파티는 그렇게 세 사람 모두 기분 나쁜 상태에서 끝났다. 그날 화가 잔뜩 난 정유진은 집에서 이틀 정도 쉬고 나서야 그나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 강지현이 정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파트 단지 밖에 있는 카페에 있으니 그녀더러 나오라고 했다. 강지현은 창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고 책상 위에는 꽃이 세 송이 놓여 있었다.그는 정유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조금 전에 한 아이가 와서 꽃을 파는데 너무 애원해서 어쩔 수 없이 샀어요.”그는 꽃을 집어 들어 탁자 위의 꽃병에 꽂았다. 사실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다.정유진은 코트를 벗고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부은 게 아직도 안 내려갔네요?”그날 강지찬에게 두 대를 맞은 강지현의 왼쪽 얼굴은 아직도 좀 부어 있었다.“이제 괜찮아요.”강지현이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했다.정유진은 아이가 너무 커도 안 좋다는 말에 다른 것은 주문하지 않고 물 한 잔만 달라고 했다.웨이터가 주문을 받고 가자마자 조금 전 꽃을 팔던 아이가 또다시 두 사람의 테이블로 왔다. 예쁜 치마를 입은 소녀는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꽃이 더 안 필요하세요?”강지현은 그런 소녀가 귀여워 상냥하게 말했다. “내가 방금 사지 않았어?”“예쁜 아줌마에게는 더 안 사줘요?”순간 강지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러자 옆에 있던 정유진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왜 이 아저씨에게만 꽃을 사라고 해?”그 말에 아이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두 분 너무 멋지고 예쁘셔서 커플 같아 보여서요.”정유진은 아이의 엉덩이를 톡톡 두 번 치고는 말했다.“잘못 짚었어. 우리는 친구야. 꽃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소녀는 아쉬운 표정으로 뒤돌아서 갔다.정유진은 소녀가 간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강지현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여기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그 말에 강지현이 바로 대답했다.“오늘은 제 생일이에요.”순간 정유진은 어리둥절해졌다. 오늘이
“지금 뭐 하는 거예요?”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강지찬을 본 정유진은 어이가 없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강지찬은 주먹으로 정유진의 뒤에 있는 엘리베이터 벽을 쿵 하고 내리쳤다. “어디 갔다 왔어요?”정유진은 그제야 조금 전 강지현과 만난 것을 조예원뿐만 아니라 강지찬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뭐랄까... ‘우연의 일치’라고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타이밍이 기가 막힌 것 같았다.“밖에서 지현 씨와 차 한잔 마셨어요. 봤잖아요.”정유진의 대답에 강지찬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오늘 무슨 날인지는 알아요?”“밸런타인데이잖아요. 그리고 지찬 씨와 지현 씨의 생일이기도 하고요.”너무 덤덤한 정유진의 표정에 강지찬은 더욱 화가 났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알면서도 지현이와 같이 생일도 쇠고 밸런타인데이도 함께 보내는 거예요?”정유진도 계속 시비를 걸어오는 강지찬 때문에 점점 울화가 치밀었다.“내가 도착해서 알았다면 믿을 거예요?”강지찬은 정유진의 턱을 잡으며 말했다.“그럼 만나러 나갈 때, 강지현을 만난다는 것도 몰랐어요?”강지찬은 역시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정유진은 그런 강지찬의 모습에 마음이 조금씩 식어 갔다.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정유진은 이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지 궁금했다.“생각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말을 마친 정유진은 시선을 돌려 엘리베이터 안에 표시된 층수 스크린을 힐끗 바라봤다.조금 전 엘리베이터에 탄 후, 강지찬이 들어오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 층수를 누르지 않아 엘리베이터가 계속 1층에 멈춰 서 있었다.정유진은 더 이상 강지찬과 같은 얘기들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이거 놔요, 집에 갈 거니까.”하지만 강지찬은 그런 그녀의 덤덤한 표정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당신, 정말 못 된 여자야!”말이 끝나자마자 강지찬은 정유진의 입술에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정유진이 몸부림을 치려 하자 강지찬은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의 벽에 꽉 눌러 더
정유진은 화가 잔뜩 나 있는 강지찬을 바라보며 어쩌면 강지찬이 진짜로 자기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지찬의 이 사랑은 너무 버거워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지찬 씨, 가정 법원도 오늘 문 열었을 거예요. 아무래도 우리...”그 말에 강지찬은 정유진의 목을 덥석 조르며 냉혹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요!”강지찬은 손에 힘을 주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이런 모습은 여전히 정유진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강지찬이 당장이라도 자기를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강지찬을 화나게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아이 양육비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아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아이를 평생 안 보러 와도 되고요. 재산 분할해달라는 말은 안 할게요. 각서라도 쓸 수 있어요. 저는 아이만 있으면 돼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말했잖아요!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손을 덜덜 떨고 있는 강지찬은 이 여자의 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유진 씨가 이혼하고 싶어 하다니!’강지찬은 이 한평생 ‘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제일 싫어했다.그는 갑자기 옆에 있는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그렇게 콸콸거리는 물소리가 두 사람의 싸움을 멈췄다.다음날 계단을 내려간 정유진은 집 주위로 경비가 삼엄해진 것을 발견했다. 그 사람들은 강지찬의 지시에 따라 정유진이 대문 밖을 못 나가도록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거의 감옥이나 다름없었다.부경원에 경호원이 많이 늘어나 그녀는 정원 안에서 산책할 수밖에 없었다.한편 지아는 오늘도 한창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직 봄이 되지 않아 꽃과 나무들이 새싹을 피우기 전이라 강지아가 그린 풀밭은 마치 검게 그을린 연탄처럼 보였다.외출했던 강지찬이 급히 집으로 돌아오더니 잠시 후 경호원 몇 명이 캐리어를 정리하고 나왔다.“며칠 정도 출장을 가야 하니까 장모님이 보고 싶으시면 사람을 보내서 모셔오세요.”강지찬의 말에 정유진은 담담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거실에는 어르신들이 다 함께 있었고 강홍택 부부와 고세연도 같이 있었다.이때 강홍식이 불쾌한 내색을 드러내며 말했다.“너는 어떻게 어른을 만났는데 인사도 없어? 아빠가 대학교수인데 그렇게 가르치던?”사실 이 말은 송년회 때 정유진이 고세연에게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홍식은 이 말로 정유진을 공격하고 있었다.그야말로 친척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재판을 받으러 온 거나 다름없었다.정유진은 강홍식의 옆에 앉은 할머니를 보고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소개해주는 사람이 없어서요.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그러자 옆에 있던 류선이 웃으며 말했다.“유진아, 이분은 지찬이는 사촌 고모야. 지찬이가 어렸을 때 사촌 고모가 잠깐 봐준 적이 있거든.”류선의 말에 정유진은 바로 사촌 고모를 보고 인사했다.“사촌 고모님. 안녕하세요.”그 사촌 고모는 몇 마디 불평을 더 하고 싶었지만 혼낼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정유진도 이미 ‘사촌 고모님’이라고 또박또박 부르며 자기에게 인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말투가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정유진 또한 여기서 그들의 비위를 맞출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인사만 한 후 얼른 옆에 있는 지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촌 고모님이 지아를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모님, 잘 쉬다 가세요.”정유진은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지아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물론 옆에 있는 고세연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두 사람이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사촌 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찬이 와이프가 정말 버릇이 없네. 역시 우리 세연이가 제일 얌전하다니까.”하지만 그 말에 흔들릴 정유진이 아니었다.정말 아니꼬우면 직접 강지찬을 설득해 이혼 서류에 빨리 도장을 찍게 하면 되니까...그날 저녁, 정유진은 저녁 식사 모임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강지아도 그곳에 보내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이 온 목적이 강지아를 보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저녁을 먹자마자 방경숙이 휴대전화를 그녀
정유진은 해가 거의 중천에 뜬 후에야 잠에서 깼다.어젯밤, 배 속 아이의 움직임이 너무 심해 정유진은 한밤중에야 잠이 들었다.양치한 후, 거울을 보며 스킨로션을 바르는데 강지찬의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왔다.정유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굳이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강지찬의 방으로 향했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정유진이 있는 게스트 룸의 문을 ‘펑’하고 발로 걷어찼다.순간, 립스틱을 바르던 정유진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강지찬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의자에 앉아 있는 정유진의 옷을 잡고 그녀를 들어 올렸다.“대표님! 대표님, 진정하세요!”방경숙과 장형준은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정유진을 바라보는 강지찬은 눈빛이 차갑다 못해 주위의 모든 공기조차 얼어붙게 할 것 같았다.하지만 정유진은 그런 강지찬을 보고도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또 뭘 잘못했기에 강 대표님의 심기를 건드렸나요?”정유진의 얼굴을 노려보는 강지찬의 눈에서는 깊이 맺힌 원한을 느낄 수 있었다.정유진은 강지찬의 마음속 가득한 이 원한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기에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 또한 이런 남편을 보고 있자니 이따금 마음이 슬프고 쓸쓸했다.강지찬은 정유진을 옆으로 홱 뿌리쳤다.방경숙이 뒤에서 부축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유진은 분명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강지찬은 미친 듯이 정유진이 방금 일어난 이불을 들추고 베개를 옆으로 던지며 무엇인가 찾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게스트 룸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고 그저 침대 시트만 살짝 구겨져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이불 속에는 아직도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어제저녁, 정유진이 여기에서 잔 것을 남김없이 알려주었다.아무것도 찾지 못한 강지찬은 다시 씩씩거리며 방을 나갔다.“사모님, 괜찮으세요?”방경숙은 정유진보다 더 심하게 온몸을 떨고 있었다.정유진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지현의 얼굴은 지난번에 맞아 부었던 곳이 이제 막 낫기 시작했지만 오늘 또 한 번 강지찬의 주먹에 맞아 다시 부어오르기 시작했다.그는 입가의 핏자국을 닦으며 씩 웃었다.“강지찬, 형같이 도도한 사람은 실패란 걸 모르지? 말해봐, 지금 그 사진을 유진 씨에게 보여 준다고 해도 유진 씨가 형을 믿을까?”강지찬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믿고 안 믿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유진이 평생 내 여자라는 게 중요해. 그리고 너는 영원히 구석에 숨어서 창고 안의 쥐처럼 유진 씨가 강지찬의 마누라로 사는 걸 지켜보면 돼.”그 말에 강지현 얼굴의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다. “형은 너무 지독한 사람이야.”그러자 강지찬이 한마디 했다.“더 지독한 게 뭔지 보여 줄게.”강지찬은 잡고 있던 강지현의 멱살을 팽개치고 장형준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K그룹에서는 새로운 인사이동 발령이 나왔다. 내용은 강지현 재무부 부서장이 즉시 흥산시로 자리를 옮겨 K그룹 산하에 있는 계열사의 지사장을 맡는다는 것이었다.계열사의 지사가 바로 흥산시에 있었다.흥산시는 전국 최하위의 도시이며 기후가 건조하고 미세먼지가 많아 폐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특히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강지현더러 거기에서 살다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통보를 보고도 K그룹의 임원들은 아무도 나서서 말을 하지 않았다.회사 내부의 게시판부터 단톡방까지 그 누구도 함부로 토론하고 의논하지 않았다. 한편, 발령 소식을 들은 류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강홍택을 보며 강지찬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당장 물어보라고 했다. “우리 아들을 죽이려고 작정한 게 아니면 뭐예요? 지현이가 대체 지찬이에게 뭘 잘 못 했냐 말이에요?”강홍택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근 강지혁과 그의 엄마, 두 사람을 집에 들인 일로 강지찬과 사이가 좋아진 강홍택은 일부러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강홍택의 입장에서 어차피 자기는 이미 늙었고 강지찬은 아직
정유진은 그 말에 너무 어이가 없었다. 강지찬이라는 이 사람은 가치관부터 자기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강지찬 씨, 당신 정말 미쳤어요! 아무리 둘째 집의 사람들을 의심한다고 해도 지찬 씨 어머니에게 일이 생겼을 때 강지현 씨는 어린아이였어요. 강지현 씨가 그때 몇 살이었어요? 강지현 씨와 전혀 상관없잖아요. 지현 씨를 싫어하고 멀리하고 심지어 나와 이상한 관계라고 의심까지 하면서 어떻게든 복수하려 하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 당신이 그러고도 남자냐고요!”정유진의 말을 들은 강지찬은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유진 씨, 어떻게 강지현의 편을 들 수 있어요?”강지찬의 말투는 마치 정유진이 무슨 큰 죄를 지은 듯했다. 강지찬에게는 정유진이 썸타는 상대를 위해 대변을 해주는 것으로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유진으로서는 강지찬의 이런 행동과 생각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순간 정유진은 그동안 강지찬을 향했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인격과 존엄까지 짓밟혔다고 느꼈다.“내가 왜 강지현 씨 두둔하면 안 되는데요? 나와 강지현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결백하다고요!”강지찬은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유진 씨, 한마디만 더 하면 강지현을 평생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게 할 거예요. 혼자 외지를 떠돌다가 그렇게 밖에서 죽게 할 거예요!”정유진은 그의 말에 자기 귀를 의심했다.“지찬 씨, 아무리 그래도 강지현 씨는 강씨 집안 사람이에요. 자기 집안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어요?”그 말에 강지찬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처음부터 말했죠? 나는 강지현을 한 번도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그의 말에 정유진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제야 정유진은 알 것 같았다. 그녀와 강지찬 사이에 시작만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을...그들은 사실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강지찬과 정유진, 두 사람은 마치 평행선과 같았다. 보기에는 가까워 보이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순간 한쪽 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지아가 생각난 정유진은 고세연을 보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들어오래, 꺼져!”고세연은 팔짱을 낀 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지찬 오빠가 왜 너를 싫어하는지 네가 한번 맞춰볼게.”그 말에 정유진은 피식 웃었다. 강지찬이 나를 싫어한다고?정유진은 배가 조금 이상한 느낌에 한 손으로 배를 만지며 숨을 헐떡였다.“지찬 씨가 제발 나를 싫어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어떡하지? 지찬 씨가 아무리 나를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해도 너는 평생 강씨 집안에 얹혀사는 고세연 아가씨일 뿐, 절대 사모님이 되지 못하는데?”“너...”이 말은 고세연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다.게다가 말을 마치자마자 배는 점점 더 심하게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온미정은 임산부가 화를 내면 아기도 불안해할 거라고 절대 화를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요즘 너무 많은 일 때문에 정유진의 정서는 바람 잘 날 없이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한 상태였다.정유진의 안 좋은 표정을 눈치챈 고세연은 천천히 그녀의 배로 시선을 내렸다. “강씨 집안 사모님, 왜 그러세요?”하지만 정유진은 고세연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소파에 앉아 쉬고 싶을 뿐이었다.“꺼져, 여기서 너를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그런데 고세연이 갑자기 정유진의 팔을 잡아당겼다.“뭐 하는 거야?”정유진은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부릅뜨고 고세연에게 물었다.고세연은 정유진의 배를 힐끗 보더니 대충 짐작한 듯 말했다.“배가 아픈 거 아니야? 아이가 충격을 많이 받았나 봐? 어쩌면 이 아이 없...”고세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유진은 손을 번쩍 들어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아이의 존재는 정유진에게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기에 그 누구도 함부로 아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꺼져, 안 그러면 사람 부를 테니까!”고세연은 한 손으로 자기 볼을 움켜쥐더니 독기 서린 눈으로 정유진을 바라봤다. 사실 고세연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이곳에 몰래 왔다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