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윤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소지아가 건네는 과일을 받아먹었다. 지아를 향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었다.미셸은 그제야 자신이 웃음거리가 된 것을 깨달았다.두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았는데, 도윤이 실수로 과즙을 입가에 흘리자, 지아는 빠르게 휴지로 입가를 닦아주었다.과일을 먹고 난 후 지아는 침대 옆에 앉아 한참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지금 시간 괜찮으면 약을 새로 갈아야 할 것 같아.”“그래.”도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지아는 화장실에서 미지근한 온수와 물수건을 챙겨나오며 미셸에게 말했다.“미셸 씨, 지금 약을 다시 갈아야 할 것 같은데요.”“도윤 오빠 약 가는 걸 제가 보면 안 돼요?”미셸은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었다. 자신이 깎은 사과는 나 몰라라 하고, 지아가 깎은 건 잘만 받아먹었으니.지아가 대체 무슨 수로 도윤을 구워삶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내 아내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내 상처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미셸은 억울해서 외쳤다.“하지만 도윤 오빠! 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잖아요.”도윤은 지아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난 재결합하고 싶지만, 아직 지아가 허락하지 않아 못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우리가 이혼했더라도 내 마음속 아내는 지아 하나뿐이고.”미셸은 발을 쿵쿵 구르며 병실을 나갔다.하지만 지아는 미셸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내일 아침쯤에는 도시락을 들고 또 쫄래쫄래 찾아올 것이다.미셸은 도윤의 마음을 집요하게 갈구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포기했을지 몰라도 미셸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지아는 문을 닫고 침대 곁으로 다가와 약 몇 가지를 챙긴 채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옷 벗어.”며칠 사이 지아는 약을 가는 과정을 자주 지켜봐 온 탓에 거의 간호사처럼 익숙해졌다.도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지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벗겨줘. 움직이면 등이 당겨서 못 하겠어.”‘핑계하고는... 참 뻔하네.’‘아파서 못한다고? 마취도 안 하고 견딘 사람이 고작 이걸 참지 못한다니 말도 안 되지.’‘그래 나 대신 다
소지아는 그제야 이도윤이 벌써 3일 동안 씻지 못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동안 겨우 물수건으로 손이나 발을 닦아줬을 뿐 다른 곳은 전혀 씻지 못했다.평소의 도윤이었다면 매일같이 샤워를 했을 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씻지 못했으니 아주 불편할 것이다.지극히 정상적인 수요였으니 굳이 부끄러워하며 말할 필요는 없었다.“진봉 씨한테 몸을 닦아달라고 부탁할게. 등 쪽은 절대 물이 닿아서는 안 되거든.”“그래.”지아가 전화를 걸었으나 핸드폰 너머 진봉 쪽은 소란스럽고 정신없어 보였다.“사모님 죄송합니다. 최근 저와 형은 너무 바빠서 앞으로 두 날 동안은 병문안을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간호사한테 부탁해 주세요. 대부분 요구는 모두 들어줄 겁니다.”솔직하게 늘여놓은 진봉의 말에 지아도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통화 종료 후 지아가 말했다.“간호사 두 명 불러올게.”그때 도윤이 지아의 팔을 휙 잡아당겼고 평형을 잡지 못한 지아는 두 팔로 침대 끝을 지탱했다.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도윤은 지아 목으로 물방울이 흐르는 것까지 보였다.입을 다신 도윤이 말했다.“지아야, 난 절대로 다른 여자가 내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해왔어.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너 하나뿐이었거든.”“지금 이 상황에서 찬물 뜨거운 물 가릴 게 있어?”도윤의 검은색 눈동자가 지아를 지그시 향하자 지아는 심장이 저도 모르게 쿵쿵거렸다.도윤이 입을 삐죽였다.“네가 일주일 동안 돌봐준다고 그랬잖아.”지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래, 내가 직접 하면 될 거 아니야.”지아가 의자를 가져왔고 천천히 도윤을 침대에서 부축해 내리게 했다.등 쪽의 상처 면적이 너무 큰 탓에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상처가 땅겨왔다.대부분의 상처는 옅었으나 세 군데는 꽤 깊게 찔려 자칫하면 피가 새어 나올 수 있었다.그래서 도윤은 뭘 하든지 천천히 움직였고 나머지는 모두 지아가 도왔다.도윤은 평소에 엄살이 심한 편이 아니었으나, 간만에 친절한 지아의 얼굴을 마주하자 절로 엄살이
소지아의 얼굴은 부끄러워 거의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비록 예전에는 더 많은 스킨십을 해왔으나, 직접 바지를 푸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현재 두 사람은 이혼한 상태였다.도윤은 침착하게 지아를 기다렸다.지아는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고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눈을 감고 바지를 휙 내린 지아는 빠르게 몸을 돌려 물 온도를 체크했다.다시 몸을 돌리자 도윤이 이미 의자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살짝 벌어진 다리, 다부진 근육, 그 어떤 여자가 시선을 뗄 수 있겠는가?하지만 잘생긴 얼굴에 반듯한 자세의 도윤을 두고 그 어떤 생각을 하든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다.“지아야, 고마워.”지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 욕실은 전체적으로 나쁘지는 않았으나 집에서 사용하는 샤워볼은 따로 없었고, 지아는 제 손에 비누 거품을 내고 도윤의 피부에 묻혔다.2년 동안의 휴식을 거쳐 지아의 손바닥 굳은살은 모두 사라졌고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지아의 손이 도윤의 몸에 닿을 때마다 도윤의 마음속 음란 마귀가 소동을 피웠다.자꾸만 그날 밤 보트에서 눈을 가린 지아의 모습이 떠올랐다.비록 지아는 약기운에 그날 밤에 대한 대부분 기억을 잃었다.현재 지아는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도윤을 씻기고 있었으나, 사랑했던 사람을 앞에 두고 씻기는 행동에 지아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는 없었다.손가락이 도윤의 복근에 닿자 지아는 조용히 속으로 되뇌었다.‘이건 빨래판이다. 아주 큰 빨래판일 뿐이야.’남자의 팔은 또 아주 튼튼했다. 수트를 입을 땐 똑 떨어지는 슬림핏이었으나, 옷을 벗기면 완벽한 이두선은 예술작품처럼 느껴졌다.지아는 계속해서 되뇌었다.‘이건 큰 닭 다리다. 아주 튼실한 닭 다리야.’말없이 거품을 어깨부터 손가락까지 이어 문지르는데 손바닥을 닦는 순간 도윤이 갑자기 손을 잡자 두 사람은 깍지를 꼭 끼게 되었으며 지아는 손가락을 꼼짝할 수 없었다.도윤의 약지에는 여전히 결혼반지가 있었다. 이 3일 동안 단 한 번도 빼지 않았었
소지아는 고개를 숙여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도윤이 말리지 않았다면 안쪽으로 닿을 뻔했었다.벅벅 문질러 댔던 탓에 도윤의 짙은 색 팬티 끝자락에 물 자국이 선명했다.지아는 빠르게 도윤에게서 손을 뺐고, 갑자기 크게 움직인 탓에 손을 빼는 순간 바닥에 크게 엉덩방아를 찧었다.도윤은 급한 마음에 손을 뻗어 지아를 당겼다.“지아야, 괜찮아?”바닥에는 지아가 만든 비누 거품이 가득했고 도윤도 바닥 위로 미끄러져 넘어졌다.“아!”지아의 위로 도윤의 몸이 겹쳤다.서로의 몸이 피부로 느껴졌다.지아는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이런 우연은 드라마에서 봐도 오버라고 했을 것이다!그러나 지아는 가장 먼저 도윤의 상처가 떠올라 다급하게 물었다.“괜찮아? 등 쪽 상처가 벌어지지는 않았어?”크게 움직인 탓에 도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심한 고통이 찾아왔다.도윤이 아픔을 꾹 참으며 말했다.“괜찮아. 조금만 시간을 줘.”지아는 도윤이 무리하다가 상처가 더 벌어질까, 얌전히 깔린 상태를 유지했다.그러나 그 상태에서 도윤의 신체 변화가 선명하게 느껴졌다.“이도윤! 이 변태!”지아가 얼굴을 붉힌 채로 말했다. 그러나 도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지아야 이건 정상적인 생리 반응이야. 네가 내 아래에 깔린 걸 어떡해.”“웃기시네. 다른 여자가 아래에 깔렸어도 똑같았을 거면서.”지아는 이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아니, 그렇지 않아.”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매력 넘치는 조이가 작정하고 유혹할 때도 넘어가지 않았던 도윤이었다. 그때의 진봉은 도윤에게 문제가 있는 줄만 알고 장난감도 여러 개 사다 주었었다.“절로 가.”“지아야, 네가 지핀 불은 책임져야지.”지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정말 뻔뻔하기도 해라! 난 보살펴준다고 했지, 너랑 뭘 한다고 하지는 않았어!”“이미 이렇게 된 걸 어떡해?”“네가 알아서 해.”두 볼을 붉힌 지아가 말했다.“불가능해.”지아는 충격받은 얼굴로 말했다.“아니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서글픈 이도윤의 목소리에 소지아는 고개를 들어 물기 젖은 그 눈동자를 마주했다. 도윤은 마치 버려진 강아지 같은 행색을 하고 있었다.‘내가 알고 지낸 이도윤 맞아? 강아지한테 영혼을 뺏긴 게 아니고?’지아가 무뚝뚝하게 물었다.“뭘 어떻게 도우면 되는데?”도윤은 지아의 손바닥 위를 꾹꾹 눌렀고 지아는 얼굴이 시뻘게져 터질 것만 같았다.이어 지아가 다급하게 거부했다.“싫어, 안돼, 거절할게. 꿈도 꾸지 마.”지아는 도윤이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지아야, 걱정하지 마. 절대 네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을게.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지아는 실크 잠옷 바지를 입고 있었고 얇은 잠옷 바지 위로 고스란히 느껴졌다.도윤의 억제하는 듯한 숨소리가 귓가에 흩어지고 지아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두 손으로 제 눈을 가린 지아가 계속해서 구시렁거렸다.“이도윤, 넌 정말 개자식이야.”“그래 난 나쁜 놈이지. 그런데 이렇게 나쁜 놈한테 걸린 넌 평생 도망갈 수 없을 텐데.”“나랑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널 평생 사랑할 수 있게 해줘.”지아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조용히 해, 이 나쁜 놈아.”도윤의 호흡이 더 가빠졌다.“지아야, 사랑해. 내 목숨도 줄게.”허벅지에 느껴지는 온도에 지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그만하지?”“이걸로 어떻게 되겠어? 지아 너잖아.”도윤이 고개를 돌려 아무 예고 없이 지아의 입술에 키스했다.30분 후.지아는 도윤의 부축을 받으며 안에서 걸어 나왔다. 지아의 걸음걸이가 엉성하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가득했다.그에 반면 도윤은 깨끗하게 씻겨지고 정신 상태도 아주 좋아 보였다.등 뒤가 흠뻑 젖은 지아가 표독스러운 눈길로 도윤을 노려보았다.“개자식.”구시렁거리며 지아는 다시 욕실로 돌아가 샤워했고, 병실로 돌아오자 도윤이 주변에 핑크색 하트가 뿅뿅 거리는 게 느껴졌다.도윤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지아야,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우리도 이만 자자.”자자는 말에 지아의 얼굴이 또 화
소지아를 침대에 눕힌 뒤 이도윤은 소파로 향했다.소파는 2인용이었지만, 190이 넘는 키의 도윤이 눕자 두 다리가 밖으로 뻗어졌다.지아가 긴 한숨을 내쉬었고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이도윤, 지금 뭘 하자는 거야?”“지아야, 난 괜찮아. 소파에서 이렇게 엎드려 자면 돼.”“당장 침대로 와!”지아의 분노에 도윤은 쫄래쫄래 침대로 돌아왔다.두 사람의 관계는 예전과는 사뭇 달랐으나 또 묘하게 조화로웠다.지아는 온몸을 이불로 꽁꽁 가렸고, 도윤은 자지 않고 뚫어져라 지아만을 바라보았다.밤새 몇 번 뒤척이다 잠에서 깨난 지아는 도윤이 여전히 자지 않고 저를 바라보는 모습에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좀 자면 안 돼?”“등이 아파서 잠이 안 와. 내가 옆을 지킬 테니까 넌 빨리 자.”‘대체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거야?’지아는 어이가 없어졌다.지아가 몸을 돌려 등을 보이면 도윤은 지아의 뒤통수만 바라봤다.“잠을 자려면 두 눈을 꼭 감아야 하는 거야.”지아는 도윤의 눈이 레이저를 뿜을 수 있었다면 제 뒤통수는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도윤이 솔직하게 말했다.“이제 90여 시간 뒤면 넌 떠날 거야. 다음 만남이 언제가 될지 모르니 조금만 더 눈에 담고 싶어서 그래.”지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혹시 눈치챈 건가?’“지아야, 품에 안아보면 안 될까? 안기만 할게.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지아는 이를 갈았다.“아까는 비비기만 한다며!”잠옷을 입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피부가 아주 벗겨질 뻔했다.등 뒤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지아는 또 도윤에게 넘어갔다는 걸 알아차렸다.“눈 감고 입도 다물고 이만 자자.”지아는 아예 이불로 제 머리를 가렸다. 도윤이 자지 않는대도 지아는 빨리 잠에 들어야 했다. 아니면 내일 누가 도윤을 보살피겠는가?막 잠에 들려는데 누군가 제 이불을 몰래 드는 게 느껴졌다.‘설마 잠에 든 사람한테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겠지?’‘감히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상처를 확 잡아채 버릴 거야.’
그 말이 소지아의 귀에 들어가자 지아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처음에는 이도윤이 안아주면 그저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제지하지 않았다. 근데 누가 알았겠는가? 도윤이 이토록 대담해질 줄은.이런 일을 미리 막지 않은 것은 사실상 허락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이제는 잠을 척하는 것도 안 먹혔고, 하지 말라고 도윤을 뭐라고 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그야말로 지아는 진퇴양난에 빠진 상태였고 도윤의 손은 여전히 지아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지아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정말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지아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숨을 헐떡였다. “내가 살아남는 것도 힘든데,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어디 있겠어?”도윤은 지아의 귓불을 입술로 살짝 깨물며 중얼거렸다. “나는 매일 네 생각만 해.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이전에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도 달콤했지만, 도윤은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직접적이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선호를 추측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항상 절제하며 자신의 감정을 감춰왔다.과거에는 연애 초보자 서툰 두 사람이었지만, 이 고난들을 겪으면서 도윤도 조금씩 성장해 왔다. 지아가 말했듯이, 지아가 도윤에 대해 불만을 가진 것은 정보의 차이 때문이었고 오해와 비밀이 두 사람의 결혼 파탄의 주된 원인이었다.생사의 고비를 넘었고, 도윤은 자신의 마음을 명확하게 지아에게 전하고 싶었다. 아마 자신의 인생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윤은 지아를 사랑했으며, 지아가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용기 있게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아는 도윤의 공세에 당해낼 수 없었다.“이거 놔, 계속 이러면 정말 화낼 거야.” 지아는 몸이 뜨거워지면서 상황이 제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점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아야.” 도윤이 짧게 아파하는 소리를 내자 지아가 급히 멈췄다. “네 상처를 건드렸어?”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이
이도윤은 천천히 소지아의 잠옷을 내렸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밝지 않은 빛에도 불구하고, 도윤은 지아의 마른 등과 아름다운 허리 라인을 볼 수 있었다. 지아는 정말 너무 말랐는데 솔직히 말해, 이전의 지아를 안았을 때부터 손이 아팠다.아마 아이를 세 명이나 낳은 탓에, 지아의 가슴은 더 커졌고, 모유 수유를 하지 않아서 탄력을 잃지 않았다. 두 번의 조산으로, 지아의 배에는 깊은 임신줄도 없이 온몸이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그랬기에 지아는 자신의 몸매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모르고 있었다.방안에는 24시간 난방이 있어 봄처럼 따뜻했지만, 옷이 없는 상태에서도 지아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지아야, 돌아봐봐. 너를 보고 싶어.”“싫어!”도윤은 지아를 바로 끌어당겼고 지아는 여전히 손으로 눈을 가리며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빨리 해.”도윤은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서둘러?”이번에는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하는 관계였기에 지아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냈다. 그리고 도윤은 약속을 지키며 결국 지아에게 다짐을 깨지 않았다. 한참 후, 도윤은 지아의 몸 위에서 숨을 몰아쉬었다.“지아야, 고마워.”지아의 목소리는 약간 애교를 띠었다. “이도윤, 이제 너한테 빚진 거 없어.”도윤은 지아의 다리에 묻은 것들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지아는 몸을 일으켜 말했다.“내가 할게.”“싸우기도 했으니 이제 자야지, 안 그래?”“자, 바로 잘 거야.”지아는 침대에 누웠지만,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과거의 애증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한때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남자를, 나중에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던 그 남자와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니.이야기가 로맨스 소설에서 판타지 소설로 변해버린 듯했다. 밤이 깊어져 가는 동안, 도윤은 지아를 안고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마치 충심으로 가득 찬 큰 강아지처럼, 지아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온전히 감싸 안았다.처음 세 날 동안 도윤의 등은 정말 아팠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
소임호는 눈앞의 광기 어린 조경선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조경선, 그동안 정말 행복했니? 그렇게 애써 계획해서 네가 얻은 건 뭐지?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우리는 모두 패배자라고!” “틀렸어.”조경숙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그 당시의 나는 얼굴도 망가지고, 족보에서 제명되고, 가족들에게도 내쳐졌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데, 조경숙은 왜 모든 걸 가져야 해? 시골에서 돌아온 한낱 촌뜨기가 어떻게 나를 대신할 수 있었냐고!” “그래, 난 패배자야. 하지만 너희도 내 시체 위에 서서 잘난 척할 수는 없을걸? 우리 두 쪽 다 망가지는 게 내 승리니까!” 조경선이 고개를 숙여 소임호를 살펴보며 말했다.“당신 꼴을 좀 봐. 떠돌이 개랑 다를 게 뭐야? 참 안쓰럽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곧 소씨 가문은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나는 당신을, 그리고 소씨 가문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말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그래, 난 미쳤어.”“하지만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젠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당신이 똑똑히 느껴야 할 차례야.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경숙은 이제 심세호의 여자가 됐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아?” “참, 그건 모르지? 소씨 가문의 노친네는 이미 죽었고, 당신 아들들도 곧 당신과 함께 무덤으로 갈 거야!” “조경선, 너는 진짜 인간 말종이야!” 소임호는 극도로 분노하며 몸부림쳤고, 쇠사슬은 그의 몸부림으로 인해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조경선은 소임호의 턱을 잡고 비웃으며 말했다. “왜, 불만이야? 그럼 나한테 빌어봐. 그러면 그 자식들한테 고통 없는 죽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꿈 깨.”소임호가 냉소하며 말했다.“죽어도 너한테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당신을 죽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참히 망가지는지 보여줄 수 없잖아. 당신 자식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고,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조경숙은 눈이 멀어 다른 남
여자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넌 먼저 돌아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분간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어요.”시월은 갑자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물었다.“맞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흥, 끝까지 고집불통인 쓰레기 같은 남자. 내가 겪은 교통을 천배, 만 배로 되돌려줄 거야!” 시월의 얼굴에 찰나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동안 아빠가 가족도 잃게 하고, 집안도 망가지게 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 꿈 깨! 이건 그 사람이 나한테 진 빚이라고!” 여자가 소시월의 옷깃을 꽉 잡으며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데, 나는 네 어미야. 네가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나는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엄마, 알겠어요,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당연히 엄마 편이에요.” 소시월은 여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여자의 정서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사실, 그녀의 얼굴도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집착이 너무도 강한 그녀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 고통을 평생 기억하면서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한테 천 배, 만 배로 돌려줄 거야!!” 여자는 평생을 복수 계획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하지만 소시월이 보기에, 복수를 이루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소씨 가문은 지금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소시월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소시월이 떠난 후, 여자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는데, 여자가 자신의 지문을 입력하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여자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는 손과 발이 묶인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광기 어린 집착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소임호
소지훈이 폭로한 충격적인 사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아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출생 비밀을 찾아 헤매던 지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스스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소씨 가문 사람들의 고충에 공감했던 지아는 이제 그들이 자기 혈육임을 알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미끄러졌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들이...” 하지만 더욱 지아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예전에 마주했던 그 시신이 자기 친언니였다는 사실이었다. ‘시영 언니는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 ‘심지어 나는 그걸 전혀 몰랐고,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했어...’ 지아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지아야!”도윤은 지아를 안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침대에 누운 채 찡그린 표정을 한 지아를 보며 도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지아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그런데 간절히 바랐던 가족마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다니.’ 무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아의 곁을 지켰다.도윤은 무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냥 과로한 상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뿐이거든.” 한편, 소씨 가문의 황당한 해프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으며, 소영수의 장례식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들의 싸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소지훈이 이긴 듯 보였으나, 사실 그로 인해 소씨 가문은 체면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시월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해가 뜨기도 전에 황급히 차를 몰아 오래된 별장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까악까악’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장미 덩굴은 낡은 담벼락 위로 기어오르며, 삭막하고 부패한 세상에 한 줄기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햇살이 어둠을 찢으며 온 세상의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