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비행기에서 도윤이 눈 속에서 지윤이를 안는 장면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정말 나쁜 엄마였다.이제 겨우 만났는데 결국 다시 아이의 손을 놓아야 했으니, 지금 지윤의 마음은 얼마나 슬플까?지아는 유리창에 손을 얹은 채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지아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눈 속 깊은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사라지는 부자의 모습이었다.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비행기는 섬을 향해 날아갔고 지아는 한참이 지나서야 아들과의 이별을 극복했다.착륙하기도 전에 민아의 등 뒤로 소망이 옷깃을 붙잡고 있었고, 앞에 있는 해경이와 독수리 병아리 잡기 놀이를 하는 모습에 들리지 않아도 그들이 무척 신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헬리콥터 소리가 들리자 민아도 움직임을 멈추고 아이와 함께 지아를 마중 나왔다.일주일 동안 만나지 못했고 세찬이 없어서인지 기분이 한결 나아진 민아는 안색도 전처럼 창백하지 않고 좋아 보였다.“지아야.”“엄마!”두 아이가 새끼 고양이처럼 지아를 에워쌌다. 두 아이를 다시 만난 사실에 기뻐해야 했지만 지아는 두 아이의 얼굴을 보며 지윤을 떠올렸다.지윤이 홀로 그들의 짐을 짊어진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왜 기분이 안 좋아? 개도윤이 또 괴롭혔어?”민아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당장이라도 따지러 갈 기세였다.“아니, 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말해줄게.”지아는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추스르며 말했다. 이미 큰 잘못을 하고 왔으니 두 아이에게까지 상처를 줄 수 없었다.“이모 말씀 잘 들었어?”“네!”새처럼 입을 모아 재잘거리는 두 아이는 무척 귀여웠다.민아가 웃었다.“앞으로는 이모라고 부르지 마. 몰라 이젠, 그냥 내 아들딸 삼을래. 앞으로는 엄마라고 불러주면 고맙겠어!”“그래, 애들 이뻐해 주는 사람 많으면 나야 좋지. 민아야, 나 배고파 죽겠어.”“오늘 너 올 줄 알고 주방에 다 준비해달라고 했어. 개도윤이 나쁘긴 해도 너한테는 정말 잘해주긴 하나 봐. 이 섬엔 정말 모든 게 다 있어.
도윤은 고집불통인 과거 자신과 꼭 닮은 세찬을 보며 그의 순진함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아이가 된다.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새로운 인생 경험이 생기는 법이니까.이런 경험은 옆에서 말해줘도 들리지 않으니 본인이 직접 겪어야 했다.도윤은 오만한 세찬을 비웃지 않았다. 신은 공평하니 예정된 일은 반드시 오기 때문이었다.게다가 도윤은 세찬이 단순한 애인이 아니라 민아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걸 이미 알아차렸다.괜찮다, 어차피 사랑의 힘이 다 바꿀 테니까.세찬은 말을 하면서 다시 카메라를 쳐다보았고, 영상에는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민아의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전보다 훨씬 더 정서적으로 안정된 모습이었다.이번에 도윤의 제안이 옳았던 것 같다. 민아에겐 친구와 아이들의 치유가 필요했다.“요즘 집안이 시끄러워서 3개월만 머물게 했다가 다시 데리러 올 거야.”이번 민아의 유산으로 세찬은 화가 나서 민아를 위해 미친 짓을 했고, 약혼 상대는 지금까지도 중환자실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상대 역시 돈 있고 권력 있는 재벌 가문이라 고작 애인 때문에 큰 짓을 벌인 세찬의 입지가 난처해졌다.결혼이 무산되고 두 가문 사이에 원한이 생기자 강씨 어르신도 크게 동요하며 그 역시 애인 때문에 세찬이 지나친 화를 불러왔다는 생각에 이번 기회에 민아도 함께 처리할 생각이었다.하여 이번 도윤의 제안에 세찬이 동의한 것이다.“3개월?”도윤이 피식 웃었다.“네가 생각보다 그 여자를 더 사랑하는데 다만 그걸 깨닫지 못하는 건 아니야?”이렇게 큰일이 생겼으니 3개월은 무슨, 3년이 지나도 강씨 가문이 잠잠할지 미지수였다.“네가 그 아가씨한테 극악무도하게 굴어 남은 인생마저 망쳐버렸다고 들었는데.”“본인이 자초한 거지.”그 여자를 언급하는 세찬의 목소리에서 잔인한 냉기가 느껴졌다.“넌 설마 평생 형수님을 섬에 둘 생각이야?”“말했잖아, 이번엔 자유를 줄 거라고.”세찬이 알고 있는 도윤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지아와 섬 의사들의 치료를 받
앞으로 5일만 있으면 떠난다는 말에 민아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펼쳤다.“민아야, 앞으로의 계획이 뭐야?”“과거에 학교 다닐 때는 항상 돈을 많이 벌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밤낮으로 일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더 중요한 것을 잃었어. 난 이제 평범한 나라에서 봉사 활동이나 하면서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싶어. 그러다 질리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카페랑 꽃집을 열거나 세계 여행을 하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거야.”“좋아.”민아는 지아를 돌아보았다.“넌?”“난 더 강해질 거야. 의학 공부도 계속하고 계속 선생님 눈에 자랑스러운 학생이 될 거야.”지아의 눈빛이 확고했다.“잘됐네.”민아는 한숨을 쉬었다.“고등학교 3학년 때 교내 나무 밑에 앉아 미래를 기대하던 때가 생각나. 나중에 우리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유학을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민아야, 도망쳐봐야 소용없어. 때론 경험해 봐야만 아는 게 있어.”“하긴.”민아는 나무 그늘에서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바닷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세어보았다. 세찬과 모든 인연을 영원히 끊을 때까지 아직 5일이 남아있었다.하지만 사흘째 되던 날 일이 생겼다.지난 이틀 동안 민아는 잔뜩 들떠 있었고 심지어 폴짝폴짝 뛰면서 길가에 있는 잡초에도 인사를 건넸다.아마도 세찬은 민아가 너무 행복해하는 모습을 못 견뎠는지 사흘째 저녁에 모습을 드러냈다.그때 민아는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그동안 이곳에 지내면서 열흘에 한 번씩 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가져다주는 걸 알고 있었다.섬의 일꾼들이 돌아오는 줄 알았던 민아는 상관하지 않고 나무 밑에 서서 천으로 눈을 가리고 숫자를 세었다.“여덟, 아홉, 열, 꼬마들 잘 숨었어? 늑대가 토끼 잡으러 간다!”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에 민아는 그 자리에서 무작위로 일꾼 몇 명을 붙잡아 숨바꼭질에 합류시켰다.고작 몇 걸음만에 단단한 누군가의 품에 부딪혔다.
그 목소리에 민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고, 민아는 자신의 얼굴에서 눈가리개를 격렬하게 벗었다.민아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세찬이었다!민아는 번개라도 맞은 듯 말을 더듬었다.“여긴 왜 왔어요?”세찬의 입꼬리가 미소를 머금고 말려 올라갔다.“난 매일 밤낮으로 김 비서 보고 싶었는데, 섬에서 너무 잘 지내서 내가 누군지도 잊었나?”일꾼들은 모두 눈치껏 자리를 떴고, 두 아이는 아직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눈을 크게 깜빡이며 세찬을 쳐다보았다.그 천진난만한 눈빛에 뭔가 하고 싶었던 세찬은 민아를 그냥 놓아주었다.“해경이랑 소망이 맞지?”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아이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소망이가 불렀다.“아빠?”세찬은 기뻐하며 서둘러 무릎을 꿇고 아이를 안아주었다.마치 올챙이가 어미를 찾는 것 같았다.“꼬마야, 난 네 아빠가 아니야. 사람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다.”소망이의 눈에 실망감이 스쳐 갔다. ‘아빠는 어디 갔을까?’세찬은 소망을 안고 한참을 놀아주었고 눈가에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민아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오래 전 세찬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당시 민아는 천진난만하게 아이들을 좋아하냐고 물었고 세찬의 대답은 단호했다.“안 좋아해. 짜증 나.”그러고는 들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고 자신을 바라보았다.“김 비서, 당신은 똑똑하니까 멍청한 짓은 안 할 거야, 그렇지?”세찬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 속에는 위협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아이를 좋아하지 않으니 애인이 낳은 아이는 더더욱 싫어할 것이다.앞으로 세찬의 자녀는 본처의 뱃속에서만 태어날 테니까.그때까지도 깊게 빠지지 않았던 민아도 그 점을 잘 알고 2년 동안 잘 버텼다.그날 밤의 사고가 있기 전까지. 민아도 자신이 임신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아이가 생기자 생각도 바뀌었다.그런데 지금 와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민아는 세찬이 아이와 노는 사이 미련 없이 뒤돌아 가버렸다.세찬만 보면 자신의
민아는 입을 삐죽거렸다.“그런 농담 하나도 재미없어. 지아야, 어떡해. 그 사람이 오면 우리 계획은...”세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무슨 계획? 김 비서, 나 몰래 뒤에서 나쁜 짓 하는 거야?”민아는 하마터면 들킬 뻔하자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그나마 지아가 침착하게 마스크를 벗고 수술 도구를 내려놓은 다음 수술복을 벗고 방 밖으로 나왔다.“아무것도 아닙니다. 민아가 말한 건 그쪽이 잘 때 칼로 찔러서 죽일지, 설사약을 먹여서 죽일지였어요. 그런 계획은 하루에도 백 개는 생각해 내거든요.”민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아에게 눈짓했다.‘역시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지아는 차분하고 절제된 성격, 민아는 솔직하고 거침없는 성격이라 서로 보완하기 딱 좋았다.세찬은 가볍게 웃었다.“장난이 심하네. 역시 형수님께서 현명하시네요.”지아는 담담하게 말했다.“강세찬 씨도 저희가 이미 이혼했다는 걸 아실 텐데 그런 호칭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네요.”“미안합니다, 소지아 씨.”그제야 세찬은 도윤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민아는 화가 나면 달려들어 물고 얼굴을 할퀴는데 지아는 말다툼은커녕 차갑게 쳐다보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강세찬 씨는 섬에 왜 오셨죠? 민아가 이제 겨우 이겨내고 있는데 지금 그쪽을 만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민아는 세찬을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고,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만 소란을 피웠으며, 평온할 때는 습관적으로 멀리 피했고 함부로 쏘아붙이지도 않았다.지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민아는 당장에 속으로 감탄을 뱉었다.‘역시 지아야!’“흠, 김 비서 만나러 왔습니다.”지아는 무심코 머리 위의 감시카메라를 가리켰다.“이 섬에는 카메라가 많고 강세찬 씨도 적지 않게 봤을 텐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사람 불쾌하게 하시는 거죠? 솔직히 민아와 미래를 꿈꾸는 것도 아니면서 왜 서로 시간만 낭비하시는 건가요? 본인도 불쾌하고 남도 불행할 뿐인데.”민아는 일방적으로 지아가 자신의 변호인이라고 여기면서
손을 깨끗이 씻고 부검실을 나가려고 돌아서자 두 아이가 뒤를 따랐다.“엄마, 삼촌...”“알아, 너희는 가서 재미있게 놀아.”지아는 약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세찬이 이곳에 온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도윤은 자신이 떠난 후로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소식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떠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지아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도윤이 지아를 놓아줄 수 있었던 것은 지아가 섬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감시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다.만약 자신이 떠난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지아는 세찬이 민아를 데려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민아의 방 문을 바라보았다.민아가 돌아간다면 과거의 자신보다 더 처참할 것이다. 적어도 도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아를 사랑했지만 세찬은 달랐다. 세찬의 눈에 민아는 그저 노리개에 불과했고, 영원히 민아에게 떳떳한 신분을 주지 않을 것이며 아이를 낳아도 남들 눈에는 그저 내연녀와 서자일 뿐이었다.언젠가 세찬이 민아에게 싫증을 내면 민아는 그대로 버림받게 된다.지아는 너무 많은 고통을 겪은 탓에 다시는 민아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민아를 데려갈 생각이었다.세찬은 민아를 강제로 끌고 갔고 민아는 차갑게 물었다.“여기 왜 왔어요?”세찬이 대답대신 물었다.“네 방이 어디야?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민아의 턱이 정면을 향해 까딱하자 세찬이 민아의 손을 잡아당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대체 무슨 일인데 읍...”문이 쾅 닫히는 순간, 세찬의 몸이 다가오며 얇은 입술이 그대로 민아의 입술을 머금었다.“요물, 보고 싶었어.”민아는 세찬이 정말 중요한 일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니란 것에 깜짝 놀랐다.심지어 그동안 민아는 머릿속으로 전에 처리한 계약이 뭔가 크게 잘못되어서 세찬이 먼 거리에서 달려온 것은 아닌지 계속 생각했다.세찬에게 입맞춤을 당하는 순간 민아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이 남자가 미쳤나?’“이거 놔요!”민아
세찬은 그런 말이 민아의 입에서 나온 게 믿기지 않는 듯 바라보았다.병원에서 울고불고 싸울 때도 끝내자는 말은 하지 않던 민아였다.세찬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다시 말해봐.”민아는 고개를 숙이고 손톱을 만지작거렸다.“이젠 질렸으니까 끝내자고요.”허리를 잡은 손이 격렬하게 조여오고 민아를 꽉 끌어당기며 세찬은 이를 갈았다.“방금 한 말을 취소할 수 있는 기회는 한 번뿐이야.”“강 대표님, 그동안 잘 생각해 봤는데 이런 관계는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원하던 게 아니야? 허.”세찬은 비웃으며 손을 뻗어 민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설마 강씨 집안 사모님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와 조롱하는 듯한 눈빛을 보며 민아는 자신이 직접 그런 말을 뱉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아니요, 그냥 그만두고 싶어요. 계약기간은 3년이었고 이제 몇 달 안 남았는데 3개월 휴가까지 준다고 하셨으니 기간이 다 된 것 같아서요.”“그만둔다고? 왜, 비서 일 그만두고 다시 영업이나 하려고?”민아는 세찬의 비열한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대답했다.“2년 동안 너무 힘들어서 당분간 좀 쉬고 싶어요. 강 대표님, 그만해요 우리.”“김 비서, 계약 위반하면 위약금 내야 하는 거 알고 있나?”세찬은 민아가 돈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말을 하면 긴장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민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알아요, 얼마든 낼게요.”“네가 내야 할 금액이 지난 몇 년 동안 네가 일했던 만큼이라면? 시간 낭비한 셈인데.”민아의 속눈썹이 살짝 흔들리자 세찬은 민아를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는 것처럼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돈을 그렇게 좋아하는 네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지. 얌전히 유급 휴가 보내면 보너스를 두 배로 줄게, 어때? 이번엔 내가 조심해서 더는 너 임신해서 고생하는 일 없게 할게.”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세찬을 바라보았는데, 세찬은 그 눈빛이 낯
떠날 계획을 마친 민아가 어떻게 준비를 안 할 수 있겠나.민아는 나중에 화가 난 세찬이 계좌를 동결할까 봐, 모아두었던 돈을 개인적으로 조금씩 이체하거나 사람을 찾아 현금으로 바꾸었고, 고향 집에 송금하는 등 잔액을 줄이고 있었다.세찬은 매우 호탕하게 지아의 계좌로 6억을 보냈다.민아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하룻밤에 6억이라니, 내 가치가 꽤 높네.’세찬은 이런 쪽에 요구가 높았다. 민아를 고를 때도 진작 민아의 몸 사이즈를 재어보고 며칠 동안 테스트해 보고 나서야 손을 대기 시작했다.겉으로는 잘 포장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껍질을 벗겨낸 후 세찬이 얼마나 악마처럼 지저분한 사람인지 민아만이 알고 있었다.그래도 민아가 임신했다는 걸 안 뒤로 양심껏 건드리지 않았고 따지고 보면 몇 개월이 지난 시간이었다.세찬이 조급하게 침대에 눕히자 민아는 다소 불편했다.“아직 안 씻었는데...”“하고 씻어.”민아의 머리카락이 새하얀 이불 위에 흩어져 있었고, 세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민아가 침대에서 자신에게 잘 맞춰줬는데 지금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아팠고 손의 움직임마저도 훨씬 부드러워졌다.“그동안 다른 사람 만난 적 없어요?”민아가 묻자 세찬은 그런 질문이 불만스러운 듯 차가운 눈빛으로 민아를 훑어보았다.“아무나 내 침대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세찬은 반지를 다시 민아의 손에 끼워주며 손가락 끝에 입맞춤을 했다.대단한 집안도 아니고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지만 다리만큼이나 그 손이 설명할 수 없이 세찬을 매료시켰다.“악보 기억나?”세찬은 입술을 귓불로 옮기며 물었다.미친!민아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이 미친 남자는 1년 전부터 민아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아무런 기초도 없었던 민아는 매일 잠들기 전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악보까지 외우게 했다.임신한 동안 겨우 잠잠해졌나 싶었는데 세찬이 또 이런다.“아니요, 기억 안 나요.”“휴가 줄 테니까 10곡만 외워.”“알았어요.”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