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식을 만나고 온 강지현을 본 류선은 그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왔다.“너의 큰아버지가 요즘 여기저기서 고세연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시는데 너에게까지 지금 그러는 거야?”강지현은 옷장을 열고 안에서 트위드 코트를 골랐다. “응.”류선은 피식 차갑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찾을 사람이 도저히 없긴 했나 보네. 자기 친아들이 꿈쩍도 안 하니까 이제 너에게까지 부탁해? 아들, 명심해. 이 일에 절대 끼어들면 안 돼.”강지현은 선택한 코트를 옷장에서 꺼낸 후 셔츠와 민소매를 고르기 시작했다.이를 지켜보던 류선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너 지금 강지찬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만나는 거야? 왜 옷차림에 그렇게 신경 써?”순간 강지현은 옷을 고르던 손을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나 옷 좀 갈아입어야 하는데, 좀 나가 주면 안 돼?”류선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정유진 만나러 가는 거야? 큰아버지가 너더러 정유진에게 사정하라고 한 거야?”강지현이 아무 대꾸를 안 하자 류선도 나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그런 엄마를 보며 강지현은 어쩔 수 없이 욕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너의 큰아버지, 이제 정말 노망이 났구나. 하나만 말할게. 강지찬을 만나지 마, 정유진은 더더욱 만나지 말고. 쓸데없이 그들 집안일에 더 이상 끼어들지 마.”말을 하던 류선은 점점 기분이 격앙되는 듯했다.“너만 아니었으면 강지찬은 지금 스캔들에 휘말렸을 거고 강씨 집안은 네 것이 됐는지도 몰라. 나는 어쩌다가 너 같은 아들을 낳았을까? 어렵게 이런 기회가 차려졌는데 아들인 네가 직접 뭉개 버릴 줄 어떻게 알았겠니.”욕실에서 옷을 갈아있던 강지현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류선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지금 말해 봤자 이미 소용없겠지. 그런데 강지찬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라 아무도 고세연 편들려 안 할 거야. 우리도 그 자식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있자고. 아들, 너도 적당히 해.”이 말은 그녀 자신도 언행 불일치라는 것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현은 조예원과 함께 문을 나섰고 정유진은 특별히 강지현더러 조예원을 배웅하라고 부탁했다.힐튼캐슬을 나온 조예원이 강지현을 보며 말했다.“제 차는 작업실 앞 주차장에 있으니 저 안 데려다줘도 돼요.”그러고는 한번 피식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유진이 그 녀석이 야무져 보이지만 사실은 꽤 순진하니까 굳이 신경 안 쓰셔도 돼요.”지난번에 강지현이 그녀의 집에서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났다는 것은 이 사람이 그녀에게 전혀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오늘 밤 정유진이 두 사람을 엮어 주려는 게 너무 훤히 보여 강지현도 분명 눈치를 챘을 것이다.강지현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조예원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죄송해요.”순간 어리둥절해진 조예원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하하, 지현 오빠. 왜 갑자기 사과하세요?”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강지현은 이 문제를 얼버무리려 하지 않고 그녀와 확실히 선을 그으려고 했다.조예원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웃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그녀는 항상 신사적이고 상냥하다고 생각했던 강지현이 이렇게 무정할 줄 몰랐다.“제가 지현 오빠를 몰래 좋아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예요?”조예원이 묻자 강지현이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나 같은 사람에게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말을 하는 강지현은 여전히 부드럽고 차분했다.그는 제일 다정한 얼굴로 가장 무정한 말을 하며 맞은편에 서서 기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마치 다른 사람이 그를 좋아하는 것이 그에게는 속박이고 방해가 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끝내려 했다.그는 상대방에게 아무런 기대도 주지 않았다.조예원 또한 매사에 칼같이 확실한 것을 좋아한다.“고백해 보기도 전에 거절당했네요? 그런데 나를 안 좋아할 거라는 거 어떻게 알아요?”그녀는 한발 앞으로 다가가 강지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유진이 때문인가요?”순간 강지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아니에요.”강지현은 아니라고 했지만 조예원
이날 강지찬은 늦게 귀가했고 집에 도착했을 때 정유진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침실에 어두운 스탠드 등을 켜 논 정유진은 그가 눕는 쪽을 향해 옆으로 누운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강지찬은 저도 모르게 그녀 가까이에 다가가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정유진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돌아왔어요? 몇 시예요?”강지찬은 얼른 그녀 어깨를 다독였다.“한 시 거의 다 됐어요. 계속 자요. 저 씻고 올게요.”정유진은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다음날 강지찬은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정유진을 요양원에 먼저 데려다주고 출근했다.“어제 집에 손님이 왔어요?”강지찬이 무심코 물었다.분명 장은미가 고자질했음에도 강지찬은 모른 척하고 있었다.“어제 지현이가 왔어요. 예원이도 같이 와서 밥 먹었어요.”“지현이?”강지찬이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그렇게 부르지 말아요.”“그럼 어떻게 부를까요? 계속 강 선생님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순간 정유진은 목소리를 낮춰 그에게 속삭였다.“예원이가 많이 좋아해요.”강지찬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유진 씨 그 절친, 사람 보는 눈 없죠?”강지현이 뭐가 좋다고? 허약하고 푹 주눅이 들어 음침해 보이기도 하고...게다가 둘째 집에는 정상적인 사람이 하나도 없다.“그런 말 마세요. 가족이잖아요. 지현이가 어때서요? 이번에 저와 지아도 구해줬잖아요.”강지찬은 더 이상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네네, 나중에 정식으로 식사 초대해서 고맙다고 인사할게요.”정유진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불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강지찬은 최대한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정유진이 경호원과 함께 신안요양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강지찬의 얼굴은 많이 굳어 있었다.“조사하는 건 어떻게 됐어?”그의 물음에 장형준이 대답했다.“그때 지나가던 사람과 관원사 입장권 판매원의 말에 따르면 작은 도련님이 확실히 계속 멀리서 사모님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강지현이 왜 정유진을 따라갔
상록수는 이미 완전히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다.정원에 잔디밭도 이미 깔려 있었고 일하는 인부들도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다.내부도 거의 완공되어 각종 가전제품과 생활용품도 이미 들어온 상태였다.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강지현이라 전체 디자인의 스타일 또한 아늑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줬다.정유진이 그림을 들려고 하자 강지현이 다가와 그녀를 말렸다.“그냥 놔둬요. 내가 할 테니까.”“무겁지 않은데요, 뭘.”강지현은 그림을 들고 벽에 걸자 정유진이 그를 제지했다.“여기가 아니에요. 이건 계단에 걸 거예요.”상록수의 계단은 터프하게 꾸며져 있어 왠지 텅 빈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정유진은 강지현과 함께 빈 곳을 메울 수 있는 적당한 그림을 골랐다.“제가 가서 걸면 되니까 여기 꼼짝 말고 있어요.”강지현은 인부들을 시켜 그림을 들고 갔다.그 모습에 정유진이 말했다.“너무 오버할 필요 없어요. 의사 선생님께서도 저 보고 틈만 나면 걸으라고 했어요.”하지만 그녀의 말에 강지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래도 주의하는 게 좋잖아요. 여기 일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사람들과 같이 그림 걸면 되니까 가서 좀 앉아 계세요.”그림을 거는 담당 인부는 화랑 사람이었다. 그는 두 사람이 부부인 줄 알고 웃으며 한마디 했다.“두 분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제 와이프가 임신했을 때 제가 이렇게 꼼꼼하지 못했는데 어쩐지 계속 저를 나무라더라니...”정유진은 이 상황이 너무 난감했지만 강지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오해하신 것 같네요. 우리 형수님이십니다.”형수님과 도련님 사이라는 말에 그 인부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정유진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강지현이 그림을 건 후 두 사람은 다시 마당을 돌며 어떤 점을 보완해야 될지 살폈다.일을 마치고 강지현이 정유진을 작업실까지 데려다줬다.정유진이 잠깐 들어가 앉으라고 하자 강지현은 요양원에 지아를 만나러 가야 한다며 이를 거절했다.그녀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에 들어가자 조예원이 차
강지찬은 정유진이 베란다에서 한참 책을 본 후에야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여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강지찬은 정유진을 꼭 껴안고 그녀의 부드러운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늦었어요. 오늘 할 일이 많아요.”목덜미부터 그녀의 입술 가까이 키스하며 올라온 강지찬이 물었다.“오늘도 상록수에 가야 해요?”“네...”두 사람은 커튼이 쳐져 있는 좁은 베란다에서 오랫동안 키스를 나눴다.아침을 먹은 후, 강지찬이 굳이 정유진을 상록수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고집하자 정유진이 타일렀다.“거기 너무 멀고 또 지찬 씨와 가는 방향이 달라서 불편할 거예요. 한번 갔다 오고 나면 반나절은 다 지났을 거예요. 안돼요.”그 말에 강지찬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고 대신 한마디 물었다.“강지현도 가요?”“네, 오늘 장식품들이 도착해서 검수하러 가야 해요. 이번 것만 완성되고 지현이가 만족하면 나도 이제 완전히 해방이에요. 더 이상 그쪽으로 갈 필요도 없고요.”“알겠어요.”강지찬은 정유진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몸조심하고 빨리 마치고 집에 와서 쉬어요. 너무 피곤하면 안 되니까.”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각자 차를 탔다. 강지찬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때 옆에 있던 장형준이 말했다.“이 번호로는 아무 정보도 찾을 수 없어요. 그리고 저녁에 대표님에게 사진 보낼 때 말고는 계속 전원이 꺼진 상태입니다.”그 말에 강지찬이 물었다.“한빈 쪽 상황은 어때?”“한빈 씨는 사람을 시켜 계속 지켜보라고 했는데 요즘 별 움직임이 없어요. 아마 소희 씨 출산이 거의 다가오고 있어서 정기 검진을 하러 같이 가는 것 말고는 거의 외출도 하지 않아요. 이 사진들은 한빈 씨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요즘 일 때문에 너무 바쁜 강지찬은 한빈의 존재를 하마터면 까맣게 잊을 뻔했다. “형준아, 한빈이 요즘 너무 조용한 것 같지 않아?”장형준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초반에 일이 터졌을 때는 어떻게든 판을 뒤집으려고
그동안 정유진은 이 사건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런데 갑자기 재판이 열린다니?“왜, 얘기 못 들었어?”류선은 원망하는 척한 말투로 말했다.“지찬이도 참, 이런 일을 어떻게 너에게 숨길 수 있어? 하지만 지찬이가 세연이와 지낸 세월이 얼만데... 세연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긴 하지.”“엄마, 형과 형수님 두 분 일이야. 알아서 잘하시겠지.”강지현의 묵직한 목소리가 류선의 말을 끊었다.사실 그는 류선을 여기에 데리고 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류선이 새집 마감 검수라는 말을 듣고 아침부터 꼭 따라오겠다며 하도 많이 말해 강지현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정유진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본 류선은 내심 흐뭇해했다.“내가 잘못 말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지찬이는 처음부터 세연이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어. 세연이가 그동안 구치소에서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너무 불쌍해서 마음이 아프다니까.”순간 정유진은 피식 웃었다.‘고세연이 불쌍하다고?’납치되고 인생을 망칠 뻔한 건 그녀와 지아인데 고세연이 대체 어디가 불쌍하단 말인가?그 말에 강지현도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죄송해요. 저희 엄마가... 고세연의 일을 형이 말하지 않은 건 본인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을 거예요.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시고 형이 돌아오면 형에게 물어보세요.”정유진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이는 듯했다.“그럴게요.”한편 류선은 자기 아들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남에게 자기 욕을 하자 분통이 치밀어 올랐다. “물어볼 게 뭐 있어? 바깥에서 일하는 남자인데 자기 일은 당연히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아이고!”순간 발을 헛디딘 류선은 갑자기 정유진 쪽으로 넘어졌다.“조심하세요!”강지현은 정유진의 허리를 덥석 잡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옆에 있던 조예원은 성큼 앞으로 내디디며 넘어질 류선의 뻔한 팔을 잡았다.“어머님, 조심하세요!”정유진은 한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만약 류선이 정말로 그녀 앞으로 넘어졌다면 정유
정유진은 화내는 기색 하나 없이 덤덤한 얼굴로 강지찬에게 물었다. 사실 그녀는 류선의 말 따위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류선이 일부러 자기와 강지찬 사이를 이간질해 둘이 다투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만약 진짜로 그녀가 강지찬과 따지고 싸우면 류선은 뒤에서 몰래 기뻐할 것이다.셔츠를 벗은 강지찬은 정유진의 다리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둘째 숙모의 헛소리를 왜 들어요. 먼저 자요. 나는 샤워하고 올게요.”강지찬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샤워한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두리뭉실한 말로 둘러대는 건 정유진도 납득할 수 없었기에 계속 강지찬에게 물었다.“진짜로 고세연 씨 그렇게 풀어줄거예요?”그 말에 강지찬이 덤덤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고세연은 자기가 한 짓에 대해 분명 벌을 받을 거예요.”“어떤 벌이요? 몇 년 정도 선고받게 할 건데요?”“그건 법원에서 결정하겠죠.”강지찬은 정유진의 턱을 잡고 입술에 뽀뽀하며 말했다.“여보, 날 믿어요. 난 항상 당신 편이니까.”그 말에 정유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혹시 다른 생각이 있는 거예요?”강지찬은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말했다.“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우리 아기에게만 신경 써 줘요. 나머지는 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강지찬은 확고한 눈빛과 진지한 말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강지찬이 굳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정유진도 그를 안 믿을 수가 없었다.자기 아내와 친여동생이 하마터면 인생이 끝날 뻔했는데 분명 가만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뒤, 법원의 재판 결과를 들은 정유진은 순간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도저히 자기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특히 재판 후에 바로 석방하라는 재판 결과에 정유진은 순간 이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지찬 씨, 바로 석방이라고요?”고세연의 수갑이 풀리는 것을 본 정유진은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일단 집에 가요. 집에
친정으로 돌아가는 길, 차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정유진은 기분이 극도로 나쁜 상태였다. 지금 그녀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오롯이 강지찬에 대한 실망뿐이었다.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바로 방에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갔다. 이명자가 위로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옆에 있던 정명학이 이명자를 붙잡았다.“유진이 혼자 있게 내버려 둬. 지금 가서 얘기할수록 유진이 마음만 더 복잡해질 거야.”그 말에 이명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 서방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정명학은 아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만해, 냉장고에 삼계탕 끓일 재료가 좀 남아 있으니까 일단 유진이에게 끓여주자고.”이명자가 주방에 들어가서 닭을 손질하자 정명학도 일회용 장갑을 끼고 집게를 들어 딸에게 먹이기 위해 호두를 까기 시작했다. 호두는 태아 대뇌 발달에 아주 좋다.한편 침실에 있는 정유진은 창가에 앉아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침대 위에 놓여 있는 휴대전화는 진동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분명 강지찬의 전화일 것이다. 하지만 정유진은 휴대전화가 울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녀는 고세연의 무죄 석방이라는 재판 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납치되었던 날, 그녀 마음속의 두려움과 절망, 그리고 지아의 비명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찬이 무슨 근거로 그녀와 지아를 대신해 고세연을 용서한단 말인가?휴대전화는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정유진은 너무 귀찮은 나머지 바로 전화를 끊어 버리고 강지찬을 차단했다.전화번호뿐만 아니라 모든 연락할 방법을 아예 전부 차단해 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의 초인종이 울렸지만 그녀는 정명학에 문을 열지 말라고 했다. 한참 후, 강지찬은 더 이상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떠났다.정유진은 저녁에 삼계탕 국물만 깨작거리다가 입맛이 없어 바로 방에 들어갔다. 3일 동안 집에서 쉰 정유진은 조예원 더러 힐튼캐슬에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