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고, 강욱이 사흘 동안 오지 않자 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지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지아는 다시 한번 하빈을 멈춰 세웠다.“아픈 건 어떻게 됐어요? 왜 며칠이 지나도 낫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아가씨. 이미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만 형님께서 혹시나 몸에 남아있는 바이러스를 옮길까 봐 걱정하고 계십니다.”지아는 강욱이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건지, 진짜 병에 걸린 건지 알 수 없었다.어쨌든 강욱이 그동안 자신을 잘 대해줬으니 그래도 가서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지아가 말했다. “제가 가볼게요. 지금 어디 있어요?”“그럴 필요 없습니다. 형님께서 분명 오시는 걸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괜찮은지 그냥 한 번만 보고 갈게요. 어느 방에 있나요?”하빈은 망설였다. “그게...”“나한테 말하기 전까지 오늘 이 문 못 나가요.” 하빈은 머리를 긁적였다.“아가씨, 전 그냥 형님이 시켜서 식사 배달하러 온 사람입니다. 저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그냥 한번 보겠다는 거예요.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알겠어요. 그럼 돌아가서 형님한테 말씀드려볼게요.”지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좋은 소식 기다릴게요.”하빈은 도망치듯 도윤에게 달려갔고, 도윤은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열은 내렸지만 체력이 많이 손상되어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도윤이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아픈 것도 있지만 지아를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지아가 자신을 보러 온단 말에 미리 준비를 마쳤다.저녁 식사를 마친 지아는 하빈에게 아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방 번호를 받아 도윤의 방으로 갔다.배에 오른 후 처음으로 외출한 지아는 긴 복도를 따라 걸었고, 바닷바람이 약간은 서늘한 기운으로 그녀를 맞이했다.큰 파도가 배 위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이따금 배가 약간 흔들거리기도 했다.지아가 방 번호를 살펴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서 있었다.여자는 담장에 등
도윤은 지아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이상 더 지아 곁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이런 날이 올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지난 며칠 동안 일부러 피해 다녔지만 그저 그날이 조금만 늦게 오기를 바랐을 뿐이었다.지아는 먼저 도윤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고 옆 의자에 앉았다.“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동안 우리를 그렇게 오래 돌봐줬는데 나는 처음 물을 떠주네요.”도윤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을 몇 번 했다.“감사합니다.”“약 드실래요?”지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괜찮아요. 아직 기침만 계속하네요.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습니다.”“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임강욱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부지런하고 유능하죠. 그런 사람에게 아이만 돌보라고 하기엔 너무 아까워요. 아직 젊은 나이니까 나가서 사회생활도 해야죠.”지아가 정중하게 말하자 도윤은 양손에 컵을 들고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유리잔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시선을 내렸다.긴 침묵 끝에 도윤이 입을 열었다.“제가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게 아가씨를 괴롭히는 거겠죠.”도윤의 갑작스럽고도 직접적인 말에 지아는 조금 당황했다.무뚝뚝한 성격에 자신처럼 그날 밤 일은 그냥 없었던 일처럼 넘어갈 줄 알았다.그런데 도윤이 그 벽을 깨뜨려 정면 돌파하며 자신에게 대답을 강요할 줄이야.지아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깍지 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그 이유도 있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 A시에 도착하면 헤어지려고 했어요.”“소망이가 저 많이 좋아해요.”“알아요.”“그러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도윤은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전남편처럼 당신한테 상처 주지 않을게요. 아껴주고 지켜주고, 돈이 없어서 싫다고 하면 돈도 벌 겁니다. 돈 벌 방법은 많으니까, 당신과 아이는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냥 불쌍해서 그래요. 병이 아직 완치되지도 않았고 몸이 완전히
지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도윤이 덧붙였다.“아가씨가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가씨를 좋아하는 건 내 일이고, 전 예전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아가씨 인생에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아가씨를 좋아하는 건 내 자유이기도 하니까, 날 죽일 수는 있어도 좋아하는 마음은 막을 수 없어요.”그 말을 듣고 있던 지아의 귓불이 달아올랐다. ‘무던하고 장난기 많은 사람은 어디 가고...’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지아는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도윤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이불을 걷어 내렸다.“됐어요. 부담 느낄 필요 없다고 했으니까 데려다줄게요. 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쉬어요.”“아니요. 혼자 돌아갈게요. 어차피 별로 멀지도 않아요.”“밤에는 배가 위험하니까 데려다줄게요.”이미 일어나 재킷을 입은 도윤은 지아의 옷차림이 다소 얇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무심코 블레이저를 꺼내 어깨에 둘러주었다.지아가 거절하기도 전에 도윤이 말했다.“깨끗한 겁니다.”“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저는...”“알아요.”도윤은 문 옆에 서서 지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지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제야 여자 혼자 배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도윤은 반쪽 가면을 써서 평범한 얼굴을 가렸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아우라는 더욱 위험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그 모습을 얼핏 본 지아는 도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곧바로 그런 생각을 뒤편으로 떨쳐버렸다. 도윤과 키는 비슷했지만 몸이 조금 더 튼튼했고, 강욱은 도윤보다 10킬로 정도는 더 마른 것 같았다.늘 양복과 셔츠 차림으로 항상 넥타이를 매는 도윤은 주름 하나 없이 단정했고, 손짓 하나에도 귀족의 기품이 풍겨 나왔다.하지만 강욱은 평소 정장을 입는 일이 드물었고, 흰 셔츠 맨 위 단추 두 개는 풀어헤친 채 셔츠도 바지 안에 넣지 않았다.슈트는 활짝 열어 셔츠의 모서리가 드러나도록 입었다.사람 자체가 캐주얼하고 편안해 보였고, 가면을 쓰고 있으니 사악한 방탕함이 더 느껴졌다.지아는
여전히 기침을 하던 도윤은 지아를 문 앞에 데려다주고 몇 마디 당부한 뒤 자리를 떠났다.지아의 몸이 남들보다 약한 데다 자신의 병도 채 낫지 않아 밀폐된 공간에서 바이러스가 아이와 지아에게 옮을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두 사람의 안전을 위해 도윤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게다가 지아가 이제 겨우 곁에 남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럴 때일수록 지아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이윽고 지아에게 단검을 건네며 마음대로 밖을 나가지만 않는다면 안전하다고 말했다.지아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하빈과 소망은 한창 재밌게 놀고 있었다.소망은 하빈의 얼굴에 별과 달 스티커를 잔뜩 붙이고 목에는 목걸이를, 귀에는 귀걸이를 하고 열 손가락에 인조 손톱까지 붙여놓았다.하빈은 요술봉을 들고 변신하고 있었다.“요리조리 마술...”한 바퀴를 돌기도 전에 문 앞에 서 있는 지아를 보고 미소가 굳어버렸다.“흠! 아가씨 빨리 오셨네요.”‘임강욱은 대체 어디서 이런 사람을 데려오는 걸까? 왜 하빈 씨가 소망이보다 더 신나 보이지?’“제가 괜한 부탁을 드린 건 아니죠?”“아닙니다. 소망 아가씨께서 무척 얌전하세요. 시간도 늦었는데 전 이만 가볼게요.”“소망아, 하빈 삼촌한테 인사해야지.”소망이 손을 흔들었다.“삼촌 안녕.”그러다 소망이는 다시 무언가 떠오른 듯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하빈의 손을 잡았다.“강욱 삼촌은 어딨어요?”지아가 설명했다.“삼촌 병 다 나으면 다시 올 거야. 착하지, 하빈 삼촌은 이제 쉬러 가야 해.”“아.”강욱 삼촌도 함께 돌아올 거라고 기대했던 소망의 눈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혹시 엄마와 삼촌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왜 강욱 삼촌이 며칠째 안 보이고 대신 하빈 삼촌이 오는 걸까? 앞으로 강욱 삼촌을 못 보는 걸까...’한번 싹튼 생각은 뿌리를 박고 싹이 트고 잎이 피는 씨앗처럼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이틀이 더 지났지만 도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
아이를 잃어버렸다. 그녀가 운동하는 틈을 타 몰래 도망친 것이다!항상 착하고 순종적이었던 소망이가 임강욱을 찾으러 몰래 나갈 줄은 정말 몰랐다.이 배가 어떤 곳인지, 얼마나 많은 변태들이 있는지 아이는 모른다.특히 이렇게 작고 예쁜 여자아이가 누군가의 표적이 된다면?이 세상에는 돈 많고 미친 사람들이 많았고, 단순 협박보다 더 무서운 후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예를 들어 여자 다리와 머리카락을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이 다크웹에 미션을 올리면 전문적으로 전 세계에서 적합한 후보자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타깃이 확정되면 그들은 온갖 신분으로 위장해 접근한 뒤 여자들에게 데이트라는 명목으로 해외여행을 가서 팔아넘기기도 했다.일부는 장기나 신체가 팔려 가고, 가치가 떨어지면 변태들에게 팔려 가 불구가 된 수집품이 되기도 했다.그리고 이 유람선에는 그런 변태들이 많았다!무너지기 직전인 지아는 소망이 하빈을 따라잡아 모든 게 무사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도킹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때일수록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힘들게 되찾은 아이인데 반드시 무사해야 했다.지아는 가발과 마스크를 쓰고 아무 옷이나 걸치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아이가 살아있다는 걸 몰랐으면 오히려 그녀의 삶이 조금 나았을까?한번 행복했던 순간을 맛보고 나니 잃는 게 더욱 두려워졌다. 모공 하나, 숨결 하나에도 두려운 기색이 가득했다.지아는 당황한 나머지 도윤의 방으로 달려가다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항암치료의 부작용은 줄어들었지만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풀썩 주저앉는 탓에 눈앞이 어지러웠다.잠시 진정하고 일어날 준비를 하는데 지아의 눈앞에 여자의 하이힐이 나타났다.검은색 가죽으로 둘러싸인 굽이 얄쌍한 하이힐이었다.하얀 여자의 피부가 검은색 그물 스타킹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아가씨, 도와드릴까요?”여자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지아의 시선이 가느다란 다리를 타고 천천히 올라가자 하이웨이스트 짧은 치마에 검은색 티를 입은
지아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폭발할 것만 같았고,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봤어요? 어디 있어요?”조이가 지아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나랑 같이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요.”여자의 말은 악마의 유혹이었다.‘만약 아이가 손에 있다면 바로 넘겨주면 그만인걸, 왜 굳이 나까지 데려가려는 걸까.’지아는 아이 말고 자신도 타깃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배후에 숨어있던 살인자일까?’아니, 그녀였다면 이런 식이 아니라 더 쉽고 거친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이 여자는 A국 억양을 사용하긴 했으나 A시 출신은 아닌 것 같았고, 외모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오래된 원한이 아니라면 새로운 원수일 것이다.지아는 만일을 대비해 며칠 전 강욱이 준 단검에 손을 가져갔다.그리고는 차분한 얼굴로 모르는 척 물었다.“정말 아이가 당신과 함께 있나요? 다행이네요. 너무 어려서 잃어버리면 위험에 빠질까 봐 걱정했는데. 그쪽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아니나 다를까, 지아의 칭찬을 들은 조이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지아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저도 지나가다 봤어요. 배가 안전하지 않아서 일단 제가 데려갔죠. 급하게 다니는 걸 봐서 그쪽 아이가 아닐까 추측했고요.”“그럼 빨리 저를 데려다줘요.”지아는 매우 불안한 표정이었다.조이가 웃으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바로 데려다줄게요.”여자가 돌아서는 순간 지아의 표정이 바뀌며 재빨리 손을 썼다.지아는 여자의 종아리를 발로 찼고, 상대가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꿇으려는 순간 태클을 걸어 여자의 목에 칼날을 들이댔다.“내 아이를 돌려주지 않으면 당신 죽여버릴 거야!”지아는 자신의 힘이 충분하지 않기에 기회는 단 한 번의 공격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상대에게 숨을 돌릴 기회를 주면 자신은 죽는다!하여 매끄럽게 일련의 동작을 취한 지아는 상대가 아무리 빠르게 반응을 해도 이미 칼끝을 목에 겨누고 있었다.“그렇게 안 봤는데 꽤 매섭네요.”조이는 전혀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
어느 정도냐면, 화장기 하나 없이 파운데이션도, 쉐딩도, 립스틱이나 눈썹 하나 칠하지 않았는데도 지아의 피부는 새하얗고 섬세했으며, 말랑한 입술은 자연스러운 핑크빛을 띠고 있었고, 눈썹은 그리지 않아도 짙었으며 오똑한 코에 자연스러운 이목구비가 입체적이고 뚜렷했다.지금 지아가 차갑게 노려보고 있어도 조이는 그녀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했다.지금껏 수많은 여자를 보았지만 맨얼굴로 눈앞에 있는 여자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어쩐지 내가 최선을 다해 유혹했는데도 그 남자는 꿈쩍하지도 않더라.’이렇게 예쁜 여자를 봤는데 다른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조이가 손을 뻗어 지아의 뺨을 쓰다듬었다.“얼굴이 정말 예쁘네.”지아는 홀린 듯한 여자의 표정을 보며 전혀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 같지 않았다. 예전에 그녀를 노리고 왔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당신 대체 누구야,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거야? 돈 때문이라면 아이는 보내주고, 돈은 원하는 만큼 불러.”도윤과 이혼했을 때 2천억을 받았고, 매년 회사 주식 배당금과 도윤이 전에 준 돈까지 합치면 지아의 계좌엔 천문학적인 액수의 금액이 있었다.예전에는 도윤에게 들킬까 봐 감히 쓰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노출되는 게 낫겠다 싶었다.“오호, 후하기도 하셔라. 얼마나 줄 수 있는데?”지아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상대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지아 스스로도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지도, 적지도 않은 금액을 불러 협상할 여지를 두려 했다.“20억.”납치범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액수였다.조이가 손을 뻗어 지아의 뺨을 만졌다.“꽤 솔깃하지만, 난 돈에 관심 없으니까 날 탓하지 말고 그 남자를 원망해.”지아는 혼란스러웠다.‘아프리카에 있는 남자?’“사람 잘못 본 거 아닌가요? 제 전남편은 아프리카에 있고 우리는 몇 년 동안 연락이 끊겼어요.”“쯧쯧,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사람을 가지고
이틀 동안 도윤은 몸이 전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진봉과 진환도 곧 A시에 도착할 것 같아 배에서 슬그머니 내렸다.그동안 배에서 체결한 계약서를 제때 돌려보내고 회사의 몇 가지 문제를 처리해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에서 내렸을 때 지아가 의심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기 위함이었다.평온하고 조용한 나날이 지속되고, 하빈은 하던 대로 지아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러 왔다.그런데 날이 밝기도 전에 깜짝 놀랄 일이 생길 줄이야.누군가 하빈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설마 지아인가?’표정이 확 변한 도윤은 마침 회의 중이었기에 미처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다.도윤이 하빈에게 눈치를 주자 하빈이 먼저 문 앞으로 다가가 살펴보았다.“아무도 없어요.”문을 열고 몸을 내밀어 보니 아무도 없고 문 앞에 상자만 놓여 있었다.“이상하네. 웨이터가 보낸 작은 선물일까요?”호기심에 상자를 열어본 하빈은 안에 든 사진을 보고 충격에 상자를 떨어뜨렸다.“보스, 사모님과 아가씨한테 큰일이 생겼어요!”그 말 한마디에 온라인 회의 중이던 도윤은 서둘러 중단하고 헤드폰을 벗고 컴퓨터 전원을 껐다.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도윤이 하빈에게 물었다.“뭔데?”하빈은 상자를 들고 뛰어왔다.“보스, 이거 보세요.”상자 안에는 사진 두 장과 작은 흰토끼 인형이 들어 있었다.사진 속에는 잠옷 차림의 소망이가 뭘 봤는지 눈물이 가득 맺혀 있는 모습이었고, 다른 사진에는 그날 밤 조이의 모습처럼 밧줄로 기둥에 묶여 있는 지아의 모습이었다.젠장!도윤은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그래도 여자라고 적당히 참아주었고 그날로 정신을 차릴 줄 알았는데, 목표를 지아로 변경할 줄이야.‘천국의 길을 열어줬는데, 본인이 기꺼이 지옥의 길을 가겠다면야.’“사람 불러서 나랑 같이 가.”“네, 보스.”도윤은 화장 할 시간이 없어 가면으로 얼굴 전체를 가렸다.그러고는 대충 외투를 집어 들고 빠르게 밖으로 향했다.기억을 더듬어 그날 밤 그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