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의 이성은 계속해서 무너지기 직전에 다다랐고, 눈은 이미 충혈된 채로 불편함을 참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필요 없습니다.”“대표님, 지금 약물 때문에 계속 이런 상태가 지속될 텐데 해결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땐 여자를 찾는 게 부작용도 없고 가장 직접적인 해결책입니다.”도윤의 붉게 물든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았고 세게 깨물어 얇은 입술엔 피가 스며 나온 채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필요 없다고 했잖아! 약이나 주세요.”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고집쟁이를 또 하나 만났네.’“알았어요. 부작용이 있어도 전 모릅니다. 게다가 지금 경우를 봐선 한 번으로는 효과가 없을 테니 적어도 두 번은 맞아야 할 겁니다.”도윤은 이를 악물었다.“주사 놓으세요.”바늘이 천천히 피부를 찌르자 도윤은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만 떠올렸다.또다시 그녀를 다치게 할 뻔했다.그 시각 또 다른 기이한 방, 야릇한 분위기가 풍기는 방은 네 면이 거울로 되어 사각지대 없이 어떤 각도로든 여자를 볼 수 있었다.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도윤을 유혹하려 했던 조이였다.대어를 낚았다고 생각했는데, 평범한 물고기와는 다르게 악마 물고기를 장난감처럼 여기는 범고래일 줄은 몰랐다.조금 전 방에 들어온 도윤은 방의 구조를 훑어보았고, 조이는 당장이라도 도윤에게 달라붙고 싶었다.그때는 아직 약효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던 도윤이 손을 뻗어 조이의 접근을 막으며 말했다.“나한테 무슨 약을 먹인 거야?”조이는 자신과 상대가 동족일 거란 생각에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작은 약병을 꺼냈다.“이건 나만의 비법인데, 혹시 몰라서 약을 좀 더 넣었어.”도윤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래?”그러다가 시선이 옆에 있는 상자로 향했고, 조이는 곧바로 자신의 보물을 소개했다.“여기 뭐든 다 있어. 원하는 것 말만 해.”도윤은 장난감 몇 개를 발로 툭툭 건드리다 밧줄 몇 가닥을 집어 올렸다.조이가 요염하
지아는 밤새 잠을 거의 못 자고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강욱이 방에 들어올까 봐 걱정하면서도 지아는 강욱이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되었다.배 전체가 파티를 벌이는 동안 지아가 있는 곳만 적막감이 감돌았다.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마루에 앉아 창밖으로 힘없이 차가운 달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지아는 그동안의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웠던 삶의 단편들을 떠올리며 마음이 혼란스러웠다.도대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아이와 헤어지고 하루하루 숨어 지내야 하는 걸까.저 문이 열려도 자신이 뭘 할 수 있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당연히 지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둘의 힘은 하늘과 땅 차이였고, 남자가 정말로 밀어붙인다면 지아는 오롯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아이를 위해 죽음을 택할 수도 없었고, 이 굴욕적인 밤을 영혼에 영원히 새길 수밖에 없었다.어디로 도망칠 수도 없다.지아는 단지 평범한 삶을 원했는데 결국 맞이하게 된 건 이런 결말이었다.그렇게 불안한 밤이 지나 해가 떠오르고, 바다 위로 떠오르는 일출이 장관을 이뤘다.지아는 밤을 지새우다 잠이든지 30분도 되지 않아 쏟아지는 햇빛에 꿈에서 깨어났다.팔을 올려 눈부신 햇빛을 차단하던 지아는 이윽고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 생각나 즉시 술병을 잡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의자와 테이블은 여전히 문에 붙어 있었고, 움직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온 세상이 고요하고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엄마.”침대에서 일어난 소망이는 잠에서 깨어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졸린 눈빛으로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소망이 일어났어?”소망은 배를 만지며 낮게 말했다.“우유.”매일 아침 분유를 마시는 것이 습관이었던 소망이에게 우유를 타주는 것도 강욱의 일이었다.지아는 바삐 말했다.“알았어. 엄마가 지금 바로 우유 타 줄게.”“강욱 삼촌.”소망은 맨발로 침대에서 일어나 꼬리처럼 엄마를 졸졸 따라다녔다.요 며칠 스위트룸에 지내면서 아이는 매일 아침 일찍 강욱의 방으로
강욱은 오전 내내 돌아오지 않았고, 소망이 여러 차례 물어볼 때마다 지아는 핑계를 대며 얼버무렸다.그렇게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 강욱의 모습에 하빈에게 물어봐도 머뭇거릴 뿐이었다.지아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아무리 센 약이라도 1박 2일이 지나면 진정되지 않나?’다음 날 아침 일찍, 하빈이 막 가려는데 지아가 붙잡았다.“저기요, 임강욱 씨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상대가 분명하게 대답할 때까지 보내주지 않겠다는 기세였다.하빈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욱 형님이 좀 아프세요.”“아프다고요?”지아는 평소에 튼튼하게만 보였던 강욱이 아플 거라곤 전혀 예상 못했다.“솔직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강욱 형님은 그날 밤 약에 취했었는데 두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칠까 봐 다른 방에서 혼자 얼음물에 몸을 담근 채 밤을 보냈어요. 아침저녁으로 온도 차도 크고 찬물로 샤워해도 충분히 차가운데 거기에 얼음까지 넣었어요. 그리고...”지아는 그가 여자를 찾아 해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그리고 뭐요?”“의사가 최선의 해결책은 여자를 찾는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그러지 않고 과량의 진정제를 투여하도록 강요했어요. 거기에 밤새 추운 곳에 있었으니 몸이 강철도 아니고 어떻게 버티겠어요.”지아는 그 과정을 듣고 만감이 교차했다.“지금은 괜찮아요?”“솔직히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어제 밤새 열이 났어요. 강욱 형님께서는 두 사람이 걱정할까 봐, 그리고 혹시 감기라도 옮길까 봐 저에게 대신 식사를 준비하라고 시킨 겁니다.”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가서 만나봐도 돼요?”“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강욱 형님이 절대 아가씨를 외출시키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어요. 열흘 정도만 지나면 도착할 거고,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닙니다.”위독한 것도 아니야.”“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가씨. 저를 구해주신 강욱 형님께서 두 분을 잘 챙기라고 당부했으니 이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가씨.”방문
소망은 그림 속 작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엄마, 삼촌, 오빠, 나, 우리 가족이에요.”한부모 가정은 이게 문제였다. 세상 그 어떤 엄마도 이걸 설명할 수 없을 테고, 그건 지아도 마찬가지였다.반나절 동안 망설이던 지아가 설명했다.“소망아, 삼촌은 삼촌이고, 엄마와 너희만이 가족이야. 삼촌은 너희들 양아빠처럼 우리를 지켜주는 사람이야. 잠깐만 우리와 지내고 언젠가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삼촌은 떠날 거야.”언제나 말 잘 듣는 아이가 지아의 설명을 듣고 자리에서 소란을 피웠다.“안 돼요, 떠나면 안 돼요. 난 삼촌 좋단 말이야!”“그래, 엄마도 네가 삼촌 좋아하는 거 알아. 하지만 아가, 넌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날 거고, 모든 사람이 끝까지 우리와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삼촌도 직업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평생 우리 곁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콩알만 한 눈물이 긴 속눈썹에 맺혔고, 지아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하지만, 하지만...”아이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저 도윤이 떠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지아는 아이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달랬다.“이 세상에서 부모님 말고는 아무도 영원히 네 곁에 있을 수 없어, 알겠어? 삼촌도 아이가 생길 거고, 자기 아이를 보살피면서 살아가야지. 엄마가 나중에 소망이가 보고 싶어 하면 삼촌 만날 수 있게 해 볼게, 알았지?”소망은 코를 훌쩍거리며 지아를 올려다보았다.“그럼 아빠는요?”아이가 다시 물었다.“우리 아빠는요?”“아빠는...”지아는 눈을 감자 도윤의 얼굴이 떠올랐다.만약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걸 그가 알게 된다면 무척 기뻐할 테지만, 그들 사이엔 깊은 원한이 있었다.증오와 미움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그들 사이에는 백채원, 이지윤 남매도 있었다.‘아이에게 아빠가 또 다른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면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아빠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지는 건데, 그래도 아이에겐 좋은 기억만 남겨 줘야지.’지아가 대답했다.“죽었어
하빈의 말대로였다. 도윤은 정말 아파서 밤낮으로 열이 펄펄 끓으며 침대에 누워 시름시름 앓았다.진봉은 오래 함께한 아내처럼 머리맡에서 사과를 깎으며 쉴 새 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보스, 지금 이 꼴을 좀 봐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반년 동안 사모님 뒤를 쫓아다니면서 정체를 숨겨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네요.”진환이 그런 진봉을 노려보았다.“넌 좀 조용히 해. 보스가 원해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진환은 따뜻한 물 한 컵을 도윤에게 가져다주었다.“보스, 따뜻한 물 많이 마셔야 빨리 나아요.”도윤의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말라 있어서 무척 초췌해 보였다.물 한 잔을 다 마신 후 침대에 기대어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던 도윤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제일 먼저 입 밖으로 꺼낸 첫마디는 지아였다.“지아는 어떻게 지내?”“하빈이는 여자만큼이나 꼼꼼한 사람이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사모님의 취향을 줄줄이 읊고 있으니 잘못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도윤의 시선이 망설이는 진봉의 얼굴로 향했다.“말해.”“사모님께서 계속 보스에 대해 물어보셔서 하빈이가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답니다.”“지아가 뭐래?”“사모님께서 보러 오고 싶다고 했는데 하빈이가 거절했답니다.”도윤의 눈빛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비쳤다.“그래.”“보스, 얼른 나으세요. 지난 몇 년 동안 사모님과 떨어져 지내느라 몸도 기운도 다 상하셨잖아요. 예전 같았으면 하룻밤 얼음물에 있었다고 이렇게까지 열이 끓었겠어요?”진환도 옆에서 거들었다.“얘가 말을 좀 밉게 해도 일리가 있습니다. 몸이 예전 같이 않아요. 자주 밤도 새우시잖아요. 보스, 자기 몸도 돌보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사모님을 지켜요? 아직 사모님 죽이려 했던 배후도 밝혀지지 않았잖아요.”도윤은 두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전 같았으면 1년 내내 아픈 적이 없었고, 감기나 독감에 걸렸어도 뜨거운 물 좀 마시면 괜찮아졌을 것이다.지금처럼 이렇게 앓아누웠을 리가.“죽은?”“하빈이한테 가져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고, 강욱이 사흘 동안 오지 않자 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지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지아는 다시 한번 하빈을 멈춰 세웠다.“아픈 건 어떻게 됐어요? 왜 며칠이 지나도 낫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아가씨. 이미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만 형님께서 혹시나 몸에 남아있는 바이러스를 옮길까 봐 걱정하고 계십니다.”지아는 강욱이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건지, 진짜 병에 걸린 건지 알 수 없었다.어쨌든 강욱이 그동안 자신을 잘 대해줬으니 그래도 가서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지아가 말했다. “제가 가볼게요. 지금 어디 있어요?”“그럴 필요 없습니다. 형님께서 분명 오시는 걸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괜찮은지 그냥 한 번만 보고 갈게요. 어느 방에 있나요?”하빈은 망설였다. “그게...”“나한테 말하기 전까지 오늘 이 문 못 나가요.” 하빈은 머리를 긁적였다.“아가씨, 전 그냥 형님이 시켜서 식사 배달하러 온 사람입니다. 저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그냥 한번 보겠다는 거예요.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알겠어요. 그럼 돌아가서 형님한테 말씀드려볼게요.”지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좋은 소식 기다릴게요.”하빈은 도망치듯 도윤에게 달려갔고, 도윤은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열은 내렸지만 체력이 많이 손상되어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도윤이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아픈 것도 있지만 지아를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지아가 자신을 보러 온단 말에 미리 준비를 마쳤다.저녁 식사를 마친 지아는 하빈에게 아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방 번호를 받아 도윤의 방으로 갔다.배에 오른 후 처음으로 외출한 지아는 긴 복도를 따라 걸었고, 바닷바람이 약간은 서늘한 기운으로 그녀를 맞이했다.큰 파도가 배 위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이따금 배가 약간 흔들거리기도 했다.지아가 방 번호를 살펴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서 있었다.여자는 담장에 등
도윤은 지아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이상 더 지아 곁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이런 날이 올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지난 며칠 동안 일부러 피해 다녔지만 그저 그날이 조금만 늦게 오기를 바랐을 뿐이었다.지아는 먼저 도윤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고 옆 의자에 앉았다.“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동안 우리를 그렇게 오래 돌봐줬는데 나는 처음 물을 떠주네요.”도윤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을 몇 번 했다.“감사합니다.”“약 드실래요?”지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괜찮아요. 아직 기침만 계속하네요.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습니다.”“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임강욱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부지런하고 유능하죠. 그런 사람에게 아이만 돌보라고 하기엔 너무 아까워요. 아직 젊은 나이니까 나가서 사회생활도 해야죠.”지아가 정중하게 말하자 도윤은 양손에 컵을 들고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유리잔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시선을 내렸다.긴 침묵 끝에 도윤이 입을 열었다.“제가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게 아가씨를 괴롭히는 거겠죠.”도윤의 갑작스럽고도 직접적인 말에 지아는 조금 당황했다.무뚝뚝한 성격에 자신처럼 그날 밤 일은 그냥 없었던 일처럼 넘어갈 줄 알았다.그런데 도윤이 그 벽을 깨뜨려 정면 돌파하며 자신에게 대답을 강요할 줄이야.지아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깍지 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그 이유도 있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 A시에 도착하면 헤어지려고 했어요.”“소망이가 저 많이 좋아해요.”“알아요.”“그러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도윤은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전남편처럼 당신한테 상처 주지 않을게요. 아껴주고 지켜주고, 돈이 없어서 싫다고 하면 돈도 벌 겁니다. 돈 벌 방법은 많으니까, 당신과 아이는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냥 불쌍해서 그래요. 병이 아직 완치되지도 않았고 몸이 완전히
지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도윤이 덧붙였다.“아가씨가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가씨를 좋아하는 건 내 일이고, 전 예전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아가씨 인생에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아가씨를 좋아하는 건 내 자유이기도 하니까, 날 죽일 수는 있어도 좋아하는 마음은 막을 수 없어요.”그 말을 듣고 있던 지아의 귓불이 달아올랐다. ‘무던하고 장난기 많은 사람은 어디 가고...’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지아는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도윤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이불을 걷어 내렸다.“됐어요. 부담 느낄 필요 없다고 했으니까 데려다줄게요. 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쉬어요.”“아니요. 혼자 돌아갈게요. 어차피 별로 멀지도 않아요.”“밤에는 배가 위험하니까 데려다줄게요.”이미 일어나 재킷을 입은 도윤은 지아의 옷차림이 다소 얇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무심코 블레이저를 꺼내 어깨에 둘러주었다.지아가 거절하기도 전에 도윤이 말했다.“깨끗한 겁니다.”“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저는...”“알아요.”도윤은 문 옆에 서서 지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지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제야 여자 혼자 배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도윤은 반쪽 가면을 써서 평범한 얼굴을 가렸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아우라는 더욱 위험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그 모습을 얼핏 본 지아는 도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곧바로 그런 생각을 뒤편으로 떨쳐버렸다. 도윤과 키는 비슷했지만 몸이 조금 더 튼튼했고, 강욱은 도윤보다 10킬로 정도는 더 마른 것 같았다.늘 양복과 셔츠 차림으로 항상 넥타이를 매는 도윤은 주름 하나 없이 단정했고, 손짓 하나에도 귀족의 기품이 풍겨 나왔다.하지만 강욱은 평소 정장을 입는 일이 드물었고, 흰 셔츠 맨 위 단추 두 개는 풀어헤친 채 셔츠도 바지 안에 넣지 않았다.슈트는 활짝 열어 셔츠의 모서리가 드러나도록 입었다.사람 자체가 캐주얼하고 편안해 보였고, 가면을 쓰고 있으니 사악한 방탕함이 더 느껴졌다.지아는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