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어찌 애먼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고민에 잠긴 백아영이 문득 이성준과 시선이 마주쳤고, 웃음기가 언뜻 보이는 남자의 그윽한 눈빛은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백아영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더니 당황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 이현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그녀의 모습을 본 이성준은 희미한 눈웃음을 지었고, 속으로 아직 기회는 많다고 몰래 생각했다.이현무와 한창 놀다가 백아영도 슬슬 할 일을 시작했다.그녀는 온종일 혼수상태에 빠진 제갈연준을 강제로 깨웠다.제갈연준의 손과 발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밧줄로 온몸을 감싼 모습은 한 마리의 번데기를 연상케 했다. 심지어 움직이고 싶어도 제자리에서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그는 표정이 일그러지며 점점 흉악하게 변했다.이내 험악한 눈빛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간덩이가 부었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벌써 잊었나 본데?”지난 몇 년 동안 겪었던 고통은 백아영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악몽이지만, 아무리 잊기 힘들어도 오로지 아들 하나만 보고 여태껏 버텨왔다. 그녀는 이제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침대 옆으로 다가간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최대 얼마 정도 떨어져야 폭발이 일어나지?”곧 있으면 아이가 도착할 텐데 제갈연준과 만난 적은 있으려나? 만약 서로 일면식이 있다면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분명 제갈연준을 보자마자 겁에 질릴 테니까.백아영은 아이가 다시 겁을 먹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그래서 이따가 아이를 만날 때 제갈연준을 숨겨놓고 단둘이 볼 생각이다.제갈연준은 백아영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은팔찌를 바라보며 사악하게 비웃었다.“이성준이 그렇게 대단하다면서 폭탄쯤은 그냥 제거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나한테 왜 물어봐? 아영아, 아직도 날 몰라? 지금 이 지경이 되었는데 누구 좋은 노릇 해주려고 순순히 알려줄 거로 생각해? 만약 폭발하는 게 두렵다면 내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으면 되잖아. 어차피 그동안 껌딱지처럼 딱 붙어서 사이좋게 지냈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성준의 마지노선을 도발하고 있었다.자제력은 물론 이성이 찰나에 와르르 무너졌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제갈연준을 죽여버릴 작정으로 단검을 깊숙이 찔렀다.“안 돼!”백아영은 황급히 이성준의 손을 잡았고, 다행히 제갈연준이 죽기 직전에 단검이 우뚝 멈추었다.새빨개진 이성준의 눈동자는 냉혹하다 못해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었다.“저 자식이 널 가둬두고 괴롭히고 다치게까지 했는데 대체 왜 살리려고 하는 거지? 설마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야?”백아영은 경악한 얼굴로 이성준을 바라보았다. 이 황당무계한 질문은 뭐지? 질투에 눈이 멀어 보이는 것도 없는 건가?“4년 동안 죽이고 싶은 순간이 어찌 한두 번뿐이겠어? 심지어 죽이는 방법도 각양각색으로 구상했지. 그러나 지금은 마음을 접었어.”백아영은 이성준의 손을 꼭 붙잡았다.“난 이미 구원받고 자유를 되찾았거든. 게다가 곧 아들도 만나지 않겠어? 이제부터 진짜 삶이 시작되는데, 저런 사람의 더러운 피 때문에 내 인생에 오점과 트라우마를 남기고 싶지 않아. 그럴 자격조차 없거든! 저런 쓰레기 같은 놈 때문에 당신이 왜 손을 더럽혀? 워낙 악랄한 짓을 많이 해서 언젠간 법의 제재를 받을 거야.”백아영의 말은 마치 시원한 바람처럼 한껏 흥분해 있는 이성준의 마음을 차분히 다스렸다.다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살의는 거친 파도처럼 그를 집어삼킬 듯싶었다.“물론 당신의 새로운 삶에 오점을 남길 자격은 없지만, 그동안 받았던 상처 때문에 평생 힘들어할 바에는 차라리 내 손을 더럽히고 싶어.”이성준은 그윽한 시선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백아영, 기억해. 지나간 일은 이미 되돌릴 수 없어.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든 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아껴주고 걱정해줄 테니까. 앞으로 저 자식의 입에서 다시는 이런 말을 듣지 않게 하도록 약속할게.”이성준과 눈이 마주친 백아영은 심장이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가슴이 쓰라린 아픈 기억은 봄비를 만
“거기 서!”백아영은 걸음을 우뚝 멈추고 쇠사슬을 내려다보았다.“성준아, 이게 대충 몇 미터 정도 돼?”“3m.”이성준은 미리 준비한 3m짜리 쇠사슬을 챙겨와서 교체해줬다.결국 목적을 이룬 두 사람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자 제갈연준은 분노가 가득 찬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날 붙잡았다고 안심하지 마. 내가 순순히 봐줄 거로 생각해?”백아영은 괜스레 불안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권모술수가 워낙 많은 사람인지라 대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오후 3시 반이 되자 아이가 도착했다.유리창 너머로 아이를 발견한 순간 백아영은 눈시울이 빨개졌고,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3년 동안 생이별을 당하면서 밤낮으로 시달렸던 그리움이 밀물처럼 몰려왔다.드디어 아들을 만나게 되다니!한 뼘만 한 아이는 이현무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지만, 훨씬 왜소하고 심각한 영양실조를 앓고 있다.커다란 두 눈에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찼고, 자그마한 몸은 긴장감 때문에 얼어붙었는데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불쌍한 내 새끼...”백아영은 미어지는 가슴에 목이 메었다.이성준은 눈물을 닦아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얼른 가. 널 기다리고 있잖아.”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선우경진은 또다시 의식을 잃은 제갈연준을 등에 업고 문 앞에 내동댕이치더니 문짝에 바짝 갖다 댔다.그의 손목은 백아영과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백아영이 나가자 옆에 서 있던 이현무는 무의식중으로 이성준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고, 잔뜩 긴장한 채 표정이 점점 초조하게 변했다.이성준은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왜 그래?”이현무는 문틈으로 백아영을 바라보더니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시무룩하게 말을 이었다.“아빠, 아영 아줌마가 진짜 아들을 되찾았으니 앞으로 날 싫어하면 어떡해요?”자그마한 얼굴에는 불안함과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이성준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허리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해, 많이 놀랐어? 겁먹지 않아도 돼. 여기에만 있을게.”그녀는 재빨리 소파에 앉았다. 눈높이가 맞으면 아이가 덜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여기 앉아 있을게, 우리 얘기나 좀 나눠보지 않을래?”녀석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가시 돋친 아이의 모습에 백아영의 가슴이 아팠다.얼른 친해지려고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는데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그녀가 다가갈수록 심지어 존재 자체는 아이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백아영은 마냥 지켜볼 수가 없었다. 비록 당장이라도 뛰어가 꼭 껴안고 한 번이라도 더 쳐다보고 싶었지만,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알았어, 이제 그만 나가볼 테니까 혼자 잘 있어. 여기서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피곤하면 눈이 저절로 떠질 때까지 자도 돼.”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말을 내뱉었다.“필요한 게 있으면 엄마 불러, 알겠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으니까.”말을 마친 백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물러서더니 방문을 살며시 닫았다.문이 닫히고 나서야 녀석은 긴장을 풀고 구석에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피곤함이 몰려오는지 잠을 자려고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눈빛만큼은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음산한 기운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백아영은 창밖에 서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잠이 든 아이를 보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이성준이 단단한 팔로 백아영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아이는 원래 낯을 가려. 천천히 친해지면 돼. 서서히 익숙해질 거야.”“응.”백아영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물론 속으로는 아들이 다른 아이와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다.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란 아이들은 세 살 때 제일 천진난만하고 장난이 심한 시기이며, 아무리 겁이 많다고 해도 눈빛만큼을 살아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의 아들
수상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백아영의 시선에도 이성준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떳떳한 표정을 지었다.이내 옆에 있는 과일을 가리키며 말했다.“기분 좋아지게 시중을 잘 들어준다면 당연히 빨리 해제해주지 않겠어?”백아영은 할 말을 잃었다.곧이어 허탈을 웃음을 짓더니 포크로 과일 한 조각을 콕 찍어 그에게 건네주었다.과일을 날름 받아먹은 이성준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하루빨리 폭탄을 해제해서 ‘자유’를 되찾기 위해 백승구과 함께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백아영은 이성준의 곁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다.그가 폭탄을 연구하고 있을 때 백아영은 옆에 앉아 온갖 시중을 들어줬다.처음에는 어딘가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익숙해졌다.두 사람의 사이가 화기애애해지는 반면,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고 모호한 기운을 풍겼다.그날 밤, 이성준은 PC를 켜고 영상 통화를 하면서 상대편 전문가와 폭탄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그러다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제가 딴 길로 빠지게 되었다.영상 속 노란 머리 청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형님, 백옥처럼 뽀얀 팔뚝의 주인은 대체 누구예요?”순간 백아영은 긴장감이 몰려왔다. 이성준이 무슨 대답을 할까?그녀가 알고 있는 이성준이라면 상대방에게 닥치고 일하라고 핀잔을 줬을 게 뻔했다.하지만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영상 속 예쁘장한 여자가 노란 머리 남자에게 딱밤을 날리며 피식 웃었다.“바보야? 보면 몰라? 이렇게 작고 성가신 폭탄을 해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팔목을 잘라내는 거야. 그런데도 보스께서 기꺼이 밤을 지새우며 지금까지 연구했다는 건 그만큼 특별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겠어?”노란 머리 남자는 문득 깨달았다.“백아영 씨? 축하드려요, 보스! 드디어 형수님을 찾았네요.”노란 머리 남자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형수님, 안녕하세요! 서로 인사 나누고 안면 좀 트지 않을래요?”깜짝 놀란 백아영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꿈을 꾸고 난 후유증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들킬까 봐 차마 눈을 뜨고 그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러다 연신 심호흡하면서 한참 동안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하지만 여느 때처럼 침대 머리맡에 앉아 ‘아침 인사’를 건네는 이성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방에 없는 건가?순간 백아영은 어색한 느낌마저 들었다.곧이어 이성준뿐만 아니라 여태껏 침대 밑바닥에서 지내던 제갈연준도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서둘러 팔을 들었고, 손목에는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은팔찌가 온데간데없었다!어젯밤에 자고 있을 때 이성준이 이미 폭탄을 제거한 건가?이럴 수가! 그녀는 드디어 자유를 되찾았다.백아영은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빨개졌고,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걸어갔다.마침 순찰 중인 경호원을 발견하자 서둘러 물었다.“이성준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그녀는 얼른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경호원이 공손하게 대답했다.“도련님께서 제갈연준을 처리하러 갔는데 끝나면 금방 오신다고 하셨어요.”이성준이 밤까지 새면서 겨우 은팔찌를 제거했을 게 뻔했다.감동을 금치 못한 백아영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실질적인 행동으로 보답할 생각이었다. 가진 거라고는 이 몸뚱이뿐인 지라 식사를 한 끼 대접하기로 했다.물론 요리 실력은 여전히 볼품없는 탓에 결국 뚱보 아줌마에게 도움을 청했다.두 사람은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였고,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속속 완성되자 백아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뚱보 아줌마는 웃으면서 감탄했다.“아영 씨, 욕봤어요. 도련님께서 오시면 정말 기뻐하겠네요.”“고작 밥 한 끼에 불과한데요, 뭘. 목숨을 살려준 은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사실 이성준이 그녀를 위해 해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지라 백아영은 정말 고마웠지만, 대체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랐다.“두 분이 보통 사이도 아니고, 굳이 격식을 따질 필요가 있어요?”뚱보 아줌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참,
이성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무려 4년이나 허비했는데, 이젠 단 일 초라도 더 기다리기 싫어요.”“성준 씨한테는 현무가 있잖아요.”선우경진의 말투가 사뭇 진지해졌다.“성준 씨는 여느 싱글 남자와 달라요.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그녀는 현무의 새엄마가 되는 거예요. 정녕 아이와 비교했을 때 누가 더 중요한지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아영은 승구라는 아들이 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아이를 고생시켰다는 생각에 엄마로서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애를 쓸 테니 무조건 아들을 일순위에 놓지 않겠어요? 성준 씨도 아영처럼 똑같이 대해줄 수 있어요? 또한 속으로 아무런 불평불만이 없을 거로 장담해요?”선우경진은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어갔다.“재혼 가정은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죠.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프러포즈하면서 당연히 행복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약속할 텐데, 만약 이룰 수 없다면 괜히 아영에게 해나 끼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네요. 나중에는 서로 상처만 입을 테니까.”안 그래도 온갖 고생을 다 겪었는데, 백아영이 또 다른 불구덩이에 뛰어들기를 원치 않았다.이성준은 장미꽃 가운데 놓인 반지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백아영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어요. 경진 씨가 걱정하는 건 문제가 되지도 않아요.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까 이번 결혼을 통해서는 백아영에게 오로지 행복만을 약속할 거예요.”갈등이 생긴다 한들 그녀가 신경 쓰는 일이 없도록 알아서 해결할 생각이다.이성준의 진지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자 선우경진도 한시름 놓았다.그동안 이성준과 일을 하면서 백아영을 찾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이고 대가를 치렀는지 똑똑히 지켜봤다. 심지어 선우 일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그의 진심은 이미 지난 4년 동안 충분히 드러났다.이런 남자가 일단 사랑에 빠진다면 상대방을 애지중지 여겨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는 물론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어떻게 보면 이
그러나 결국 충동을 억누르고 그를 놓아주었다.이내 이현무를 데리고 다이닝룸에 가서 밥을 먹이고는 옷 갈아입으러 2층으로 올라갔다.그녀는 곧장 방으로 가는 대신 복도 창문으로 정원을 내다보았는데, 오늘 저녁의 광경은 평소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반짝이는 네온사인이 줄을 지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눈시울이 점점 붉어지더니 가슴 속에 마치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답답하고 괴로웠다.지난 4년 동안 그녀는 백승구를 제외하고 오매불망 그리워한 사람이 또 있었는데, 다름 아닌 이성준이다. 끝이 보이지 않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그를 떠올리는 게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다시 만나는 순간 그의 배려에 설렜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부하기 힘들 정도인지라 가까이 다가갈 때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찌하겠는가?자신을 향한 호감을 깨달았을 때 그녀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지만, 근심과 슬픔을 도무지 떨쳐낼 수 없었다.물론 이성준이 그녀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아 할 수 있지만, 아이의 아버지가 그의 사촌 남동생인 이도하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그냥 넘어갈 게 아니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그날 밤 남자가 황도훈이 아니라 한정판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추가로 조사해보니 조건에 부합하는 상대가 바로 이도하이지 않겠는가?만약 나중에 그의 귀에 흘러 들어간다면 분명 혐오감을 느낄 텐데...그때 가서 서로 상처받을 바에는 차라리 지금 떠나는 게 나았다. 아무것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야지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오면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이성준은 30분 넘게 기다렸지만, 선우경진과 백아영의 모습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슬슬 짜증이 밀려오자 선우경진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그제야 저 멀리서 걸어왔다.그러나 그는 혼자 나타났다.이성준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백아영은 어디 있죠?”선우경진은 어두운 얼굴로 이성준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네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