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전화 와서…”송문영은 손으로 휴대폰을 감싸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김예훈이 씨익 웃었다. “꺼지라고 해.”“네!” 여전히 휴대폰을 손을 감싼 송문영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면서 차갑게 내뱉었다.“저희 대표님께서 꺼지라네요!”그리고 통화를 끊어버렸다. ‘또라이 같은 새끼!’…한 편, 아주 의기양양하게 전화를 걸던 정지용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한참 뒤에야 자리에서 팔짝 뛰며 일어났다.“고작 부장 나부랭이가 지금 나보고 꺼지라고 한 거야? 네가 뭔데 꺼지래?! 우리 가문이 우습다 이거야?”정씨네 식구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그 부장 나부랭이가 꺼지라고 한 게 아니라 분명 대표가 꺼지라고 한 거 같은데!“할아버지, 너무 하지 않아요?”정지용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감히 우리 가문을 꺼지라고, 분명 우습게 보는 거예요. 이거 찾아가서 따…”“닥쳐!”어르신이 말을 잘라버렸다. “무의미한 짓은 하지 말거라. 듣자니 20대 초반인 젊은 사람이 신임으로 왔다고 하던데. 그 나이 땐 세상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고 건방지게 구는 건 당연한 거야.” 어르신이 잠시 멈추다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그 대표가 예전의 모든 투자를 거절하고 9000억을 늘린 걸 보면 분명 비전 있는 프로젝트만 취급하나 보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 가문을 대표해서 만나고 올 테냐?”정씨네 식구들 또 서로 쳐다보기만 한다.어르신이 방금 송 부장이 말한 걸 못 들었나? 그 회사 대표님께서 꺼지라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찾아가는 건 진짜로 면전에서 모욕을 처먹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다.어르신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당연히 힘든 일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직접 찾아가서 투자금을 요구한다면 냉대를 받고 올 게 뻔하지만 이 기회를 놓친다면 정씨 가문은 부상할 가능성이 없게 된다.그때 어르신 눈길이 한참 화를 내고 있는 정지용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정지용이 일어서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할아버지, 누나를 보내는 게 어떨
어르신이 고려해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필경 손주들 중에서 정지용을 가장 아끼고 있으니 그 말을 들어줬다.“그래, 민아가 가면 되겠구나. 미루지 말고 내일 YE 투자 회사에 가거라.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실패하면 안 돼!”“할아버지, 제 생각엔…” 방금 욕을 먹고 무슨 비위로 내일 가서 협력을 상의하라는 건지 정민아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어르신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미 이렇게 결정한 이상 핑계를 대지 말거라!”말 떨어지기 바쁘게 그 자리에 모였던 정씨 가문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마음속으로 다행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판에는 누가 걸리던 재수 없게 되는 것이다.임은숙은 집에 도착해서도 표정이 내내 어두웠다. 원래 어르신 눈에 차지 않는 집인데 성공하지도 못할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탁!임은숙이 물컵을 탁하고 놓으면서 표효했다. “김예훈 그 놈은 어디 있는 거야?! 집 청소도 밥도 안 하고 우리를 굶겨 죽일 셈이야?!”정민아가 답했다. “엄마, 잊었어? 나 대신 경찰서에 갔잖아. 아직도 안 돌아온 걸 보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인데.”임은숙이 냉소를 지었다. “일은 무슨? 그 꼴에 무슨 싸움을 할 줄 한다고. 이 참에 이혼이나 해! 그동안 이혼시킬 구실이 없었는데 잘됐네. 병신 같은 놈이 우리 집에 들어온 이후로 좋은 일이 하나도 없어!”정민아는 살짝 걱정돼 몇몇 친구에게 연락했다. 김예훈을 경찰서에서 꺼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모두 하는 말이 김예훈이 경찰서에 잡혀가지 않았단다.…이튿날, 정민아는 아래 위로 단정하게 치장하고 집을 나섰다. 포르쉐를 몰고 YE 투자 회사에 가는 내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YE 투자 건물 회사 건물 아래에서 정민아를 맞이한 사람은 대표님 비서 하은혜였다. 비서는 정민아를 향해 인사도 건네지 않고 프리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정민아 씨 맞죠?”정민아가 우두커니 바라보다 이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맞아요.”“따라오세요.
그날 저녁, 정씨 가족들이 다시 별장에 모였다. 멍하니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몇 시간 전에 통보를 받고 저녁 식사도 못한 채 회의하러 온 것이다. YE 투자 회사에서 계약서를 내민 것도 모자라 투자금액을 더 올려줬다는 말에 단숨에 달려왔다.엊저녁만해도 YE 투자 회사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다들 재수 없는 판에 엮이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정민아가 해냈다. 무슨 자격으로!정민아는 어르신 셋째 아들의 딸이라 평소 대접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경영하는 회사가 계속 적자를 많이 내는 바람에 곧 정씨 가문에서 쫓겨나게 생겼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 바뀌었다.이렇게 중요한 투자금을 받아냈으니 어르신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정민아도 가문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될 것이다.그들 중에서 정지용이 가장 믿을 수 없었다. 정민아가 성공하게 되면 자신이 무능한 인간으로 되기 때문이다.“민아 누나, 아무렇게나 쓴 계약서에 사인해도 되는 거예요? 그리고 550억이라니 누굴 속이려고? YE 투자 회사 대표 얼굴도 보지 못했으면서!” 정지용이 빈정거리며 말했다.“그래, 나 대표 얼굴 못 봤어.”정민아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하은혜가 접대를 했을 뿐 대표는 만나지 않았으니.그 말에 다들 하나같이 노려봤다. “저녁 밥도 못 먹고 네 헛소리 들으러 온 게 아니야!”“정민아,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명색이 대표인데 모자란 네 남편을 따라 배운 거니? 가짜 계약서를 내놓고 우리를 속이려 들어?”“우리가 바보로 보이냐? 가짜 계약서가 말이 돼냐고!”“이혼이고 뭐고. 그냥 짐 싸서 네 남편이랑 손잡고 집에서 나가!”잠자코 있던 사람들이 분노하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성공하지는 못할 망정 가짜 계약서를 내놓으면 앞으로 정씨 가문은 어찌해야 되는지 아득했다.만약 가문이 망하게 되면 부귀영화는 물거품이 된다.정지용은 뻥진 표정으로 바보를 보듯이 바라봤다. “진짜 대박이다. 누나는 우리 가문이 안중에도 없어요? 민아 누나, 이 일 진짜 중요해요.
이때 어르신이 계약서를 읽더니 돋보기를 꺼내 인감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서야 손을 휘휘 저었다.“다들 조용히 해. 이 계약서 진짜구나. 한데 지용이 말도 맞다. 계약서를 보아하니 미리 작성한 게 아니라 어제 작성한 것 같구나. 민아가 계약을 성사시켰으니 물론 공을 세웠다지만 지용이가 우리 가문을 위해서 수모를 감수했으니 그 공이 더 크다.”정지용이 의기양양해서 정민아를 힐끗 보고는 할아버지를 향해 절을 했다.“할아버지, 저도 정씨 가문 후손인데 그보다 더한 수모도 참을 수 있어요. 제가 얻어 맞더라도 가문이 돈을 벌 수 있다면 기꺼이 몸을 희생하겠어요.”“제 생각엔 이 신임 대표가 우리 가문의 상업 부지 가치를 알아보고 투자금을 내준 것 같아요. 성의를 표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계약서에 서명해서 내일 보내야 된다고 생각해요. 계약서는 제가 안전하게 신임 대표에게 전달할게요. 그리고 우리집에도 초대할께요.”정지용은 무조건 신임 대표를 모시고 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신임 대표가 계약서를 내줬다는 건 우리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다는 걸 설명하니 무조건 성공이다.그리고 계약서를 자기가 가져가게 되면 이 프로젝트 담당자는 자연스럽게 자기가 맡게 될 텐데.정민아가 누군지 기억할 리가 없다.“그래, 역시 내 손자다!”어르신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자랑스럽다고 칭찬했다.“지용아 그럼 내일 수고해라.”정민아는 실망했다. 이젠 공로가 다 정지용한테 가게 생겼다.계약서에 YE 투자 회사 인감도 있으니 내일 가져가면 무조건 성공할 것이다. 그때면 정민아라는 사람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정민아는 분통이 터졌지만 말은 못하고 이만 갈았다. 왜냐면 할아버지가 저렇게 말한 이상 내가 가져온 계약서라고 우겨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YE 투자 회사김예훈은 손이 닿는 대로 서류를 훑어보다 손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긴장을 풀었다.오늘 일은 김예훈이 안배한 것이다. 정씨 가문 따위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민아가 오는 걸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 그냥
하은혜가 벤틀리를 몰고 김예훈을 집까지 데려다 주려고 했다. 하지만 차가 너무 막혀서 김예훈은 어쩔 수 없이 차 트렁크에서 전동 스쿠터를 꺼내 올라탔다. 전동 스쿠터가 고장난 줄도 모르고 달리다 물구덩이에 빠져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김예훈은 먼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한데 조이영이 보더니 냉소를 지었다.“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병신한테도 먹히나 봐. 김예훈, 설마 똥물에 빠졌어? 냄새 장난 아닌데?”김예훈은 듣는 척도 안하고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하던 찰나.임은숙이 말소리를 듣고 다가오더니 인상을 팍 썼다.“김예훈, 무슨 염치로 돌아와?! 여기가 무슨 호텔이냐?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게?!”못난 자식 때문에 정민아의 공로가 정지용에게 빼앗긴 것이다. 다 이 재수 없는 놈 때문이다.정소현도 방에서 나오면서 김예훈을 째려봤다. “왜 이렇게 더러워? 신발도 갈아 신지 않고. 집안이 다 썩겠어. 우리 집에 있기 싫으면 나가!”김예훈은 무덤덤하게 임은숙과 정소현을 번갈아 볼 뿐 입을 꾹 담았다. 만약 두 모녀와 맞붙을 생각이 있었다면 3년 전에 이미 혈압 올라 죽었을 것이다.대꾸하는 것도 귀찮아 그냥 정민아 앞으로 걸어갔다. 원래는 인상이라도 쓰려고 했는데 예쁜 얼굴을 본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민아, 회사에 9억 필요하다고 했지? 내가…”“하하하, 병신 이제야 와이프를 챙기네?”조이영이 말을 끊었다. “모자란 놈 얼굴도 두껍지. 지 꼴이 어떤지 몰라요. 다른 남편들은 와이프가 돈이 필요하다면 노가다를 뛰면서라도 돈을 갖다 바치는데. 너는 호주머니 털어도 만원도 안 나오면서 무슨 염치로 돈 얘기를 꺼내? 내가 너라면 3층에서 뛰어내리겠어. 왜 사냐?”조이영의 말이 점점 심해지자 정민아는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이영, 그만 해.”어찌했든, 어제 박동훈한테서 억울함을 당할 때 김예훈이 나서줬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어느정도 감정이란 게 있었다.“민아, 너는 진짜 얘가 착해빠져서는. 나
김예훈과 박동훈이 짜고 벌인 짓이 분명하다. 아니면 김예훈이 멀쩡하게 검찰서에서 나올 수 없다.“조이영! 안지희! 적당히 해!” 김예훈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두 여자를 싸늘하게 내려봤다.한데 인정 안 할 수가 없다. 조이영은 세련되고 안지희는 귀여워서 아무리 싸가지없이 굴어도 예쁜 건 여전히 예쁘고 귀여운 건 여전히 귀여웠다.조이영이 질색했다. ‘병신 같은 자식 지금 어딜 보는 거야? 감히 지 와이프 친구를 훑어봐? 쓰레기 같은 자식!’김예훈이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전에 그랬지? 내가 9억을 내놓으면 무슨 요구든 다 들어준다고?”“그래! 맞아!” 조이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다가갔다. 김예훈 가슴에 닿을 듯 말듯 한 자세로 서서 쏘아붙였다. “내놔 봐! 안 그러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래, 능력 있으면 어디 내보시지!” 옆에 앉았던 안지희도 참지 못하고 비아냥대며 한마디 날렸다.“눈 똑바로 뜨고 봐!” 김예훈이 방금 들고 온 검정색 봉투를 들어올렸다.그러자 5만원권 돈뭉치가 와르르 쏟아졌다.그 순간 별장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신사임당 얼굴이 박힌 누런 돈뭉치가 거실에 산처럼 쌓였다. 보기만 해도 눈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이…이건…” 정민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이거…진짜야…” 임은숙이 거의 덮치듯이 달려와 양손에 돈뭉치를 쥐고 확인했다. 그새 화난 표정이 어느정도 누그러들었다.정소현은 입만 벌린채 그 자리에 고정돼 버렸다. 있는 집에서 태어났지만 지금까지 현금 9억이 쌓이면 어떤 광경인지 전혀 본적 없었다.
조이영과 안지희는 다리에 점점 힘이 풀렸다. 현금 9억원이 산더미처럼 쌓인 광경은 확실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게. 그냥 아빠라고 한 번 불러봐.”김예훈은 손벽을 치면서 활짝 웃었다.조이영이 숨을 깊게 마시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김예훈을 아래위로 훑으며 비웃었다. “김예훈, 내가 모를 줄 알아? 3년 동안 용돈을 민아한테서 받아썼으면서 어떻게 네까짓 게 9억을 마련해? 도둑질한 건 아니지?”그 말에 정민아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이내 김예훈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김예훈이 의아했다. 결혼 3년차, 정민아가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정민아가 방문을 잘 닫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면서 물었다. “김예훈,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이 돈 어디서 났어? 진짜 도둑질한 게 아니지?”“걱정 마. 그러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친구가 빌려줬어.” 김예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YE 투자 회사 신임 대표라는 신분을 어제 말했는데도 다들 믿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말하면 믿어줄까? 정민아가 진짜 신분을 알게 되면 오히려 두 사람 사이가 더 복잡해지니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김예훈은 자신의 신분 때문에 정민아가 태도를 바뀌는 게 싫었다. 오직 평범한 김예훈을 사랑해 주길 바랐다. “친구? 무슨 친구?”정민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친구와 연락하는 걸 못 봤는데. 거짓말하지 마. 전에 아팠을 때 네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해도 다들 무시했잖아.”그 말이 김예훈 가슴에 비수처럼 박혀 아파왔다. YE 가문 후계자 자격을 잃고나서 인정이 뭔지 깨달았다. 과거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를 엄청난 재액으로 여기고 연락하는 것조차 싫어서 친구 목록에서 차단시켰다.김예훈이 이를 꽉 물며 괴로움을 참았다. 방문 앞에 서더니 고개를 돌렸다.“대학교 동창이야. 투자 관련 일을 하는데 전에 내 신세를 진 적이 있어. 지금 돈으로 보답하는 거니까 먼저 써!”“네 신세 질 게 뭐가 있어?” 정민아는 믿지 않았다.
“실패한다고?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YE 투자 회사 대표라도 돼? 꼴에 아는 척은. 어쩌지도 못하는 주제에!”임은숙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지금 이 순간 풀지 않으면 안 될 기세다.김예훈이 말을 하려고 할 때 정민아가 소파에 앉았다.“엄마, 예훈이 오늘 자리에 없었어. 그러니 나무라지 마. 정지용이 염치가 없어서 그래. 예훈이 그래도 9억을 들고 와서 급한 불을 껐어. 그러니까…”“그러니까 뭐?! 좋게 말하라고? 급할 불을 꺼줬으니 절이라고 해줄까?”임은숙은 욕만 퍼부느라 이혼에 관한 말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얼른 가서 밥 안 해? 경고하는데, 앞으로 쭉 있고 싶으면 눈치 있게 행동해. 아니면 어림도 없어!”김예훈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의아한 눈길로 정민아를 쳐다봤다.‘지금 나를 생각해주는 건가?’“어머니, 뭘 드시고 싶어요? 제가 다 할게요.”김예훈의 기분이 좋아졌다.“실실거릴 기분 아니야!”임은숙이 또 쏘아 댔다. 어쩜 이리도 모자란 놈이 있을까? 욕을 먹었는데도 실실 처웃기나 하고!이튿날 아침, 정지용은 BMW를 몰고 건들거리며 YE 투자 회사에 도착했다. 어느 가문에서 왔다고 말하자 프런트 직원이 깍듯하게 응접실로 안내했다. 직원의 친절한 태도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분명 정민아가 가져온 계약서인데 이젠 모두 본인 것이 되었다. 계약서에 이미 서명했으니 대표를 만나서 세부 사항에 대해 얘기하면 투자금을 받을 수 있다. 곧 550억이 자신의 손을 거친다는 생각에 온몸의 세포가 흥분됐다. 중간에서 빼낼 금액도 상당하니 이번 계약이 성사되면 스포츠카 한 대를 바꿀 생각이었다.‘하하하!’이 외에도 정씨 가문 손주들 중에 자신의 공로가 제일 크니 앞으로 가주는 따 놓은 셈이다.혼자만의 좋은 생각을 하던 중, 시야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정지용이 펄쩍 뛰며 응접실 문에 서서 욕을 하기 시작한다.“김예훈, 병신 같은 새끼. 누가 여기 오라고 했어?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얼른 꺼지지 못해? 여기 더럽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