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환은 심각한 표정이었다.“보스의 정체가 드러나면 과거 보스에게 원한을 품었던 여러 세력이 반드시 보복을 위해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 겁니다. 어젯밤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의 배후에 있는 조직은 10년 전 S지역의 중심인물인데 무모하게 나서기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기 전에 보스를 끌어내릴 생각인 겁니다.”지아는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그럼 이제 도윤 씨가 위험하지 않나요?”“여기는 아직 안전하지만 군사 지역을 벗어나면 모든 곳이 위험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저희가 블랙 넷에서 누군가가 익명의 현상금 게시물을 게시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보스를 죽이면 200억을 받을 수 있다는데 이러한 고가의 현상금 게시물은 보통 일부 개인 암살자와 용병까지 끌어모으죠. 큰 보상에는 용자가 나서는 법이니까요.”도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아를 위로했다.“전에 널 내 곁에 둔 건 내가 지켜줄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젠 내 곁이 제일 위험하니까 떠나야 해.”자기는 목숨을 걸면서 지아에겐 떠나라고 한다.지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떠날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당신 등에 난 상처가 아물면 떠날 거야.”“지아야, 너...”도윤은 지아가 이유를 듣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줄 알았는데, 이곳에 남겠다고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오해하지 마, 계산은 확실히 할 거야. 당신이 내게 상처 준 건 잊지 않았어. 하지만 이 상처는 나 때문에 생긴 거니까.”“하지만...”“진환 씨가 여긴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어? 며칠 더 있어도 괜찮지 않나?”도윤은 예상치 못한 호의에 다소 놀랐다.“당연히 괜찮죠. 이런 때에 사모님께서 여기 계시면 저는 오히려 좋죠.”진환은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대표님, 작은 도련님과 아가씨는 이미 챙겨드리고 있고 상대도 여지를 남겨 놓았으니 일단 치료부터 하고 처리하시죠. 지금은 푹 쉬세요.”진환이 그렇게 말하며 문을 나서
소지아는 간호사가 약을 바꾸는 방법을 열심히 지켜보았고, 방안에 두 사람만 남겨지게 되자 그제야 이도윤에게 화를 냈다.“여보?”“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끈질기게 조르는 걸 어떡해.”지아는 여전히 쌀쌀맞게 말했다.“이 대표는 스캔들도 많네.”이불을 들추자 붕대로 칭칭 감긴 등이 보였다.도윤이 계속해서 변명을 늘어놨다.“지아야, 그 사람은 딱 한 번 붕대를 갈아줬을 뿐이야. 그것도 어깨 쪽 붕대, 딱 한 번뿐이야.”“우린 이혼한 사이니까 그 사람이 당신한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아무 상관없는 걸?”지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붕대를 가위로 잘랐다.“지아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여자는 너뿐이야. 다른 여자는 없어.”도윤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아는 계속해서 비꼬려고 했으나 붕대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처에 말이 막혔다.상처가 심각할 거라 예상했지만 직접 보니 기분이 달랐다.등에 온전한 부위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아는 가슴이 아파졌다.엎드린 도윤은 지아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고 지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다.“지아야, 나와 백채원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지아는 일단 상처를 소독하며 이어질 도윤의 말에 기대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충동적으로 벌인 일이라거나, 누군가 약을 먹여 조종했다는 말이 나올가 두려웠다.도윤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사실 오래전부터 너한테 진실을 밝히고 싶었어. 하지만 그때의 넌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잖아. 내가 어젯밤에 수술대에서 죽어버렸다면 넌 영원히 진실을 알지 못할 거야. 난 더 이상 여한을 남기고 싶지 않아. 지아야, 저번에 내가 너한테 건넨 친자확인서는 가짜가 아니야.”지아의 손이 뚝 멈춰 섰다.“뭐라고?”“처음부터 난 백채원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있겠어? 지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줄 알았던 우리 첫
소지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해했고 이도윤이 대답했다.“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봐. 전혀 이해가 안 돼.”“전림은 어렸을 때부터 나랑 같이 훈련을 받았고 나랑 생김새가 비슷하니 내 대역 중 하나였어. 우린 생과 사를 함께 할 운명이었으나 그 사람은 절대 사랑해서는 안 될 백채원을 사랑하게 된 거야. 백채원을 임신시키고 나와 함께 나간 현장에서 나 대신 치명타를 입고 말았어. 그리고 죽기 전에 나한테 백채원을 잘 부탁한다고 했지.”“전림의 희생에 나는 백채원의 요구라면 무조건 들어줬어. 그때의 난 소씨 가문과 내 동생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고, 두 사건이 얽히게 되었어. 나는 한편으로 소씨 가문에 복수를 하며 임신 중인 백채원을 돌봤어. 그러다 보니 넌 내가 바람을 핀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난 너의 질문에도 해석할 수가 없었어.”“백채원은 자신의 아이가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라게 할 수는 없다며 나한테 가정을 만들어 달라고 빌었어.”지아는 마음이 씁쓸해졌다.“그래서 그렇게 한 거야?”“전림의 목숨으로 바꾼 조건이니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너와 이혼을 제안했었지. 하지만 백채원이 원하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 병원이며, 드레스, 블린 시트, 너의 몫은 모두 빼앗으려고 했어.”지아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했다.“그 사람이 날 바다로 밀어버리려고 했던 것도 알고 있었어?”“두 사람의 성격을 모두 알고 있으니 백채원이 어떤 짓을 벌일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야. 바다에 빠지고 본능적으로 널 구하려고 했지만, 죽어버린 전림의 얼굴과 유언이 자꾸 떠오르고, 진봉과 진환도 바다로 들어오고 있었으니 그 사람한테로 간 거야.”지아의 눈가가 붉어졌고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그럼 아이는 대체 어떻게 된 건데?”“백채원은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고 너는 순산이었으나, 백채원의 한 아이가 죽어버렸어. 지윤은 미숙아였으나 상태가 아주 좋았어. 넌 마취할 수 없어 고통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는데 나라고 마음이 아프지 않았던
이건 기쁨에 흐르는 눈물이었다. 소지아는 기쁨과 감격에 겨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으며 머릿속엔 온통 귀여운 아이의 얼굴만 떠올랐다.그럴 줄 알았다면 아이의 옆을 더 많이 지켜줄 걸, 자꾸 후회되었다.“지아야, 울지마.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모두 내 탓이라는 걸 알아.”지아는 이도윤의 어깨를 내리치며 말했다.“당연히 네 탓이지.”상처를 피했지만, 상처가 당겨졌는지 도윤이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지아는 그동안 계속 지윤이 내 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환상했었다. 그런데 이제 환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너무 갑작스레 찾아온 행복에 그동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비 온 뒤 개임이라는 게 이제야 비로소 느껴졌다.“전림의 얼굴을 봐서라도 백채원을 반복해서 용서했지만 백채원은 그칠 줄을 몰랐어. 이제 전림에 대한 빚은 모두 갚았다고 생각해 혼약을 파기한 거야. 앞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평생 평온하게 지내게 지원해 주는 것 외에는 없어.”지아는 도윤의 등에 약을 발랐다. 지윤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손놀림이 한층 조심스러워졌다.“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그 아이는 날 많이 닮았더라고. 누군가 지윤을 해치려고 했던 그날부터 특별 훈련을 시키고 있어.”“그 아이도 네 길을 걷게 하려고?”도윤의 얼굴에 우울한 표정이 스쳤다.“지아야, 우리 이씨 가문이 백 년 동안 꿋꿋이 버티고 있는 건 모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숨겨진 많은 일들은 지아에게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지금 후퇴하려고 해도 너무 늦어버렸어. 난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야만 너랑 우리 아이들을 지킬 수 있어.”지아는 무슨 이유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이씨 가문이 평범한 재벌가가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이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그런데 아이를 그 길을 걷게 한다고?”“지아야, 난 어쩔 수가 없어. 지윤은 재능이 있고, 첫째 아들인 지윤이 다른 가문 도련님처럼 곱게 자라지 못하는 건 운명적인 일인 거야. 그 아이는 이씨 가
소지아의 가발이 다 헝클어졌고 이도윤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래도 예전 머리가 더 좋아. 부드럽고 향기로웠어.”“짜증나.”지아는 흥-하고 몸을 일으켜 계속해서 도윤 등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도윤이 앞으로 큰 일을 앞두고 있어 자꾸 자신을 떠나보내려는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두 사람은 이혼을 했으니 도윤이 앞으로 어떤 일을 앞두고 있는지 알려줄 의무는 없었다.아이가 살아있다고 해서 도윤이 지아에게 줬던 상처가 없어지는것도 아니었다.다른 사람의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에게 상처를 줬던건 지아에게 있어 너무 불공평했다.두 사람도 아이 때문에 사이가 회복되지는 않을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연락을 주고 받았던것은 모두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다.도윤을 7일동안 보살핀건, 자신을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고 할수 있었다.두 사람은 앞으로 각자의 걸을 것이다. 지아도 본인의 길을 찾았다.그후로부터 며칠동안 두 사람은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서로의 등에 칼을 꽂거나 가시 돋힌 말은 하지 않았다.지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정성껏 도윤의 식단부터 재활까지 도왔다.도윤이 진봉과 진환에게 어떤 비밀스러운 일을 맡겼는지 며칠 동안 도통 보이지 않았다.그에 반면 미셸은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왔는데 보는 지아가 더 피곤했다.“도윤 오빠.”미셸은 꼬박꼬박 오빠를 붙여서 도윤을 불렀는데, 그러면 둘 사이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사과 깎아왔으니까 맛 좀 봐.”지아가 잠시 방을 비운 사이 미셸이 틈을 타서 들어와다.도윤이 인상을 찌푸리며 거절했다.“사과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너나 많이 먹어.”“오빠 위해 일부러 깎은건데?”대체 누구한테서 배운 말버릇인지 미셸은 요즘들어 말꼬리를 올리고 몸도 배배 꼬았다. 그러나 듣는 도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미셸은 여성 평균 키를 넘겼고 골격도 있는 편이었으며 태어나길 피부가 까무잡잡했다.키는 지아와 거의 비슷했는데, 168cm에 60kg의 몸매는 가장 이상적이었지만 지
이도윤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소지아가 건네는 과일을 받아먹었다. 지아를 향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었다.미셸은 그제야 자신이 웃음거리가 된 것을 깨달았다.두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았는데, 도윤이 실수로 과즙을 입가에 흘리자, 지아는 빠르게 휴지로 입가를 닦아주었다.과일을 먹고 난 후 지아는 침대 옆에 앉아 한참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지금 시간 괜찮으면 약을 새로 갈아야 할 것 같아.”“그래.”도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지아는 화장실에서 미지근한 온수와 물수건을 챙겨나오며 미셸에게 말했다.“미셸 씨, 지금 약을 다시 갈아야 할 것 같은데요.”“도윤 오빠 약 가는 걸 제가 보면 안 돼요?”미셸은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었다. 자신이 깎은 사과는 나 몰라라 하고, 지아가 깎은 건 잘만 받아먹었으니.지아가 대체 무슨 수로 도윤을 구워삶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내 아내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내 상처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미셸은 억울해서 외쳤다.“하지만 도윤 오빠! 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잖아요.”도윤은 지아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난 재결합하고 싶지만, 아직 지아가 허락하지 않아 못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우리가 이혼했더라도 내 마음속 아내는 지아 하나뿐이고.”미셸은 발을 쿵쿵 구르며 병실을 나갔다.하지만 지아는 미셸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내일 아침쯤에는 도시락을 들고 또 쫄래쫄래 찾아올 것이다.미셸은 도윤의 마음을 집요하게 갈구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포기했을지 몰라도 미셸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지아는 문을 닫고 침대 곁으로 다가와 약 몇 가지를 챙긴 채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옷 벗어.”며칠 사이 지아는 약을 가는 과정을 자주 지켜봐 온 탓에 거의 간호사처럼 익숙해졌다.도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지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벗겨줘. 움직이면 등이 당겨서 못 하겠어.”‘핑계하고는... 참 뻔하네.’‘아파서 못한다고? 마취도 안 하고 견딘 사람이 고작 이걸 참지 못한다니 말도 안 되지.’‘그래 나 대신 다
소지아는 그제야 이도윤이 벌써 3일 동안 씻지 못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동안 겨우 물수건으로 손이나 발을 닦아줬을 뿐 다른 곳은 전혀 씻지 못했다.평소의 도윤이었다면 매일같이 샤워를 했을 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씻지 못했으니 아주 불편할 것이다.지극히 정상적인 수요였으니 굳이 부끄러워하며 말할 필요는 없었다.“진봉 씨한테 몸을 닦아달라고 부탁할게. 등 쪽은 절대 물이 닿아서는 안 되거든.”“그래.”지아가 전화를 걸었으나 핸드폰 너머 진봉 쪽은 소란스럽고 정신없어 보였다.“사모님 죄송합니다. 최근 저와 형은 너무 바빠서 앞으로 두 날 동안은 병문안을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간호사한테 부탁해 주세요. 대부분 요구는 모두 들어줄 겁니다.”솔직하게 늘여놓은 진봉의 말에 지아도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통화 종료 후 지아가 말했다.“간호사 두 명 불러올게.”그때 도윤이 지아의 팔을 휙 잡아당겼고 평형을 잡지 못한 지아는 두 팔로 침대 끝을 지탱했다.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도윤은 지아 목으로 물방울이 흐르는 것까지 보였다.입을 다신 도윤이 말했다.“지아야, 난 절대로 다른 여자가 내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해왔어.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너 하나뿐이었거든.”“지금 이 상황에서 찬물 뜨거운 물 가릴 게 있어?”도윤의 검은색 눈동자가 지아를 지그시 향하자 지아는 심장이 저도 모르게 쿵쿵거렸다.도윤이 입을 삐죽였다.“네가 일주일 동안 돌봐준다고 그랬잖아.”지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래, 내가 직접 하면 될 거 아니야.”지아가 의자를 가져왔고 천천히 도윤을 침대에서 부축해 내리게 했다.등 쪽의 상처 면적이 너무 큰 탓에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상처가 땅겨왔다.대부분의 상처는 옅었으나 세 군데는 꽤 깊게 찔려 자칫하면 피가 새어 나올 수 있었다.그래서 도윤은 뭘 하든지 천천히 움직였고 나머지는 모두 지아가 도왔다.도윤은 평소에 엄살이 심한 편이 아니었으나, 간만에 친절한 지아의 얼굴을 마주하자 절로 엄살이
소지아의 얼굴은 부끄러워 거의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비록 예전에는 더 많은 스킨십을 해왔으나, 직접 바지를 푸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현재 두 사람은 이혼한 상태였다.도윤은 침착하게 지아를 기다렸다.지아는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고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눈을 감고 바지를 휙 내린 지아는 빠르게 몸을 돌려 물 온도를 체크했다.다시 몸을 돌리자 도윤이 이미 의자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살짝 벌어진 다리, 다부진 근육, 그 어떤 여자가 시선을 뗄 수 있겠는가?하지만 잘생긴 얼굴에 반듯한 자세의 도윤을 두고 그 어떤 생각을 하든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다.“지아야, 고마워.”지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 욕실은 전체적으로 나쁘지는 않았으나 집에서 사용하는 샤워볼은 따로 없었고, 지아는 제 손에 비누 거품을 내고 도윤의 피부에 묻혔다.2년 동안의 휴식을 거쳐 지아의 손바닥 굳은살은 모두 사라졌고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지아의 손이 도윤의 몸에 닿을 때마다 도윤의 마음속 음란 마귀가 소동을 피웠다.자꾸만 그날 밤 보트에서 눈을 가린 지아의 모습이 떠올랐다.비록 지아는 약기운에 그날 밤에 대한 대부분 기억을 잃었다.현재 지아는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도윤을 씻기고 있었으나, 사랑했던 사람을 앞에 두고 씻기는 행동에 지아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는 없었다.손가락이 도윤의 복근에 닿자 지아는 조용히 속으로 되뇌었다.‘이건 빨래판이다. 아주 큰 빨래판일 뿐이야.’남자의 팔은 또 아주 튼튼했다. 수트를 입을 땐 똑 떨어지는 슬림핏이었으나, 옷을 벗기면 완벽한 이두선은 예술작품처럼 느껴졌다.지아는 계속해서 되뇌었다.‘이건 큰 닭 다리다. 아주 튼실한 닭 다리야.’말없이 거품을 어깨부터 손가락까지 이어 문지르는데 손바닥을 닦는 순간 도윤이 갑자기 손을 잡자 두 사람은 깍지를 꼭 끼게 되었으며 지아는 손가락을 꼼짝할 수 없었다.도윤의 약지에는 여전히 결혼반지가 있었다. 이 3일 동안 단 한 번도 빼지 않았었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