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아는 차 문을 급히 열고 내리려 했지만, 도윤이 지아의 손을 잡아 막았다. “지아야, 우리가 지윤을 강사에게 맡겼다면, 그들의 훈련 과정에 간섭해서는 안 돼. 여기서는 규칙이 법이야.”“네가 지윤을 만나고 싶다면, 지윤이 모든 항목에서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지아는 창문에 얼굴을 댄 채 바라보았다. 큰 키의 남자가 지윤에게 다가가 상태를 묻는 것 같았는데 휴식이 필요한지도 물어보는 것 같았다. 결국 지윤의 특별한 신분을 고려하여 강사는 다소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윤은 강사의 도움을 거절했다. “저, 저 혼자 할 수 있어요.”지윤은 작은 손으로 눈 위를 짚고 조금씩 천천히 일어났다. 그 작은 몸에서는 무한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다시 일어난 지윤은 천천히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대오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다.지아는 지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 작은 체구가 그렇게도 완강하게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달렸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한 걸음, 두 걸음, 지아는 이 아이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지아는 도윤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지아의 눈에는 지윤이 그저 한 아이일 뿐이었다. 달리기를 마치고 다른 아이들이 모두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을 때, 지아는 식당에 도착했지만 남겨진 것은 차가운 반찬과 남은 밥뿐이었다.이에 지아는 참을 수 없었다. “그저 아이일 뿐인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 어떻게 제대로 자라나겠어? 안 돼, 난 지윤을 데리고 가야 해.”“지아야, 진정해. 네가 없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이렇게 지냈어.”“전문 영양사가 배정되어 있고, 지윤은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한 뼘이나 더 커. 내 아인데 내가 어떻게 그를 아끼지 않을 수 있겠어?”지아는 지윤이 순순히, 불만 없이 앉아 밥을 먹으려고 하자, 식당 아주머니가 특별히 따뜻한 식사를 가져다주었다.“어린이, 이거 먹어. 아주머니가 특별히 너를 위해 남겨뒀어.”“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사실 이지윤에게 있어서 이것은 굉장히 큰 도전이었다. 지윤이는 아직 어렸기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될 것이었다. 키가 크고 마른 소년의 옆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서 있었는데, 마른 소년이 중심인 듯 보였다. 그 소년은 키가 크고 마르며, 뚜렷한 쇄골이 드러났다. 과거에 고생했음이 역력했고, 명백히 영양실조 상태였지만, 그런데도 또래에 비해 어린 느낌이 없었다. 그 소년의 눈은 지윤을 떠올리게 했고, 그 눈빛은 늑대 무리에서의 왕을 연상시켰고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기세가 서렸다.“이 아이의 이름은 유주혁이야. 나이는 어리지만 북쪽 전쟁터에서 주워진 고아야.”“처음 발견했을 때는 시체를 먹으며 살아가고, 때로는 독수리와 음식을 다투기도 했어.”이에 지아는 속이 울렁거렸다. “이 아이가 사람 고기를 먹었다고?”“정확히는 부패한 고기야.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지 먹을 거야. 주혁은 스스로 지은 이름인데, 태어날 때부터 부모 없이 발견됐을 때는 죽기 직전이었어.”“몸에 여러 병이 있었지만, 이제 막 회복해서 훈련을 위해 이곳에 보내졌어. 여기서는 아이들의 우두머리야. 왜 지윤이를 괴롭히려고 하는지 알아?”“울프가 되고 싶어 하는 건가? 근데 지윤이 인정하지 않으니까?”“맞아, 지윤은 작지만 이미 자신의 목표를 알고 있어.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거야. 그게 불만이니 주혁은 기회를 찾아 괴롭히려고 하지.”지아는 그 말을 듣고 궁금해졌다. 지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주혁은 팔짱을 끼고 입가에 조롱과 잔혹함이 묻어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궁금한 건, 넌 어느 집안의 도련님이야? 무슨 짓을 했기에 어머니조차도 자주 밥을 남겨줘야 하니? 네게 어울리는 거야?”주혁은 지윤의 정체를 몰랐다. 지윤이 처음 왔을 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들 중 많은 아이들은 색이 바랜 피부에 마른 콩나물 같았다. 그랬기에 지윤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사람들이 도련님이라고 불렀다.지윤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식판과 바닥에 흩어진 음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표
유주혁도 화가 나 있었지만, 사실 이렇게 작은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주혁은 입으로는 지윤을 도련님이라 부르면서, 이곳 아이들이 대부분 고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지윤을 자극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아이가 잘 따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니, 주혁은 지윤을 집중적으로 괴롭혀 다른 아이들 앞에서 권위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지윤은 더욱 완강했고, 싸울수록 저항의 눈빛은 더욱 빛났다. ‘이 고집스러운 녀석은 도대체 뭐지? 정말 까다로운 상대였다.’“이 녀석, 넌 죽었다.”주혁은 진지하게 지윤을 때리려 했고, 주먹을 들어 지윤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그만둬!” 이때 지아가 소리쳤다. 지윤은 절망적이라는 듯 눈을 감았는데 지윤의 작은 몸으로는 저항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주혁의 손목을 붙잡았다.모든 이들이 그 방향을 바라보았고, 지아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다행히 지아가 제때 도착했다. 사실 지아는 몰랐지만, 멀리서 감독관이 마취총을 들고 있었고, 지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주혁은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지윤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지윤은 오랫동안 지아를 보지 못했고, 어릴 적의 기억은 이미 희미해졌다. 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사랑한다면 왜 자기의 곁에 없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준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지윤은 지아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항상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윤이 다시 지아를 볼 때, 지윤은 첫눈에 지아를 알아보았다. 그 순간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정말 환상이 아닐까? 어머니가 여기에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 분명 지아는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이 들었다.이에 주혁도 놀랐다. 여기에 여자가 나타났다니. 이 여자는 분명 지윤 때문에 온 것이었고 지아는 이지윤을 품에 안으며 물었다. “괜찮아? 아이야?”지윤은 멍하니 서서 크게 눈을 떴다. “누구세요?” 지아는 지윤의 얼굴에 난 상처
지아는 아이의 눈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떨림을 보았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자식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다니.’“미안해, 미안해.” 지아는 아이를 품에 안고 거듭 사과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 여, 여긴 어떻게 왔어요?”“아가, 엄마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엄마?”지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아가 정말 자신을 알아본 걸까?“아들, 엄마가 전에 오해한 줄도 모르고 널 이제야 찾아왔어. 엄마가 다 미안해.”지아는 아이를 꼭 껴안은 채 눈물이 턱을 타고 지윤의 목까지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지금은 포옹만이 최고의 위로였다. 도윤은 사람을 시켜 약을 가져오게 했다.“지아야, 애 약부터 발라주자.”지아는 그제야 아이를 놓아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이의 얼굴에 난 상처를 살폈다.“많이 아팠지?”“괜찮아요.”지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까 멍하니 지아를 바라보았다.지아가 자신의 상처에 약 발라주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아빠, 진짜 엄마예요?”도윤은 손을 뻗어 아이의 코를 툭 건드렸다.“바보야, 진짜지 그럼.”도윤의 말을 들은 지윤이는 지아가 약을 발라줄 때도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얌전히 있었다.자기 때문에 지아가 놀라서 가버릴까 봐.예전에는 그래도 가끔씩 말썽을 부렸는데, 지금은 정말 성질 한 번 안 부릴 정도로 얌전한 아이가 되어서 지아는 그 모습이 더더욱 안타까웠다.“지윤아 배고프지, 엄마가 밥 해줄까?”“좋아요.”아이가 이렇게 클 때까지 한 번도 직접 밥을 해 먹인 적이 없었다.그러고도 엄마라고 할 수 있는지 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과거 나쁜 생각으로 지윤이를 안고 배에서 뛰어내렸을 때만 생각하면 지아는 무척 후회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벼랑 끝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도윤은 모자를 안방으로 데려갔다. 그는 평소 할 일이 없을 때면 산에 가서 몰래 지윤이 곁을 지키곤 했었다.남자아이라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러 단호하게 굴었지만 그렇
지아는 지윤이가 매우 예민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늘 걱정에 시달리며 힘들게 얻은 걸 잃을까 봐 두려워했다.지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를 진정시키며 얼마나 사랑하는지 거듭 말해주었다.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었는데 지윤이는 배가 터질 듯이 많이 먹더니 도윤이 손에서 젓가락을 빼앗아 가기 전까지 멈추지 않았다.아이는 엄마의 요리가 매일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윤아, 이리 와.”지아는 창가에 앉아 아이를 향해 손짓했고 지윤이는 서둘러 순순히 올라와 지아의 품에 안겼다.여기선 바깥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는데 지윤이는 엄마가 함께해서인지 평소와 다른 각도에서 훈련장을 바라보자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지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네 이름도 내가 지은 거야. 엄마 아빠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왔지. 넌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태어났어.”“엄마는 그때 아빠를 많이 사랑했나 봐요.”“응, 많이 사랑했지.”지아는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아빠에 대한 엄마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너는 내가 임신해서 낳은 아기야. 그때 네 아빠가 손을 써서 널 데려가면서 우린 헤어졌고 엄마는 네 존재도 몰라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놓쳐버린 거야. 엄마는 매일 널 그리워하고 밤낮으로 너를 생각했어. 엄마가 이 세상 누구보다 널 사랑한다는 걸 알아줘.”지윤이는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엄마, 나도 엄마를 아주 아주 많이 사랑해요.”“착하다.”지아는 아이의 이마 위에 턱을 얹으며 말했다.“엄마는 아빠의 결정에 간섭할 수 없어. 넌 여기선 항상 조심하고 위험하면 제일 먼저 도움을 청해야 해, 알았지? 넌 아직 어린애니까 자신을 보호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거야.”“엄마 걱정 마세요. 아빠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요. 전에도 몇 번 버티지 못했을 때 다른 사람이 저를 구해줬어요. 그렇지만 아빠는 남자는 강해야 한다고, 버틸 수 있으면 버티면서 피를 흘리되 눈물은 절대 흘리면 안 된다고 했어요.”“쯧,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듣
지윤이는 엄마가 도윤에 대해 얘기하는 게 좋았다. 세상에서 도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지아뿐이었다.기껏해야 도윤이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도윤을 기쁘게 해줄 방법을 찾으라는 말만 하던 백채원과는 달랐다.“하지만 아빠가 그렇게 나쁜데 엄마는 어떻게 아빠를 좋아했어요?”지아가 독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땐 내가 눈이 멀었지. 아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엄마를 쫓아다녔는지 알아? 큰 강물 속 물고기만큼 많았어. 네 아빠 그 얼굴에 엄마가 속아 넘어간 거지.”“엄마가 다른 사람하고 결혼했으면 나도 없고 동생들도 없었어요.”아이가 실망스럽게 말하자 지아는 즉시 말을 돌렸다.“네 아빠도 예전엔 꽤 인간적인 사람이었지. 엄마한테 잘해줄 때도 있었어. 그래서 널 임신하기 전에는 엄마가 매일 행복해하며 네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단다.”“그럼 지금은요? 아빠는 여전히 엄마에게 잘해주고 있고 대부분 아빠가 했던 일은 다 엄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걸 전 알아요.”“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엄마가 약속할 수 있는 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지금처럼 너를 사랑한다는 거야.”지윤이가 작게 속삭였다.“엄마, 그 사랑하는 마음을 아빠에게 조금만 나눠줄 수 있어요? 아빠 정말 불쌍해요.”“이 세상에는 네 아빠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서 엄마가 없어도 괜찮아.”“하지만 아빠에게 엄마는 물고기에게 필요한 산소와 같아서 산소가 없으면 물고기는 죽을 거예요.”지윤이가 지아의 품에 파고들었다. 학습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아이는 금방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난 아빠도 좋고 엄마도 좋은데 엄마랑 아빠가 같이 있는 게 제일 좋아요. 다른 아이들은 모두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데 엄마도 날 사랑한다면서요? 어차피 지금 혼자인데 아빠가 전에 했던 행동들 용서해 주면 안 돼요? 동생들도 나처럼 엄마 아빠가 헤어지는 걸 원하지 않을 거예요.”지윤이는 생각이 있어도 말을 못 하는 어린 두 아이와 달리 그래도 컸다고 생각한 바를 논리적으로 말했다.지아
“엄마, 저 얌전히 말도 잘 듣고 다신 엄마 화나게 하지 않을게요.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돼요?”변진희가 지아를 뿌리치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하지만 그래도 절뚝거리며 쫓아가면서 변진희가 탄 차 뒤에서 돌아와 달라고 계속 애원했다.그때 지아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변진희가 평소 차갑게 대해도 그래도 엄마인데, 그녀가 떠나면 자신은 엄마가 없는 아이가 될 것 같았다.변진희가 남아서 예전처럼 차갑게 굴어도 곁에서 매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좋았다.변진희가 떠난 후, 지아는 밤낮으로 그녀가 돌아오길 빌었다.매일 학교가 끝나면 밖에서 아이를 데리러 오는 엄마들, 아이들 밥을 챙겨오는 엄마들, 학부모 활동에 참여하는 부모들, 놀이터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다니는 부모들, 아이가 넘어지면 마음이 아픈 듯 품에 안아주는 엄마들을 보며 자신은 나중에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가정을 선물하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그때 변진희와 다를 게 있을까? 자신도 아이를 버려둔 채 완벽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게 했다.“지윤아.”지아는 아이를 껴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엄마, 난 미안하다는 말 대신 챙김 받고 싶어요. 옛날에는 내 존재를 몰라서 그랬지만 이제 알았는데도 날 떠날 거예요?”지윤은 역시 도윤을 닮아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짧은 시간안에 지아가 자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파악한 아이는 단번에 약점을 잡고 아이의 순진한 눈물을 협상 카드로 삼아 지아를 붙잡고 있었다.그러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세상 어떤 부모가 사탕을 달라고 우는 아이를 외면하겠나.특히 이 아이에겐 빚진 것이 많았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하늘의 별과 달이라도 따주어야 했다.하지만 아이는 별이나 달 대신 그저 지아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랄 뿐이었다.“난...”“엄마, 전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도 저와 동생들을 사랑하잖아요. 저에겐 완전한 가족이 없었지만 동생들도 한창 뭘 해야 할지
지아는 지윤이의 머리를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었다.“아가, 엄마도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가끔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되는 게 아니야. 네가 한 가족을 원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지만 엄마랑 아빠가 함께 있어도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지윤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듯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지아를 바라보았고 지아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엄마도 어렸을 때 너처럼 한 가족이 단란하길 원했어. 그때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고 매일 우리에게 차갑게 대했어. 사람이 매일 기분이 좋지 않으면 결국에는 어떻게 될까? 우울해하고, 짜증 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불행만 줘. 혹시 새를 키워본 적 있어?”“아빠가 준 고양이가 있는데 엄마가 제일 좋아한다고 했어요.”“새는 고양이와 달라. 고양이는 집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지만 새의 세상은 새장 한 평에 불과해. 매일 새장 입구에 서서 평생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 분명히 가까이 있지만 평생 닿을 수 없지. 새를 너무 사랑해서 매일 최고의 먹이를 주지만 그 새가 정말 행복할까? “엄마 말은 아빠가 엄마한테 새장이고 엄마가 새라는 뜻인가요?”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엄마가 조금 이기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가, 엄마도 한때 결혼에 대한 큰 기대를 품었던 어린 소녀였고 미래를 동경하면서 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것에 행복했어. 그토록 너를 만나서 너에게 행복한 가정을 선사해 주길 고대했지만 세상은 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아. 엄마도 여기까지 오길 원하지 않았지만 이제 이렇게 됐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어.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를 계속 사랑하고 남은 인생 동안 너에게 보상해 주는 것뿐이야. 네 아빠와는 화해할 수 없어. 넌 착한 아이니까 엄마를 이해해 줄 거야. 엄마도 엄마가 원하는 인생이 있어.”“엄마, 알겠어요. 전 엄마의 결정을 응원해요.”어린아이는 지아와 도윤의 얽히고설킨 갈등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지만 딱 하나, 자신이 엄마를 사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