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아는 차 문을 급히 열고 내리려 했지만, 도윤이 지아의 손을 잡아 막았다. “지아야, 우리가 지윤을 강사에게 맡겼다면, 그들의 훈련 과정에 간섭해서는 안 돼. 여기서는 규칙이 법이야.”“네가 지윤을 만나고 싶다면, 지윤이 모든 항목에서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지아는 창문에 얼굴을 댄 채 바라보았다. 큰 키의 남자가 지윤에게 다가가 상태를 묻는 것 같았는데 휴식이 필요한지도 물어보는 것 같았다. 결국 지윤의 특별한 신분을 고려하여 강사는 다소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윤은 강사의 도움을 거절했다. “저, 저 혼자 할 수 있어요.”지윤은 작은 손으로 눈 위를 짚고 조금씩 천천히 일어났다. 그 작은 몸에서는 무한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다시 일어난 지윤은 천천히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대오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다.지아는 지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 작은 체구가 그렇게도 완강하게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달렸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한 걸음, 두 걸음, 지아는 이 아이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지아는 도윤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지아의 눈에는 지윤이 그저 한 아이일 뿐이었다. 달리기를 마치고 다른 아이들이 모두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을 때, 지아는 식당에 도착했지만 남겨진 것은 차가운 반찬과 남은 밥뿐이었다.이에 지아는 참을 수 없었다. “그저 아이일 뿐인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 어떻게 제대로 자라나겠어? 안 돼, 난 지윤을 데리고 가야 해.”“지아야, 진정해. 네가 없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이렇게 지냈어.”“전문 영양사가 배정되어 있고, 지윤은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한 뼘이나 더 커. 내 아인데 내가 어떻게 그를 아끼지 않을 수 있겠어?”지아는 지윤이 순순히, 불만 없이 앉아 밥을 먹으려고 하자, 식당 아주머니가 특별히 따뜻한 식사를 가져다주었다.“어린이, 이거 먹어. 아주머니가 특별히 너를 위해 남겨뒀어.”“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사실 이지윤에게 있어서 이것은 굉장히 큰 도전이었다. 지윤이는 아직 어렸기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될 것이었다. 키가 크고 마른 소년의 옆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서 있었는데, 마른 소년이 중심인 듯 보였다. 그 소년은 키가 크고 마르며, 뚜렷한 쇄골이 드러났다. 과거에 고생했음이 역력했고, 명백히 영양실조 상태였지만, 그런데도 또래에 비해 어린 느낌이 없었다. 그 소년의 눈은 지윤을 떠올리게 했고, 그 눈빛은 늑대 무리에서의 왕을 연상시켰고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기세가 서렸다.“이 아이의 이름은 유주혁이야. 나이는 어리지만 북쪽 전쟁터에서 주워진 고아야.”“처음 발견했을 때는 시체를 먹으며 살아가고, 때로는 독수리와 음식을 다투기도 했어.”이에 지아는 속이 울렁거렸다. “이 아이가 사람 고기를 먹었다고?”“정확히는 부패한 고기야.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지 먹을 거야. 주혁은 스스로 지은 이름인데, 태어날 때부터 부모 없이 발견됐을 때는 죽기 직전이었어.”“몸에 여러 병이 있었지만, 이제 막 회복해서 훈련을 위해 이곳에 보내졌어. 여기서는 아이들의 우두머리야. 왜 지윤이를 괴롭히려고 하는지 알아?”“울프가 되고 싶어 하는 건가? 근데 지윤이 인정하지 않으니까?”“맞아, 지윤은 작지만 이미 자신의 목표를 알고 있어.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거야. 그게 불만이니 주혁은 기회를 찾아 괴롭히려고 하지.”지아는 그 말을 듣고 궁금해졌다. 지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주혁은 팔짱을 끼고 입가에 조롱과 잔혹함이 묻어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궁금한 건, 넌 어느 집안의 도련님이야? 무슨 짓을 했기에 어머니조차도 자주 밥을 남겨줘야 하니? 네게 어울리는 거야?”주혁은 지윤의 정체를 몰랐다. 지윤이 처음 왔을 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들 중 많은 아이들은 색이 바랜 피부에 마른 콩나물 같았다. 그랬기에 지윤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사람들이 도련님이라고 불렀다.지윤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식판과 바닥에 흩어진 음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표
유주혁도 화가 나 있었지만, 사실 이렇게 작은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주혁은 입으로는 지윤을 도련님이라 부르면서, 이곳 아이들이 대부분 고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지윤을 자극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아이가 잘 따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니, 주혁은 지윤을 집중적으로 괴롭혀 다른 아이들 앞에서 권위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지윤은 더욱 완강했고, 싸울수록 저항의 눈빛은 더욱 빛났다. ‘이 고집스러운 녀석은 도대체 뭐지? 정말 까다로운 상대였다.’“이 녀석, 넌 죽었다.”주혁은 진지하게 지윤을 때리려 했고, 주먹을 들어 지윤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그만둬!” 이때 지아가 소리쳤다. 지윤은 절망적이라는 듯 눈을 감았는데 지윤의 작은 몸으로는 저항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주혁의 손목을 붙잡았다.모든 이들이 그 방향을 바라보았고, 지아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다행히 지아가 제때 도착했다. 사실 지아는 몰랐지만, 멀리서 감독관이 마취총을 들고 있었고, 지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주혁은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지윤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지윤은 오랫동안 지아를 보지 못했고, 어릴 적의 기억은 이미 희미해졌다. 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사랑한다면 왜 자기의 곁에 없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준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지윤은 지아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항상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윤이 다시 지아를 볼 때, 지윤은 첫눈에 지아를 알아보았다. 그 순간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정말 환상이 아닐까? 어머니가 여기에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 분명 지아는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이 들었다.이에 주혁도 놀랐다. 여기에 여자가 나타났다니. 이 여자는 분명 지윤 때문에 온 것이었고 지아는 이지윤을 품에 안으며 물었다. “괜찮아? 아이야?”지윤은 멍하니 서서 크게 눈을 떴다. “누구세요?” 지아는 지윤의 얼굴에 난 상처
지아는 아이의 눈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떨림을 보았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자식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다니.’“미안해, 미안해.” 지아는 아이를 품에 안고 거듭 사과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 여, 여긴 어떻게 왔어요?”“아가, 엄마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엄마?”지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아가 정말 자신을 알아본 걸까?“아들, 엄마가 전에 오해한 줄도 모르고 널 이제야 찾아왔어. 엄마가 다 미안해.”지아는 아이를 꼭 껴안은 채 눈물이 턱을 타고 지윤의 목까지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지금은 포옹만이 최고의 위로였다. 도윤은 사람을 시켜 약을 가져오게 했다.“지아야, 애 약부터 발라주자.”지아는 그제야 아이를 놓아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이의 얼굴에 난 상처를 살폈다.“많이 아팠지?”“괜찮아요.”지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까 멍하니 지아를 바라보았다.지아가 자신의 상처에 약 발라주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아빠, 진짜 엄마예요?”도윤은 손을 뻗어 아이의 코를 툭 건드렸다.“바보야, 진짜지 그럼.”도윤의 말을 들은 지윤이는 지아가 약을 발라줄 때도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얌전히 있었다.자기 때문에 지아가 놀라서 가버릴까 봐.예전에는 그래도 가끔씩 말썽을 부렸는데, 지금은 정말 성질 한 번 안 부릴 정도로 얌전한 아이가 되어서 지아는 그 모습이 더더욱 안타까웠다.“지윤아 배고프지, 엄마가 밥 해줄까?”“좋아요.”아이가 이렇게 클 때까지 한 번도 직접 밥을 해 먹인 적이 없었다.그러고도 엄마라고 할 수 있는지 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과거 나쁜 생각으로 지윤이를 안고 배에서 뛰어내렸을 때만 생각하면 지아는 무척 후회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벼랑 끝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도윤은 모자를 안방으로 데려갔다. 그는 평소 할 일이 없을 때면 산에 가서 몰래 지윤이 곁을 지키곤 했었다.남자아이라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러 단호하게 굴었지만 그렇
지아는 지윤이가 매우 예민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늘 걱정에 시달리며 힘들게 얻은 걸 잃을까 봐 두려워했다.지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를 진정시키며 얼마나 사랑하는지 거듭 말해주었다.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었는데 지윤이는 배가 터질 듯이 많이 먹더니 도윤이 손에서 젓가락을 빼앗아 가기 전까지 멈추지 않았다.아이는 엄마의 요리가 매일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윤아, 이리 와.”지아는 창가에 앉아 아이를 향해 손짓했고 지윤이는 서둘러 순순히 올라와 지아의 품에 안겼다.여기선 바깥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는데 지윤이는 엄마가 함께해서인지 평소와 다른 각도에서 훈련장을 바라보자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지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네 이름도 내가 지은 거야. 엄마 아빠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왔지. 넌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태어났어.”“엄마는 그때 아빠를 많이 사랑했나 봐요.”“응, 많이 사랑했지.”지아는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아빠에 대한 엄마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너는 내가 임신해서 낳은 아기야. 그때 네 아빠가 손을 써서 널 데려가면서 우린 헤어졌고 엄마는 네 존재도 몰라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놓쳐버린 거야. 엄마는 매일 널 그리워하고 밤낮으로 너를 생각했어. 엄마가 이 세상 누구보다 널 사랑한다는 걸 알아줘.”지윤이는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엄마, 나도 엄마를 아주 아주 많이 사랑해요.”“착하다.”지아는 아이의 이마 위에 턱을 얹으며 말했다.“엄마는 아빠의 결정에 간섭할 수 없어. 넌 여기선 항상 조심하고 위험하면 제일 먼저 도움을 청해야 해, 알았지? 넌 아직 어린애니까 자신을 보호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거야.”“엄마 걱정 마세요. 아빠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요. 전에도 몇 번 버티지 못했을 때 다른 사람이 저를 구해줬어요. 그렇지만 아빠는 남자는 강해야 한다고, 버틸 수 있으면 버티면서 피를 흘리되 눈물은 절대 흘리면 안 된다고 했어요.”“쯧,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듣
지윤이는 엄마가 도윤에 대해 얘기하는 게 좋았다. 세상에서 도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지아뿐이었다.기껏해야 도윤이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도윤을 기쁘게 해줄 방법을 찾으라는 말만 하던 백채원과는 달랐다.“하지만 아빠가 그렇게 나쁜데 엄마는 어떻게 아빠를 좋아했어요?”지아가 독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땐 내가 눈이 멀었지. 아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엄마를 쫓아다녔는지 알아? 큰 강물 속 물고기만큼 많았어. 네 아빠 그 얼굴에 엄마가 속아 넘어간 거지.”“엄마가 다른 사람하고 결혼했으면 나도 없고 동생들도 없었어요.”아이가 실망스럽게 말하자 지아는 즉시 말을 돌렸다.“네 아빠도 예전엔 꽤 인간적인 사람이었지. 엄마한테 잘해줄 때도 있었어. 그래서 널 임신하기 전에는 엄마가 매일 행복해하며 네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단다.”“그럼 지금은요? 아빠는 여전히 엄마에게 잘해주고 있고 대부분 아빠가 했던 일은 다 엄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걸 전 알아요.”“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엄마가 약속할 수 있는 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지금처럼 너를 사랑한다는 거야.”지윤이가 작게 속삭였다.“엄마, 그 사랑하는 마음을 아빠에게 조금만 나눠줄 수 있어요? 아빠 정말 불쌍해요.”“이 세상에는 네 아빠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서 엄마가 없어도 괜찮아.”“하지만 아빠에게 엄마는 물고기에게 필요한 산소와 같아서 산소가 없으면 물고기는 죽을 거예요.”지윤이가 지아의 품에 파고들었다. 학습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아이는 금방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난 아빠도 좋고 엄마도 좋은데 엄마랑 아빠가 같이 있는 게 제일 좋아요. 다른 아이들은 모두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데 엄마도 날 사랑한다면서요? 어차피 지금 혼자인데 아빠가 전에 했던 행동들 용서해 주면 안 돼요? 동생들도 나처럼 엄마 아빠가 헤어지는 걸 원하지 않을 거예요.”지윤이는 생각이 있어도 말을 못 하는 어린 두 아이와 달리 그래도 컸다고 생각한 바를 논리적으로 말했다.지아
“엄마, 저 얌전히 말도 잘 듣고 다신 엄마 화나게 하지 않을게요.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돼요?”변진희가 지아를 뿌리치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하지만 그래도 절뚝거리며 쫓아가면서 변진희가 탄 차 뒤에서 돌아와 달라고 계속 애원했다.그때 지아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변진희가 평소 차갑게 대해도 그래도 엄마인데, 그녀가 떠나면 자신은 엄마가 없는 아이가 될 것 같았다.변진희가 남아서 예전처럼 차갑게 굴어도 곁에서 매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좋았다.변진희가 떠난 후, 지아는 밤낮으로 그녀가 돌아오길 빌었다.매일 학교가 끝나면 밖에서 아이를 데리러 오는 엄마들, 아이들 밥을 챙겨오는 엄마들, 학부모 활동에 참여하는 부모들, 놀이터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다니는 부모들, 아이가 넘어지면 마음이 아픈 듯 품에 안아주는 엄마들을 보며 자신은 나중에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가정을 선물하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그때 변진희와 다를 게 있을까? 자신도 아이를 버려둔 채 완벽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게 했다.“지윤아.”지아는 아이를 껴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엄마, 난 미안하다는 말 대신 챙김 받고 싶어요. 옛날에는 내 존재를 몰라서 그랬지만 이제 알았는데도 날 떠날 거예요?”지윤은 역시 도윤을 닮아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짧은 시간안에 지아가 자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파악한 아이는 단번에 약점을 잡고 아이의 순진한 눈물을 협상 카드로 삼아 지아를 붙잡고 있었다.그러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세상 어떤 부모가 사탕을 달라고 우는 아이를 외면하겠나.특히 이 아이에겐 빚진 것이 많았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하늘의 별과 달이라도 따주어야 했다.하지만 아이는 별이나 달 대신 그저 지아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랄 뿐이었다.“난...”“엄마, 전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도 저와 동생들을 사랑하잖아요. 저에겐 완전한 가족이 없었지만 동생들도 한창 뭘 해야 할지
지아는 지윤이의 머리를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었다.“아가, 엄마도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가끔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되는 게 아니야. 네가 한 가족을 원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지만 엄마랑 아빠가 함께 있어도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지윤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듯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지아를 바라보았고 지아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엄마도 어렸을 때 너처럼 한 가족이 단란하길 원했어. 그때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고 매일 우리에게 차갑게 대했어. 사람이 매일 기분이 좋지 않으면 결국에는 어떻게 될까? 우울해하고, 짜증 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불행만 줘. 혹시 새를 키워본 적 있어?”“아빠가 준 고양이가 있는데 엄마가 제일 좋아한다고 했어요.”“새는 고양이와 달라. 고양이는 집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지만 새의 세상은 새장 한 평에 불과해. 매일 새장 입구에 서서 평생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 분명히 가까이 있지만 평생 닿을 수 없지. 새를 너무 사랑해서 매일 최고의 먹이를 주지만 그 새가 정말 행복할까? “엄마 말은 아빠가 엄마한테 새장이고 엄마가 새라는 뜻인가요?”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엄마가 조금 이기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가, 엄마도 한때 결혼에 대한 큰 기대를 품었던 어린 소녀였고 미래를 동경하면서 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것에 행복했어. 그토록 너를 만나서 너에게 행복한 가정을 선사해 주길 고대했지만 세상은 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아. 엄마도 여기까지 오길 원하지 않았지만 이제 이렇게 됐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어.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를 계속 사랑하고 남은 인생 동안 너에게 보상해 주는 것뿐이야. 네 아빠와는 화해할 수 없어. 넌 착한 아이니까 엄마를 이해해 줄 거야. 엄마도 엄마가 원하는 인생이 있어.”“엄마, 알겠어요. 전 엄마의 결정을 응원해요.”어린아이는 지아와 도윤의 얽히고설킨 갈등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지만 딱 하나, 자신이 엄마를 사
소임호는 눈앞의 광기 어린 조경선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조경선, 그동안 정말 행복했니? 그렇게 애써 계획해서 네가 얻은 건 뭐지?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우리는 모두 패배자라고!” “틀렸어.”조경숙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그 당시의 나는 얼굴도 망가지고, 족보에서 제명되고, 가족들에게도 내쳐졌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데, 조경숙은 왜 모든 걸 가져야 해? 시골에서 돌아온 한낱 촌뜨기가 어떻게 나를 대신할 수 있었냐고!” “그래, 난 패배자야. 하지만 너희도 내 시체 위에 서서 잘난 척할 수는 없을걸? 우리 두 쪽 다 망가지는 게 내 승리니까!” 조경선이 고개를 숙여 소임호를 살펴보며 말했다.“당신 꼴을 좀 봐. 떠돌이 개랑 다를 게 뭐야? 참 안쓰럽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곧 소씨 가문은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나는 당신을, 그리고 소씨 가문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말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그래, 난 미쳤어.”“하지만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젠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당신이 똑똑히 느껴야 할 차례야.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경숙은 이제 심세호의 여자가 됐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아?” “참, 그건 모르지? 소씨 가문의 노친네는 이미 죽었고, 당신 아들들도 곧 당신과 함께 무덤으로 갈 거야!” “조경선, 너는 진짜 인간 말종이야!” 소임호는 극도로 분노하며 몸부림쳤고, 쇠사슬은 그의 몸부림으로 인해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조경선은 소임호의 턱을 잡고 비웃으며 말했다. “왜, 불만이야? 그럼 나한테 빌어봐. 그러면 그 자식들한테 고통 없는 죽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꿈 깨.”소임호가 냉소하며 말했다.“죽어도 너한테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당신을 죽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참히 망가지는지 보여줄 수 없잖아. 당신 자식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고,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조경숙은 눈이 멀어 다른 남
여자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넌 먼저 돌아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분간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어요.”시월은 갑자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물었다.“맞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흥, 끝까지 고집불통인 쓰레기 같은 남자. 내가 겪은 교통을 천배, 만 배로 되돌려줄 거야!” 시월의 얼굴에 찰나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동안 아빠가 가족도 잃게 하고, 집안도 망가지게 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 꿈 깨! 이건 그 사람이 나한테 진 빚이라고!” 여자가 소시월의 옷깃을 꽉 잡으며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데, 나는 네 어미야. 네가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나는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엄마, 알겠어요,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당연히 엄마 편이에요.” 소시월은 여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여자의 정서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사실, 그녀의 얼굴도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집착이 너무도 강한 그녀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 고통을 평생 기억하면서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한테 천 배, 만 배로 돌려줄 거야!!” 여자는 평생을 복수 계획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하지만 소시월이 보기에, 복수를 이루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소씨 가문은 지금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소시월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소시월이 떠난 후, 여자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는데, 여자가 자신의 지문을 입력하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여자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는 손과 발이 묶인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광기 어린 집착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소임호
소지훈이 폭로한 충격적인 사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아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출생 비밀을 찾아 헤매던 지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스스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소씨 가문 사람들의 고충에 공감했던 지아는 이제 그들이 자기 혈육임을 알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미끄러졌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들이...” 하지만 더욱 지아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예전에 마주했던 그 시신이 자기 친언니였다는 사실이었다. ‘시영 언니는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 ‘심지어 나는 그걸 전혀 몰랐고,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했어...’ 지아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지아야!”도윤은 지아를 안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침대에 누운 채 찡그린 표정을 한 지아를 보며 도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지아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그런데 간절히 바랐던 가족마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다니.’ 무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아의 곁을 지켰다.도윤은 무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냥 과로한 상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뿐이거든.” 한편, 소씨 가문의 황당한 해프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으며, 소영수의 장례식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들의 싸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소지훈이 이긴 듯 보였으나, 사실 그로 인해 소씨 가문은 체면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시월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해가 뜨기도 전에 황급히 차를 몰아 오래된 별장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까악까악’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장미 덩굴은 낡은 담벼락 위로 기어오르며, 삭막하고 부패한 세상에 한 줄기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햇살이 어둠을 찢으며 온 세상의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