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조용히 지아를 안은 채 조금도 밀어붙이지 않았다.“아가씨, 일이 이렇게 됐으니 다른 얘기는 나중에 해요. 지금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입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몸을 맡기는 게 싫은 건 알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도윤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오늘 밤 일은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오늘 밤이 지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예전과 같아요. 제가 싫으면 차라리... 하빈이나 다른 사람을 불러도 되고...”지아는 손을 뻗어 도윤의 입을 가린 채 다소 질책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차라리 당신이었으면 좋겠어요.”적어도 그들은 서로를 알고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지아는 정말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입으로는 싫다고 말했지만, 몸은 본능적으로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듯 도윤에게 바짝 붙었다.지아는 더 이상 남자의 가느다란 허리를 팔로 감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그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도윤과 침대에서 사랑에 빠졌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미치도록 원했다.도윤은 물속에서 치마의 한 부분을 낚아채고 이빨로 레이스의 가벼운 부분을 뜯어냈다.지아는 조금 불안했다.“뭐, 뭐 하는 거예요?”도윤은 레이스로 지아의 눈을 가렸다.“아가씨, 날 누구로 상상하든 상관없어요.”여전히 내키지 않았던 지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임강욱 씨, 하지 마요. 나, 나 아직 버틸 수 있어요...”욕조의 찬물을 빼고 도윤은 미지근한 물을 다시 넣은 뒤 불을 껐다.밖에서 희미한 빛만 쏟아져 들어와 눈부시지도 않았고 분위기도 딱 좋았다.지아는 당황하며 손으로 도윤의 가슴팍을 밀었다.“저, 전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도윤은 몸을 숙여 지아의 귀에 속삭였다.“아가씨 몸은 이미 오래전에 준비됐어요.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것뿐이죠. 두려워하지 마요. 난 아가씨 마음 바라지 않아요.”악마처럼 낮게 속삭이며 도윤은 지아가 닫힌 마음의 문을 열도록 조금씩 밀어붙였다.도윤의 손이 지
“깨물지 마요, 마음 아파.”지아의 머릿속에는 도윤과 함께 있을 때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도윤을 만났을 때 아직 그런 일들에 익숙하지 않았다.소리를 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지아는 매번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다.그런데 어느 날 남자가 등 뒤에서 자신의 턱을 잡으며 귓가에 이런 말을 했었다.그날은 광란의 밤이었다.지금 지아는 은빛 레이스로 눈을 가리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깨닫지 못했다.남자가 턱을 들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백조 같은 목선을 드러냈다.흐트러진 드레스가 어깨에서 흘러내려 새하얀 팔과 섹시한 쇄골이 드러났고, 미세한 스팽글이 어두운 밤에 반짝였다.하늘하늘한 치마가 막 피어나려는 꽃처럼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도윤은 천천히 몸을 숙여 밤낮으로 생각했던 그 입술에 키스했다.지아의 첫 반응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이번에는 도윤이 맨정신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도윤의 가슴에 손을 대고 밀어내는데 셔츠를 사이에 두고 뜨거운 체온이 느껴져 지아의 손바닥도 뜨겁게 달아올랐다.왜, 남자의 키스가 도윤과 비슷하게 느껴졌을까?다른 남자와 키스를 해 본 적이 없는 지아는 누구와 하든 똑같은 느낌이기에 이런 착각이 들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머릿속은 점차 혼란스러워졌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본능만이 지아를 이끌었다.이 순간에도 지아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을 생각하고 외치고 있었다.욕실의 나른한 분위기와 달리 이 배는 개업 이래 첫 번째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경매가 끝나고 조이는 화를 내며 방으로 돌아와 먼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모두 부쉈다.“누님, 왜 그렇게 화를 내요? 68억이 생겼으니 기뻐해야죠! 이렇게 큰 거래를 성사했으니 보스도 분명 큰 상을 주실 겁니다!”조이는 찻잔을 집어 들고 남자의 발에 내리쳤다.“닥쳐, 알아보라는 건 왜 못 알아내?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60억을 그냥 가져와?”“누님, 제가 알아낸 임강욱 씨 정보는
문을 걷어찬 사람은 다름 아닌 하빈이였다.지금 하빈은 더 이상 지아와 소망 앞에서 보이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이 아니었다.얼굴에 쓴 가면마저도 귀신 토템으로 바꾸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용맹하게 서 있는 근엄한 모습이었다.“빙고, 정답. 너희를 위한 거야.”조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네가 뭔데 여기가 어딘지 알아? 어떻게 감히 배 위에서 무모하게 행동할 수 있어?”말하는 동시에 조이는 이미 경보기를 눌렀고, 그 소리를 듣고 모든 부하들이 무기를 장착하고 달려 나왔다.조이는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배에서 무모하게 행동한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 잘게 썰어서 물고기 밥이 될 거야.”이 순간 헬기에 탄 사람들이 로프 사다리를 따라 갑판 위 모든 곳에 체계적으로 내려갔고, 모두 방탄조끼와 방폭 헬멧을 쓰고 무기를 손에 든 채 무거운 군화를 신고 갑판에 발을 디뎠다.조이의 전사들은 대부분 손에 피를 묻힌 적 있는 무법자들이었고, 목숨을 위협하는 격투 스타일로 일반인들을 쉽게 상대할 수 있었지만 정규적인 용병단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었다.배 안에서 온갖 총소리와 비명, 싸움이 난무했다.조이는 여전히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고, 하빈은 이미 오래전에 모든 문을 막은 터라 창문에도 사람들이 빼곡했다.“조이 씨, 가시죠.”하빈이 문 앞에 섰다.“뭐 하려는 거야, 여기가 누구의 영역인지 알아?”하빈은 비웃었다.“상관없어. 처리해.”모두들 양의 무리를 덮친 늑대들처럼 게임을 시작했다.성매매를 하던 사람들의 방문이 그대로 발에 걷어차여 열렸다.“모두 손들어, 성매매 현장 적발이다! 손으로 머리 뒤로 보내고 구석으로 가.”남녀는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바다 위라 경찰이 올 리도 없었다.다시 보니 사람들은 경찰 제복이 아니라 용병 위장복을 입고 있었다.“당신들 누구야?”배가 나온 한 남자가 물었다.“누가 여기로 오라고 했어?”대꾸하는 사람 하나 없이 사진만 찍었다.
수천 마일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 남자는 자연스럽게 이 모든 일을 목격했다.헬기가 나타났다는 왕 매니저의 조심스러운 전화에 드디어 도윤을 잡았다고 기뻐하던 남자는 이제 끝이구나 싶었다.“소란을 피우면 피울수록 좋죠.”왕 매니저는 보스가 술에 취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배 하나로 도윤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획기적인 건 없었다.그런데 다가오는 사람들이 사설 용병단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남자의 얼굴은 곧바고 바뀌었다.도윤은 자신의 부하들을 움직이지 않았다!이러면 배에 탄 사람이 도윤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빨리, 얼른 멈춰.”“너무 늦었어요, 보스, 저들은... 아악!!!”전화가 끊어졌다.남자는 다급히 카메라 화면을 켰지만 1번부터 끝까지 카메라가 전부 파손당했다.모든 카메라 위치가 발견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며칠 전 도윤이 배에 있을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남자는 자신이 도윤을 골탕먹이는 동시에 자기도 이미 먹잇감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번엔 제대로 한방 먹었다!’마지막 한 대는 진봉이 고장 냈는데, 진봉은 발을 올리기 전에 카메라에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며 남자를 조롱했다.그러더니 카메라를 발로 차서 순식간에 깨뜨리고 화면이 검게 변했다.배 안에서 악마의 파티가 시작되었고,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당했다! 이도윤, 이 망할 자식이 감히 날 놀려?’남자는 화가 나서 모래 원반 위에 있는 일곱 개의 별 탑을 손으로 쓸어내렸다.이 순간 타워를 쌓아 올린 수만 개의 파편이 무너지고 떨어지고 와인이 바닥에 흩어졌다.마치 남자의 실패를 비웃는 것 같았다.그와 도윤은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싸워왔고, 그중 이번에 가장 처참하게 진 라운드였다.과거 도윤은 직접 배에 올라서도 아무런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지만 오늘 지아의 사건으로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덕분에 도윤은 손쉽게 배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고 남자는 입이 있어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다.처음부터 끝
온화한 햇살이 조용히 바다 위로 쏟아져 내려 반짝였다.밤새 소란스러웠던 큰 배는 마침내 나뭇잎이 바다 위에 잔잔히 떠 있는 것처럼 고요해졌다.어젯밤은 손님들에게 끔찍한 밤이었으며, 배의 모든 기반 시설이 엄청나게 파괴되었다.현금인출기는 바로 뜯겨 나갔고, 카지노와 마찬가지로 모든 현금을 가져갔다.가져가지 못한 것은 부서지거나 파괴되었다.부유한 상인들은 모두 발가벗고 있었고 도박꾼들은 탈탈 털려서 눈이 충혈된 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감히 몸을 뒤척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이런 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고 돈은 그다음이었다.조이는 진환에게 끌려 높은 곳에 매달렸고, 아래에서 혼란스러운 현장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안 돼, 그만둬!”자신의 순간적인 욕망 때문에 이런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오랫동안 배에서 깡패 노릇에 익숙해져 있던 조이는 보스가 없으면 자신이 하늘인 줄 알고 제멋대로 행동했다.자기가 건드린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 것도 모른 채.보스의 수년간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자 조이는 무릎을 꿇고 진환에게 머리를 조아렸다.“제발 그만하세요. 내가 잘못했어요, 진짜 잘못했어요. 차라리 날 죽여요. 토막 내서 물고기 밥으로 던져도 되니까 배는 망치지 마세요!”지금쯤 조이는 자신이 건드린 사람이 자신의 배후에 있는 세력도 두려워하지 않는 거물이라는 걸 깨달았다.이건 자연계의 법칙이다. 강자는 규칙을 세우고 생사를 결정한다.진환은 가볍게 웃었다.“네가 권력을 손에 쥐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을 놔줬어? 우리가 사적으로 합의하려고 했을 때 기회를 줬었나?”“난...”조이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가면 아래 진환의 얼굴은 비웃고 있었다.“아니지. 네 머릿속엔 오직 복수밖에 없었고, 무고한 사람과 아이들도 살려주지 않았어, 알지?”진환은 한숨을 쉬었다.“우리 보스가 그래도 여자라고 그 정도에서 끝냈으면 적당히 물러났어야지. 근데 넌 주제도 모르고 굳이 또 건드렸어. 그 모녀가 보스
용병들은 이곳을 약탈한 후 멋지게 떠났다.새벽이 다가오자 아직 자고 있던 지아도 잠결에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옮겨졌다.도윤은 씻고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상쾌한 바닷바람이 얼굴에 불어와 오랫동안 가슴에 머물렀던 우울함을 털어버렸다.그들이 있는 층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엉망이었다.90%가 가고 남아있는 10% 사람들은 전부 그들 일행이었다.수백 명의 깡패들이 단단히 묶인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진환에게 풀려난 조이는 황급히 비틀거리며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레스토랑, 댄스 플로어, 각종 명품 브랜드 가게, 유흥 장소가 엉망진창이었다.조이는 잔해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없어, 다 없어.”조이는 비틀거리며 바로 갔다.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이곳에서 칵테일 몇 잔 마시면서 신처럼 다른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지켜보았다.값비싼 술들은 약탈당했고, 아무 가치도 없는 와인들은 바닥에 박살 났다.조이는 한 걸음 다가가 바닥에 반쯤 무릎을 꿇고 와인 반병을 집어 들었다.파편으로 가득 찬 병을 들고 조금 마셨고, 마지막 한 방울의 액체를 다 마시자 절망의 빛이 눈앞에 번쩍였다.깨진 파편을 들어 대동맥을 향해 세게 찔렀다.배를 이렇게 만들어서 보스에게 큰 피해를 줬으니 어디로 도망쳐도 보스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게다가 조이는 자신이 자초한 짓이라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죽음으로 죄를 갚는 것만이 남아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탕!그런데 바로 그 순간 총알이 조이가 손에 쥐어진 유리 파편에 부딪혔다.조이는 팔이 저릿한 감각이 느껴지며 순식간에 파편이 깨져서 사방으로 튕겼다.조이가 멍하니 뒤를 돌아보자,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도윤이 무기를 내려놓고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정갈한 정장을 입은 그는 파편들 사이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당신 대체 누구야!”조이는 이를 갈았다!이 남자는 지금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신을 유혹해 그런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게 했다.도윤은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지아는 얼마나 잠을 잤는지도 모른 채 비몽사몽 잠에서 깨어났고, 눈을 뜨기도 전에 온몸 곳곳에서 아픔이 느껴졌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어딘가 휑한 느낌에 이불을 걷어 올리자 자신이 이미 부드럽고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였다.이불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남자는 놀랍게도 지아의 몸을 깨끗이 씻겨주고 약까지 발라서 부기로 인한 통증이 없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지아는 지나간 일을 떠올리며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이제부터 임강욱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주변에는 더 이상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는 자신의 방도 아니었다.그리고 배에 있을 때처럼 흔들리는 느낌도 없었다.육지다!어떻게 뭍에 오를 때까지 잠을 잘 수가 있지?지아는 낯선 주변을 둘러보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아이는 어디 있지?지아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약하고 지친 자신의 몸을 간과한 탓에 바로 쓰러졌다.다행히 바닥에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어 다치지 않았다.방에서 소리가 들리자 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엄마!”아이는 방 안에서 뛰어나왔고 지아는 무사한 아이를 보고 안도했다.“소망아.”지아는 아이를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지아는 정신이 흐릿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지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고 천천히 일어서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아이를 이끌고 문밖으로 나갔다.지아는 문이 열리자 깜짝 놀랐다.하늘에서 눈송이가 날리고 있었고, 익숙한 광경, 익숙한 냄새, 익숙한 온도가 느껴졌다.어느새 지아의 눈에서 눈물이 서서히 흘러내렸고, 마음속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엄마?”아이는 지아가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몰라서 긴장한 듯 손을 잡고 흔들었다.지아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A시에 왔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깨어나 보니 여기 도착할 줄이야.기억상실부터 기억을 되찾기까지 올해 있었던 일들
하빈의 말은 언뜻 듣기에 빈틈이 없었지만 지아는 의아함이 생겼다. 무려 60억이다. 60만도, 6천만도 아닌 60억!게다가 그날 경매에 값이 얼마나 오를지도 모르니 분명 60억만 빌린 건 아닐 것이다.건우는 꽤 그럴듯한 집안이었지만 그래봤자 의사 집안인데, 어떻게 몇십억의 자금을 꺼내올 수 있단 말인가?게다가 지아는 단지 친구일 뿐 연인도 아니었다.심지어 건우가 용병까지 찾았다니.못할 건 없지만 전혀 그런 일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그런데 건우 말고 또 누가 도움을 줄 수 있겠나.‘도윤일 리는 없는데...’지아는 생각만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프리카에 있는 도윤은 설령 날개가 달렸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빨리 올 수 없을 것이다.설사 왔다고 해도 그러면 진작 그들을 데려갔지 이렇게 밖에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네, 그때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몰라요. 강욱 형님하고 제가 여러 곳에서 돈을 모으고 있었고 임건우 씨도 초조해하셨어요. 그분이 돌아다니면서 모금하지 않았다면 아가씨를 구할 수 없었을 거예요.”지아는 깜짝 놀랐다.“이렇게 큰돈을...”“그러니 임건우 씨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중요한 순간에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낙찰받았으면 아가씨를 구할 방법도 없었을 거예요.”하빈은 그날 밤의 상황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렸다.지아는 자신이 구조됐다는 사실만 알았지, 호화 유람선이 완전히 난파된 상태였다는 사실은 몰랐다.저 위에 사람들이 대체 뭘 겪었는지도.특히 원한을 품은 도윤은 그날 밤 자리에 앉아 지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던 남자들을 여러 차례 때려서 배에서 내릴 때까지 대부분 사람들은 일어나지도 못했다.“그럼 임... 임강욱 씨는 어디로 갔어요?”지아는 결국 이렇게 물었다.하빈이 머리를 긁적였다.“강욱 형님은 아가씨와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헤어지기로 약속했다며 저에게 두 사람을 지켜달라고 부탁하고는 약속대로 떠났습니다.”지아는 강욱이 일어나서 마주치면 자신이 민망할까 봐
심장후는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고, 단지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할 뿐이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시월이 두 사람의 전 재산을 걸고 미래를 도박하려는 것이 걱정이었다.‘만약 월이의 계획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모든 걸 잃고 말 거야.’ 심장후도 시월과 비슷한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특수한 계기로 지금의 명문가 도련님 신분을 얻었지만, 심장후는 그 신분은 아주 소중히 여겼다. 지금 이 순간 물러난다고 해도, 심장후가 가진 돈은 평생을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심장후는 욕심이 없었고, 그에게 있어서는 지금이 인생의 정점이었다.‘나는 단 한 번도 기적 같은 부를 바란 적이 없어.’ 하지만 시월은 심장후의 생각과 달랐다.삼징후가 설득하려 애썼지만, 시월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화만 커질 뿐이었다. “딱 한 가지만 물을게. 날 도울 거야, 말 거야?” “월아, 내가 어떻게 널 돕지 않을 수 있겠어. 하지만...”“그럼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내가 소씨 가문을 손에 넣으면, 오빠도 많은 걸 누릴 수 있을 거야.” 심장후는 한숨을 내쉬었다.“월아, 우리가 누구든,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해. 네가 원한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게.” “그럼 가서 방법이나 생각해 봐, 최대한 빨리 2조를 마련해야 해.” 시월은 자신이 보유한 고정 자산, 즉 부동산, 상가, 펀드 등을 단기간에 현금화할 수 없었기에, 심장후에게 방법을 찾아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후는 결국 시월의 요구를 받아들였다.심장후는 심씨 가문에서 사랑받는 가족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런 명문가 집안을 통해 2조를 마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모든 행동은 시후의 감시 아래 있었고, 도윤은 일찍이 사람들을 배치하여 모든 사실을 지아에게 알려주었다. “소시월이 미끼를 물었어. 곧 자금을 마련할 것 같아.” 지아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너무 큰 야망은 독이 되는 법인데... 소시월은 너
2조는 시월에게 전 재산이었다.만약 시월이 그 돈을 들여 소씨 가문의 적자를 메우고도 돌려받지 못한다면, 시월이 수년간 힘들게 세운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시후는 분명히 말했다.“회사가 안정을 되찾으면, 우리 소씨 가문은 너에게 맡길게.”즉, 시월이 2조를 투자하면, 소씨 가문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그것은 몇 배의 높은 수익을 의미했다. 1을 투자해 100을 얻는, 그야말로 엄청난 도박인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박꾼에게 있어 베팅이 클수록 보상이 풍부해지면, 유혹도 더욱 커지는 법이었다. 시월은 자신이 실패할 가능성도 고려했지만, 소씨 가문에서 오랜 세월 동안 지켜본 결과, 시후는 말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실패했을 때의 대가와 성공했을 때의 수익을 비교했을 때, 성공의 가능성이 시월을 더 사로잡았다. ‘그래, 수년 동안 공들여 기다려온 기회를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순 없어.’ 시후가 시월을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2조는 적은 금액이 아니야. 월아, 큰 부담이 되지 않겠어? 우리가 이미 은행에서 2조의 대출을 받지 않았다면, 은행에 도움을 요청했겠지만...”“오빠, 오빠는 어릴 때부터 저를 보호해 주셨잖아요. 이제 집안에 문제가 생겼으니, 이번엔 제가 나설 차례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저축한 돈도 있고, 그동안 밖에서 조금씩 모은 돈도 있어요. 방법을 조금 더 찾아볼게요.”“월아, 정말 잘 자라줬구나. 하지만 최대한 빨리 돈을 마련해야 해. 친척들도 우리가 반격할까 봐 계속해서 지분을 사들이고 있거든.” “당장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래, 이번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회사를 지키게 되면, 아버지께서 너에게 회사를 넘겨주실 거야.”“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오빠들은 잘 지키고 싶을 뿐이니까요.” 시월은 참으로 감동적인 말을 했는데, 시후조차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질 정도였다. ‘아주 완벽한 연기가 따로 없네.’두 사람이 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 시
시후는 계속해서 부드럽게 설득했다. “지금 우리는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 있어. 어머니의 행방은 아직 알지도 못하고, 이젠 방계 친척들까지 우리를 노리고 있으니까.”“그 사람들은 원래 할아버지께서 우리를 편애한다고 불만이 많았고, 아버지의 회사도 할아버지의 재산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회사 지분의 일부를 몰래 사들이기 시작했던 거야.”“물론 원래는 걱정할 일이 아니었어. 그 지분들은 큰 위험이 되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제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잖아.” 소시월은 표정이 크게 변했다.“그래서 문제가 생긴 거예요?”“그래, 큰 문제가 생겼어. 그 사람들이 가진 소액 지분에 할아버지의 지분까지 더해지면서 아버지께서 가진 모든 지분을 넘어서고 말았으니까.” 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아버지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탓에, 자식들에게 지분을 나눠주셨던 게 화근이 된 거야. 그 누구도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고, 친척 쪽에서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거지.” “이제 아버지께서 가진 지분은 그 사람들보다 훨씬 적어. 이대로라면 회사의 주도권도 그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말 거야. 우리가 소송을 해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거라고.” “그럼 이제 어떡해요?”시월이 그 거대한 재산에 눈독을 들이며, 지금까지 도망가지 않고 시후와 대치 중인 것도 그 탐스러운 금은보화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야. 손실을 최소화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지분을 아버지께 돌려드려야 해.” 이는 시월이 가지고 있는 3%의 지분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비록 3%라고 해도, 시월이 매년 받는 배당금은 수십억대에 달했다.“그걸로 충분할까요?”“부족해.”시후는 단호히 말했다.“그 사람들은 그동안 치밀하게 준비했어. 우리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을 거란 뜻이지. 그 사람들이 몰래 사들인 지분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 거기에 할아버지의 20% 지분까지 더
소임호는 눈가가 붉어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울고 있는 시월을 바라보았다.그 소녀는 한때 소임호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아빠,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아빠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시월은 병상 앞에서 한참을 울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어서 마음속에 의문을 품었다. “아빠...?”시언은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는 증오를 억누르고,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월아, 아버지는 지금 많이 허약하셔.”“아빠, 그럼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집안일은 제가 잘 챙길게요.”시월은 한참 동안 위로의 말을 전했지만, 소임호는 단지 짧게 ‘그래’라는 대답만 했다. 다만, 시월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침대를 꽉 잡은 소임호의 손등에는 불거진 핏줄이 선명했다. 소임호는 시월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하지만 과거 시월이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리면, 소임호는 결코 마음이 평온할 수 있었다. ‘우리 시영이는 이 냉혈한 때문에 죽임을 당했어. 시영이는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났고, 죽기 전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 심지어 시신을 거둘 사람도 없었다고.’소임호는 많은 풍파를 겪은 사람이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소임호는 눈을 감고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지금은 참아야 해. 지아의 계획이 아직 진행 중이니, 절대로 폭발해서는 안 돼.’ 소씨 가문 사람들이 시월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이익과 기회를 제공했는지를 소임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시월은 이미 보통 사람이 백 년을 노력해도 얻지 못할 만큼의 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월은 전혀 만족하지 못했고, 끝까지 탐욕을 부렸다. “큰오빠, 할 말이 있어요.”“잘됐네, 나도 마침 할 말이 있던 참이야.”두 사람은 한 명씩 방을 나섰고, 시후는 거실 소파에 앉아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빠, 오빠랑 연락이 안 되는 동안 우리 소씨 가문에 더
시후는 약간 놀랐다. 조경선을 모든 게 들통나자마자 꼬리를 자르고 도망쳤는데, 오히려 소시월은 도망치지 않고 시후에게 전화를 걸었으니 말이다. ‘지아 말이 맞았어. 소시월은 독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야망도 끝이 없었던 거라고.’ 시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그래, 오빠야, 무슨 일이야?] “오빠, 그동안 연락이 안 돼서 정말 걱정했어요. 괜찮은 거예요?” [난 괜찮아.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버지를 구출하려고 노력 중이었거든.]“그럼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구했어요?”시월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만약 시후가 진실을 알지 못했다면, 시월의 태도와 과거의 일을 연결 짓지 못했을 것이었다. ‘정말 무서운 여자였구나.’ ‘나이는 어리지만,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야망과 담력을 가지고 있었어.’ ‘이런 사람을 그냥 죽여버리는 건, 너무 가벼운 처벌이야!’ 시후는 지아가 미리 알려준 대로 대처했고, 시월은 즉시 소임호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안전하지 않으니, 올 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 괜히 문제를 더 키울 수도 있으니까.] “오빠,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후, 시후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아야, 역시 네 말이 맞았어. 소시월은 도망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 계획을 진행하려고 하는 중이었다고.” “소시월은 아주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왔어요. 저는 죽이려 한 것만 봐도, 소시월이 얼마나 철저한지 알 수 있잖아요. 그 여자는 절대 본인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거예요.” “제가 할머니의 사진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소시월한테 속고 있었을 거예요. 그 여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을 거라고요!” “그렇게 독한 사람은 죽이는 것도 아까워!”시하는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내 다리, 내가 잃어버린 지난 세월이 다 소시월 때문이었어! 그리고 시영이의 죽음도... 다 그 여자 때문이었다고! 나는 그 여자를 죽이
소씨 가문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고, 시월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비록 지금은 소임호의 신분을 입증할 절대적인 증거가 없었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은 이미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이에 따라 소임호의 혈통은 소씨 가문 내에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시월과 조경선의 원래 계획은 소씨 가문을 후손 없이 무너뜨려 소씨 가문의 대부분 재산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 재산은 실로 어마어마했으니 말이다.게다가 소씨 가문 사람들이 시월은 아무리 아껴주어도, 결국 시월은 시집가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시월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저 한몫의 축의금뿐이었고, 그것마저 심씨 가문으로 가져가야 할 것이었다.게다가 결혼한 뒤에는 시월이 남자의 부속물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시월이 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는 단지 조경선을 위해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시월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는데, 조경선처럼 사랑에 집착하는 사람과는 달리, 시월은 훨씬 더 영리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게 바로 사랑이야.’ 물질적인 안정만이 시월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제공할 수 있었다. 조경선은 시월이 친딸이라고 주장했지만, 시월은 이미 자신의 출생 비밀을 철저히 파헤쳤다. 조경선은 평생 소임호만을 사랑하며 집착했기에, 다른 남자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사실, 시월은 생모는 깊은 산골에 살던 농부의 아내였다. 시월은 집안의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했지만, 마음이 약해진 시월의 생모는 시월을 산에 버렸고, 마침 산속으로 숨어들었던 조경선이 그녀를 발견해 데려간 것이었다. 조경선은 그 순간부터 복수를 위한 계획을 마음속에 세웠다.시월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난 후 더욱 노력했고, 조경선이 자신을 산속에서 데려온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비록 시월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노력으로 부족함을 메웠다. 게다가 소씨 가문의 풍부한 자원과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무사히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한편, 도윤은 혼란스러운 예린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예린은 총알에 스쳐 가벼운 상처만 입었지만, 표정은 마치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공허하고 무기력했다. 예린은 차량 뒷좌석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온몸이 부서질 듯한 상태였다. 진실이 주는 충격은 예린에게 너무도 컸다. 그녀의 마음은 죄책감과 혼란으로 가득 찼는데, 고개를 들어 도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빠, 그때 날 죽이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구나? 이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결과라는 걸 알았으니까.” 예린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나도 이렇게 되길 원치 않았어. 나는 소 선생님을 돕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소 선생님의 여동생을 죽일 뻔했어. 나는 죽어야 해!” 도윤은 스스로를 질책하는 예린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신도 아니고, 미래를 내다볼 능력도 없어. 내가 네 목숨을 살려둔 건,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다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뜻이었어.”도윤이 예린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예린아, 우리는 원래부터 정상적인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했잖아. 우리 부모님의 잘못된 선택이 우리에게도 왜곡된 마음을 심어줬어. 그래서... 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쉽게 하게 된 거지. 오빠도 과거에는 너처럼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 지아가 어떤 벌을 내리든, 나는 받아들일 생각이야.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서거든.”“잘못은 잘못이고, 그걸 변명할 수는 없어. 하지만 과거에 얽매여 계속 괴로워한다면, 소 선생님이 널 구할 필요가 있었겠어?” 예린은 시후의 이름이 언급되자, 눈동자에 희미한 생기가 돌았다. “그분의 선의를 배신하지 마. 넌 살아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 과거가 아무리 어둡더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살을 볼 수 있을 거야.” “예린아, 앞으로는 반듯하게 살아가야 해.” “오빠
시후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괜찮아. 일단 진정 좀 해봐.” 시후가 도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많이 흥분한 것 같은데, 어서 데려가서 좀 쉬게 해줘.” 도윤의 입장에서 계속 이곳에 머무는 것은 이미 불편한 일이었다. 소씨 가문의 남자들이 맹수처럼 당장이라도 도윤을 물어뜯을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도윤의 목적은 예린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었는데, 예린은 고집이 세고 완고했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 뻔했다. “장인어른, 몸조리 잘하세요.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도윤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소임호는 도윤에게 베개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소임호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는데, 자기 딸이 밖에서 고생하며 학대받을 때, 도윤이 그저 방관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지아가 급히 다가가 소임호를 달랬다.“아빠, 진정하세요. 아직은 몸이 회복되지 않으셨잖아요.” “이름이 지아라고 했나?”소임호는 지아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지아는 환희와 많이 닮아 있었지만, 눈매와 이목구비는 소임호와 조경숙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네, ‘지혜 지’에 ‘맑을 아’예요.”“아주 훌륭한 이름이구나.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겠니... 너를 잘 키워주신 양아버지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내가 직접 방문할 기회가 없어서 아쉬울 따름이구나.” “제 양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이 소식을 들으신다면, 저를 가족들과 만나게 해 주신 것을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지아는 이 방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었지만, 가장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비록 가족을 만나던 순간에는 눈물을 참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미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빠, 제가 처방전을 써드릴게요. 그대로만 복용하시면 곧 건강을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지아가 처방전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데... 다들 소시월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세요?” 지아는 무심한 듯 물었지만, 소시월은 소씨 가문 사람
지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이번 생에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해요.” “지아야, 소시월이 그렇게 악랄한 사람인 줄 몰랐어. 그 X은 너를 몇 번이고 암살하려 했고, 우리 가족을 산산조각 냈어!” “전에 오빠가 너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걸 용서해 줄 수 있겠어?” “여러분이 제 가족이라는 걸 몰랐을 때도, 저는 한 번도 오빠들을 원망한 적 없어요.” 가족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고, 모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지만, 이예린만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충격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말도 안 돼. 소지아가 날 속였다니, 어떻게 날 속인 거지?”예린은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시후는 예린이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괜찮아? 이만 일어나.”예린은 시후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고, 지아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모든 게 내 잘못이에요.” 본래 예린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도윤이 그녀의 손과 발의 힘줄을 끊었을 때조차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예린은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머리를 몇 번 조아리자, 예린의 이마에서는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고, 머리뼈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뚜렷하게 울렸다. “그러지 말고 일어나서 이야기해.” 하지만 시후의 말은 예린의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예린은 지아의 손목을 붙잡은 채, 피와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언니, 미안해요. 저도 속아서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거예요. 용서는 바라지도 않을게요. 그냥 저를 죽여주세요. 제발 죽여주세요!” 예린은 자신이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느꼈고, 죽음을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지아는 예린을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후회로 가득 찬 예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너는 분명히 죽어 마땅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