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준은 사람을 집어삼킬 듯한 그윽한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봤고 입술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백아영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던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민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영 씨!”백아영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고 수줍은 듯 얼굴이 붉어졌다.“우... 우진 도련님.”백아영은 부끄러워 차마 이성준을 바라볼 수 없었다.“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방금 일어난 일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민우진은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찼지만, 꾹 참고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그는 성큼성큼 백아영에게 다가가더니 부드럽게 말했다.“걱정돼서 따라왔어요. 이성준한테 약 발라주려고요?”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남녀 사이에 그러는 건 불편하니까 제가 대신 할게요.”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한 백아영은 심장이 진정될 줄 몰랐고, 민우진이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성준은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귀찮게 그럴 필요 없어. 난 다른 사람이 해주는 건 불편하거든.”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민우진의 표정도 좋지만은 않았다.부상을 명분으로 백아영에게 접근하려는 그의 모습이 달갑지 않았던 민우진은 시선을 돌려 선우경진을 바라봤다.“선우 도련님처럼 친분 있고 의술 좋은 사람이 치료해 주는 건 싫어하지 않겠지?”마침 제갈연준에게 수갑을 다 채운 선우경진은 고개를 들어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알아챘다.민우진 뿐만 아니라 그 역시도 이성준과 백아영이 가까워지는 게 신경 쓰였기에 곧바로 앞으로 나가 약을 들었다.“제가 할게요.”이성준의 표정은 또다시 어두워졌고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진정된 백아영은 몰래 이성준을 훔쳐봤고 표정이 안 좋은 그의 모습에 상처가 많이 아픈가 싶어 걱정이 앞섰다.민우진은 일부러 그녀와 이성준 사이에 끼어들어 시선을 차단했고,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아영 씨,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며칠 동안 많은 일이 있
화가 난 민우진은 표정이 일그러졌다.이성준이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당장 백아영을 데려갈 수 없었던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아영 씨, 폭탄 제거하는 방법을 제가 꼭 찾을게요. 이건 제 핸드폰이에요.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요.”이성준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곳까지 매번 찾으러 올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백아영은 핸드폰을 건네받았고 이성준은 그녀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한참 노려보다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졸려.”그는 곧바로 손을 들어 불을 껐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방안에서 백아영은 그저 멍하니 침대 옆에 서 있었다.혼자라면 어둠 속에서도 밖으로 나갈 수 있었겠지만 제갈연준과 너무 멀리 떨어지면 안 되는 상황에 하필 그는 정신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어떡하지?’망설이는 동안 이성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침대 위로 끌어당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서 자.”백아영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거절할 겨를도 없이 이성준은 말을 이었다.“새벽에 혹시라도 아프면 어떡해. 지금은 널 찾으러 갈 힘조차 없어.”자신을 위해 칼을 맞은 이성준을 생각하며 그녀는 죄책감을 느꼈고 마음이 약해졌다.“그래. 오늘 밤은 여기 있을게.”그때 선우경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남녀 단둘이 같이 자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제갈 연준은 사람이 아닌가요?”이성준은 그의 말에 반박했고 마음 같아서는 그들 모두 내쫓아 백아영과 단둘이 있고 싶었다.“그래도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안 되죠.”어렵게 찾은 선우 일가의 보물이었기에 쉽사리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럼 밤새 여기 앉아있으라고 할까요?”선우경진은 말문이 막혔다. 뇌 연구 프로젝트 때문에 5일동안 맘 편히 쉬지도 못하고 고생했을 백아영을 생각하면 밤새 앉아있으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고 선우경진도 그걸 원하지는 않았다.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그럼, 저도 오늘 여기 있을게요.”이성준의 목소리는 싸늘했다.“그러시든가.”뻣
백아영은 순식간에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고 막 일어나려던 순간에 이성준이 눈을 떴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듯한 어색한 분위기를 풍겼다.백아영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그게,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좋은 아침.”이성준은 목이 잠긴 듯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고 마치 첼로의 G 음율처럼 짙고 감미로웠다.순간 정신이 멍해진 백아영은 심장이 마구 뛰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이성준의 모습에 비하면 그녀의 당황스러움은 터무니없어 보였다.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고 뻣뻣하게 몸을 일으켰다.“좋은 아침.”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성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아침 뭐 먹고 싶어?”자연스러운 그의 말투는 마치 신혼부부를 연상케 했고 백아영은 어색한 듯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아무거나.”얼마 지나지 않아 뚱보 아줌마는 아침을 가져다주었고, 소파에서 하룻밤을 잤던 선우경진도 눈을 떴다.그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더니 그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식사하던 중 선우경진은 착잡한 눈빛으로 줄곧 백아영을 응시했고 불편함을 느낀 그녀는 입을 열었다.“도련님, 저한테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는 건가요?”눈이 반짝였던 선우경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신분과 관련된 일이야.”백아영은 멈칫했다. 4년 전, 그녀는 가족을 찾으려다가 선우 일가를 건드리게 되었고 그러다가 ‘가짜 엄마’ 허수빈까지 등장했다.결국 제갈연준에게 붙잡혀 4년 동안 고문당한 것도 모두 이 일 때문이었고, 그녀가 만약 가족을 찾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백아영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허수빈이 친엄마가 아닌 건 저도 알고 있어요. 이제 더 이상 가족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네요. 저에게는 아들이라는 가족 한 명이면 충분하고 그냥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요. 도련님의 호의는 너무 고마운데 제 신분에 대해서는 말씀 안 하셔도 돼요.”백채영을 착각하지 않았더라
“더 이상 선우 가문의 인재를 찾는 건 큰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일은 못 들은 거로 할게요.”생각지도 못한 백아영의 반응에 선우경진은 자리에 얼어붙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백아영의 차분함은 예상을 뛰어넘었고 그 어떤 불평불만 심지어 기대조차 없는 모습은 신우 일가를 완전히 낯선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백아영은 이 혈연 관계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아영아, 미안해. 다 우리 잘못이야. 네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까 매달리지는 않을게.”선우경진은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할아버지가 맹독에 중독된 후부터 몸이 쇠약해지고 있어. 날이 갈수록 증상도 심해져서 이제 약들은 전부 무용지물이야.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선우경진은 울먹이며 애원했다.“널 만나고 싶다는 게 할아버지의 소원이었어. 아영아, 한 번만 만나주면 안 될까?”물처럼 잔잔하던 마음이라는 호수에 갑자기 파도가 일었다.물론 그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은 단 하나도 없었다. 기억 속의 선우소훈은 백채영을 편애하는 노인이었고 그녀에게 수많은 억울함을 안겨다 준 사람에 불과했다.하지만 그가 인자한 마음으로 처벌을 미룬 덕분에 아이를 지킬 수 있게 되어 백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 일이 끝나면 한번 찾아뵐게요. 그런데... 가족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요.”소원을 들어주는 백아영의 모습에 선우경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마워, 아영아!”...이성준의 부탁으로 백아영은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채 그를 돌봤고 이성준도 틈만 나면 폭탄 제거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비록 목숨이 아직 손목에 달려있었지만 홀가분하고 마음이 편안했다. 적어도 백채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백채영이 나타났을 때 백아영은 이성준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백채영은 미친 듯이 달려들더니 그릇과 수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쿵’하는 소리와 함께 약은 바닥에 전부 쏟아졌다.“백아영, 너일 줄 알았어! 이 천한 년아! 돌아오자마자 내 남자를
서로의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선을 긋는 말에 백채영은 민망하지만, 괴로우면서도 화가 났다.“성준 씨, 어떻게 나한테 모질게 대할 수 있어? 어쨌거나 성준 씨 아이를 낳아준...”“현무만 아니었다면 벌써 죽이고도 남았을 거야!”이성준은 짜증이 섞인 몸짓으로 손을 흔들며 명령했다.“끌어내!”“성준 씨...안 돼, 성준 씨!”백채영은 포기하지 않고 발악을 하더니 경호원의 힘에 못 이겨 억지로 끌려갔다.울부짖는 소리도 점점 멀어지면서 끝내 사라졌다.방안은 마침내 평화를 되찾았지만, 백아영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이성준과 백채영이 4년 전에 결혼도 안 하고 애초에 갈라섰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녀는 여태껏 세 식구가 화목하게 잘 사는 줄 알았다.백채영을 쫓아내고 이성준은 고개를 돌려 백아영을 바라보았다. 싸늘하던 눈빛은 순식간에 사르르 녹으면서 그윽하게 변했다.“그동안 나에 대한 오해가 있었나 본데, 이제 알겠어? 나 솔로야.”그의 입에서 솔로라는 단어를 듣자 왠지 모르게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백아영은 마치 심장이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찌릿했다.선우경진은 백아영에게 플러팅하는 이성준을 보자 괜히 신경이 거슬러 차가운 말투로 찬물을 끼얹었다.“솔로면 다입니까? 이미 애도 있잖아요.”싱글대디는 그다지 매력 포인트는 아니었다.그러나 이성준은 대수롭지 않게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백아영도 애가 있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선택할 권리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선우경진은 할 말을 잃었다.“백아영.”이성준이 갑자기 앞으로 몸을 기대자 백아영과 바짝 붙어 있게 되었고, 입술이 당장이라도 코끝에 닿을 지경이었다.“그러고 보니 우리 다 애가 있네? 꽤 잘 어울리겠는데?”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더니 마치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날뛰었다.넋을 잃은 백아영은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백채영은 울면서 집에 도착했고, 화가 도무지 가시지 않아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집어 던졌다.“백아영, 죽지
리사는 살의를 최대한 억누르고 쌀쌀맞게 말했다.“도련님을 구할 거야. 네 도움이 필요해.”백채영은 당황한 얼굴로 거절했다.“성준 씨가 붙잡아 간 이상 완벽한 방어벽을 구축할 텐데 제갈연준을 어떻게 구해? 난 또 무슨 수로 당신 도와주고? 말도 안 돼.”“백채영, 이성준 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리사가 초강수를 던졌다.“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도와주기만 한다면 백아영을 다시는 나타나지 못하게 할게. 그렇다면 이씨 가문의 사모님은 네가 되지 않겠어?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딴 곳에 죽을 때까지 있을래? 아니면 부귀영화와 눈부신 미래를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할래?”리사는 백채영의 목을 놓아주며 사악하게 유혹했다.“알아서 정해.”백채영은 멍하니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욕망은 곧 두려움을 집어삼켰고, 눈빛이 위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점심시간이 지나고 이현무도 도착했다.그는 짜리몽땅한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방을 향해 총총 뛰어가면서 외쳤다.“스파이 누나! 너무 보고 싶...었...”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커다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표정으로 백아영을 쳐다본 그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엄마...?”강원에서 백아영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 이후로 이현무는 영웅 엄마를 잊을 수가 없었다.나중에 똑같이 편안함과 따스함을 안겨준 스파이 누나를 만나고 나서 서서히 잊히더니 온종일 회상하는 일도 드물었다.그러나 오늘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이야!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민망한 듯 말했다.“미, 미안해요!”철이 일찍 든 덕분에 그는 아무한테나 함부로 엄마라고 했다가는 상대방이 불쾌해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이현무는 백아영의 기분이 나빠지는 걸 원치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였다.다시 만날 수 있다는 자체가 그는 너무 기뻤다.분명 모습은 조심스럽지만, 별빛처럼 반짝이는 아이의 두 눈을 보자 백아영은 마음
따라서 어찌 애먼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고민에 잠긴 백아영이 문득 이성준과 시선이 마주쳤고, 웃음기가 언뜻 보이는 남자의 그윽한 눈빛은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백아영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더니 당황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 이현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그녀의 모습을 본 이성준은 희미한 눈웃음을 지었고, 속으로 아직 기회는 많다고 몰래 생각했다.이현무와 한창 놀다가 백아영도 슬슬 할 일을 시작했다.그녀는 온종일 혼수상태에 빠진 제갈연준을 강제로 깨웠다.제갈연준의 손과 발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밧줄로 온몸을 감싼 모습은 한 마리의 번데기를 연상케 했다. 심지어 움직이고 싶어도 제자리에서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그는 표정이 일그러지며 점점 흉악하게 변했다.이내 험악한 눈빛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간덩이가 부었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벌써 잊었나 본데?”지난 몇 년 동안 겪었던 고통은 백아영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악몽이지만, 아무리 잊기 힘들어도 오로지 아들 하나만 보고 여태껏 버텨왔다. 그녀는 이제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침대 옆으로 다가간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최대 얼마 정도 떨어져야 폭발이 일어나지?”곧 있으면 아이가 도착할 텐데 제갈연준과 만난 적은 있으려나? 만약 서로 일면식이 있다면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분명 제갈연준을 보자마자 겁에 질릴 테니까.백아영은 아이가 다시 겁을 먹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그래서 이따가 아이를 만날 때 제갈연준을 숨겨놓고 단둘이 볼 생각이다.제갈연준은 백아영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은팔찌를 바라보며 사악하게 비웃었다.“이성준이 그렇게 대단하다면서 폭탄쯤은 그냥 제거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나한테 왜 물어봐? 아영아, 아직도 날 몰라? 지금 이 지경이 되었는데 누구 좋은 노릇 해주려고 순순히 알려줄 거로 생각해? 만약 폭발하는 게 두렵다면 내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으면 되잖아. 어차피 그동안 껌딱지처럼 딱 붙어서 사이좋게 지냈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성준의 마지노선을 도발하고 있었다.자제력은 물론 이성이 찰나에 와르르 무너졌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제갈연준을 죽여버릴 작정으로 단검을 깊숙이 찔렀다.“안 돼!”백아영은 황급히 이성준의 손을 잡았고, 다행히 제갈연준이 죽기 직전에 단검이 우뚝 멈추었다.새빨개진 이성준의 눈동자는 냉혹하다 못해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었다.“저 자식이 널 가둬두고 괴롭히고 다치게까지 했는데 대체 왜 살리려고 하는 거지? 설마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야?”백아영은 경악한 얼굴로 이성준을 바라보았다. 이 황당무계한 질문은 뭐지? 질투에 눈이 멀어 보이는 것도 없는 건가?“4년 동안 죽이고 싶은 순간이 어찌 한두 번뿐이겠어? 심지어 죽이는 방법도 각양각색으로 구상했지. 그러나 지금은 마음을 접었어.”백아영은 이성준의 손을 꼭 붙잡았다.“난 이미 구원받고 자유를 되찾았거든. 게다가 곧 아들도 만나지 않겠어? 이제부터 진짜 삶이 시작되는데, 저런 사람의 더러운 피 때문에 내 인생에 오점과 트라우마를 남기고 싶지 않아. 그럴 자격조차 없거든! 저런 쓰레기 같은 놈 때문에 당신이 왜 손을 더럽혀? 워낙 악랄한 짓을 많이 해서 언젠간 법의 제재를 받을 거야.”백아영의 말은 마치 시원한 바람처럼 한껏 흥분해 있는 이성준의 마음을 차분히 다스렸다.다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살의는 거친 파도처럼 그를 집어삼킬 듯싶었다.“물론 당신의 새로운 삶에 오점을 남길 자격은 없지만, 그동안 받았던 상처 때문에 평생 힘들어할 바에는 차라리 내 손을 더럽히고 싶어.”이성준은 그윽한 시선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백아영, 기억해. 지나간 일은 이미 되돌릴 수 없어.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든 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아껴주고 걱정해줄 테니까. 앞으로 저 자식의 입에서 다시는 이런 말을 듣지 않게 하도록 약속할게.”이성준과 눈이 마주친 백아영은 심장이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가슴이 쓰라린 아픈 기억은 봄비를 만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