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얼마나 잠을 잤는지도 모른 채 비몽사몽 잠에서 깨어났고, 눈을 뜨기도 전에 온몸 곳곳에서 아픔이 느껴졌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어딘가 휑한 느낌에 이불을 걷어 올리자 자신이 이미 부드럽고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였다.이불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남자는 놀랍게도 지아의 몸을 깨끗이 씻겨주고 약까지 발라서 부기로 인한 통증이 없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지아는 지나간 일을 떠올리며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이제부터 임강욱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주변에는 더 이상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는 자신의 방도 아니었다.그리고 배에 있을 때처럼 흔들리는 느낌도 없었다.육지다!어떻게 뭍에 오를 때까지 잠을 잘 수가 있지?지아는 낯선 주변을 둘러보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아이는 어디 있지?지아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약하고 지친 자신의 몸을 간과한 탓에 바로 쓰러졌다.다행히 바닥에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어 다치지 않았다.방에서 소리가 들리자 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엄마!”아이는 방 안에서 뛰어나왔고 지아는 무사한 아이를 보고 안도했다.“소망아.”지아는 아이를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지아는 정신이 흐릿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지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고 천천히 일어서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아이를 이끌고 문밖으로 나갔다.지아는 문이 열리자 깜짝 놀랐다.하늘에서 눈송이가 날리고 있었고, 익숙한 광경, 익숙한 냄새, 익숙한 온도가 느껴졌다.어느새 지아의 눈에서 눈물이 서서히 흘러내렸고, 마음속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엄마?”아이는 지아가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몰라서 긴장한 듯 손을 잡고 흔들었다.지아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A시에 왔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깨어나 보니 여기 도착할 줄이야.기억상실부터 기억을 되찾기까지 올해 있었던 일들
하빈의 말은 언뜻 듣기에 빈틈이 없었지만 지아는 의아함이 생겼다. 무려 60억이다. 60만도, 6천만도 아닌 60억!게다가 그날 경매에 값이 얼마나 오를지도 모르니 분명 60억만 빌린 건 아닐 것이다.건우는 꽤 그럴듯한 집안이었지만 그래봤자 의사 집안인데, 어떻게 몇십억의 자금을 꺼내올 수 있단 말인가?게다가 지아는 단지 친구일 뿐 연인도 아니었다.심지어 건우가 용병까지 찾았다니.못할 건 없지만 전혀 그런 일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그런데 건우 말고 또 누가 도움을 줄 수 있겠나.‘도윤일 리는 없는데...’지아는 생각만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프리카에 있는 도윤은 설령 날개가 달렸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빨리 올 수 없을 것이다.설사 왔다고 해도 그러면 진작 그들을 데려갔지 이렇게 밖에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네, 그때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몰라요. 강욱 형님하고 제가 여러 곳에서 돈을 모으고 있었고 임건우 씨도 초조해하셨어요. 그분이 돌아다니면서 모금하지 않았다면 아가씨를 구할 수 없었을 거예요.”지아는 깜짝 놀랐다.“이렇게 큰돈을...”“그러니 임건우 씨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중요한 순간에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낙찰받았으면 아가씨를 구할 방법도 없었을 거예요.”하빈은 그날 밤의 상황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렸다.지아는 자신이 구조됐다는 사실만 알았지, 호화 유람선이 완전히 난파된 상태였다는 사실은 몰랐다.저 위에 사람들이 대체 뭘 겪었는지도.특히 원한을 품은 도윤은 그날 밤 자리에 앉아 지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던 남자들을 여러 차례 때려서 배에서 내릴 때까지 대부분 사람들은 일어나지도 못했다.“그럼 임... 임강욱 씨는 어디로 갔어요?”지아는 결국 이렇게 물었다.하빈이 머리를 긁적였다.“강욱 형님은 아가씨와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헤어지기로 약속했다며 저에게 두 사람을 지켜달라고 부탁하고는 약속대로 떠났습니다.”지아는 강욱이 일어나서 마주치면 자신이 민망할까 봐
건우는 한숨을 쉬었다.“널 누가 말려. 이따가 보내줄 테니까 다시 생각해 봐.”“생각 끝났어요. 선배, 그동안 도와줘서 고마워요.”지아는 건우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건우가 아니었다면 딸을 만나기는커녕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던 전 생활에 비하면 뜻밖의 축복을 받은 셈이었다.건우는 할 말이 많았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냥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 사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아무튼 조심해.”전화를 끊고 나서 건우의 손바닥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다빈은 얼른 고개를 내밀었다.“뭐래요, 지아 언니가 의심하지는 않죠?”“그런 것 같진 않아. 어차피 나 말고 떠올릴 만한 사람이 없을 테니까.”다빈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지아 언니한테 거짓말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아요. 우리까지 속였다는 걸 알면 속상해할 텐데. 망할 이도윤, 대체 지아 언니가 살아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대요?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너무 음흉한 남자예요. 지아 언니의 신뢰를 얻기 위해 장례식까지 치르고 밤낮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니. 지아 언니는 그런 미친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어요.”“사랑은 양날의 검이라 잘 되면 애정이지만 걷잡을 수 없어지면 집착이 돼. 우리가 지아를 지킬 능력이 없으니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거야.”건우는 오늘 아침 그 전화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모두를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도윤은 진정한 사냥꾼이었다.“이번 일로 정신 차리고 교훈을 새겨서 다시는 예전처럼 지아 언니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건우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길 바라야지.”그렇게 말한 후 건우는 전화를 걸어 도윤에게 연락해 지아의 생각을 전했다.도윤은 나름 예의 있게 계좌 번호를 알려주며 고맙다는 인사까지 덧붙였다.다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어쩐지 올 한 해 순조롭다고 했어요. 엄마 사업도 잘되고 큰 주문도 몇 건 받아서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진봉은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보스, 그놈이 보복할까 봐 걱정되세요?”“지아를 보고 내 정체를 알아차렸을 거야. 내가 자기 밥줄을 건드렸는데 가만히 있을까? 악랄한 놈이라서 분명 내 약점을 파고들 거야.”“보스 약점은 사모님인데, 그럼 사모님을 건드리겠네요.”윤도윤의 눈빛이 짙어졌다.“그때 내가 지아와 비밀 결혼을 할 때도 언젠가 내 신분이 누설돼서 지아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려워서 그랬어. 하지만 결국 돌고 돌아 결국에는 드러나서 꼬리를 잡혔네. 지아의 적을 제외하고도 내 신분이 지아에게 가장 큰 위험이 될까 봐 두려워.”“보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도윤은 팔짱을 끼고 절벽 가장자리에 서서 암초에 거칠게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도윤의 눈빛은 차갑고 단호했다.“지아가 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건 내가 너무 약해서 누군가 지아를 빌미로 나를 위협할 기회를 줬다는 걸 증명해. 내가 할 일은 계속 위로 올라가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거야. 그러면 아무도 지아를 해치지 않겠지.”멀리서 다들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손에 든 몇백억의 현금으로 광란의 파티를 벌이고 있었고 섬에는 돈다발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가냘픈 체구의 남자가 다가오자 진환과 진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눈치껏 자리를 떠났다.도윤이 고개를 돌리자 세찬의 점잖고 우아한 얼굴이 나타났다.“몇백억을 그냥 이렇게 주는 거야?”조금 전까지 고고하고 부드럽던 표정과는 다르게 셔츠 두 개를 열어젖힌 세찬은 꽤나 방탕해 보였다.“친구 사이에 그까짓 돈 몇 푼 가지고 뭘. 네가 전화 한 통에 사람을 보내지 않았어도 나 정말 물러서지 않았어. 너희 쪽 사람들 들켰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뭐가 문제야? 내 습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리 바꿔서 총놀이 하는 거지. 우린 너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아, 작은 사업일 뿐이라고. 너희 쪽도 가본 지도 오래됐네. 혹시 인류를 통째로 장악할 계획이야? 둘째 형한테 들으니 지난 2년 동안 큰 물건 몇 개를 더 개발하
엠파이어 빌딩 꼭대기.와르르-남자는 눈앞에 놓인 차 세트를 모두 부쉈고 맞은편에서 비서가 소심하게 보고했다.“이번 사고의 예상 손해 금액은 대략 3조 7천 4백억 원입니다.”그해 거대한 호화 유람선과 호화로운 장식에 들어간 비용은 1조 원이 넘었고, 각종 무기, 의료 장비, 물품, 골동품, 기타 고정 자산까지 합치면 4조 원에 육박했다.“금전적 손실 외에 고객도 잃었습니다.”“조이는 어딨어?”“배에 조이의 시신이 없는 걸 보아 데려간 것 같습니다. 지금 많은 승객들이 보상을 요구하고 있고, 보상 금액도 수천억에 달합니다. 보스, 어떡할까요?”남자는 격분했다.“신경 쓰지 마.”“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을까요?”“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준다고 해도 앞으로 배에 탈 것 같아?”비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아니요.”“배에 탑승한 사람들은 대부분 양지 인물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우리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지?”“보상을 원하는 건 음지 사람들입니다.”“그 사람들의 돈은 애초에 깨끗한 돈이 아니야. 보상을 해준다고 해도 만족시킬 수 없을 텐데 굳이 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걔들 기분을 봐줘? 어차피 다음 거래는 없을 텐데.”비서는 서류를 닫았다.“보스, 우리 측에서 이번에 심각한 손실을 보았는데 어떻게 하실 건가요?”남자는 눈앞에 한 여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이번 일은 이 여자 때문에 시작되었으니 이 여자가 끝내게 해야지.”...지아는 두툼한 패딩을 입고 아이의 손을 잡은 채 거리를 거닐었다.언제나처럼 겨울이 일찍 찾아온 A시에는 겨울의 대부분 시간 눈이 내렸다.하늘에 흩날리는 눈송이는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소망은 두꺼운 머플러를 두르고 모자를 쓴 채 작은 손을 뻗어 눈송이를 잡으려 했다.“엄마, 눈, 예뻐요.”지아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들 뒤에는 수천 개의 불빛이 비치고 아이의 순수한 미소에 날아다니는 눈송이가 담기며 모든 것이 너
경호원은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미친 듯이 달려가 마침내 민아의 손을 잡았다.“김 비서님, 저희를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 당신이 죽으면 대표님한테 뭐라 해명할 수 없어요.”“빌어먹을, 괜히 내 탓 하지 마. 살아서 싸울 수 없다면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강세찬과 당신들에게 복수할 거니까!”민아의 목소리는 매우 커서 전혀 곧 죽을 사람 같지 않았다.“내가 가장 사나운 귀신으로 변하려고 일부러 빨간 옷까지 입었다고. 이봐, 밤에 일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내가 겁먹어 죽게 할 테니까.”“...”분명 생사가 걸린 상황인데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김 비서님은 어떻게 죽을 때도 이렇게 웃길까!’“웃고 싶으면 웃어, 참지 말고.”“김 비서님, 절 웃기지 마세요. 전 절대 죽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이봐, 이 세상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게 뭔지 알아?”“죽음인가요?”민아는 고리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니, 주식이야.”“김 비서님, 그런 썰렁한 농담은 하나도 재미없어요.”“그래, 셋 셀 때까지 손 놔.”“안 돼요.”“내가 따로 돈을 숨겨둔 게 있는데, 이 손 놓은 다음에 그 돈의 절반으로 날 위해 금화, 큰 별장, 고급 승용차를 사고 근육질 남자 열 명만 태워줘, 알았지? 우리 둘이 반씩 나누자고.”경호원은 여전히 원칙적인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제가 근육남들을 태운 걸 알면 저까지 태워버릴 것 같아서요.”“너 많이 먹어?”“별로요.”“그럼 됐네. 그냥 불에 타. 마침 나도 가면 잡일을 맡아줄 조수가 필요하거든. 나랑 같이 황천길 가자. 그러면 우리 둘이 길동무가 되어 외롭지도 않고 그쪽 보스가 매달 월급을 태워줄 거야.”뒤에 있던 일행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순간 긴장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그러던 중 구세주처럼 전화벨이 울렸다.“김 비서님 휴대폰입니다.”“망할 강세찬이겠지, 안 받아. 내가 이미 죽어서 황천길에 올랐다고 전해줘. 이따 밤에 꿈속으로 찾아간다고.
민아는 상대방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바보야, 그런 것까지 통역하게?”경호원은 속이 쓰렸다.‘이런 미친…’지아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민아야, 어디 있어?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민아는 지아가 어떻게 부활했는지 몰랐지만, 지아가 아직 살아있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살아가는 게 더 이상 지루하지 않게 느껴졌다.적어도 지아가 걱정하게 할 수는 없었다.“아니야, 새 보디가드랑 얘기 중이야. 지아 넌 아직 모르지, 나 초콜릿 복근 있는 경호원 8명씩 데리고 다닐 정도로 잘 나간다?”“목소리 들으니까 안심이 되네. 네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잘 지내. 내가 왜 잘 못 지내겠어. 지금은 큰 별장에 살면서 리무진도 타면서 부자의 삶을 살아.”민아가 웃으며 말했지만 지아는 예민하게 감지했다.“우는 거야?”민아는 눈송이가 흩날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가에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네가 죽지 않은 것에 너무 기뻐서 그러지. 기쁨의 눈물도 못 흘려?”경호원들은 그 틈을 타서 민아를 끌어올렸고, 민아의 몸이 눈 속에 파묻혔다.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엄청나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지아야, 보고 싶어.”지아는 민아의 속사정을 모르고 정말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럼 늘 가던 곳에서 보자.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어.”“그래.”“언제 도착해?”“30분, 아니 한 시간. 나도 이제 흙수저가 아니니까 단장 좀 해야겠어.”“알았어, 그럼 한 시간 후에 보자.”민아는 전화를 끊고 경호원이 말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지금 내 상태 어때?”경호원이 진지하게 대답했다.“예쁜 귀신 같습니다”“그 입 다물어.”그렇게 말한 뒤 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도망쳤고 경호원이 뒤쫓았다.“김 비서님, 이제 안 뛰어내리세요?” “내 친구가 날 찾는 게 안 보여? 강세찬한테 나간다고 전해. 또 못 나가게 하면 바로 배를 갈라서 보여줄 거라고.”경호원은 입꼬리를 올렸다.‘보스는 어쩌
이영은 침묵이 흐른 뒤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알았어. 내 약속은 변하지 않아.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설영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녀의 뜻을 알았던 이영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제야 이영은 근태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강이영 씨, 일도 그만뒀는데 아직도 그렇게 바쁩니까?”“안 바빠요. 그냥 친구랑 얘기 좀 했어요. 대표님께서 직접 안내해 주시고, 일하시는데 방해되지 않으시겠어요?”“평소에 바쁜 걸로 충분해요. 저도 쉴 때가 있어야죠. 오래간만에 이렇게 나왔는데 오히려 이런 기회를 준 강이영 씨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네요.”이영은 미소만 지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근태가 말했다.“저는 오히려 강이영 씨와 이 대표님과의 관계가 더 궁금합니다.”“그게 중요한가요?”근태는 검지에 끼고 있는 보석 반지를 만지작거렸다.“이 대표님은 하씨 가문 땅을 위해 이곳에 오시는데 강이영 씨가 여전히 이 대표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면, 강이영 씨의 체면을 생각해서...”이영이 정중하게 웃으며 말을 끊었다.“괜한 생각 마세요, 하 대표님. 이 대표님이 제 전 상사였던 건 맞지만 전 이미 회사를 떠났고, 회사 일은 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공과 사가 확실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회사를 떠나면 평범한 친구조차 할 수 없는데 회사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죠. 하 대표님 생각대로 하세요. 저에 대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C시에 온 건 동생 때문인데 대표님하고 같은 호텔에 묵게 될 줄은 몰랐어요.”“그렇게 안 봤는데 강이영 씨 꽤 매정하네요.”“매정한 건 아니고, 원래 어른들 세상에선 이익만 따지니까요.”이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덤덤했기 때문에 근태는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차가 천천히 멈추자 근태가 먼저 내려 이영의 휠체어를 꺼냈다.근철은 보영이 올 줄 알고 아침 일찍부터 와서 들뜬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이영 누나, 보영아, 또 만났네요.”“근철 도련님.”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