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돌아오는 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과거 학생 시절의 자신과 민아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그때 미래의 운명을 알았다면 좀 더 자유롭게 웃을 수 있었을까?차가 집에 도착하고 하빈은 일부러 아기를 먼저 데리고 나갔다.지아는 금방 돌아가지 않고 가로등 밑에 서서 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거기 있는 거 알아요.”가로등 뒤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도윤은 멀리서 지아를 바라보고 있었다.“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고, 지아는 도윤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그날 밤엔 고마웠어요.”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도윤이 제때 돈을 빌려 값을 치르지 않았다면 지아는 악마들의 손에 넘어가 목숨이 끝날 뻔했다.“제가 아가씨를 지키지 못했습니다.”도윤의 어깨와 머리에 하얀 눈이 두툼하게 쌓인 걸 보아 한참을 서 있었던 것 같다.지아는 천천히 도윤을 향해 걸어왔고, 도윤은 조금 불안했다.지아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는지 확신이 없었던 도윤은 지아가 알면 어떻게 할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아무도 없는 고요한 밤에 곧 길은 두꺼운 얼음과 눈으로 덮였다.지아가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났다.도윤의 심장은 눈 소리와 함께 거칠게 뛰고 있었다.지아는 도윤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이건...’“내일 은행에 가기로 했어요.”“아가씨, 뭐 하시려고요?”“계좌 번호 줘요. 그동안 일했던 돈 정산해 줄게요.”도윤은 짙은 눈썹을 내렸다.“그럼 아가씨께서는 이제 제가 필요 없는 겁니까?”“계좌의 돈이 움직이면 그 사람이 분명 알게 될 겁니다. 그러면 저도 도망갈 수 없을 거고, 그 사람이 당신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강욱 씨, 멀리 가요, 최대한 멀리.”도윤은 그제야 자신이 지아에게 악마의 그림자처럼 드리운 채 따라다니며 트라우마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사람은 아직 아프리카에 있잖아요. 게다가 오랫동안 죽은 척했으니 들키기 쉽지
지아는 방으로 돌아왔고, 아이는 이미 잠든 뒤여서 뜨거운 수건으로 아이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떠나면서 때마침 내려다본 가로등 아래 강욱이 서 있었다.‘왜 바보처럼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만 보고 있는 걸까?’예로부터 그리움과 얻지 못하는 사랑은 사람을 아프게 했다.지아는 힐끗 바라보고 커튼을 닫았다. 아무것도 줄 수 없기에 애초에 상대방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로 했다.하빈은 천천히 도윤에게 다가가 말했다.“보스, 사모님께서는 이미 주무시고 계세요, 이만 돌아가세요.”“조금만 더 있을게.”도윤은 눈 속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눈보라에 온몸을 맡긴 뒤 담배를 다 태우고 떠났다.다음 날 아침 일찍 지아는 하빈에게 아이를 맡기고 직접 은행에 가서 큰돈을 이체했다.지아는 어쩌면 은행에서 걸어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은행 직원들도 매우 예의 있게 다과도 미리 준비해 두었으며, 은행장이 직접 안내를 해주었다.은행장은 마지막까지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이면서 지아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며 지아가 가져갈 쌀 포대와 기름을 몇 개 더 건네주었다.지아가 문을 나섰지만 문밖은 텅 비어 있었다.‘괜한 생각이었나? 도윤이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고? 아니면 이미 내가 죽었다는 걸 받아들인 걸까?’눈보라를 맞으며 서 있던 지아는 조금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도윤에게 억압당할 때는 역겨웠지만, 정말 자신을 포기하자 지아는 마음 한구석에서 상실감을 느꼈다.이제 지아는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지아는 모교를 찾아갔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어린 얼굴을 바라보던 지아는 마치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 같았다.그때 한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지아 누나!”살짝 떨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지아는 저 멀리서 교복을 입은 소년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처음에 자신과 키가 비슷했던 소년은 몇 년 사이 부쩍 성장해 지아보다 키가 반 뽐 정도 더 컸다.평소에도 예의 바른 민이는 지난 며칠간 학업에
단순한 십 대 소년은 지난 몇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지아는 다정하게 말했다.“다른 나라에 출장 갔어. 예전에는 자주 왔었어?”“처음 1, 2년은 그랬어요. 직접 제 숙제도 도와주고 그림도 봐주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바빠서 그런지 작년에 본 게 거의 마지막이었고, 살도 많이 빠졌더라고요.”지훈은 머리를 긁적였다.“지아 누나, 아저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처음에는 하늘 아래 가장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연락하고 나니 말수가 적어서 그렇지 마음도 섬세하고 책임감도 있는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지아는 도윤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온 이유를 말했다.“전효 씨가 연락한 적 있어?”“형님 매일 보이지 않아요. 제가 처음 학교 다닐 때 몇 번 오더니 어디론가 사라졌어요.”“연락은 됐어?”지훈은 고개를 저었다.“예전 연락처만 있는데, 그 번호는 오래전에 지웠어요. 지난 2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젠 만나러 오지도 않아요.”지아는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고 이지훈은 걱정이 되었다.“지아 누나, 무슨 일 있어요?”“전효를 찾아야 할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그렇다면 섬으로 돌아가서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요? 지난 몇 년 동안 아저씨는 우리 섬을 아주 아름답게 만들었어요. 해항선도 열고, 섬에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었고, 어부들도 질서를 지키며 낚시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큰 변화가 생겼죠. 저랑 같이 가 보면 알 수 있어요.”“학교 안 가도 괜찮아?”지아는 멀리서 교과서를 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전 이미 학교 붙어서 수업에 가든 안 가든 상관없어요.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요.”예전에는 말수가 적고 덩치만 컸던 이지훈이 요즘은 성격도 훨씬 좋아졌고, 더 이상 우울하지 않고 햇살 가득 밝은 사람으로 변했다.지아는 아이와 함께 섬에 갔을 때 섬의 풍경에 정말 놀랐다.과거 이 섬은 교통이 불편할 뿐 아니라 전기조차 자급자족할 수 없었고, 산과 바다에 의지하는 원시적인 생활 습관이
언뜻 보기에도 도윤이 쓴 글씨가 너무 익숙했고, 거대한 벚나무에 적어도 수천 개 비단이 흩날리고 있었다.“지아 누나, 이건 아저씨가 쓴 거예요. 누나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요.”지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난 만수 아저씨 보러 갈게.”만수는 전보다 조금 더 젊어 보였고, 생활이 편해지니 사람들도 좋아진 것이 분명했다.지아가 왔다는 것을 안 만수는 열정적으로 맞이하며 곧장 닭장에서 닭 한 마리를 들고나왔다.“지아 왔구나, 오랜만이네. 마른 것 좀 봐라. 내가 닭 한 마리 잡아서 몸보신해 줄게.”거절할 수 없었던 지아는 주방으로 가서 만수를 도와줄 준비를 했다.집안의 부엌이 모두 현대식으로 되어 있고, 고기를 먹을 여유조차 없던 시절에 비하면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다.“아저씨, 전효 씨 온 적 있어요?”만수는 쌀을 도정하면서 말했다.“그 녀석 본지 오래됐는데 그래도 가끔씩 안부 전화 해줘.”지아의 눈이 반짝였다.“얼마나 자주요?”“글쎄, 두세 달에 한 번?”“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였어요?”“중양절, 분명히 기억나.”지아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올해 중양이 정확히 10월 23일이니까 최근에 연락을 했겠군요? 아저씨, 아주 중요한 부탁할 게 있어요.”“그런 말 하지 마. 네 덕분에 우리 섬이 잘 되어가고 있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게.”지아는 만수에게 몇 마디를 건네며 소망이와 함께 섬에서 지냈다.일단 이곳은 안전했고, 굳이 지아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도윤 외에도 아직 지아의 죽음을 노리는 적이 있었다.섬의 시설은 이미 완벽했고, 이곳에서 생활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지훈은 매일 소망과 함께 섬 곳곳을 누볐고 소망이도 섬을 무척 좋아했다.지아는 밀물과 썰물, 해가 지고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도윤이 곧 자신을 찾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마치 그림자처럼 마음에 드리워진 그 악마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전
민아의 얼굴은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간병인이 저녁 식사를 들고 와서 당부했다.“아가씨, 유산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몸 잘 추슬러야 해요. 많이 먹어요. 아직 젊으니까 곧 회복할 수 있어요. 다시 임신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가져가세요.”“아가씨, 저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 전 그저 일하는 사람일 뿐이잖아요.”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민아는 곧바로 쟁반에서 음식을 모두 들어 올리며 바닥에 쏟았다.“꺼지라고.”간병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잔해 조각들을 수거했다.민아는 밖에 날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비로소 지아의 상황을 이해했다.다만 의아했던 건 지아가 귀국했다는 걸 세찬이 이미 아는데 그걸 도윤에게 알리지 않았을까.도윤이 지아가 죽지 않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지아를 혼자 내버려둘 수 있겠나.‘아니면 이제 정말 정신 차렸나?’하지만 민아는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을 굳게 믿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더 큰 속셈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지아는 전화를 끊고 두 눈에 걱정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민아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걸까, 세찬과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행복한 사랑에 빠진 것 같지는 않았는데.’휴대폰에 민아로부터 또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일부러 밝은 척 웃는 내용일 줄 알았는데 화면에는 한 마디밖에 없었다.[이도윤 조심해.]지아는 조금 놀라서 서둘러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민아 쪽은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무슨 뜻일까? 민아가 뭔가 알고 있나?’ 지아는 안절부절못했다. ‘민아 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갑자기 휴대폰을 꺼버린 거지?’병원.민아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훔쳐 간 눈앞의 남자를 화난 표정으로 쳐다봤다. 훤칠한 키에 잘생기고 우아한 외모의 남자는 하는 짓마다 가관이었다.“강세찬, 내 폰 내놔!”세찬은 휴대폰을 꺼버리고 누군가 맞을까 봐 걱정하지도 않는지 바로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김 비서, 내가 남의 일에 너무
지아는 이 메시지를 받은 후 마음이 불안했다.민아는 세찬과 같이 있으니 도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아마도 민아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경고한 것 같았다.‘세찬은 민아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지아는 돌아가고 싶지만 전효의 행방을 놓칠까 봐 두려웠다.밤낮으로 민아와 연락되지 않자 지아는 초조해졌고, 민아를 그대로 놔둘 수 없었다.만수에게 거듭 당부한 뒤, 소망을 섬에 남겨두고 혼자 배를 타고 몰래 A시로 돌아왔다.도윤은 이미 지아가 섬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상태였다.도윤은 섬에서 지아의 모든 행동을 다 지켜보고 있었지만 지아가 섬에서 지내면서 전효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고 몰래 돌아간 이유를 알 수 없었다.A시는 아주 추웠고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아는 택시를 타고 민아의 아파트로 향했다.민아가 영업사원이 된 후 매입한 집은 방 2개, 거실 1개로 크지 않지만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고, 지아가 자주 드나들어 경비원들도 다 알아보았기에 출입을 막지 않았다.지아는 먼저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잔뜩 긴장하며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갔다.방은 어두웠고 공기 중에 오랫동안 사람이 없었던 흔적이 가득했다.불을 켜자 현관에 여성용 샌들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미 겨울인데 왜 아직도 샌들이 있을까?답은 딱 하나였다.여름에 민아는 이 집을 떠난 이후로 이곳에 살지 않았다.지아는 다시 경비원을 찾아 물었다.“민아 씨요? 여기 자주 오지 않았어요. 연애하는지 처음 한두 달은 보이다가 나중에는 돌아오는 텀이 점점 길어지더라고요. 집을 내놓지 않겠냐고도 물어봤어요. 여기 위치도 좋고, 집값도 올라서 팔면 큰돈 벌 수 있거든요.”“혹시 남자 친구를 본 적 있어요?”지아는 계속 물었다.“남자를 몇 번 본 적은 있는데 남자 친구인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보름 전에 민아 씨가 물건 가지러 왔을 때 배가 살짝 나온 걸 봐서 좋은 일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지아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지아 역시 아이를 두 번이나 잃은 아픔을 경험한 엄마이기 때문에 민아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지아는 더욱 가슴이 아프고 걱정이 되었다.민아의 성격상 세찬과 정상적인 관계였다면 아이를 잃었어도 지아에게 말했을 것이다.세찬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건 좋은 진전이 없다는 의미였다.서로 마음이 같지 않은 관계의 결말은 어떨까?지아는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민아를 찾고 싶었다.티위 팰리스는 이 도시에서 가장 비싼 건물이었다.마친 그곳에 지아에게 주려던 도윤의 집도 있었지만 지아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그런 곳은 집주인이 아니면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렇게 쉽게 속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집주인인 지아를 본 부동산 관리인은 매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지아는 대충 핑계를 대고 세찬의 집 번지수를 알아냈다.공교롭게도 지아의 집은 1층이고 세찬의 집은 꼭대기 층이라 같은 건물이었다.지아는 이곳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세찬과 마주친 적도 없었다.이제 세찬의 주소를 알아도 지아는 자신의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함부로 집에 들어설 수 없었다.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부자이거나 재력가, 아니면 연예계 톱스타들이었고, 입주율은 60퍼센트에 불과했다.이 시간대에는 불이 켜진 방이 많지 않았다.건물은 총 7층에 매 층마다 집이 한 채였다. 맨 꼭대기에 있는 거실과 침실에 불이 켜져 있어 세찬의 집이 입주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아는 저 멀리서 눈을 쓸고 있는 청소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현금 20만 원을 꺼냈다.“아줌마, 부탁이 있어요.”돈에 이끌린 청소부는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지아는 계단에 숨어 아줌마가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문이 열렸다.잠옷 차림의 세찬은 전에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었다.“선생님, 방금 한 집주인께서 아이가 길을 잃었다며 신고를 했는데, 아이가 너무 작아서 동을 잘못 들어갔는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키가 이 정
그날 밤 지아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어떤 방법으로 민아를 도울 수 있을지 몰라 고민했다.민아는 자의로 세찬의 곁에 남은 걸까?아니면 자신처럼 도망치려던 걸까?생각해 보니 민아의 의견을 직접 물어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다음 날부터 지아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세찬의 행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민아는 얼마 전 유산을 한 뒤 집 밖을 나서지 않고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것이다.지아는 매일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입이 무거운 아주머니에게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일주일이 지났고 날짜를 세어보니 민아의 유산한 지 보름 정도 지났고 민아의 성격상 곧 집을 떠날 것 같았다.지아가 6일째 세찬을 따라다니던 어느 날, 세찬은 도윤을 불러 술 한잔하자고 했다.세찬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힘들어했다.“제수씨 설마 자기가 변장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말하며 세찬이가 던진 사진들 속엔 전부 지아가 세찬을 따라다니는 모습이었다.사진에서 살짝 내민 작은 머리가 더 귀여워 보였다.“아니면 내가 그렇게 한가해서 매일 그 여자랑 같이 다니는 줄 아는 거야?”세찬은 지아가 자신이 이미 눈치챈 사실을 알아차릴까 봐 경호원들에게 지아의 스토킹을 모른 척 하도록 특별히 말해둔 상태였다.“네 여자는 네가 데려가. 난 놀아줄 시간 없으니까.”도윤은 그 사진들을 보물인 양 거둬갔다.“원본은?”세찬은 도윤을 흘겨보았다.“그렇게까지 할 일이야?”“무슨 상관이야? 내 아내 사진 내가 가지겠다는데.”도윤은 부끄럽기보다는 자랑스러웠다.이렇게 귀여운 지아를 보는 것도 드물었다.세찬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답이 없어. 너희 부부 미친 것 같아. 그 여자는 나를 쫓고, 너는 그 여자를 쫓아. 차라리 둘이 놀지 그래?”“나처럼 되면 너도 이해가 될 거야.”세찬은 와인 잔을 흔들더니 우아하게 와인을 맛보며 말했다.“이해도 안 되고 이해하기도 싫어. 여자는 원래 얌전할 땐 달래고 그러지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