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이런 식으로 아이를 설득했다. 지윤은 나이가 어리지만 도윤만큼 고집스럽지 않았다.아이는 모든 걸 지아 중심으로 생각했다.외모는 도윤과 매우 닮았지만, 성격만은 지아를 닮아 배려심이 넘쳤다.하지만 늘 자기 이익대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 힘들고 마음 아픈 일이 많았다. 이날 밤, 아이는 지아의 품에 꼭 안겨 작은 손으로 지아의 잠옷 옷깃을 불안하게 움켜쥐었다.아이의 얼굴에 난 상처를 살피던 지아는 심장이 저릿했다.이 상처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앞으로 지아가 걸어갈 길 역시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도 아이를 떠나야 하는 지아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하지만 지아가 딱 한 가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건, 지금이나 앞으로도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도윤도 지윤도 줄곧 자신을 지켜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자칫 남에게 잡혔다가 이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삶은 단 하나뿐인데 강해지지 않으면 미셸 같은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때릴 수 있을 것이다.도윤의 힘이 줄어들면 지아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게 된다!게다가 도윤은 자신의 정체까지 드러냈기 때문에 더 이상 도윤과 함께 있는 것도 안전하지 않았다.지아는 도윤과의 결혼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에 눈앞의 일만 바라볼 수 없었고, 자신의 미래뿐만 아니라 여러 아이들도 생각해야 했다.아이가 잠에 들자 도윤이 조용히 다가왔고, 도윤의 단단한 가슴이 지아의 등에 닿자 지아는 순식간에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뭐 하는 거야”지아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고 도윤은 팔로 지아의 허리를 감싸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겁내지 마, 그냥 안고만 잘게.”지아는 도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하지만 도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지아의 허리를 안은 채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내일 떠날 생각이야?”지아가 낮게 대답했다.“어차피 붙잡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도윤은 한숨을 쉬었다.“난 상처 회복을 위해 한동안
지아가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떠났고, 문이 살며시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부자는 조용히 눈을 떴다.지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아빠, 정말 못 붙잡아요?”“미안해.”도윤의 눈은 안타까운 기색으로 가득 찼다.지아가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깥의 찬바람이 얼굴을 칼로 찌르는 듯 얼굴 전체가 따갑고 아팠다.도윤의 말대로 누군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사모님, 비행기가 준비됐으니 이제 가셔도 돼요.”“고마워요.”“근데 활주로가 좀 멀어서 힘드시겠지만 좀 걸으셔야 해요.”“괜찮아요.”지아가 손을 내저었다.지아는 두꺼운 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모자 속에 얼굴 전체를 파묻었다.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았지만 감히 뒤돌아보지 못했다.한번 뒤돌면 다시는 앞으로 걸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지아는 뒤 돌아보지 말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자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외쳤다.도윤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커튼 뒤로 숨었고,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지아의 옷깃을 잡으려는 듯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아빠, 엄마 보내기 싫어요. 날 버리면 어떡해요?”“그럴 리가, 엄마가 널 그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널 버리겠어? 그저 잠깐 우리와 떨어져 지내는 것뿐이야.”지윤이 흐느꼈다.“아빠는 엄마 보고 싶지 않아요?”“보고 싶지, 미친 듯이 보고 싶지. 차라리 네 엄마를 가둬두고 평생 곁에 두고 싶지만...”도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빠는 이미 한 번 잘못했고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아. 네 엄마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어. 과거에는 아빠가 엄마를 억지로 붙잡아 두면서 엄마의 꿈과 행복, 미래를 빼앗아 갔어. 엄마는 새장 속의 새였는데 이제 아빠가 새장을 열어 더 넓은 하늘로 날게 해주는 거야.”“그럼 아빠는 엄마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 새 삼촌과 가정을 꾸리는 게 두렵지 않아요?”도윤이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강욱의 모습으로 지아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삶과 죽음을 겪었고 지아가 가장 약할 때 곁을 지켜
“엄마, 가지 마세요! 기다려요!”밤새 내린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고, 지윤이 눈밭에서 겨우 일어났을 때 기내 문이 닫히고 헬기 프로펠러가 올라가고 있었다.지윤은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젯밤 지아에게 잘 있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이별의 순간이 오자 본능 외에는 이성적인 판단은 남아 있지 않았다.줄곧 엄마가 곁에 없었던 아이는 온통 지아에 대한 걱정만이 얼굴에 가득했다.“엄마 가지 마요. 이제 겨우 만났는데 그냥 여기 있어 줘요, 제발!”작은 몸이 또다시 눈 속으로 쓰러졌고 지윤은 눈물을 흘리며 계속 외쳤다.하지만 오늘은 바람이 너무 심한 데다 프로펠러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는데 지아에게 아이의 목소리가 닿을 리 없었다.“엄마, 보고 싶어요. 매일 보고 싶었는데 옆에 있으면 안 돼요? 얌전히 말 잘 들을게요. 거짓말했어요. 사실은 엄마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매일 엄마 보고 싶었는데. 훈련도 싫고 도련님 되는 것도 싫어요. 난 그냥 엄마 아들이 되고 싶은데, 제발 한번만...”지윤은 천천히 땅에서 일어나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아서 목이 터져라 울었다.오랫동안 교관에게 훈련을 받아온 아이는 항상 강인한 모습을 보였고, 피곤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무슨 훈련이든 해냈다.그런 지윤이 처음으로 사탕 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그러는 게 또 어때서?“착하지, 울지 마.”헬리콥터는 지아와 아이의 모든 바람을 싣고 이륙했다.도윤은 눈 속에서 아이를 안아 들고 몸에 묻은 눈을 털어주고는 자신의 군복을 벗어 지윤을 감싸안아 주었다.교관은 도윤에게 거수경례를 했고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이틀만 쉬게 해.”“네, 보스.”아빠의 따뜻한 체온에 지윤이는 아빠 품에 안겨 주체할 수 없이 울었다.“아빠, 난 생각만큼 강하지 않아요.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이 그냥 엄마가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난 그냥 평범한 아이가 되고 싶어요.”.“착하지, 울지 마. 넌 착한 아이야.”“착한 아이
지아는 비행기에서 도윤이 눈 속에서 지윤이를 안는 장면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정말 나쁜 엄마였다.이제 겨우 만났는데 결국 다시 아이의 손을 놓아야 했으니, 지금 지윤의 마음은 얼마나 슬플까?지아는 유리창에 손을 얹은 채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지아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눈 속 깊은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사라지는 부자의 모습이었다.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비행기는 섬을 향해 날아갔고 지아는 한참이 지나서야 아들과의 이별을 극복했다.착륙하기도 전에 민아의 등 뒤로 소망이 옷깃을 붙잡고 있었고, 앞에 있는 해경이와 독수리 병아리 잡기 놀이를 하는 모습에 들리지 않아도 그들이 무척 신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헬리콥터 소리가 들리자 민아도 움직임을 멈추고 아이와 함께 지아를 마중 나왔다.일주일 동안 만나지 못했고 세찬이 없어서인지 기분이 한결 나아진 민아는 안색도 전처럼 창백하지 않고 좋아 보였다.“지아야.”“엄마!”두 아이가 새끼 고양이처럼 지아를 에워쌌다. 두 아이를 다시 만난 사실에 기뻐해야 했지만 지아는 두 아이의 얼굴을 보며 지윤을 떠올렸다.지윤이 홀로 그들의 짐을 짊어진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왜 기분이 안 좋아? 개도윤이 또 괴롭혔어?”민아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당장이라도 따지러 갈 기세였다.“아니, 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말해줄게.”지아는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추스르며 말했다. 이미 큰 잘못을 하고 왔으니 두 아이에게까지 상처를 줄 수 없었다.“이모 말씀 잘 들었어?”“네!”새처럼 입을 모아 재잘거리는 두 아이는 무척 귀여웠다.민아가 웃었다.“앞으로는 이모라고 부르지 마. 몰라 이젠, 그냥 내 아들딸 삼을래. 앞으로는 엄마라고 불러주면 고맙겠어!”“그래, 애들 이뻐해 주는 사람 많으면 나야 좋지. 민아야, 나 배고파 죽겠어.”“오늘 너 올 줄 알고 주방에 다 준비해달라고 했어. 개도윤이 나쁘긴 해도 너한테는 정말 잘해주긴 하나 봐. 이 섬엔 정말 모든 게 다 있어.
도윤은 고집불통인 과거 자신과 꼭 닮은 세찬을 보며 그의 순진함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아이가 된다.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새로운 인생 경험이 생기는 법이니까.이런 경험은 옆에서 말해줘도 들리지 않으니 본인이 직접 겪어야 했다.도윤은 오만한 세찬을 비웃지 않았다. 신은 공평하니 예정된 일은 반드시 오기 때문이었다.게다가 도윤은 세찬이 단순한 애인이 아니라 민아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걸 이미 알아차렸다.괜찮다, 어차피 사랑의 힘이 다 바꿀 테니까.세찬은 말을 하면서 다시 카메라를 쳐다보았고, 영상에는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민아의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전보다 훨씬 더 정서적으로 안정된 모습이었다.이번에 도윤의 제안이 옳았던 것 같다. 민아에겐 친구와 아이들의 치유가 필요했다.“요즘 집안이 시끄러워서 3개월만 머물게 했다가 다시 데리러 올 거야.”이번 민아의 유산으로 세찬은 화가 나서 민아를 위해 미친 짓을 했고, 약혼 상대는 지금까지도 중환자실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상대 역시 돈 있고 권력 있는 재벌 가문이라 고작 애인 때문에 큰 짓을 벌인 세찬의 입지가 난처해졌다.결혼이 무산되고 두 가문 사이에 원한이 생기자 강씨 어르신도 크게 동요하며 그 역시 애인 때문에 세찬이 지나친 화를 불러왔다는 생각에 이번 기회에 민아도 함께 처리할 생각이었다.하여 이번 도윤의 제안에 세찬이 동의한 것이다.“3개월?”도윤이 피식 웃었다.“네가 생각보다 그 여자를 더 사랑하는데 다만 그걸 깨닫지 못하는 건 아니야?”이렇게 큰일이 생겼으니 3개월은 무슨, 3년이 지나도 강씨 가문이 잠잠할지 미지수였다.“네가 그 아가씨한테 극악무도하게 굴어 남은 인생마저 망쳐버렸다고 들었는데.”“본인이 자초한 거지.”그 여자를 언급하는 세찬의 목소리에서 잔인한 냉기가 느껴졌다.“넌 설마 평생 형수님을 섬에 둘 생각이야?”“말했잖아, 이번엔 자유를 줄 거라고.”세찬이 알고 있는 도윤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지아와 섬 의사들의 치료를 받
앞으로 5일만 있으면 떠난다는 말에 민아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펼쳤다.“민아야, 앞으로의 계획이 뭐야?”“과거에 학교 다닐 때는 항상 돈을 많이 벌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밤낮으로 일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더 중요한 것을 잃었어. 난 이제 평범한 나라에서 봉사 활동이나 하면서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싶어. 그러다 질리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카페랑 꽃집을 열거나 세계 여행을 하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거야.”“좋아.”민아는 지아를 돌아보았다.“넌?”“난 더 강해질 거야. 의학 공부도 계속하고 계속 선생님 눈에 자랑스러운 학생이 될 거야.”지아의 눈빛이 확고했다.“잘됐네.”민아는 한숨을 쉬었다.“고등학교 3학년 때 교내 나무 밑에 앉아 미래를 기대하던 때가 생각나. 나중에 우리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유학을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민아야, 도망쳐봐야 소용없어. 때론 경험해 봐야만 아는 게 있어.”“하긴.”민아는 나무 그늘에서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바닷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세어보았다. 세찬과 모든 인연을 영원히 끊을 때까지 아직 5일이 남아있었다.하지만 사흘째 되던 날 일이 생겼다.지난 이틀 동안 민아는 잔뜩 들떠 있었고 심지어 폴짝폴짝 뛰면서 길가에 있는 잡초에도 인사를 건넸다.아마도 세찬은 민아가 너무 행복해하는 모습을 못 견뎠는지 사흘째 저녁에 모습을 드러냈다.그때 민아는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그동안 이곳에 지내면서 열흘에 한 번씩 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가져다주는 걸 알고 있었다.섬의 일꾼들이 돌아오는 줄 알았던 민아는 상관하지 않고 나무 밑에 서서 천으로 눈을 가리고 숫자를 세었다.“여덟, 아홉, 열, 꼬마들 잘 숨었어? 늑대가 토끼 잡으러 간다!”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에 민아는 그 자리에서 무작위로 일꾼 몇 명을 붙잡아 숨바꼭질에 합류시켰다.고작 몇 걸음만에 단단한 누군가의 품에 부딪혔다.
그 목소리에 민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고, 민아는 자신의 얼굴에서 눈가리개를 격렬하게 벗었다.민아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세찬이었다!민아는 번개라도 맞은 듯 말을 더듬었다.“여긴 왜 왔어요?”세찬의 입꼬리가 미소를 머금고 말려 올라갔다.“난 매일 밤낮으로 김 비서 보고 싶었는데, 섬에서 너무 잘 지내서 내가 누군지도 잊었나?”일꾼들은 모두 눈치껏 자리를 떴고, 두 아이는 아직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눈을 크게 깜빡이며 세찬을 쳐다보았다.그 천진난만한 눈빛에 뭔가 하고 싶었던 세찬은 민아를 그냥 놓아주었다.“해경이랑 소망이 맞지?”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아이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소망이가 불렀다.“아빠?”세찬은 기뻐하며 서둘러 무릎을 꿇고 아이를 안아주었다.마치 올챙이가 어미를 찾는 것 같았다.“꼬마야, 난 네 아빠가 아니야. 사람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다.”소망이의 눈에 실망감이 스쳐 갔다. ‘아빠는 어디 갔을까?’세찬은 소망을 안고 한참을 놀아주었고 눈가에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민아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오래 전 세찬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당시 민아는 천진난만하게 아이들을 좋아하냐고 물었고 세찬의 대답은 단호했다.“안 좋아해. 짜증 나.”그러고는 들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고 자신을 바라보았다.“김 비서, 당신은 똑똑하니까 멍청한 짓은 안 할 거야, 그렇지?”세찬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 속에는 위협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아이를 좋아하지 않으니 애인이 낳은 아이는 더더욱 싫어할 것이다.앞으로 세찬의 자녀는 본처의 뱃속에서만 태어날 테니까.그때까지도 깊게 빠지지 않았던 민아도 그 점을 잘 알고 2년 동안 잘 버텼다.그날 밤의 사고가 있기 전까지. 민아도 자신이 임신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아이가 생기자 생각도 바뀌었다.그런데 지금 와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민아는 세찬이 아이와 노는 사이 미련 없이 뒤돌아 가버렸다.세찬만 보면 자신의
민아는 입을 삐죽거렸다.“그런 농담 하나도 재미없어. 지아야, 어떡해. 그 사람이 오면 우리 계획은...”세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무슨 계획? 김 비서, 나 몰래 뒤에서 나쁜 짓 하는 거야?”민아는 하마터면 들킬 뻔하자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그나마 지아가 침착하게 마스크를 벗고 수술 도구를 내려놓은 다음 수술복을 벗고 방 밖으로 나왔다.“아무것도 아닙니다. 민아가 말한 건 그쪽이 잘 때 칼로 찔러서 죽일지, 설사약을 먹여서 죽일지였어요. 그런 계획은 하루에도 백 개는 생각해 내거든요.”민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아에게 눈짓했다.‘역시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지아는 차분하고 절제된 성격, 민아는 솔직하고 거침없는 성격이라 서로 보완하기 딱 좋았다.세찬은 가볍게 웃었다.“장난이 심하네. 역시 형수님께서 현명하시네요.”지아는 담담하게 말했다.“강세찬 씨도 저희가 이미 이혼했다는 걸 아실 텐데 그런 호칭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네요.”“미안합니다, 소지아 씨.”그제야 세찬은 도윤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민아는 화가 나면 달려들어 물고 얼굴을 할퀴는데 지아는 말다툼은커녕 차갑게 쳐다보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강세찬 씨는 섬에 왜 오셨죠? 민아가 이제 겨우 이겨내고 있는데 지금 그쪽을 만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민아는 세찬을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고,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만 소란을 피웠으며, 평온할 때는 습관적으로 멀리 피했고 함부로 쏘아붙이지도 않았다.지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민아는 당장에 속으로 감탄을 뱉었다.‘역시 지아야!’“흠, 김 비서 만나러 왔습니다.”지아는 무심코 머리 위의 감시카메라를 가리켰다.“이 섬에는 카메라가 많고 강세찬 씨도 적지 않게 봤을 텐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사람 불쾌하게 하시는 거죠? 솔직히 민아와 미래를 꿈꾸는 것도 아니면서 왜 서로 시간만 낭비하시는 건가요? 본인도 불쾌하고 남도 불행할 뿐인데.”민아는 일방적으로 지아가 자신의 변호인이라고 여기면서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