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아영은 그가 남자에게 부딪혀 몸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몸으로만 모든 충격을 견뎌낸 한태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안 다쳤어요?”백아영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가 다친 건 아닌가 싶은 걱정도 앞섰다.“아영 씨, 우선은 저랑 같이 여기서 나가요.”이성준은 백아영을 품에 안고 그녀를 감싸며 사람들 속에서 벗어났다.인파가 몰린 탓에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들었고 사람들 속에서 백아영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꽉 끌어안아야만 했다.외부인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으나 그녀는 한태윤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그의 차가운 숨결에는 한약 냄새가 뒤섞여 있었는데 묘하게 향기로웠고 그 향기가 백아영의 심장을 파고들자 두근거리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한참이 지나서야 이성준은 간신히 백아영과 함께 인파 속에서 탈출했다.“지금은 위험하니까 이제 사람 적어지면 둘러봐요. 평소보다 늦게 문 닫으라고 얘기해 둘게요.”백아영은 한태윤과의 신체접촉으로 정신이 혼미해졌고 부끄러운지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개만 끄덕였다.이성준은 그녀의 수줍음을 보지 못한 척 아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불꽃놀이가 곧 시작될 것 같은데 같이 볼까요?”그제서야 고개를 든 백아영은 큰 호수의 가장자리에 그들이 서 있다는 걸 알아챘고 아름다운 경치에 화려한 조명이 더해지자 왠지 모를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그곳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커플이었다.백아영은 순간 마음이 불편해져 몸 둘 바를 몰랐고 대충 핑계를 둘러대서 자리를 피하려던 그때 한 어린 소녀가 꽃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다.“아저씨는 정말 잘생겼네요. 여기 이쁜 이모랑 너무 잘 어울려요.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처럼요. 제가 지금껏 만났던 커플 중에서 제일 아름다워요.”커플이라는 말에 백아영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꼬마야, 우린 커플이 아니야.”소녀는 믿기는 않는
백아영은 팔찌를 빼내 이성준에게 돌려줬다.“그리고 전 바람둥이를 제일 싫어해요.”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이성준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백아영의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바람둥이라니? 내가 뭘 어쨌는데?’...호텔의 888번 방.성무열은 자랑하듯 테이블에 놓인 상자를 열더니 백아영에게 혈옥을 보여줬다.무려 13개인데, 그가 처음에 조 대표와 얘기했던 8개보다 거의 두 배가 되는 수량이다.뚱뚱한 여자와 밥을 먹은 덕분에 성무열은 많은 양의 혈옥을 얻을 수 있었다.이 혈옥만 있다면 백아영은 신약을 개발해 낼 가능성이 매우 높고 성공하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빚도 갚을 수 있게 된다.혈옥을 손에 넣은 그녀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연구실이다.연구실은 남원에 있었기에 연구를 시작하려면 적어도 며칠은 더 지나야 한다. 그런 백아영의 마음을 알아차린 성무열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제경에 별장이 하나 있는데 오늘 밤에 장비들을 옮겨올게. 그러면 내일부터 바로 연구 시작할 수 있을 거야.”백아영은 두 눈이 반짝였으나 곧바로 거절했다.“이렇게 도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더 이상 신세 지고 싶지 않아.”말은 쉬운 것처럼 들리지만 혈옥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남원에 있는 연구실을 통째로 옮겨오는 거나 다름없었고 그렇게 되면 별장의 구조도 많이 달라진다.손쉽게 도움 주는 범위를 넘어선 어려운 일이다.“아영아, 내가 이렇게 많은 혈옥을 구해왔는데 감사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어?”성무열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당연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말만 해.”백아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무열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럼 내 별장에서 연구해. 부탁을 거절한다면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예상치 못한 그의 부탁에 백아영은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착잡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성무열을 바라보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무열아, 나 때문에 이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아빠, 지금 어디예요?」「얼른 방법 좀 생각해 봐요. 엄마가 저랑 같이 떠나려고 해요.」「아빠, 아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가는 영원히 엄마를 놓치게 된다고요!」이현무는 변기에 쪼그리고 앉아 이성준에게 연속으로 문자를 보냈으나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다.그 시각 화장실 문밖에 있던 백아영은 노크하며 물었다.“현무야, 왜 그래? 어디 아파? 안 나오면 엄마가 들어간다?”이현무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뭉그적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왔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엄마, 전 여기가 더 좋아요. 양아버지 별장에 가고 싶지 않아요.”백아영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봤다.“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왜 이래?”이현무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핑계를 생각했으나 이성준과 손을 잡은 걸 눈치챌까 봐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손들고 항복했다.그는 자신의 작은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성무열은 자연스레 백아영과 이현무의 캐리어를 끌었다.“가자.”“잠깐만.”백아영은 옆방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비록 한태윤과 어색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주치의로서 이사가는 건 미리 얘기하는 게 예의였고 앞으로 며칠간 어떻게 진찰할지 논의도 해야 했기에 잠깐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백아영은 그가 방에 없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의아하게 방문을 바라봤다.“그냥 문자 남겨.”성무열은 기쁨을 드러내며 말했다. 한태윤이 백아영에게 사심이 있으니 아예 두 사람이 마주치지 않는 상황이 그에게 유리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한태윤에게 보낼 문자를 편집하며 로비를 나섰다.그러나 문자를 편집하고 발송을 누르려던 찰나 호텔 밖으로 나온 백아영은 자리에 얼어붙었다.호텔 입구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건 성무열이 준비한 차가 아닌 한정판 최고급 마이바흐였다.이성준이 검은 정장을 입고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차 앞쪽에 기대고 있었는데 편안한 자세와 달리 강렬하고 위압적인
“성무열 씨, 죽고 싶어 아주 환장을 하네요.”성무열은 캐리어를 놓고 앞으로 걸어갔다.“내가 당신을 두려워할 것 같아요?”분위기는 순식간에 과열됐고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했다.백아영은 착잡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다가 손을 뻗어 성무열의 손목을 잡았다.그녀의 작은 움직임에 두 남자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기뻐하는 성무열과 달리 이성준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백아영은 애써 이성준의 시선을 피하며 한 손으로 캐리어를, 다른 한 손으로 성무열을 끌며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가자.”백아영은 그의 존재를 눈앞에서 지우고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단호하게 행동했다.이성준은 당장이라도 성무열의 팔목을 잘라버리고 싶었지만 백아영의 태도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성무열을 다치게 할수록 백아영은 그를 감싸며 지켜줄 게 뻔하니까.이성준은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고 백아영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현무는 안돼.”백아영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녀는 이성준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지금껏 도망쳤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괴로워 그와 말 한마디조차 섞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백아영의 마음을 알 리 없었던 이성준은 그녀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웠다.백아영은 이를 악물고 큰 용기를 내어 이성준을 바라봤다.“현무는 나랑 있는 걸 더 좋아해.”“난 현무의 아빠고 보호자야. 다른 남자 집에서 지내는 건 용납할 수 없어.”이성준은 막무가내로 말했다.“꼭 가야 한다면 현무는 내가 집으로 데려갈 거야.”“집에 가기 싫어요!”이현무는 갑자기 백아영의 허벅지를 끌어안더니 눈물 콧물을 펑펑 쏟으며 울음을 터뜨렸다.“집으로 가면 아빠가 절 때려죽일 거예요. 엄마, 제발 저랑 같이 있어요. 집에 가기 싫어요. 엉엉...”이현무의 서러운 울음소리에 백아영은 가슴이 미어졌다.그동안 이성준이 어떻게 대했길래 아이가 이렇게 무서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이현무를 품에 안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다른 남
“내가 별장 하나 빌리면 되는 거지?”백아영은 답답함에 이를 악물었다.“나랑 현무 단둘이서 지낼게.”비록 직접 집으로 데려가지는 못했지만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이성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응.”아무 관계가 아니더라도 괜한 트집을 잡으며 못살게 굴려는 그의 의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기분이 언짢아진 백아영은 이현무의 손을 잡고 이성준을 스쳐 지나갔다.“무열아, 이제 주소 보내줄 테니까 그쪽으로 장비 좀 옮겨줘.”성무열은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말했다.백아영은 이현무를 차에 태우고 나서야 편집한 문자를 한태윤에게 전송했고 전송이 끝나자마자 이성준의 핸드폰에서 메시지 신호음이 울렸다.백아영은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려 이성준을 바라보고 싶었으나 우연의 일치라며 생각하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공교롭게 문자가 온 게 틀림없어.’이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까지 자제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백아영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본 후 성무열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이성준을 바라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이성준 씨,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헤어졌으면 미련 갖지 말고 쿨하게 보내줘요. 왜 계속 귀찮게 질척거리는 거예요? 아영이가 상처받은 걸 뻔히 알면서 설마 양다리를 걸칠 생각으로 찾아왔어요?”이성준은 뚫어져라 백아영이 탄 차를 주시하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나랑 백아영 사이의 일은 당신이 참견할 자격이 없어요.”말을 마친 그는 긴 다리를 뻗으며 마이바흐에 올라탔고 성무열은 분노를 터뜨렸다.“이성준, 경고하는데 다시 한번 아영에게 상처 주면 내가 목숨을 걸고 널 죽여버릴 거야.”성무열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바흐는 훌쩍 떠났다.차 안에서 위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사장님, 왜 아영 씨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신 거죠?”이성준의 신분으로 나타났으니 헤어진 이유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오해가 풀린다면 백아영도 더 이상 싸늘하게 그를 대하지 않을 텐
이현무는 기대감으로 반짝 빛나는 두 눈과 함께 흥분하며 말했다.“아빠가 말해줬는데 앤니 아줌마랑 같이 떠난 게 아니래요. 오해가 풀리면 우리는 여전히 함께 할 거라고 했어요.”백아영은 순간 흠칫 놀라며 마음이 심란해졌지만 더 이상 기대할 것조차 없는 상황에 재빨리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성준은 지금껏 사람들 앞에서 앤니와의 관계를 부정해 온 적도, 그녀에게 직접 해명한 적도 없었다. 이현무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건 그저 아이를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백아영이 임대한 별장은 모든 살림살이가 갖추어져 있어 짐을 옮기기만 하면 이사가 끝이다. 연구실을 정리하자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그녀는 한태윤을 진찰하기 위해 약과 함께 집을 나섰다.늘 찾아갔던 익숙한 별장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껄끄러웠다.한태윤의 앞에서 바람둥이라고 말한 게 바로 어제였으니 지금 그를 마주하는게 상당히 불편했다.그래도 애써 용기를 낸 후 힘겹게 별장안으로 들어섰고 우연히 그곳에서 임소미를 발견했다.임소미는 서재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백아영은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고 심장이 바늘에 찔리는 듯 불편했다.“아영 씨?”백아영을 발견한 임소미는 귀신이라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라고선 곧바로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무의식적으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예상치 못한 반응에 의아함을 느낀 백아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임소미는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실질적으로 죄책감을 가져야 할 사람은 백아영이다. “안녕하세요.”백아영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당황함을 숨겼다.“태윤 씨 치료하러 가는 길인데 소미 씨도 같이 가실래요?”“아니, 아니요.”임소미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성준이 다시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한 바가 있었는데 어찌 함께 갈 수 있냐는 말이다.우연히 만나게 된 걸 이성준이 알게 된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경계심이 가득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백아영은 큰 돌이 심장을 짓누르는 듯 숨 쉬는
이성준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저 바람둥이 아니에요!”본의 아니게 멈춰 선 백아영은 그에게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당황한 나머지 빼내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오히려 힘을 점점 더 세게 주었다.두 사람은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닿을 거리에 마주 보고 서 있었다.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끝없는 심연 같았고, 마치 소용돌이처럼 그녀를 빨아들일 듯싶었다.“오직 한 사람만 평생 바라볼 거예요.”남자의 시선을 마주한 백아영은 또다시 그 주인공이 자신일 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다.하지만 이성적으로 이 모든 건 거짓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왜냐하면 진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단지 연기가 너무 감쪽같았기 때문이다.“태윤 씨가 이럴수록 그녀한테 너무 불공평하잖아요.”“누구...?”이성준은 의혹이 가득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마침 물어보려던 찰나, 옆에 있는 서재에서 걸어 나오는 임소미를 발견했다.백아영은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온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쳤다.이내 당혹감과 억울함, 수치심이 뒤섞인 얼굴로 말했다.“소미 씨, 오해하지 마세요. 아까는 태윤 씨의 맥박을 짚어주느라...”이성준은 그윽한 시선으로 두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의혹이 그제야 풀렸다.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눈빛은 임소미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였다.“누가 함부로 집에 오라고 했지?”임소미는 겁을 먹은 나머지 자칫 무릎까지 꿇을 뻔했다.그녀는 벌벌 떨며 손에 든 USB를 보여주었다.“물건 가지러 왔어요...”비록 한태윤은 아직 완치되지 않았지만, 이성준이 한씨 일가의 뒤치다꺼리를 직접 처리하라고 으름장을 놓은 이상 그는 어쩔 수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일해야만 했다.USB에는 업무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자료가 들어 있으므로 꼭 필요했기에 임소미에게 가려오라고 시켰을 뿐, 운도 지지리 없게 백아영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죄송해요, 지금 바로 갈게요! 다신 오지 않을게요.”임소미
이성준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고, 입을 떼자마자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그래서, 나 좋아하는 거예요?”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백아영은 수치심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이내 눈빛이 흔들리며 차마 똑바로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말까지 더듬거리며 부인했다.“저, 전 단지 태윤 씨가 절 좋아하는 줄 알고...”하지만 정작 말하고 나니 부끄러운 나머지 몸 둘 바를 몰랐다.이성준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고, 낮게 깔린 목소리는 마치 인간을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마법이라도 깃들어 있는 듯 매혹적이었다.“만약 진짜 그렇다면 어떡할래요?”진짜라니?!백아영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결국, 넋을 잃은 채 제 자리에 얼어붙어 멍하니 서 있었다. 대체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너무 놀란 나머지 입까지 살짝 벌어진 그녀를 보자 이성준은 당장이라도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억눌린 욕망은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가 철창살을 부수려고 날뛰는 것처럼 통제하기 힘들었다.하지만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굳건히 페이스를 유지했다.그는 일부러 한 발짝 물러서며 미소를 쥐어짜 냈다.“걱정하지 마요, 농담이니까.”어색한 기류가 감돌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잔뜩 긴장하던 백아영도 그제야 안심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실망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일렁이는 파도처럼 퍼져나갔다....저녁이 되자 백아영은 이현무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하지만 녀석은 애니메이션 따위 안중에도 없었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백아영을 바라보았다.“엄마, 저랑 집에 돌아가면 안 돼요?”백아영과 이성준이 헤어진 이후로 이현무는 한 번도 고집을 피우거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또한, 그녀에게 집에 돌아가자거나 아빠를 용서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 이성준이 나타난 이후로 녀석의 태도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