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봉은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보스, 그놈이 보복할까 봐 걱정되세요?”“지아를 보고 내 정체를 알아차렸을 거야. 내가 자기 밥줄을 건드렸는데 가만히 있을까? 악랄한 놈이라서 분명 내 약점을 파고들 거야.”“보스 약점은 사모님인데, 그럼 사모님을 건드리겠네요.”윤도윤의 눈빛이 짙어졌다.“그때 내가 지아와 비밀 결혼을 할 때도 언젠가 내 신분이 누설돼서 지아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려워서 그랬어. 하지만 결국 돌고 돌아 결국에는 드러나서 꼬리를 잡혔네. 지아의 적을 제외하고도 내 신분이 지아에게 가장 큰 위험이 될까 봐 두려워.”“보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도윤은 팔짱을 끼고 절벽 가장자리에 서서 암초에 거칠게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도윤의 눈빛은 차갑고 단호했다.“지아가 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건 내가 너무 약해서 누군가 지아를 빌미로 나를 위협할 기회를 줬다는 걸 증명해. 내가 할 일은 계속 위로 올라가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거야. 그러면 아무도 지아를 해치지 않겠지.”멀리서 다들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손에 든 몇백억의 현금으로 광란의 파티를 벌이고 있었고 섬에는 돈다발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가냘픈 체구의 남자가 다가오자 진환과 진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눈치껏 자리를 떠났다.도윤이 고개를 돌리자 세찬의 점잖고 우아한 얼굴이 나타났다.“몇백억을 그냥 이렇게 주는 거야?”조금 전까지 고고하고 부드럽던 표정과는 다르게 셔츠 두 개를 열어젖힌 세찬은 꽤나 방탕해 보였다.“친구 사이에 그까짓 돈 몇 푼 가지고 뭘. 네가 전화 한 통에 사람을 보내지 않았어도 나 정말 물러서지 않았어. 너희 쪽 사람들 들켰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뭐가 문제야? 내 습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리 바꿔서 총놀이 하는 거지. 우린 너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아, 작은 사업일 뿐이라고. 너희 쪽도 가본 지도 오래됐네. 혹시 인류를 통째로 장악할 계획이야? 둘째 형한테 들으니 지난 2년 동안 큰 물건 몇 개를 더 개발하
엠파이어 빌딩 꼭대기.와르르-남자는 눈앞에 놓인 차 세트를 모두 부쉈고 맞은편에서 비서가 소심하게 보고했다.“이번 사고의 예상 손해 금액은 대략 3조 7천 4백억 원입니다.”그해 거대한 호화 유람선과 호화로운 장식에 들어간 비용은 1조 원이 넘었고, 각종 무기, 의료 장비, 물품, 골동품, 기타 고정 자산까지 합치면 4조 원에 육박했다.“금전적 손실 외에 고객도 잃었습니다.”“조이는 어딨어?”“배에 조이의 시신이 없는 걸 보아 데려간 것 같습니다. 지금 많은 승객들이 보상을 요구하고 있고, 보상 금액도 수천억에 달합니다. 보스, 어떡할까요?”남자는 격분했다.“신경 쓰지 마.”“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을까요?”“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준다고 해도 앞으로 배에 탈 것 같아?”비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아니요.”“배에 탑승한 사람들은 대부분 양지 인물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우리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지?”“보상을 원하는 건 음지 사람들입니다.”“그 사람들의 돈은 애초에 깨끗한 돈이 아니야. 보상을 해준다고 해도 만족시킬 수 없을 텐데 굳이 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걔들 기분을 봐줘? 어차피 다음 거래는 없을 텐데.”비서는 서류를 닫았다.“보스, 우리 측에서 이번에 심각한 손실을 보았는데 어떻게 하실 건가요?”남자는 눈앞에 한 여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이번 일은 이 여자 때문에 시작되었으니 이 여자가 끝내게 해야지.”...지아는 두툼한 패딩을 입고 아이의 손을 잡은 채 거리를 거닐었다.언제나처럼 겨울이 일찍 찾아온 A시에는 겨울의 대부분 시간 눈이 내렸다.하늘에 흩날리는 눈송이는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소망은 두꺼운 머플러를 두르고 모자를 쓴 채 작은 손을 뻗어 눈송이를 잡으려 했다.“엄마, 눈, 예뻐요.”지아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들 뒤에는 수천 개의 불빛이 비치고 아이의 순수한 미소에 날아다니는 눈송이가 담기며 모든 것이 너
경호원은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미친 듯이 달려가 마침내 민아의 손을 잡았다.“김 비서님, 저희를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 당신이 죽으면 대표님한테 뭐라 해명할 수 없어요.”“빌어먹을, 괜히 내 탓 하지 마. 살아서 싸울 수 없다면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강세찬과 당신들에게 복수할 거니까!”민아의 목소리는 매우 커서 전혀 곧 죽을 사람 같지 않았다.“내가 가장 사나운 귀신으로 변하려고 일부러 빨간 옷까지 입었다고. 이봐, 밤에 일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내가 겁먹어 죽게 할 테니까.”“...”분명 생사가 걸린 상황인데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김 비서님은 어떻게 죽을 때도 이렇게 웃길까!’“웃고 싶으면 웃어, 참지 말고.”“김 비서님, 절 웃기지 마세요. 전 절대 죽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이봐, 이 세상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게 뭔지 알아?”“죽음인가요?”민아는 고리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니, 주식이야.”“김 비서님, 그런 썰렁한 농담은 하나도 재미없어요.”“그래, 셋 셀 때까지 손 놔.”“안 돼요.”“내가 따로 돈을 숨겨둔 게 있는데, 이 손 놓은 다음에 그 돈의 절반으로 날 위해 금화, 큰 별장, 고급 승용차를 사고 근육질 남자 열 명만 태워줘, 알았지? 우리 둘이 반씩 나누자고.”경호원은 여전히 원칙적인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제가 근육남들을 태운 걸 알면 저까지 태워버릴 것 같아서요.”“너 많이 먹어?”“별로요.”“그럼 됐네. 그냥 불에 타. 마침 나도 가면 잡일을 맡아줄 조수가 필요하거든. 나랑 같이 황천길 가자. 그러면 우리 둘이 길동무가 되어 외롭지도 않고 그쪽 보스가 매달 월급을 태워줄 거야.”뒤에 있던 일행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순간 긴장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그러던 중 구세주처럼 전화벨이 울렸다.“김 비서님 휴대폰입니다.”“망할 강세찬이겠지, 안 받아. 내가 이미 죽어서 황천길에 올랐다고 전해줘. 이따 밤에 꿈속으로 찾아간다고.
민아는 상대방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바보야, 그런 것까지 통역하게?”경호원은 속이 쓰렸다.‘이런 미친…’지아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민아야, 어디 있어?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민아는 지아가 어떻게 부활했는지 몰랐지만, 지아가 아직 살아있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살아가는 게 더 이상 지루하지 않게 느껴졌다.적어도 지아가 걱정하게 할 수는 없었다.“아니야, 새 보디가드랑 얘기 중이야. 지아 넌 아직 모르지, 나 초콜릿 복근 있는 경호원 8명씩 데리고 다닐 정도로 잘 나간다?”“목소리 들으니까 안심이 되네. 네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잘 지내. 내가 왜 잘 못 지내겠어. 지금은 큰 별장에 살면서 리무진도 타면서 부자의 삶을 살아.”민아가 웃으며 말했지만 지아는 예민하게 감지했다.“우는 거야?”민아는 눈송이가 흩날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가에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네가 죽지 않은 것에 너무 기뻐서 그러지. 기쁨의 눈물도 못 흘려?”경호원들은 그 틈을 타서 민아를 끌어올렸고, 민아의 몸이 눈 속에 파묻혔다.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엄청나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지아야, 보고 싶어.”지아는 민아의 속사정을 모르고 정말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럼 늘 가던 곳에서 보자.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어.”“그래.”“언제 도착해?”“30분, 아니 한 시간. 나도 이제 흙수저가 아니니까 단장 좀 해야겠어.”“알았어, 그럼 한 시간 후에 보자.”민아는 전화를 끊고 경호원이 말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지금 내 상태 어때?”경호원이 진지하게 대답했다.“예쁜 귀신 같습니다”“그 입 다물어.”그렇게 말한 뒤 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도망쳤고 경호원이 뒤쫓았다.“김 비서님, 이제 안 뛰어내리세요?” “내 친구가 날 찾는 게 안 보여? 강세찬한테 나간다고 전해. 또 못 나가게 하면 바로 배를 갈라서 보여줄 거라고.”경호원은 입꼬리를 올렸다.‘보스는 어쩌
이영은 침묵이 흐른 뒤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알았어. 내 약속은 변하지 않아.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설영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녀의 뜻을 알았던 이영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제야 이영은 근태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강이영 씨, 일도 그만뒀는데 아직도 그렇게 바쁩니까?”“안 바빠요. 그냥 친구랑 얘기 좀 했어요. 대표님께서 직접 안내해 주시고, 일하시는데 방해되지 않으시겠어요?”“평소에 바쁜 걸로 충분해요. 저도 쉴 때가 있어야죠. 오래간만에 이렇게 나왔는데 오히려 이런 기회를 준 강이영 씨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네요.”이영은 미소만 지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근태가 말했다.“저는 오히려 강이영 씨와 이 대표님과의 관계가 더 궁금합니다.”“그게 중요한가요?”근태는 검지에 끼고 있는 보석 반지를 만지작거렸다.“이 대표님은 하씨 가문 땅을 위해 이곳에 오시는데 강이영 씨가 여전히 이 대표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면, 강이영 씨의 체면을 생각해서...”이영이 정중하게 웃으며 말을 끊었다.“괜한 생각 마세요, 하 대표님. 이 대표님이 제 전 상사였던 건 맞지만 전 이미 회사를 떠났고, 회사 일은 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공과 사가 확실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회사를 떠나면 평범한 친구조차 할 수 없는데 회사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죠. 하 대표님 생각대로 하세요. 저에 대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C시에 온 건 동생 때문인데 대표님하고 같은 호텔에 묵게 될 줄은 몰랐어요.”“그렇게 안 봤는데 강이영 씨 꽤 매정하네요.”“매정한 건 아니고, 원래 어른들 세상에선 이익만 따지니까요.”이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덤덤했기 때문에 근태는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차가 천천히 멈추자 근태가 먼저 내려 이영의 휠체어를 꺼냈다.근철은 보영이 올 줄 알고 아침 일찍부터 와서 들뜬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이영 누나, 보영아, 또 만났네요.”“근철 도련님.”
다시 만난 지아는 예전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농담까지 건넸다.민아는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우리 지아가 드디어 힘든 감정을 이겨냈구나, 정말 다행이야.”“그래, 옛날에는 사는 게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고 하루하루가 고문 같았는데 아이를 만난 후로 눈앞의 검은 안개가 걷힌 것처럼 삶이 가치 있다고 느껴져.”민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소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좋네.”“너도 이젠 나이가 있는데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사람 만난 적 없어?”지아는 아기를 너무 좋아하는 민아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을 꺼낼 때마다 민아는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빠르게 말을 돌렸다.“난 여전히 매력적이라 나 좋다는 사람 저기 해외까지 줄을 섰지만, 어디 바빠서 연애할 시간이 있어야지.”지아는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날 보러 와준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나?”“우리가 어떤 사이야,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만날 시간은 남겨둬야지.”“스읍, 쓸데없는 소리. 그 입은 아직도 필터가 없네. 나쁜 일은 꼭 말한 대로 된다는 걸 몰라?”“못 본 사이에 왜 잔소리가 더 늘었어? 너 예전에 미신 같은 거 안 믿었잖아.”지아는 따뜻한 밀크티를 들고 두 모금 마셨다.“그땐 어려서 내가 세상을 바꾸는 주인공이 될 줄 알았지. 근데 현실에서 한번 또 한 번 겪어보니 알겠더라. 나는 고작 바닷속 물방울 하나에 지나지 않고 아무리 노력해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걸.”“우리 아직 칠십도 안 됐는데 왜 장기나 두는 노인네 같지?”민아는 턱을 괸 채 진지하게 고민했다.“아마 이게 성장의 대가겠지.”“솔직하게 말해봐. 앞으로 어떡할 거야?”지아는 무기력했다.“일단 건우 선배한테 돈부터 갚아야지.”“하지만 그러면 이도윤이 네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잖아.”그 말을 꺼내는 순간 민아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아니, 그는 이미 알고 있다.’얼마 전 지아가 전화를 걸었을 때 주위에 많은 경호원들이 있었
이전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밀크티를 마시고, 쇼핑하고, 영화를 보며 다시 만난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영화가 끝나자 아이는 하품을 했고 하빈이 아우디를 몰고 지아를 데리러 왔다.“아가씨, 이제 돌아가시는 겁니까?”지아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차는 어디서 구했어요?”“빌렸어요. 이렇게 좋은 차가 엄청 싸게 나왔더라고요. 소망 아가씨 잠들겠네요. 대중교통 타고 가기엔 불편할 테니 얼른 타요. 밖에 바람도 불고 눈도 오잖아요.”지아는 민아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 탔는데, 소망이는 이미 지아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하빈이 여러 가방을 트렁크에 넣으면서 열성적으로 물었다.“이분은 어디 가세요?”“전...”민아가 머뭇거리자 지아가 물었다.“너 아직도 제이드 가든에 있어?”“응.” 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살던 곳.”“알았어, 차에 타.”밖의 눈보라는 점점 더 거세지고 길에는 행인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지아는 민아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여러 번 발견하고 물었지만 괜찮다는 대답만 돌아왔다.민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지아는 민아와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 지내온 사이라 민아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호탕한 성격의 민아가 말수가 적어지고 대화를 나눌 때마다 멍을 때리자 지아는 대충 남자와 관련된 일이라고 짐작했다.좋은 남자가 아니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거나.과거 민아는 주진구와 만날 때만 해도 온 세상에 연애한다고 알리고 싶어 할 정도였다.민아가 대화를 원하지 않으니 지아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민아를 먼저 데려다주자 그녀가 애써 웃는 척하며 말했다.“여기서 내릴게. 애도 자는데 이만 가 봐.”“며칠 뒤면 크리스마스인데 같이 놀러 갈래?”민아의 얼굴에 또 한 번 상실감이 스쳐 지나갔다.“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내가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알았어. 그럼 내 새 번호 저장해두고 시간 나면 연락해 줘.”“그래, 잘 가.”지아는 차 문을 닫고 백미러를 통해 길가에 서서
지아는 돌아오는 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과거 학생 시절의 자신과 민아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그때 미래의 운명을 알았다면 좀 더 자유롭게 웃을 수 있었을까?차가 집에 도착하고 하빈은 일부러 아기를 먼저 데리고 나갔다.지아는 금방 돌아가지 않고 가로등 밑에 서서 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거기 있는 거 알아요.”가로등 뒤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도윤은 멀리서 지아를 바라보고 있었다.“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고, 지아는 도윤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그날 밤엔 고마웠어요.”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도윤이 제때 돈을 빌려 값을 치르지 않았다면 지아는 악마들의 손에 넘어가 목숨이 끝날 뻔했다.“제가 아가씨를 지키지 못했습니다.”도윤의 어깨와 머리에 하얀 눈이 두툼하게 쌓인 걸 보아 한참을 서 있었던 것 같다.지아는 천천히 도윤을 향해 걸어왔고, 도윤은 조금 불안했다.지아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는지 확신이 없었던 도윤은 지아가 알면 어떻게 할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아무도 없는 고요한 밤에 곧 길은 두꺼운 얼음과 눈으로 덮였다.지아가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났다.도윤의 심장은 눈 소리와 함께 거칠게 뛰고 있었다.지아는 도윤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이건...’“내일 은행에 가기로 했어요.”“아가씨, 뭐 하시려고요?”“계좌 번호 줘요. 그동안 일했던 돈 정산해 줄게요.”도윤은 짙은 눈썹을 내렸다.“그럼 아가씨께서는 이제 제가 필요 없는 겁니까?”“계좌의 돈이 움직이면 그 사람이 분명 알게 될 겁니다. 그러면 저도 도망갈 수 없을 거고, 그 사람이 당신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강욱 씨, 멀리 가요, 최대한 멀리.”도윤은 그제야 자신이 지아에게 악마의 그림자처럼 드리운 채 따라다니며 트라우마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사람은 아직 아프리카에 있잖아요. 게다가 오랫동안 죽은 척했으니 들키기 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