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가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떠났고, 문이 살며시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부자는 조용히 눈을 떴다.지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아빠, 정말 못 붙잡아요?”“미안해.”도윤의 눈은 안타까운 기색으로 가득 찼다.지아가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깥의 찬바람이 얼굴을 칼로 찌르는 듯 얼굴 전체가 따갑고 아팠다.도윤의 말대로 누군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사모님, 비행기가 준비됐으니 이제 가셔도 돼요.”“고마워요.”“근데 활주로가 좀 멀어서 힘드시겠지만 좀 걸으셔야 해요.”“괜찮아요.”지아가 손을 내저었다.지아는 두꺼운 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모자 속에 얼굴 전체를 파묻었다.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았지만 감히 뒤돌아보지 못했다.한번 뒤돌면 다시는 앞으로 걸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지아는 뒤 돌아보지 말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자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외쳤다.도윤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커튼 뒤로 숨었고,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지아의 옷깃을 잡으려는 듯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아빠, 엄마 보내기 싫어요. 날 버리면 어떡해요?”“그럴 리가, 엄마가 널 그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널 버리겠어? 그저 잠깐 우리와 떨어져 지내는 것뿐이야.”지윤이 흐느꼈다.“아빠는 엄마 보고 싶지 않아요?”“보고 싶지, 미친 듯이 보고 싶지. 차라리 네 엄마를 가둬두고 평생 곁에 두고 싶지만...”도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빠는 이미 한 번 잘못했고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아. 네 엄마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어. 과거에는 아빠가 엄마를 억지로 붙잡아 두면서 엄마의 꿈과 행복, 미래를 빼앗아 갔어. 엄마는 새장 속의 새였는데 이제 아빠가 새장을 열어 더 넓은 하늘로 날게 해주는 거야.”“그럼 아빠는 엄마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 새 삼촌과 가정을 꾸리는 게 두렵지 않아요?”도윤이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강욱의 모습으로 지아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삶과 죽음을 겪었고 지아가 가장 약할 때 곁을 지켜
“엄마, 가지 마세요! 기다려요!”밤새 내린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고, 지윤이 눈밭에서 겨우 일어났을 때 기내 문이 닫히고 헬기 프로펠러가 올라가고 있었다.지윤은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젯밤 지아에게 잘 있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이별의 순간이 오자 본능 외에는 이성적인 판단은 남아 있지 않았다.줄곧 엄마가 곁에 없었던 아이는 온통 지아에 대한 걱정만이 얼굴에 가득했다.“엄마 가지 마요. 이제 겨우 만났는데 그냥 여기 있어 줘요, 제발!”작은 몸이 또다시 눈 속으로 쓰러졌고 지윤은 눈물을 흘리며 계속 외쳤다.하지만 오늘은 바람이 너무 심한 데다 프로펠러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는데 지아에게 아이의 목소리가 닿을 리 없었다.“엄마, 보고 싶어요. 매일 보고 싶었는데 옆에 있으면 안 돼요? 얌전히 말 잘 들을게요. 거짓말했어요. 사실은 엄마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매일 엄마 보고 싶었는데. 훈련도 싫고 도련님 되는 것도 싫어요. 난 그냥 엄마 아들이 되고 싶은데, 제발 한번만...”지윤은 천천히 땅에서 일어나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아서 목이 터져라 울었다.오랫동안 교관에게 훈련을 받아온 아이는 항상 강인한 모습을 보였고, 피곤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무슨 훈련이든 해냈다.그런 지윤이 처음으로 사탕 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그러는 게 또 어때서?“착하지, 울지 마.”헬리콥터는 지아와 아이의 모든 바람을 싣고 이륙했다.도윤은 눈 속에서 아이를 안아 들고 몸에 묻은 눈을 털어주고는 자신의 군복을 벗어 지윤을 감싸안아 주었다.교관은 도윤에게 거수경례를 했고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이틀만 쉬게 해.”“네, 보스.”아빠의 따뜻한 체온에 지윤이는 아빠 품에 안겨 주체할 수 없이 울었다.“아빠, 난 생각만큼 강하지 않아요.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이 그냥 엄마가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난 그냥 평범한 아이가 되고 싶어요.”.“착하지, 울지 마. 넌 착한 아이야.”“착한 아이
지아는 비행기에서 도윤이 눈 속에서 지윤이를 안는 장면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정말 나쁜 엄마였다.이제 겨우 만났는데 결국 다시 아이의 손을 놓아야 했으니, 지금 지윤의 마음은 얼마나 슬플까?지아는 유리창에 손을 얹은 채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지아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눈 속 깊은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사라지는 부자의 모습이었다.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비행기는 섬을 향해 날아갔고 지아는 한참이 지나서야 아들과의 이별을 극복했다.착륙하기도 전에 민아의 등 뒤로 소망이 옷깃을 붙잡고 있었고, 앞에 있는 해경이와 독수리 병아리 잡기 놀이를 하는 모습에 들리지 않아도 그들이 무척 신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헬리콥터 소리가 들리자 민아도 움직임을 멈추고 아이와 함께 지아를 마중 나왔다.일주일 동안 만나지 못했고 세찬이 없어서인지 기분이 한결 나아진 민아는 안색도 전처럼 창백하지 않고 좋아 보였다.“지아야.”“엄마!”두 아이가 새끼 고양이처럼 지아를 에워쌌다. 두 아이를 다시 만난 사실에 기뻐해야 했지만 지아는 두 아이의 얼굴을 보며 지윤을 떠올렸다.지윤이 홀로 그들의 짐을 짊어진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왜 기분이 안 좋아? 개도윤이 또 괴롭혔어?”민아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당장이라도 따지러 갈 기세였다.“아니, 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말해줄게.”지아는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추스르며 말했다. 이미 큰 잘못을 하고 왔으니 두 아이에게까지 상처를 줄 수 없었다.“이모 말씀 잘 들었어?”“네!”새처럼 입을 모아 재잘거리는 두 아이는 무척 귀여웠다.민아가 웃었다.“앞으로는 이모라고 부르지 마. 몰라 이젠, 그냥 내 아들딸 삼을래. 앞으로는 엄마라고 불러주면 고맙겠어!”“그래, 애들 이뻐해 주는 사람 많으면 나야 좋지. 민아야, 나 배고파 죽겠어.”“오늘 너 올 줄 알고 주방에 다 준비해달라고 했어. 개도윤이 나쁘긴 해도 너한테는 정말 잘해주긴 하나 봐. 이 섬엔 정말 모든 게 다 있어.
도윤은 고집불통인 과거 자신과 꼭 닮은 세찬을 보며 그의 순진함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아이가 된다.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새로운 인생 경험이 생기는 법이니까.이런 경험은 옆에서 말해줘도 들리지 않으니 본인이 직접 겪어야 했다.도윤은 오만한 세찬을 비웃지 않았다. 신은 공평하니 예정된 일은 반드시 오기 때문이었다.게다가 도윤은 세찬이 단순한 애인이 아니라 민아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걸 이미 알아차렸다.괜찮다, 어차피 사랑의 힘이 다 바꿀 테니까.세찬은 말을 하면서 다시 카메라를 쳐다보았고, 영상에는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민아의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전보다 훨씬 더 정서적으로 안정된 모습이었다.이번에 도윤의 제안이 옳았던 것 같다. 민아에겐 친구와 아이들의 치유가 필요했다.“요즘 집안이 시끄러워서 3개월만 머물게 했다가 다시 데리러 올 거야.”이번 민아의 유산으로 세찬은 화가 나서 민아를 위해 미친 짓을 했고, 약혼 상대는 지금까지도 중환자실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상대 역시 돈 있고 권력 있는 재벌 가문이라 고작 애인 때문에 큰 짓을 벌인 세찬의 입지가 난처해졌다.결혼이 무산되고 두 가문 사이에 원한이 생기자 강씨 어르신도 크게 동요하며 그 역시 애인 때문에 세찬이 지나친 화를 불러왔다는 생각에 이번 기회에 민아도 함께 처리할 생각이었다.하여 이번 도윤의 제안에 세찬이 동의한 것이다.“3개월?”도윤이 피식 웃었다.“네가 생각보다 그 여자를 더 사랑하는데 다만 그걸 깨닫지 못하는 건 아니야?”이렇게 큰일이 생겼으니 3개월은 무슨, 3년이 지나도 강씨 가문이 잠잠할지 미지수였다.“네가 그 아가씨한테 극악무도하게 굴어 남은 인생마저 망쳐버렸다고 들었는데.”“본인이 자초한 거지.”그 여자를 언급하는 세찬의 목소리에서 잔인한 냉기가 느껴졌다.“넌 설마 평생 형수님을 섬에 둘 생각이야?”“말했잖아, 이번엔 자유를 줄 거라고.”세찬이 알고 있는 도윤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지아와 섬 의사들의 치료를 받
앞으로 5일만 있으면 떠난다는 말에 민아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펼쳤다.“민아야, 앞으로의 계획이 뭐야?”“과거에 학교 다닐 때는 항상 돈을 많이 벌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밤낮으로 일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더 중요한 것을 잃었어. 난 이제 평범한 나라에서 봉사 활동이나 하면서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싶어. 그러다 질리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카페랑 꽃집을 열거나 세계 여행을 하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거야.”“좋아.”민아는 지아를 돌아보았다.“넌?”“난 더 강해질 거야. 의학 공부도 계속하고 계속 선생님 눈에 자랑스러운 학생이 될 거야.”지아의 눈빛이 확고했다.“잘됐네.”민아는 한숨을 쉬었다.“고등학교 3학년 때 교내 나무 밑에 앉아 미래를 기대하던 때가 생각나. 나중에 우리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유학을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민아야, 도망쳐봐야 소용없어. 때론 경험해 봐야만 아는 게 있어.”“하긴.”민아는 나무 그늘에서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바닷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세어보았다. 세찬과 모든 인연을 영원히 끊을 때까지 아직 5일이 남아있었다.하지만 사흘째 되던 날 일이 생겼다.지난 이틀 동안 민아는 잔뜩 들떠 있었고 심지어 폴짝폴짝 뛰면서 길가에 있는 잡초에도 인사를 건넸다.아마도 세찬은 민아가 너무 행복해하는 모습을 못 견뎠는지 사흘째 저녁에 모습을 드러냈다.그때 민아는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그동안 이곳에 지내면서 열흘에 한 번씩 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가져다주는 걸 알고 있었다.섬의 일꾼들이 돌아오는 줄 알았던 민아는 상관하지 않고 나무 밑에 서서 천으로 눈을 가리고 숫자를 세었다.“여덟, 아홉, 열, 꼬마들 잘 숨었어? 늑대가 토끼 잡으러 간다!”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에 민아는 그 자리에서 무작위로 일꾼 몇 명을 붙잡아 숨바꼭질에 합류시켰다.고작 몇 걸음만에 단단한 누군가의 품에 부딪혔다.
그 목소리에 민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고, 민아는 자신의 얼굴에서 눈가리개를 격렬하게 벗었다.민아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세찬이었다!민아는 번개라도 맞은 듯 말을 더듬었다.“여긴 왜 왔어요?”세찬의 입꼬리가 미소를 머금고 말려 올라갔다.“난 매일 밤낮으로 김 비서 보고 싶었는데, 섬에서 너무 잘 지내서 내가 누군지도 잊었나?”일꾼들은 모두 눈치껏 자리를 떴고, 두 아이는 아직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눈을 크게 깜빡이며 세찬을 쳐다보았다.그 천진난만한 눈빛에 뭔가 하고 싶었던 세찬은 민아를 그냥 놓아주었다.“해경이랑 소망이 맞지?”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아이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소망이가 불렀다.“아빠?”세찬은 기뻐하며 서둘러 무릎을 꿇고 아이를 안아주었다.마치 올챙이가 어미를 찾는 것 같았다.“꼬마야, 난 네 아빠가 아니야. 사람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다.”소망이의 눈에 실망감이 스쳐 갔다. ‘아빠는 어디 갔을까?’세찬은 소망을 안고 한참을 놀아주었고 눈가에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민아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오래 전 세찬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당시 민아는 천진난만하게 아이들을 좋아하냐고 물었고 세찬의 대답은 단호했다.“안 좋아해. 짜증 나.”그러고는 들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고 자신을 바라보았다.“김 비서, 당신은 똑똑하니까 멍청한 짓은 안 할 거야, 그렇지?”세찬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 속에는 위협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아이를 좋아하지 않으니 애인이 낳은 아이는 더더욱 싫어할 것이다.앞으로 세찬의 자녀는 본처의 뱃속에서만 태어날 테니까.그때까지도 깊게 빠지지 않았던 민아도 그 점을 잘 알고 2년 동안 잘 버텼다.그날 밤의 사고가 있기 전까지. 민아도 자신이 임신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아이가 생기자 생각도 바뀌었다.그런데 지금 와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민아는 세찬이 아이와 노는 사이 미련 없이 뒤돌아 가버렸다.세찬만 보면 자신의
민아는 입을 삐죽거렸다.“그런 농담 하나도 재미없어. 지아야, 어떡해. 그 사람이 오면 우리 계획은...”세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무슨 계획? 김 비서, 나 몰래 뒤에서 나쁜 짓 하는 거야?”민아는 하마터면 들킬 뻔하자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그나마 지아가 침착하게 마스크를 벗고 수술 도구를 내려놓은 다음 수술복을 벗고 방 밖으로 나왔다.“아무것도 아닙니다. 민아가 말한 건 그쪽이 잘 때 칼로 찔러서 죽일지, 설사약을 먹여서 죽일지였어요. 그런 계획은 하루에도 백 개는 생각해 내거든요.”민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아에게 눈짓했다.‘역시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지아는 차분하고 절제된 성격, 민아는 솔직하고 거침없는 성격이라 서로 보완하기 딱 좋았다.세찬은 가볍게 웃었다.“장난이 심하네. 역시 형수님께서 현명하시네요.”지아는 담담하게 말했다.“강세찬 씨도 저희가 이미 이혼했다는 걸 아실 텐데 그런 호칭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네요.”“미안합니다, 소지아 씨.”그제야 세찬은 도윤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민아는 화가 나면 달려들어 물고 얼굴을 할퀴는데 지아는 말다툼은커녕 차갑게 쳐다보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강세찬 씨는 섬에 왜 오셨죠? 민아가 이제 겨우 이겨내고 있는데 지금 그쪽을 만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민아는 세찬을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고,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만 소란을 피웠으며, 평온할 때는 습관적으로 멀리 피했고 함부로 쏘아붙이지도 않았다.지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민아는 당장에 속으로 감탄을 뱉었다.‘역시 지아야!’“흠, 김 비서 만나러 왔습니다.”지아는 무심코 머리 위의 감시카메라를 가리켰다.“이 섬에는 카메라가 많고 강세찬 씨도 적지 않게 봤을 텐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사람 불쾌하게 하시는 거죠? 솔직히 민아와 미래를 꿈꾸는 것도 아니면서 왜 서로 시간만 낭비하시는 건가요? 본인도 불쾌하고 남도 불행할 뿐인데.”민아는 일방적으로 지아가 자신의 변호인이라고 여기면서
손을 깨끗이 씻고 부검실을 나가려고 돌아서자 두 아이가 뒤를 따랐다.“엄마, 삼촌...”“알아, 너희는 가서 재미있게 놀아.”지아는 약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세찬이 이곳에 온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도윤은 자신이 떠난 후로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소식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떠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지아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도윤이 지아를 놓아줄 수 있었던 것은 지아가 섬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감시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다.만약 자신이 떠난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지아는 세찬이 민아를 데려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민아의 방 문을 바라보았다.민아가 돌아간다면 과거의 자신보다 더 처참할 것이다. 적어도 도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아를 사랑했지만 세찬은 달랐다. 세찬의 눈에 민아는 그저 노리개에 불과했고, 영원히 민아에게 떳떳한 신분을 주지 않을 것이며 아이를 낳아도 남들 눈에는 그저 내연녀와 서자일 뿐이었다.언젠가 세찬이 민아에게 싫증을 내면 민아는 그대로 버림받게 된다.지아는 너무 많은 고통을 겪은 탓에 다시는 민아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민아를 데려갈 생각이었다.세찬은 민아를 강제로 끌고 갔고 민아는 차갑게 물었다.“여기 왜 왔어요?”세찬이 대답대신 물었다.“네 방이 어디야?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민아의 턱이 정면을 향해 까딱하자 세찬이 민아의 손을 잡아당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대체 무슨 일인데 읍...”문이 쾅 닫히는 순간, 세찬의 몸이 다가오며 얇은 입술이 그대로 민아의 입술을 머금었다.“요물, 보고 싶었어.”민아는 세찬이 정말 중요한 일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니란 것에 깜짝 놀랐다.심지어 그동안 민아는 머릿속으로 전에 처리한 계약이 뭔가 크게 잘못되어서 세찬이 먼 거리에서 달려온 것은 아닌지 계속 생각했다.세찬에게 입맞춤을 당하는 순간 민아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이 남자가 미쳤나?’“이거 놔요!”민아
소임호는 눈앞의 광기 어린 조경선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조경선, 그동안 정말 행복했니? 그렇게 애써 계획해서 네가 얻은 건 뭐지?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우리는 모두 패배자라고!” “틀렸어.”조경숙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그 당시의 나는 얼굴도 망가지고, 족보에서 제명되고, 가족들에게도 내쳐졌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데, 조경숙은 왜 모든 걸 가져야 해? 시골에서 돌아온 한낱 촌뜨기가 어떻게 나를 대신할 수 있었냐고!” “그래, 난 패배자야. 하지만 너희도 내 시체 위에 서서 잘난 척할 수는 없을걸? 우리 두 쪽 다 망가지는 게 내 승리니까!” 조경선이 고개를 숙여 소임호를 살펴보며 말했다.“당신 꼴을 좀 봐. 떠돌이 개랑 다를 게 뭐야? 참 안쓰럽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곧 소씨 가문은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나는 당신을, 그리고 소씨 가문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말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그래, 난 미쳤어.”“하지만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젠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당신이 똑똑히 느껴야 할 차례야.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경숙은 이제 심세호의 여자가 됐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아?” “참, 그건 모르지? 소씨 가문의 노친네는 이미 죽었고, 당신 아들들도 곧 당신과 함께 무덤으로 갈 거야!” “조경선, 너는 진짜 인간 말종이야!” 소임호는 극도로 분노하며 몸부림쳤고, 쇠사슬은 그의 몸부림으로 인해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조경선은 소임호의 턱을 잡고 비웃으며 말했다. “왜, 불만이야? 그럼 나한테 빌어봐. 그러면 그 자식들한테 고통 없는 죽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꿈 깨.”소임호가 냉소하며 말했다.“죽어도 너한테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당신을 죽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참히 망가지는지 보여줄 수 없잖아. 당신 자식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고,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조경숙은 눈이 멀어 다른 남
여자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넌 먼저 돌아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분간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어요.”시월은 갑자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물었다.“맞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흥, 끝까지 고집불통인 쓰레기 같은 남자. 내가 겪은 교통을 천배, 만 배로 되돌려줄 거야!” 시월의 얼굴에 찰나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동안 아빠가 가족도 잃게 하고, 집안도 망가지게 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 꿈 깨! 이건 그 사람이 나한테 진 빚이라고!” 여자가 소시월의 옷깃을 꽉 잡으며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데, 나는 네 어미야. 네가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나는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엄마, 알겠어요,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당연히 엄마 편이에요.” 소시월은 여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여자의 정서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사실, 그녀의 얼굴도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집착이 너무도 강한 그녀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 고통을 평생 기억하면서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한테 천 배, 만 배로 돌려줄 거야!!” 여자는 평생을 복수 계획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하지만 소시월이 보기에, 복수를 이루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소씨 가문은 지금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소시월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소시월이 떠난 후, 여자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는데, 여자가 자신의 지문을 입력하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여자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는 손과 발이 묶인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광기 어린 집착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소임호
소지훈이 폭로한 충격적인 사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아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출생 비밀을 찾아 헤매던 지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스스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소씨 가문 사람들의 고충에 공감했던 지아는 이제 그들이 자기 혈육임을 알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미끄러졌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들이...” 하지만 더욱 지아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예전에 마주했던 그 시신이 자기 친언니였다는 사실이었다. ‘시영 언니는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 ‘심지어 나는 그걸 전혀 몰랐고,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했어...’ 지아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지아야!”도윤은 지아를 안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침대에 누운 채 찡그린 표정을 한 지아를 보며 도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지아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그런데 간절히 바랐던 가족마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다니.’ 무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아의 곁을 지켰다.도윤은 무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냥 과로한 상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뿐이거든.” 한편, 소씨 가문의 황당한 해프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으며, 소영수의 장례식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들의 싸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소지훈이 이긴 듯 보였으나, 사실 그로 인해 소씨 가문은 체면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시월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해가 뜨기도 전에 황급히 차를 몰아 오래된 별장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까악까악’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장미 덩굴은 낡은 담벼락 위로 기어오르며, 삭막하고 부패한 세상에 한 줄기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햇살이 어둠을 찢으며 온 세상의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