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나서 김예훈이 핸드폰을 양 서장한테 건넸다.양 서장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전화를 건네받더니 이내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하 비서님, 안녕하세요! 네! 제 잘못입니다!""김 회장님, 제가 눈이 멀었습니다, 실례했습니다!"전화를 끊고 양 서장이 김예훈한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더니 이내 부하들을 데리고 잽싸게 도망쳤다.이런 젠장, 이 사람은 내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김... 김 회장님?" 양 서장의 말을 들은 박동훈이 크게 놀라더니 눈앞이 캄캄해졌다.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어떻게? 당신 같이 무능력한 사람이 새 회장이라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건 말도 안 돼!""말도 안 돼! YE 가문의 젊은 세대는 하나 같이 위세가 높은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절대..."박동훈은 미친 듯이 계속 고개를 저었다.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업신여겼던 무능력한 사람이 개미 한 마리 죽이듯 이리 쉽게 자신을 짓밟아버렸다는 사실을."부탁해요, 당신이 도대체 누구인지 말해줘요, 죽더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죽읍시다." 박동훈은 멘붕이 와서 울먹거렸다."YE 가문에 후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까?" 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이... 큰 도련님..." 박동훈의 멘탈이 무너졌다, 그가 이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도련님,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눈이 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한 번만 눈 감아 주세요, 맹세합니다, 다시는 아내 분을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도련님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김예훈이 웃으면서 말했다:"나한테 내일은 없을 거라면서요?""도련님, 도련님, 제가 미쳤나 봅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이렇게는 못 살겠습니다, YE 투자 회사에서 제가 오랜 시간 애를 쓴 걸 봐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박동훈이 콧물 눈물 다 흘리면서 머리를 박았다."내 눈앞에서 꺼져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뭘 하든 난
”쉽지 않을 텐데…”정민택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말처럼 쉬운 일이었다면 그렇게 박동훈에게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어르신이 테이블을 탁탁 쳤다. “이 자금을 마련해 오는 사람이 쇼핑 센터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될 거다.”현재 정씨 일가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쇼핑 센터 프로젝트다. 그러니 프로젝트 담당자가 된다면 앞으로 정씨 가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어르신의 말에 적지 않는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YE 투자 회사와 접촉하긴 무리였다.“할아버지.”정지용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마침 YE 투자 회사에 다니는 미녀 한 분 알고 있어요. 부장급이니 회사에서 어느정도 발언권이 있겠죠. 제가 만나서 얘기해볼까요?”어르신이 인상을 팍 썼다. “부장 나부랭이가 무슨 발언권이 있겠어?”“할아버지, 부장 한 명으로 당연히 안 되죠. 하지만 곧 총지배인으로 승진한다던데, 그때 말을 꺼내면 되지 않을까요?”정지용이 싱긋 웃었다. 지금 정씨 내부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프로젝트 담장자가 된다면 앞으로 이사장 자리는 자기 몫이 될 테니까.정민택은 아들을 쳐다보기만 할 뿐 반대하지는 않았다. 만약 진짜로 정지용이 이 골칫거리를 해결한다면 그의 가족은 아버지 눈에 더 들게 될 것이다.모두가 꺼리는 눈길로 쳐다보자 정지용은 씩 웃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모두 다 들을 수 있도록 특별히 스피커 버튼까지 눌렀다.“여보세요.” 스피커를 통해 약간 긴장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정지용은 상대방이 긴장을 하든 말든 큰 소리로 물었다.“송 부장님, 정지용입니다.”한 편, 김예훈이 전동 스쿠터를 타고 회사에 도착했다. 박동훈 일로 송문영이 회사에 막 도착한 김예훈에게 보고하는 중이었다. 저녁이라 회사는 매우조용했다. 그러니 쩌렁쩌렁한 정지용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사무실에 있는 김예훈한테까지 들렸다.정지용이 큰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송 부장님, 듣자니 회사에서 투자금을 9000억으로 늘리셨다고 하던데, 마
”네,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전화 와서…”송문영은 손으로 휴대폰을 감싸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김예훈이 씨익 웃었다. “꺼지라고 해.”“네!” 여전히 휴대폰을 손을 감싼 송문영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면서 차갑게 내뱉었다.“저희 대표님께서 꺼지라네요!”그리고 통화를 끊어버렸다. ‘또라이 같은 새끼!’…한 편, 아주 의기양양하게 전화를 걸던 정지용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한참 뒤에야 자리에서 팔짝 뛰며 일어났다.“고작 부장 나부랭이가 지금 나보고 꺼지라고 한 거야? 네가 뭔데 꺼지래?! 우리 가문이 우습다 이거야?”정씨네 식구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그 부장 나부랭이가 꺼지라고 한 게 아니라 분명 대표가 꺼지라고 한 거 같은데!“할아버지, 너무 하지 않아요?”정지용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감히 우리 가문을 꺼지라고, 분명 우습게 보는 거예요. 이거 찾아가서 따…”“닥쳐!”어르신이 말을 잘라버렸다. “무의미한 짓은 하지 말거라. 듣자니 20대 초반인 젊은 사람이 신임으로 왔다고 하던데. 그 나이 땐 세상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고 건방지게 구는 건 당연한 거야.” 어르신이 잠시 멈추다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그 대표가 예전의 모든 투자를 거절하고 9000억을 늘린 걸 보면 분명 비전 있는 프로젝트만 취급하나 보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 가문을 대표해서 만나고 올 테냐?”정씨네 식구들 또 서로 쳐다보기만 한다.어르신이 방금 송 부장이 말한 걸 못 들었나? 그 회사 대표님께서 꺼지라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찾아가는 건 진짜로 면전에서 모욕을 처먹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다.어르신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당연히 힘든 일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직접 찾아가서 투자금을 요구한다면 냉대를 받고 올 게 뻔하지만 이 기회를 놓친다면 정씨 가문은 부상할 가능성이 없게 된다.그때 어르신 눈길이 한참 화를 내고 있는 정지용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정지용이 일어서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할아버지, 누나를 보내는 게 어떨
어르신이 고려해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필경 손주들 중에서 정지용을 가장 아끼고 있으니 그 말을 들어줬다.“그래, 민아가 가면 되겠구나. 미루지 말고 내일 YE 투자 회사에 가거라.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실패하면 안 돼!”“할아버지, 제 생각엔…” 방금 욕을 먹고 무슨 비위로 내일 가서 협력을 상의하라는 건지 정민아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어르신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미 이렇게 결정한 이상 핑계를 대지 말거라!”말 떨어지기 바쁘게 그 자리에 모였던 정씨 가문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마음속으로 다행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판에는 누가 걸리던 재수 없게 되는 것이다.임은숙은 집에 도착해서도 표정이 내내 어두웠다. 원래 어르신 눈에 차지 않는 집인데 성공하지도 못할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탁!임은숙이 물컵을 탁하고 놓으면서 표효했다. “김예훈 그 놈은 어디 있는 거야?! 집 청소도 밥도 안 하고 우리를 굶겨 죽일 셈이야?!”정민아가 답했다. “엄마, 잊었어? 나 대신 경찰서에 갔잖아. 아직도 안 돌아온 걸 보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인데.”임은숙이 냉소를 지었다. “일은 무슨? 그 꼴에 무슨 싸움을 할 줄 한다고. 이 참에 이혼이나 해! 그동안 이혼시킬 구실이 없었는데 잘됐네. 병신 같은 놈이 우리 집에 들어온 이후로 좋은 일이 하나도 없어!”정민아는 살짝 걱정돼 몇몇 친구에게 연락했다. 김예훈을 경찰서에서 꺼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모두 하는 말이 김예훈이 경찰서에 잡혀가지 않았단다.…이튿날, 정민아는 아래 위로 단정하게 치장하고 집을 나섰다. 포르쉐를 몰고 YE 투자 회사에 가는 내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YE 투자 건물 회사 건물 아래에서 정민아를 맞이한 사람은 대표님 비서 하은혜였다. 비서는 정민아를 향해 인사도 건네지 않고 프리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정민아 씨 맞죠?”정민아가 우두커니 바라보다 이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맞아요.”“따라오세요.
그날 저녁, 정씨 가족들이 다시 별장에 모였다. 멍하니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몇 시간 전에 통보를 받고 저녁 식사도 못한 채 회의하러 온 것이다. YE 투자 회사에서 계약서를 내민 것도 모자라 투자금액을 더 올려줬다는 말에 단숨에 달려왔다.엊저녁만해도 YE 투자 회사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다들 재수 없는 판에 엮이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정민아가 해냈다. 무슨 자격으로!정민아는 어르신 셋째 아들의 딸이라 평소 대접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경영하는 회사가 계속 적자를 많이 내는 바람에 곧 정씨 가문에서 쫓겨나게 생겼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 바뀌었다.이렇게 중요한 투자금을 받아냈으니 어르신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정민아도 가문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될 것이다.그들 중에서 정지용이 가장 믿을 수 없었다. 정민아가 성공하게 되면 자신이 무능한 인간으로 되기 때문이다.“민아 누나, 아무렇게나 쓴 계약서에 사인해도 되는 거예요? 그리고 550억이라니 누굴 속이려고? YE 투자 회사 대표 얼굴도 보지 못했으면서!” 정지용이 빈정거리며 말했다.“그래, 나 대표 얼굴 못 봤어.”정민아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하은혜가 접대를 했을 뿐 대표는 만나지 않았으니.그 말에 다들 하나같이 노려봤다. “저녁 밥도 못 먹고 네 헛소리 들으러 온 게 아니야!”“정민아,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명색이 대표인데 모자란 네 남편을 따라 배운 거니? 가짜 계약서를 내놓고 우리를 속이려 들어?”“우리가 바보로 보이냐? 가짜 계약서가 말이 돼냐고!”“이혼이고 뭐고. 그냥 짐 싸서 네 남편이랑 손잡고 집에서 나가!”잠자코 있던 사람들이 분노하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성공하지는 못할 망정 가짜 계약서를 내놓으면 앞으로 정씨 가문은 어찌해야 되는지 아득했다.만약 가문이 망하게 되면 부귀영화는 물거품이 된다.정지용은 뻥진 표정으로 바보를 보듯이 바라봤다. “진짜 대박이다. 누나는 우리 가문이 안중에도 없어요? 민아 누나, 이 일 진짜 중요해요.
이때 어르신이 계약서를 읽더니 돋보기를 꺼내 인감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서야 손을 휘휘 저었다.“다들 조용히 해. 이 계약서 진짜구나. 한데 지용이 말도 맞다. 계약서를 보아하니 미리 작성한 게 아니라 어제 작성한 것 같구나. 민아가 계약을 성사시켰으니 물론 공을 세웠다지만 지용이가 우리 가문을 위해서 수모를 감수했으니 그 공이 더 크다.”정지용이 의기양양해서 정민아를 힐끗 보고는 할아버지를 향해 절을 했다.“할아버지, 저도 정씨 가문 후손인데 그보다 더한 수모도 참을 수 있어요. 제가 얻어 맞더라도 가문이 돈을 벌 수 있다면 기꺼이 몸을 희생하겠어요.”“제 생각엔 이 신임 대표가 우리 가문의 상업 부지 가치를 알아보고 투자금을 내준 것 같아요. 성의를 표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계약서에 서명해서 내일 보내야 된다고 생각해요. 계약서는 제가 안전하게 신임 대표에게 전달할게요. 그리고 우리집에도 초대할께요.”정지용은 무조건 신임 대표를 모시고 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신임 대표가 계약서를 내줬다는 건 우리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다는 걸 설명하니 무조건 성공이다.그리고 계약서를 자기가 가져가게 되면 이 프로젝트 담당자는 자연스럽게 자기가 맡게 될 텐데.정민아가 누군지 기억할 리가 없다.“그래, 역시 내 손자다!”어르신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자랑스럽다고 칭찬했다.“지용아 그럼 내일 수고해라.”정민아는 실망했다. 이젠 공로가 다 정지용한테 가게 생겼다.계약서에 YE 투자 회사 인감도 있으니 내일 가져가면 무조건 성공할 것이다. 그때면 정민아라는 사람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정민아는 분통이 터졌지만 말은 못하고 이만 갈았다. 왜냐면 할아버지가 저렇게 말한 이상 내가 가져온 계약서라고 우겨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YE 투자 회사김예훈은 손이 닿는 대로 서류를 훑어보다 손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긴장을 풀었다.오늘 일은 김예훈이 안배한 것이다. 정씨 가문 따위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민아가 오는 걸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 그냥
하은혜가 벤틀리를 몰고 김예훈을 집까지 데려다 주려고 했다. 하지만 차가 너무 막혀서 김예훈은 어쩔 수 없이 차 트렁크에서 전동 스쿠터를 꺼내 올라탔다. 전동 스쿠터가 고장난 줄도 모르고 달리다 물구덩이에 빠져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김예훈은 먼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한데 조이영이 보더니 냉소를 지었다.“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병신한테도 먹히나 봐. 김예훈, 설마 똥물에 빠졌어? 냄새 장난 아닌데?”김예훈은 듣는 척도 안하고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하던 찰나.임은숙이 말소리를 듣고 다가오더니 인상을 팍 썼다.“김예훈, 무슨 염치로 돌아와?! 여기가 무슨 호텔이냐?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게?!”못난 자식 때문에 정민아의 공로가 정지용에게 빼앗긴 것이다. 다 이 재수 없는 놈 때문이다.정소현도 방에서 나오면서 김예훈을 째려봤다. “왜 이렇게 더러워? 신발도 갈아 신지 않고. 집안이 다 썩겠어. 우리 집에 있기 싫으면 나가!”김예훈은 무덤덤하게 임은숙과 정소현을 번갈아 볼 뿐 입을 꾹 담았다. 만약 두 모녀와 맞붙을 생각이 있었다면 3년 전에 이미 혈압 올라 죽었을 것이다.대꾸하는 것도 귀찮아 그냥 정민아 앞으로 걸어갔다. 원래는 인상이라도 쓰려고 했는데 예쁜 얼굴을 본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민아, 회사에 9억 필요하다고 했지? 내가…”“하하하, 병신 이제야 와이프를 챙기네?”조이영이 말을 끊었다. “모자란 놈 얼굴도 두껍지. 지 꼴이 어떤지 몰라요. 다른 남편들은 와이프가 돈이 필요하다면 노가다를 뛰면서라도 돈을 갖다 바치는데. 너는 호주머니 털어도 만원도 안 나오면서 무슨 염치로 돈 얘기를 꺼내? 내가 너라면 3층에서 뛰어내리겠어. 왜 사냐?”조이영의 말이 점점 심해지자 정민아는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이영, 그만 해.”어찌했든, 어제 박동훈한테서 억울함을 당할 때 김예훈이 나서줬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어느정도 감정이란 게 있었다.“민아, 너는 진짜 얘가 착해빠져서는. 나
김예훈과 박동훈이 짜고 벌인 짓이 분명하다. 아니면 김예훈이 멀쩡하게 검찰서에서 나올 수 없다.“조이영! 안지희! 적당히 해!” 김예훈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두 여자를 싸늘하게 내려봤다.한데 인정 안 할 수가 없다. 조이영은 세련되고 안지희는 귀여워서 아무리 싸가지없이 굴어도 예쁜 건 여전히 예쁘고 귀여운 건 여전히 귀여웠다.조이영이 질색했다. ‘병신 같은 자식 지금 어딜 보는 거야? 감히 지 와이프 친구를 훑어봐? 쓰레기 같은 자식!’김예훈이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전에 그랬지? 내가 9억을 내놓으면 무슨 요구든 다 들어준다고?”“그래! 맞아!” 조이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다가갔다. 김예훈 가슴에 닿을 듯 말듯 한 자세로 서서 쏘아붙였다. “내놔 봐! 안 그러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래, 능력 있으면 어디 내보시지!” 옆에 앉았던 안지희도 참지 못하고 비아냥대며 한마디 날렸다.“눈 똑바로 뜨고 봐!” 김예훈이 방금 들고 온 검정색 봉투를 들어올렸다.그러자 5만원권 돈뭉치가 와르르 쏟아졌다.그 순간 별장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신사임당 얼굴이 박힌 누런 돈뭉치가 거실에 산처럼 쌓였다. 보기만 해도 눈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이…이건…” 정민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이거…진짜야…” 임은숙이 거의 덮치듯이 달려와 양손에 돈뭉치를 쥐고 확인했다. 그새 화난 표정이 어느정도 누그러들었다.정소현은 입만 벌린채 그 자리에 고정돼 버렸다. 있는 집에서 태어났지만 지금까지 현금 9억이 쌓이면 어떤 광경인지 전혀 본적 없었다.
퍽.김예훈이 손가락을 튕기자 육민준이 손에서 놓쳤던 검이 다시 날아와 그의 이마와 머리카락을 스쳤다.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유라시아 전쟁 시기 천문재에서 사람을 지원한 점을 봐서 죽이지는 않을게. 그런데 두 번 다시 봐주는 일은 없을거야.”육민준은 식은땀이 삐질 나고 말았다.정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평온한 김예훈을 보며 육민준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병신. 병신같은 자식.”그제야 반응한 선재 스님은 날아간 육민준을 보며 싫증난 표정을 지었다.‘능력도 없으면서 괜히 나서서 망신시켜.’선재 스님은 김예훈을 힘껏 짓밟아 주기 전까지는 체면을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구민욱 도련님께서 직접 나서야겠어요.”선재 스님은 사람 무리 중에 유일하게 태연해 보이는 한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이 청년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김예훈을 보면서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제가 나설 수는 있지만 오늘 이후로 저희 구씨 가문은 오륜 사찰에 지은 빚이 사라지는 거예요. 제가 이 광대 같은 자식한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줄게요.”구민욱이라는 사람이 앞으로 나서려고 할때, 도관 입구에 토요타 센추리 몇 대가 멈춰 섰다.운전하고 길을 안내하는 사람은 전부 용문당 집법부대 제자들이었다.가운데 차량의 뒷문을 열자 백발에 기모노를 입은 일본 노인이 차에서 내렸다.노인은 네모난 얼굴형이었고, 입고있는 기모노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허리춤에 긴 검과 단검을 차고 있었지만 영락없는 평범한 노인으로 보였다.그의 뒤에는 차가운 표정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고, 딱봐도 심상치 않은 사람으로 보였다.용태웅은 멀리서부터 그들을 발견하고 멈칫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선재 스님, 조금만 진정하세요. 미야다 신노스케와 아마미네 다이토가 왔네요. 저희 지금 나설 필요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검신이 왔는데 이따 김예훈은 자기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거예요.”미야다 신노스케는 일본 야마구치파 검신이었다
육민준이 검을 꺼내는 순간,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그는 마치 영웅이라도 된 듯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육 도련님, 너무 멋있어요. 얼른 저 찌질이 같은 자식을 죽여버려요!”“선재 스님의 뺨을 때리다니.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육 도련님이 검을 빼내면 얼마나 무서운데.”무술 성지 출신들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었다.따라서 자신감이 폭발한 육민준은 눈깜짝할 사이 김예훈 앞에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샤삭.검에서 빛이 반짝이면서 검술의 기본기가 드러났다.용문당 집법부대 제자들은 검을 보는 순간 가소로운 표정을 지었다.용태웅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김예훈, 육 도련님 공격도 예상하지 못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건드린 거야?”“전에 그렇게 거만할 수 있었던 것도 진정한 고수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 거겠죠.”선재 스님이 웃으면서 말했다.“무술의 성지 천문재는 대한민국 서남 지역 일대의 강자인데 얼마나 많은 명문가에서 천문재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지 알아? 서남 지역에서 천문재의 지위는 우리 오륜 사찰이 경기도 지역에서의 지위와 비슷하기도 해. 그리고 육민준 도련님은 육씨 가문의 상속자인 거고. 검술을 18년이나 수련해서 검으로 바위도 쪼갤 수 있는 분이야. 김예훈, 네가 엄마 배 속에서부터 무술을 수련했다 해도 육 도련님의 상대가 될 수 없어.”용태웅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건 너무 가벼운 벌칙 아닐까요? 미야다 신노스케도 괜히 헛걸음하는 거잖아요.”한 무리의 사람은 일대 검신의 실력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쨕!바로 이때, 육민준이 검을 앞으로 뻗자 차를 마시고 있던 김예훈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의 뺨을 때렸다.아까까지만 해도 잘생겨 보이던 육민준의 얼굴은 그대로 일그러지고 말았다.퍽!수십 미터 밖으로 날아가 나무에 부딪힌 그는 힘없이 스르륵 바닥에 떨어졌다.“실력이 겨우 이것밖에 안 돼?”김예훈이 무관심한 표정으로 말했다.“나올 사람 또 없어? 다
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아까 분명 말씀드렸는데 잘 못 들으셨다면 다시 한번 말할게요. 이 관은 당주님이 미야다 신노스케라는 사랑이랑 사용하세요. 당주님 같은 매국노는 일본 주인과 함께 누울 수 있는 것이 가문의 자랑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너!”김예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선재 스님을 쳐다보았다.“성녀님이 직접 와도 내 앞에서는 아무런 체면도 없는데 네까짓 게 뭐라고. 김현민 시중이나 잘 들어. 여긴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니까 썩 꺼져.”“이 자식이!”백옥처럼 순전 무결하다고 소문난 선재 스님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김현민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건 맞지만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김예훈, 내 명예를 훼손한 것도 모자라 김현민 도련님의 이미지마저 망치려고? 죽고 싶어? 전화 한 통이면 네가 바짝 엎드려야 하는 거 몰라?”“그렇게 대단해?”김예훈은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전화해 봐. 과연 나를 바짝 엎드리게 할수 있는지 보게.”“너...”선재 스님은 부들부들 떨면서 핸드폰을 꺼내 성녀의 번호를 누르려 했지만 이깟 일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꾸중을 들을까 두려웠다.“왜. 못하겠어?”김예훈은 덤덤하기만 했다.“겁이 나서 못 할 거면 꺼져. 넌 내 앞에서 거들먹거릴 자격도 없어.”“너!”선재 스님은 여전히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바로 이때, 도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나타나 담담하게 말했다.“선재 스님, 그렇게 화내실 필요가 뭐가 있어요. 기껏해야 저희 무술의 성지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하층 인물인 것 같은데. 저 육민준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자기 주제를 모르는 놈이에요. 손을 대봤자 제 손만 더러워지니까요. 그런데 선재 스님을 위해서라면 제가 기꺼이 본때를 보여드리죠.”이 모습에 육민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육민준 도련님, 이런 하층 인물은 반드시 혼내줘야 정신을 차려요.”“감히 우리 무술의 성지를 무시하다니. 죽고 싶어?”“육민준 도련님, 절대 봐주지 마세요. 저
김예훈은 담담한 표정으로 선재 스님을 쳐다보았다.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그녀가 이번에 나타난 것은 김현민이 시킨 짓인 것을 알수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각 무술 성지의 대표인 것 같았다.이들은 단순히 관전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심판 역할까지 하려고 했다.그래서 김예훈도 별로 좋지 않은 태도로 담담하게 말했다.“선재 스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당주님이 관을 가져와서 저희 온 가족은 물론,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마저 관에 처넣겠다고 하는데 제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 아예 머리까지 박으라고 하시죠?”“그거랑 그거랑 어떻게 같을 수가 있어. 네가 일본인을 건드려서 검신이 복수하러 오는 거 아니야. 당주님은 네가 같은 대한민국 사람인 걸 봐서 특별히 좋은 목재로 관까지 만들어줬는데 감사한 줄도 모르고 뭐하는 짓이야. 대한민국은 너같이 무례한 사람이 많아서 수준 낮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선재 스님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그때 타케이 나오토의 온 가족을 죽일 때는 오늘이 다가올 줄 몰랐어? 네가 뭔데. 경기도 김 세자? 용문당 회장? 웃기지 마. 그깟 실력으로 일본인을 건드리다니. 야마구치파 검신이 온다고 했으니 넌 이제 죽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미야다 신노스케가 정말 제 상대가 될 거로 생각하세요?”“뭐라고?”선재 스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김예훈, 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미야다 신노스케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해? 말도 안 돼. 내가 말해주는데, 미야다 신노스케의 공격을 한 번만이라도 피할 수 있으면 내가 무릎을 꿇을게. 자신감 있는 건 좋은데 근거 없는 자신감은 자신을 해칠 수도 있어.”선재 스님은 한껏 가소로운 표정으로 전에 김예훈 때문에 겪었던 수치심을 거리낌 없이 되갚아 주고 있었다.“마지막으로 기회를 죽게.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사과하지 않으면 큰코다칠 거야.”선재 스님은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번에 오륜 사찰을 대표해서 관전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김예훈은 물론 진주·
용태웅의 손짓에 뒤에 있던 집법부대 제자들이 차량 뒷좌석에서 관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김예훈, 잘 봐. 이건 내가 너를 위해 직접 제작한 관이야.”용태웅은 한껏 음산한 말투로 말했다.“네가 죽으면 내가 직접 관에 넣어서 경기도와 부산을 다녀올 거야. 너의 아내를 포함한 온 가족도 죽여서 안에 넣으려고. 너의 조상님 무덤까지 파내서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와 함께 파묻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다음 생에 다시 환생할 수 있게 풍수 좋은 곳에 묻어줄 테니까. 하하하하. 네가 감히 나 용태웅의 아들을 죽여?”이 순간 용태웅은 이미 감정조절이 안 되어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용태웅이 이 정도로 화내는 것을 처음 본 집법부대 제자들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김예훈은 차를 한 잔 따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오늘 돌아가실 필요가 없겠네요. 오늘 이 관에 매국노인 당주님과 일본 검신이라는 사람을 같이 묻으면 되겠네요. 이런 대우에 만족하실 거라고 믿어요.”김예훈은 찻잔을 들어 천천히 향을 음미했다.“이런 제기랄! 감히 우리 당주님께 무슨 말버릇이야. 누가 너한테 이런 용기를 준거냐고.”바로 이때, 벤츠 G클래스 몇 대가 도관 앞에 멈추더니 한 무리의 남녀가 차 문을 발로 걷어차면서 심상찮은 포스를 풍겼다.이들은 다른 재벌 2세와는 다르게 뒤를 따르는 보디가드가 없었고, 세상을 많이 경험해 본 것처럼 허리춤에 보석이 박힌 총과 검을 지니고 있었다.가장 앞장서있는 여자는 딱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있어 가느다란 허리라인이 돋보였다.이 사람은 바로 경기도 무술의 성지인 오륜 사찰의 선재 스님이었다.이번에는 선재 스님이 오륜 사찰을 대표해서 온 것이다.그녀는 돌계단 위로 올라가 김예훈에게 삿대질하면서 말했다.“김예훈, 전에 허씨 가문에서 네가 귀신 놀이를 할 때도, 오륜 사찰 경매회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때도 우리 성녀님께서 대인배라 가만히 있었는데 어떻게 용문당 집법부대 용태웅 당주님께 무례를 범할 수 있어. 위아래도 없이. 명령하는데 지금 당장 무릎
“당주님, 어떻게 죽고 싶으세요?”김예훈이 아무렇지 않게 한 말에 주위 온도가 갑자기 뚝 떨어지면서 으스스해지기 시작했다.“이런 제기랄! 당주님한테 무슨 말버릇이야.”“감히 당주님 앞에서 거들먹거려? 죽고 싶어?”“전체 용문당에서 우리 당주님이 나라를 사랑하는 충신인 거 모르는 사람이 없을거야.”“당주님께 누명을 뒤집어씌우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한 무리의 용문당 집법부대 정예 부하들은 격노하며 김예훈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집법부대가 생기고부터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항상 그들이었는데 오늘 김예훈이 되려 용태웅에게 뒤집어씌울 줄 몰랐다.부하들은 이대로 참을 수가 없었다.“김예훈, 대단한데? 조금 실력을 갖춘 것도 모자라 말솜씨도 장난 아닌데?”용태웅은 혈압이 솟아오르는 느낌이었지만 애써 진정해 보려고 했다.“그런데 그래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거야. 네가 일본 야마구치파의 귀인을 잔인하게 살해해서 검신 미야다 신노스케가 이미 진주에 도착했어. 너를 산산조각 내버릴 거라고.”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직접 찾아와서 제가 힘을 아낄 수 있을것 같네요. 직접 일본까지 가서 죽이기에는 시간과 돈이 아까웠는데 어떻게 보면 당주님이 좋은 일을 하신 거나 다름없네요.”“너!”용태웅은 김예훈의 거만한 말투에 천불이 났다.이때 용태웅이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말했다.“김예훈, 어디 계속해 봐. 곧 일본 무신, 야마구치파 검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테니까. 오늘 너는 반드시 죽을 운명이야. 그래도 죽지 않으면 내가 직접 용문당 집법부대를 대표해서 너를 산산조각 내버릴 거야.”용태웅은 눈에 실핏줄이 가득했다. 화면을 통해 직접 아들이 김예훈에게 총 맞아 죽는 모습을 목격했기에 마음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 손쓰지 않은 이유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용태웅은 김예훈이 미야다 신노스케의 손에 죽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만약 김예훈이 미야다 신노스케마저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괴물이라고 해도 지쳤을
다음 날 오후 두 시. 김예훈은 진주 용문당 도관에 나타났다.아마도 모든 사람이 오늘 용태웅이 진주에 오는 이유를 알고 있어서 그런지 전체 용문당 도관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청소 아줌마조차 보이지 않았다.김예훈은 혼자서 도관 뒷산에 있는 정자에 앉아 평온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곧 맞이할 것은 폭풍우가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광대인 것처럼 말이다.김예훈 외로 현장에는 추문성과 류서우도 있었다.이대로 죽으면 안 되는 류서우는 어젯밤 제때 치료를 받아 지금은 휠체어에 힘없이 앉아있었다.이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김예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증오가 가득했다.“김예훈, 소용없어. 오늘 당주님께서 오시면 너는 끝장이야. 게다가 일본 야마구치파 검신인 미야다 신노스케도 같이 올 거라고. 네가 아무리 대단해도 진정한 무신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그러게 누가 자꾸 야마구치파를 건드리라고 했어. 너같이 오만방자한 사람의 결말은 딱봐도 뻔한 거지. 하하하!”류서우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그녀는 어제 김예훈 손에 끔찍하게 죽은 용천수를 떠올리며 머릿속에 이미 자신의 운명이 그려졌다.김예훈이 죽든 말든 류서우는 반드시 용천수를 따라가야 했다.그래서 지금 류서우는 자기 죽음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김예훈이 사지가 찢겨 가루가 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김예훈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덤덤하게 말했다.“류서우, 기대할 만할 거야. 과연 누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지.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깟 일본의 검신을 숭배해. 정말 정신이 아니네.”추문성이 류서우의 뺨을 때리는 바람에 그녀는 이가 몇 대 날아갔다.추문성은 김예훈의 평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류서우가 개처럼 짖는 것을 두고볼수 없었다.차 한 주전자를 다 마신 김예훈은 이윽고 저 멀리 용문당 도관 입구에 차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차 문이 열리고, 용문당 집법부대 당주 용태웅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나타났다.한 무리의 사람은 아주 빠른 속도로 용문당 도관 뒷산에
“김 도련님의 신분을 봤을 때 이 양패쪽이 마음에 안 들 수도, 필요 없을 수도 있겠지만 자그마한 제 성의를 받아주시기를 바랄게요. 아니면 편히 잠을 잘 수 없을것 같아서 그래요.”양상철은 진지한 표정으로 정중히 양패쪽을 김예훈의 손에 쥐어주었다.아까의 대화를 듣고, 또 양패쪽을 본 신유림 일행은 모두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이들은 양상철이 양패쪽을 내어줄 정도로 이 사기꾼 같은 놈을 신뢰할 줄 몰랐다.이 양패쪽만 있으면 이제 김예훈이 동남 해역에서 마음대로 행동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김예훈도 양상철이 이 정도로 체면을 세워줄 줄 몰랐는지 멈칫하고 말았다.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어르신, 이렇게 귀중한 물건을 받을 수 없어요.”김예훈은 이 패쪽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남양 무신으로 불리는 양상철은 전체 동남 해역에서 적수가 없는 존재로 알려졌다.남양국으로 돌아가는 순간 아마도 전체 동남 해역에서 남양국을 우러러볼 것이다.그때되면 이 패쪽이 대표하는 의미는 지금과 천차만별이었다.김예훈은 이 패쪽을 가지고 있어도 별로 쓸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져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이 물건을 양유선에게 주는 것은 김예훈에게 주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김예훈의 말에 양유선은 멈칫하더니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진주와 밀양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김현민은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 패쪽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값으로도 매길 수 없는 이 패쪽을 거절한다고? 정말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네.’김예훈은 정중히 패쪽을 돌려주며 웃으며 말했다.“정말 괜찮아요. 어르신께서 저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면 기회가 될 때 술이나 사주세요.”“술은 술이고 선물은 선물이죠.”양상철은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계속 거절했다가 이 노인네가 화가 나서 잘못되면 어쩌려고요. 뭐, 이걸 원하지 않는다면 제 손녀딸을 드릴게요. 제 손녀사위가 되어준다면 이걸 안 받아도 괜찮아요. 어때요? 제 손녀사위가 되어준
“하하하. 극야한독을 제거해 주셨는데 다른 건 어려운 일도 아니죠. 진주 10대 명의가 제 친구인데 몸조리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침대에서 거의 10년을 보낸 양상철은 전성기 시절로 돌아와 기쁘지 않을수 없었다.“할아버지, 김 도련님께서 아까 할아버지를 구하다가 신유림 총에 맞아 죽을 뻔했어요.”양유선은 힘겹게 일어나 기쁜 마음으로 양상철을 부축하면서 고자질했다.신유림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변명하고 싶었지만 차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숨이 간당간당한 양상철을 상대로 아무 말이나 막 해도 이제 전성기 시절로 돌아온 그를 미치지 않고서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김 도련님,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양상철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젊어서 잘나갈 때는 친구들도 많았었는데 몰락하니까 어떤 사람들인지 알겠더라고요. 이번에 김 도련님의 도움을 받았는데 누가 뭐래도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보려고요.”양상철은 양유선에게 손짓하면서 말했다.“내 물건 가져와 봐.”김예훈이 웃으면서 말했다.“저도 아무런 사심도 없이 구해드린 건 아니니까 감사해할 필요 없어요.”양상철이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솔직하시네요. 이거라도 드리지 않으면 제 마음이 안 내려갈 것 같아서 그래요.”양유선은 기쁜 마음에 안방에 가서 낡은 상자를 꺼내 양상철 앞에 가져왔다.이어 양유선은 김예훈을 향해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김 도련님, 저희 할아버지를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이건 저를, 그리고 전체 양씨 가문을 구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제부터 저 양유선은 김 도련님의 사람이에요. 누군가 김 도련님을 해치려고 한다면 제 시체부터 밟고 가야 할 거예요.”김예훈은 시종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양 수장님, 그저 지나가다가 우연히 도움을 드렸을 뿐이에요. 앞으로 진주·밀양에서 만날 일도 많을 텐데 돈 벌 기회가 있으면 같이 벌고, 무슨 일이 생겨도 다같이 감당하면 될 거 아니에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