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아의 얼굴은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간병인이 저녁 식사를 들고 와서 당부했다.“아가씨, 유산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몸 잘 추슬러야 해요. 많이 먹어요. 아직 젊으니까 곧 회복할 수 있어요. 다시 임신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가져가세요.”“아가씨, 저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 전 그저 일하는 사람일 뿐이잖아요.”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민아는 곧바로 쟁반에서 음식을 모두 들어 올리며 바닥에 쏟았다.“꺼지라고.”간병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잔해 조각들을 수거했다.민아는 밖에 날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비로소 지아의 상황을 이해했다.다만 의아했던 건 지아가 귀국했다는 걸 세찬이 이미 아는데 그걸 도윤에게 알리지 않았을까.도윤이 지아가 죽지 않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지아를 혼자 내버려둘 수 있겠나.‘아니면 이제 정말 정신 차렸나?’하지만 민아는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을 굳게 믿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더 큰 속셈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지아는 전화를 끊고 두 눈에 걱정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민아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걸까, 세찬과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행복한 사랑에 빠진 것 같지는 않았는데.’휴대폰에 민아로부터 또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일부러 밝은 척 웃는 내용일 줄 알았는데 화면에는 한 마디밖에 없었다.[이도윤 조심해.]지아는 조금 놀라서 서둘러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민아 쪽은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무슨 뜻일까? 민아가 뭔가 알고 있나?’ 지아는 안절부절못했다. ‘민아 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갑자기 휴대폰을 꺼버린 거지?’병원.민아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훔쳐 간 눈앞의 남자를 화난 표정으로 쳐다봤다. 훤칠한 키에 잘생기고 우아한 외모의 남자는 하는 짓마다 가관이었다.“강세찬, 내 폰 내놔!”세찬은 휴대폰을 꺼버리고 누군가 맞을까 봐 걱정하지도 않는지 바로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김 비서, 내가 남의 일에 너무
지아는 이 메시지를 받은 후 마음이 불안했다.민아는 세찬과 같이 있으니 도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아마도 민아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경고한 것 같았다.‘세찬은 민아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지아는 돌아가고 싶지만 전효의 행방을 놓칠까 봐 두려웠다.밤낮으로 민아와 연락되지 않자 지아는 초조해졌고, 민아를 그대로 놔둘 수 없었다.만수에게 거듭 당부한 뒤, 소망을 섬에 남겨두고 혼자 배를 타고 몰래 A시로 돌아왔다.도윤은 이미 지아가 섬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상태였다.도윤은 섬에서 지아의 모든 행동을 다 지켜보고 있었지만 지아가 섬에서 지내면서 전효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고 몰래 돌아간 이유를 알 수 없었다.A시는 아주 추웠고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아는 택시를 타고 민아의 아파트로 향했다.민아가 영업사원이 된 후 매입한 집은 방 2개, 거실 1개로 크지 않지만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고, 지아가 자주 드나들어 경비원들도 다 알아보았기에 출입을 막지 않았다.지아는 먼저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잔뜩 긴장하며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갔다.방은 어두웠고 공기 중에 오랫동안 사람이 없었던 흔적이 가득했다.불을 켜자 현관에 여성용 샌들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미 겨울인데 왜 아직도 샌들이 있을까?답은 딱 하나였다.여름에 민아는 이 집을 떠난 이후로 이곳에 살지 않았다.지아는 다시 경비원을 찾아 물었다.“민아 씨요? 여기 자주 오지 않았어요. 연애하는지 처음 한두 달은 보이다가 나중에는 돌아오는 텀이 점점 길어지더라고요. 집을 내놓지 않겠냐고도 물어봤어요. 여기 위치도 좋고, 집값도 올라서 팔면 큰돈 벌 수 있거든요.”“혹시 남자 친구를 본 적 있어요?”지아는 계속 물었다.“남자를 몇 번 본 적은 있는데 남자 친구인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보름 전에 민아 씨가 물건 가지러 왔을 때 배가 살짝 나온 걸 봐서 좋은 일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지아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지아 역시 아이를 두 번이나 잃은 아픔을 경험한 엄마이기 때문에 민아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지아는 더욱 가슴이 아프고 걱정이 되었다.민아의 성격상 세찬과 정상적인 관계였다면 아이를 잃었어도 지아에게 말했을 것이다.세찬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건 좋은 진전이 없다는 의미였다.서로 마음이 같지 않은 관계의 결말은 어떨까?지아는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민아를 찾고 싶었다.티위 팰리스는 이 도시에서 가장 비싼 건물이었다.마친 그곳에 지아에게 주려던 도윤의 집도 있었지만 지아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그런 곳은 집주인이 아니면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렇게 쉽게 속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집주인인 지아를 본 부동산 관리인은 매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지아는 대충 핑계를 대고 세찬의 집 번지수를 알아냈다.공교롭게도 지아의 집은 1층이고 세찬의 집은 꼭대기 층이라 같은 건물이었다.지아는 이곳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세찬과 마주친 적도 없었다.이제 세찬의 주소를 알아도 지아는 자신의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함부로 집에 들어설 수 없었다.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부자이거나 재력가, 아니면 연예계 톱스타들이었고, 입주율은 60퍼센트에 불과했다.이 시간대에는 불이 켜진 방이 많지 않았다.건물은 총 7층에 매 층마다 집이 한 채였다. 맨 꼭대기에 있는 거실과 침실에 불이 켜져 있어 세찬의 집이 입주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아는 저 멀리서 눈을 쓸고 있는 청소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현금 20만 원을 꺼냈다.“아줌마, 부탁이 있어요.”돈에 이끌린 청소부는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지아는 계단에 숨어 아줌마가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문이 열렸다.잠옷 차림의 세찬은 전에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었다.“선생님, 방금 한 집주인께서 아이가 길을 잃었다며 신고를 했는데, 아이가 너무 작아서 동을 잘못 들어갔는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키가 이 정
그날 밤 지아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어떤 방법으로 민아를 도울 수 있을지 몰라 고민했다.민아는 자의로 세찬의 곁에 남은 걸까?아니면 자신처럼 도망치려던 걸까?생각해 보니 민아의 의견을 직접 물어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다음 날부터 지아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세찬의 행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민아는 얼마 전 유산을 한 뒤 집 밖을 나서지 않고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것이다.지아는 매일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입이 무거운 아주머니에게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일주일이 지났고 날짜를 세어보니 민아의 유산한 지 보름 정도 지났고 민아의 성격상 곧 집을 떠날 것 같았다.지아가 6일째 세찬을 따라다니던 어느 날, 세찬은 도윤을 불러 술 한잔하자고 했다.세찬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힘들어했다.“제수씨 설마 자기가 변장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말하며 세찬이가 던진 사진들 속엔 전부 지아가 세찬을 따라다니는 모습이었다.사진에서 살짝 내민 작은 머리가 더 귀여워 보였다.“아니면 내가 그렇게 한가해서 매일 그 여자랑 같이 다니는 줄 아는 거야?”세찬은 지아가 자신이 이미 눈치챈 사실을 알아차릴까 봐 경호원들에게 지아의 스토킹을 모른 척 하도록 특별히 말해둔 상태였다.“네 여자는 네가 데려가. 난 놀아줄 시간 없으니까.”도윤은 그 사진들을 보물인 양 거둬갔다.“원본은?”세찬은 도윤을 흘겨보았다.“그렇게까지 할 일이야?”“무슨 상관이야? 내 아내 사진 내가 가지겠다는데.”도윤은 부끄럽기보다는 자랑스러웠다.이렇게 귀여운 지아를 보는 것도 드물었다.세찬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답이 없어. 너희 부부 미친 것 같아. 그 여자는 나를 쫓고, 너는 그 여자를 쫓아. 차라리 둘이 놀지 그래?”“나처럼 되면 너도 이해가 될 거야.”세찬은 와인 잔을 흔들더니 우아하게 와인을 맛보며 말했다.“이해도 안 되고 이해하기도 싫어. 여자는 원래 얌전할 땐 달래고 그러지
도윤은 약간 당황했다.“블랙X 출신이라고?”“정확히 말하면 반역자야. 2년 전에 이미 조직을 탈퇴했고 지금은 블랙X 현상금 리스트에도 올라가 있어서 블랙X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고 있어. 아직은 행방을 알 수 없어.”세찬이 와인 한 잔을 더 따랐다.“둘째 형한테도 지켜보라고 이미 얘기했으니까 무슨 소식 있으면 제일 먼저 알려줄게. 그러는 너는 평생 여자만 쫓아다니면서 살 거야?”“지아 상황이 좀 특별해.”도윤의 손가락이 지아의 얼굴이 대부분 드러난 사진을 어루만지며 눈빛에 애정이 가득 차 있었다.“지아를 잃는 아픔을 너무 많이 맛봐서 이제는 제대로 지키고 싶을 뿐이야.”“참 애틋한 사랑이다.”세찬은 비웃었다.“너한테서 더는 예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넌 절대 여자랑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게 좋을 거야.”도윤은 가볍게 웃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듯이 말했다.“이 사진...”“사진이 왜?”도윤은 더미에서 사진 두 장을 꺼냈는데, 두 사진의 주인공은 지아였지만 도윤의 손가락은 배경에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같은 사람이야!”세찬이 자세히 비교해 보니 상대방은 옷차림은 물론 외모도 달랐지만, 체형은 물론 왼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모습까지 똑같았다.다른 사람들은 이런 사진을 보고도 눈치채지 못하지만 도윤 일행은 남들보다 예민했기에 선명하게 찍힌 사진을 스캔하자마자 이상한 걸 알아차렸다.“원본은 어딨어?”“바로 보내달라고 할게.”“지아는 어디 있어?”“걱정하지 마. 나랑 같이 바에 왔고, 들어올 때는 로비에서 경호원이 지켜보고 있어.”당시 지아는 세찬을 미행하고 있었는데, 도윤은 자신의 사람들이 노출될까 봐 세찬의 사람들에게 차례로 지아를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하루에 두 곳만 오갈 테니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도윤은 사진을 통해 누군가 지아를 미행하고 있다는 단서를 얻었다. 분명히 따라다니는 것이다.지아는 세찬을 따라 바로 왔다. 지아는 세찬의 생활 패턴을 파악해 민아를 구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세
지아는 반응하기도 전에 남자에게 끌려갔고, 키가 큰 남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이거 놔요!”지아가 입을 열었다.“여긴 위험해요. 여자 혼자 있는 건 위험하다고요.”남자는 더 빨리 달렸다.도중에 그들은 웨이터와 부딪혀 음료를 쏟으며 난장판을 만들었다.세찬의 경호원들이 뒤를 따랐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남자가 지아의 손을 꽉 잡아당기자 지아는 미간을 찡그리며 차갑게 말했다.“놓으라고!”“아가씨를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내가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게요.”남자는 지아를 골목길로 데려갔고, 지아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남자의 힘이 워낙 세서 힘겨운 싸움이 되면 지아가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지아의 눈은 골목에 버려진 삽에 향했고, 그녀는 곧장 삽을 집어 들고 남자의 머리를 향해 세게 내리쳤다.남자는 재빨리 반응하며 지아를 놓아주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난 그저 당신을 돕고 싶을 뿐이에요.”지아의 얼굴은 차가워졌다.“저리 비켜요.”그때 갑자기 쓰레기통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 두 개가 튀어나와 지아를 향해 달려들었다.지아는 옆으로 피하며 상대 남자를 향해 삽을 휘둘렀다.아니나 다를까, 이 남자는 자신을 데려가려고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지아는 처음부터 남자에게 살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 킬러 같았다.그들은 애초에 지아를 노린 것이었다.“당신들 누구야?”남자 몇 명이 골목 입구를 막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이 손목을 돌리며 말했다.“보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그냥 처리해요.”“소지아 씨, 미안합니다.”지아를 납치한 남성의 손에는 총구에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이 들려 있었다.알고 보니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지아는 눈앞에 있는 몇 명의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누가 보냈어?”“그건 알 필요 없어요.”남자는 방아쇠를 당겼다.탕!조용한 골목에 큰 소리가 울려 퍼지고 피가 튀었다.남자는 가슴에 피
도윤은 골목 어귀에 피가 흐르고 멀리서 시체 여러 구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눈앞이 새까맣게 변해 쓰러질 뻔했다.‘지아가 죽었나?’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세찬은 빠르게 다가와 시체를 확인한 후 말했다.“걱정하지 마, 네 아내는 없으니까.”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제야 몸을 일으켜 죽은 사람을 살펴보았다.“방금 죽었어.”경호원 중 한 명이 알아봤다.“이 사람이 소지아 씨를 데려갔는데 저희가 빠르게 쫓아갔지만 당시 술집이 엉망이 돼서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지아는 사라지고 남자는 죽었다.‘지아가 한 건가?’하지만 총도 없는 지아가 어디서 무기를 구했을까?“그럴 리가 없어. 이 상처들은 모두 단발성 사격으로, 사격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해. 분명 제삼자가 있어.”오늘 밤의 사건은 도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지아가 이런 일을 당한 게 자기 때문인 것 같아 만나러 나온 걸 후회했다.“멀리 못 갔을 거야.” ...전효는 줄곧 달려 지아를 데리고 외곽으로 가서 차를 버렸다.이미 다른 차 한 대를 숨겨둔 상태였다.“차에 타.”지아는 전효를 무조건 믿었고, 차는 넓은 숲속으로 들어갔다.전효가 경고했다.“이어지는 길은 조금 울퉁불퉁하니 꽉 잡아.”“네.”두 사람은 가는 길에 말을 하지 않았다. 첫째는 전효가 애초에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고, 둘째는 두 사람의 사이가 그저 평범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숲은 온통 비포장도로였고, 차는 심하게 흔들리며 시야는 헤드라이트로는 근거리 몇 미터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좋지 않았다.지아는 손잡이를 꼭 붙잡고 마침내 물었다.“해경이는 괜찮아요?”“잘 지내. 곧 만나게 될 거야.”지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다행이네요. 전효 씨, 2년 동안 수고했어요.”“그때는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설명할 방법이 없었고, 쫓기는 상황에서 감히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아이와 함께 떠돌아다닐 수밖에
지아는 전효에게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하빈의 번호였고 지아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아가씨, 지금 어디세요?”하빈의 목소리는 조금 불안했다.지아가 아이를 데리고 섬에 가기 전에 하빈의 월급을 정산했는데, 어떻게 이 시점에 연락이 올 수 있을까?“왜요?”“강욱 형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요. 얼른 와주세요.”지아는 아직 술집에서 도윤이 나타난 이유를 파악하기 전에 강욱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나온 반응은 걱정이었다.“무슨 일이에요?”“강욱 형님이 요 며칠 아픈 데다 오늘은 술까지 많이 마셔서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 보냈는데, 자꾸 아가씨 보고 싶다고 중얼거려요. 아가씨 어디 계세요? 와주실 수 있어요?”지아는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안다고 해도 아무한테나 말할 수도 없었다.“지금은 안 돼요. 강욱 씨 상태는 어때요?”“급성 중증 알코올 중독으로 상부 위장에 출혈이 생겨서 지금 대량의 피를 토하고 있어요. 응급실에 들어가기는 했는데 아직 안 나왔어요. 아가씨 얼굴 보기도 전에 잘못될까 봐 걱정돼서요.”지아는 강욱이 왜 이 정도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신 건지 알 수 없었다.“아가씨, 사실 강욱 형님은 항상 아가씨를 좋아했어요. 아가씨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그 사랑을 가슴에 묻어두었는데, 아가씨를 만나지 못하면 평생 한으로 남을 거예요.”지아는 마음속으로 갈등했다. 누가 방금 만난 사람들을 보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아는 지금 목숨이 위태로웠다.“하빈 씨, 지금은 못 가요. 미안해요.”그렇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미 자신도 위험에 처해 있는데 아이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전효는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쳐다보았다.“누구 전화야?”“친구, 나쁜 사람도 아니고 우리한테 위협이 되는 사람도 아니에요.”“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믿고 너만 믿어. 지금 우린 안전하지 않아. 그래서 이번에 위험을 무릅쓰고 너에게 접근한 거야.”지
소임호는 눈가가 붉어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울고 있는 시월을 바라보았다.그 소녀는 한때 소임호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아빠,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아빠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시월은 병상 앞에서 한참을 울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어서 마음속에 의문을 품었다. “아빠...?”시언은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는 증오를 억누르고,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월아, 아버지는 지금 많이 허약하셔.”“아빠, 그럼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집안일은 제가 잘 챙길게요.”시월은 한참 동안 위로의 말을 전했지만, 소임호는 단지 짧게 ‘그래’라는 대답만 했다. 다만, 시월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침대를 꽉 잡은 소임호의 손등에는 불거진 핏줄이 선명했다. 소임호는 시월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하지만 과거 시월이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리면, 소임호는 결코 마음이 평온할 수 있었다. ‘우리 시영이는 이 냉혈한 때문에 죽임을 당했어. 시영이는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났고, 죽기 전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 심지어 시신을 거둘 사람도 없었다고.’소임호는 많은 풍파를 겪은 사람이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소임호는 눈을 감고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지금은 참아야 해. 지아의 계획이 아직 진행 중이니, 절대로 폭발해서는 안 돼.’ 소씨 가문 사람들이 시월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이익과 기회를 제공했는지를 소임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시월은 이미 보통 사람이 백 년을 노력해도 얻지 못할 만큼의 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월은 전혀 만족하지 못했고, 끝까지 탐욕을 부렸다. “큰오빠, 할 말이 있어요.”“잘됐네, 나도 마침 할 말이 있던 참이야.”두 사람은 한 명씩 방을 나섰고, 시후는 거실 소파에 앉아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빠, 오빠랑 연락이 안 되는 동안 우리 소씨 가문에 더
시후는 약간 놀랐다. 조경선을 모든 게 들통나자마자 꼬리를 자르고 도망쳤는데, 오히려 소시월은 도망치지 않고 시후에게 전화를 걸었으니 말이다. ‘지아 말이 맞았어. 소시월은 독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야망도 끝이 없었던 거라고.’ 시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그래, 오빠야, 무슨 일이야?] “오빠, 그동안 연락이 안 돼서 정말 걱정했어요. 괜찮은 거예요?” [난 괜찮아.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버지를 구출하려고 노력 중이었거든.]“그럼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구했어요?”시월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만약 시후가 진실을 알지 못했다면, 시월의 태도와 과거의 일을 연결 짓지 못했을 것이었다. ‘정말 무서운 여자였구나.’ ‘나이는 어리지만,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야망과 담력을 가지고 있었어.’ ‘이런 사람을 그냥 죽여버리는 건, 너무 가벼운 처벌이야!’ 시후는 지아가 미리 알려준 대로 대처했고, 시월은 즉시 소임호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안전하지 않으니, 올 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 괜히 문제를 더 키울 수도 있으니까.] “오빠,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후, 시후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아야, 역시 네 말이 맞았어. 소시월은 도망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 계획을 진행하려고 하는 중이었다고.” “소시월은 아주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왔어요. 저는 죽이려 한 것만 봐도, 소시월이 얼마나 철저한지 알 수 있잖아요. 그 여자는 절대 본인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거예요.” “제가 할머니의 사진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소시월한테 속고 있었을 거예요. 그 여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을 거라고요!” “그렇게 독한 사람은 죽이는 것도 아까워!”시하는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내 다리, 내가 잃어버린 지난 세월이 다 소시월 때문이었어! 그리고 시영이의 죽음도... 다 그 여자 때문이었다고! 나는 그 여자를 죽이
소씨 가문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고, 시월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비록 지금은 소임호의 신분을 입증할 절대적인 증거가 없었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은 이미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이에 따라 소임호의 혈통은 소씨 가문 내에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시월과 조경선의 원래 계획은 소씨 가문을 후손 없이 무너뜨려 소씨 가문의 대부분 재산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 재산은 실로 어마어마했으니 말이다.게다가 소씨 가문 사람들이 시월은 아무리 아껴주어도, 결국 시월은 시집가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시월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저 한몫의 축의금뿐이었고, 그것마저 심씨 가문으로 가져가야 할 것이었다.게다가 결혼한 뒤에는 시월이 남자의 부속물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시월이 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는 단지 조경선을 위해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시월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는데, 조경선처럼 사랑에 집착하는 사람과는 달리, 시월은 훨씬 더 영리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게 바로 사랑이야.’ 물질적인 안정만이 시월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제공할 수 있었다. 조경선은 시월이 친딸이라고 주장했지만, 시월은 이미 자신의 출생 비밀을 철저히 파헤쳤다. 조경선은 평생 소임호만을 사랑하며 집착했기에, 다른 남자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사실, 시월은 생모는 깊은 산골에 살던 농부의 아내였다. 시월은 집안의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했지만, 마음이 약해진 시월의 생모는 시월을 산에 버렸고, 마침 산속으로 숨어들었던 조경선이 그녀를 발견해 데려간 것이었다. 조경선은 그 순간부터 복수를 위한 계획을 마음속에 세웠다.시월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난 후 더욱 노력했고, 조경선이 자신을 산속에서 데려온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비록 시월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노력으로 부족함을 메웠다. 게다가 소씨 가문의 풍부한 자원과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무사히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한편, 도윤은 혼란스러운 예린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예린은 총알에 스쳐 가벼운 상처만 입었지만, 표정은 마치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공허하고 무기력했다. 예린은 차량 뒷좌석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온몸이 부서질 듯한 상태였다. 진실이 주는 충격은 예린에게 너무도 컸다. 그녀의 마음은 죄책감과 혼란으로 가득 찼는데, 고개를 들어 도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빠, 그때 날 죽이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구나? 이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결과라는 걸 알았으니까.” 예린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나도 이렇게 되길 원치 않았어. 나는 소 선생님을 돕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소 선생님의 여동생을 죽일 뻔했어. 나는 죽어야 해!” 도윤은 스스로를 질책하는 예린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신도 아니고, 미래를 내다볼 능력도 없어. 내가 네 목숨을 살려둔 건,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다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뜻이었어.”도윤이 예린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예린아, 우리는 원래부터 정상적인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했잖아. 우리 부모님의 잘못된 선택이 우리에게도 왜곡된 마음을 심어줬어. 그래서... 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쉽게 하게 된 거지. 오빠도 과거에는 너처럼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 지아가 어떤 벌을 내리든, 나는 받아들일 생각이야.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서거든.”“잘못은 잘못이고, 그걸 변명할 수는 없어. 하지만 과거에 얽매여 계속 괴로워한다면, 소 선생님이 널 구할 필요가 있었겠어?” 예린은 시후의 이름이 언급되자, 눈동자에 희미한 생기가 돌았다. “그분의 선의를 배신하지 마. 넌 살아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 과거가 아무리 어둡더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살을 볼 수 있을 거야.” “예린아, 앞으로는 반듯하게 살아가야 해.” “오빠
시후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괜찮아. 일단 진정 좀 해봐.” 시후가 도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많이 흥분한 것 같은데, 어서 데려가서 좀 쉬게 해줘.” 도윤의 입장에서 계속 이곳에 머무는 것은 이미 불편한 일이었다. 소씨 가문의 남자들이 맹수처럼 당장이라도 도윤을 물어뜯을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도윤의 목적은 예린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었는데, 예린은 고집이 세고 완고했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 뻔했다. “장인어른, 몸조리 잘하세요.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도윤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소임호는 도윤에게 베개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소임호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는데, 자기 딸이 밖에서 고생하며 학대받을 때, 도윤이 그저 방관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지아가 급히 다가가 소임호를 달랬다.“아빠, 진정하세요. 아직은 몸이 회복되지 않으셨잖아요.” “이름이 지아라고 했나?”소임호는 지아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지아는 환희와 많이 닮아 있었지만, 눈매와 이목구비는 소임호와 조경숙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네, ‘지혜 지’에 ‘맑을 아’예요.”“아주 훌륭한 이름이구나.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겠니... 너를 잘 키워주신 양아버지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내가 직접 방문할 기회가 없어서 아쉬울 따름이구나.” “제 양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이 소식을 들으신다면, 저를 가족들과 만나게 해 주신 것을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지아는 이 방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었지만, 가장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비록 가족을 만나던 순간에는 눈물을 참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미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빠, 제가 처방전을 써드릴게요. 그대로만 복용하시면 곧 건강을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지아가 처방전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데... 다들 소시월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세요?” 지아는 무심한 듯 물었지만, 소시월은 소씨 가문 사람
지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이번 생에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해요.” “지아야, 소시월이 그렇게 악랄한 사람인 줄 몰랐어. 그 X은 너를 몇 번이고 암살하려 했고, 우리 가족을 산산조각 냈어!” “전에 오빠가 너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걸 용서해 줄 수 있겠어?” “여러분이 제 가족이라는 걸 몰랐을 때도, 저는 한 번도 오빠들을 원망한 적 없어요.” 가족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고, 모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지만, 이예린만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충격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말도 안 돼. 소지아가 날 속였다니, 어떻게 날 속인 거지?”예린은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시후는 예린이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괜찮아? 이만 일어나.”예린은 시후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고, 지아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모든 게 내 잘못이에요.” 본래 예린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도윤이 그녀의 손과 발의 힘줄을 끊었을 때조차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예린은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머리를 몇 번 조아리자, 예린의 이마에서는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고, 머리뼈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뚜렷하게 울렸다. “그러지 말고 일어나서 이야기해.” 하지만 시후의 말은 예린의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예린은 지아의 손목을 붙잡은 채, 피와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언니, 미안해요. 저도 속아서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거예요. 용서는 바라지도 않을게요. 그냥 저를 죽여주세요. 제발 죽여주세요!” 예린은 자신이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느꼈고, 죽음을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지아는 예린을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후회로 가득 찬 예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너는 분명히 죽어 마땅하지만,
지아는 예린과 시후 사이에 얽힌 사연을 알지 못했기에, 예린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 다소 놀라웠다. 하지만 예린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지아는 특별히 실망하지도 않았다. 예린의 정체를 고려하면, 지아의 입장에서는 예린이 죽는 게 마땅했겠지만, 도윤의 입장에서 예린이 죽었다면, 그는 분명히 괴로웠을 터였다. 그래서 지아는 예린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예린의 등장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지아가 방금 던진 말의 의미를 되새기던 찰나, 시후가 예린에게 물었다.“괜찮은 거야?”예린은 상처를 입은 곳에 붕대를 감고 있었으나, 지아는 공기 중에 희미하게 풍기는 피비린내를 감지했다. “전 괜찮아요.” “아버지, 이 사람이 아버지를 구한 사람이에요. 만약 이 사람의 전폭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저도 손쓸 수 없었을 거예요.” 소임호는 지금 모든 관심이 지아에게 쏠려 있었지만, 예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워요. 꼭 보답하겠습니다.” 예린은 소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유난히 어색해 보였고, 손을 연신 내저을 뿐이었다.“아니에요, 보답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소임호의 시선이 다시 지아에게 향했다.“소 선생님, 방금 한 말이 사실인가요?” 그들은 조경선과 심세호를 의심했지만, 정작 그들이 오랫동안 사랑했던 딸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시월이 그들 앞에서 너무도 완벽한 연기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윤은 예린을 한 번 힐끗 본 뒤 성큼성큼 걸어왔다.“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윤은 지금 지아의 감정이 아주 격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아를 먼저 의자에 앉힌 후 예린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무릎 꿇고 들어!” 그 순간, 예린은 긴장감에 휩싸였는데, 소씨 가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결과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기에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었다. 도윤은 지아의 기구하고 복잡한 출생의 비밀과 그녀가 국내에서
지아는 뒤돌아 도윤을 한 번 바라보았고, 도윤은 지아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조금 있다가 바로 갈게.” 지아는 아버지를 빨리 만나고 싶었기에 더는 따지지 않고, 시후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시언과 시후는 이미 소임호의 곁에 있었는데, 지아가 방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모두 충혈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만난 기쁨과 과거의 날들에 대한 후회가 뒤섞여 있었다. 만약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그 많은 고난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 모양이었다.지아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그녀의 눈앞에는 소임호가 있었다. 소임호는 이전에 봤던 사진과 영상보다는 훨씬 젊어 보였지만, 몸 상태는 더 약해 보였고,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눈앞의 소임호가 바로 지아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아버지였다.소임호를 눈앞에서 보게 된 순간, 지아는 그대로 멈춰 서버렸다. 마치 누군가 지아의 움직임을 봉인한 것처럼 말이다. 지아는 소계훈이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수없이 상상해 왔다.‘내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실까?’‘그분들은 날 사랑해 주실까?“지아야, 왜 그래?”시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지아를 깨웠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분이... 소 대표님이신가요?”두 사람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끌어당겼고, 소임호는 지아를 보자마자 멈칫했다.시월은 지아를 본떠 성형했지만, 지아와 똑같이 될 수는 없었다. 지아의 얼굴은 환희와 너무 닮아 있었다. 하지만 환희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다른 자녀들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다.다만, 소임호만큼은 환희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가 환희와 함께 했던 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그쪽은...”소임호가 지아를 보자마자 몸을 일으키려 하자, 시언이 부드럽게 설명했다.“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소지아 선생님이에요. 저희와 의형제를 맺기도 했죠.”“이번에도 지아 덕분에 많은 도움을
많은 일들은 한 번 실마리를 풀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물 흐르듯이 진행되기 마련이다.도윤은 살아남은 예린이 직접 진실을 듣기를 바랐다. 한편, 지아는 이미 부남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는데,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부남진의 기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이렇게 오랫동안 전화 한 통도 없고, 너 때문에 걱정돼 죽을 뻔했구나. 그래도 도윤이가 너랑 있었다니 참 다행이었어.] 지아의 치료 덕분에, 부남진의 건강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목소리에서도 힘이 넘쳤다. 가족의 목소리를 들은 지아는 벅찬 감정에 휩싸였다. “할아버지, 정말 큰 소식이에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거예요.” 부남진의 목소리가 한층 진지해졌다.[좋은 소식이야, 나쁜 소식이야?]“좋은 소식이에요. 저, 친아빠를 찾았어요!” 쨍그랑!지아는 수화기 너머에서 컵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부남진이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놓친 것이 분명했다. [얘, 정말이니? 거짓말 아니지?]“더 일찍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복잡하던 상황이 이제야 조금 안정됐어요.”지아는 모든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했고, 부남진은 감격에 겨워했다.부남진에게 있어서 이 소식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과 같았다. 특히 지아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혈육이었다는 사실에 눈물이 차오를 정도로 기뻤다. 하지만 소임호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 부남진의 표정에는 곧장 걱정이 어렸다.‘그 아이는 유일한 내 혈육이야!’[지아야, 네 아버지는 좀 어떠니? 많이 다친 게야?]“할아버지, 오빠가 방금 아빠를 구해냈어요. 지금 당장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 같아요. 남은 치료는 저한테 맡겨주세요.”지아의 차분한 목소리에, 부남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래, 네가 있다니 안심이구나. 지아야, 네 아버지는 네가 잘 보살펴주길 바란다.]“네,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 이만 들어가 봐라.]수화기 너머의 부남진은 기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