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지아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이상 더 지아 곁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이런 날이 올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지난 며칠 동안 일부러 피해 다녔지만 그저 그날이 조금만 늦게 오기를 바랐을 뿐이었다.지아는 먼저 도윤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고 옆 의자에 앉았다.“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동안 우리를 그렇게 오래 돌봐줬는데 나는 처음 물을 떠주네요.”도윤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을 몇 번 했다.“감사합니다.”“약 드실래요?”지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괜찮아요. 아직 기침만 계속하네요.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습니다.”“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임강욱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부지런하고 유능하죠. 그런 사람에게 아이만 돌보라고 하기엔 너무 아까워요. 아직 젊은 나이니까 나가서 사회생활도 해야죠.”지아가 정중하게 말하자 도윤은 양손에 컵을 들고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유리잔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시선을 내렸다.긴 침묵 끝에 도윤이 입을 열었다.“제가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게 아가씨를 괴롭히는 거겠죠.”도윤의 갑작스럽고도 직접적인 말에 지아는 조금 당황했다.무뚝뚝한 성격에 자신처럼 그날 밤 일은 그냥 없었던 일처럼 넘어갈 줄 알았다.그런데 도윤이 그 벽을 깨뜨려 정면 돌파하며 자신에게 대답을 강요할 줄이야.지아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깍지 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그 이유도 있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 A시에 도착하면 헤어지려고 했어요.”“소망이가 저 많이 좋아해요.”“알아요.”“그러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도윤은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전남편처럼 당신한테 상처 주지 않을게요. 아껴주고 지켜주고, 돈이 없어서 싫다고 하면 돈도 벌 겁니다. 돈 벌 방법은 많으니까, 당신과 아이는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냥 불쌍해서 그래요. 병이 아직 완치되지도 않았고 몸이 완전히
지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도윤이 덧붙였다.“아가씨가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가씨를 좋아하는 건 내 일이고, 전 예전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아가씨 인생에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아가씨를 좋아하는 건 내 자유이기도 하니까, 날 죽일 수는 있어도 좋아하는 마음은 막을 수 없어요.”그 말을 듣고 있던 지아의 귓불이 달아올랐다. ‘무던하고 장난기 많은 사람은 어디 가고...’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지아는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도윤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이불을 걷어 내렸다.“됐어요. 부담 느낄 필요 없다고 했으니까 데려다줄게요. 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쉬어요.”“아니요. 혼자 돌아갈게요. 어차피 별로 멀지도 않아요.”“밤에는 배가 위험하니까 데려다줄게요.”이미 일어나 재킷을 입은 도윤은 지아의 옷차림이 다소 얇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무심코 블레이저를 꺼내 어깨에 둘러주었다.지아가 거절하기도 전에 도윤이 말했다.“깨끗한 겁니다.”“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저는...”“알아요.”도윤은 문 옆에 서서 지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지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제야 여자 혼자 배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도윤은 반쪽 가면을 써서 평범한 얼굴을 가렸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아우라는 더욱 위험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그 모습을 얼핏 본 지아는 도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곧바로 그런 생각을 뒤편으로 떨쳐버렸다. 도윤과 키는 비슷했지만 몸이 조금 더 튼튼했고, 강욱은 도윤보다 10킬로 정도는 더 마른 것 같았다.늘 양복과 셔츠 차림으로 항상 넥타이를 매는 도윤은 주름 하나 없이 단정했고, 손짓 하나에도 귀족의 기품이 풍겨 나왔다.하지만 강욱은 평소 정장을 입는 일이 드물었고, 흰 셔츠 맨 위 단추 두 개는 풀어헤친 채 셔츠도 바지 안에 넣지 않았다.슈트는 활짝 열어 셔츠의 모서리가 드러나도록 입었다.사람 자체가 캐주얼하고 편안해 보였고, 가면을 쓰고 있으니 사악한 방탕함이 더 느껴졌다.지아는
여전히 기침을 하던 도윤은 지아를 문 앞에 데려다주고 몇 마디 당부한 뒤 자리를 떠났다.지아의 몸이 남들보다 약한 데다 자신의 병도 채 낫지 않아 밀폐된 공간에서 바이러스가 아이와 지아에게 옮을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두 사람의 안전을 위해 도윤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게다가 지아가 이제 겨우 곁에 남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럴 때일수록 지아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이윽고 지아에게 단검을 건네며 마음대로 밖을 나가지만 않는다면 안전하다고 말했다.지아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하빈과 소망은 한창 재밌게 놀고 있었다.소망은 하빈의 얼굴에 별과 달 스티커를 잔뜩 붙이고 목에는 목걸이를, 귀에는 귀걸이를 하고 열 손가락에 인조 손톱까지 붙여놓았다.하빈은 요술봉을 들고 변신하고 있었다.“요리조리 마술...”한 바퀴를 돌기도 전에 문 앞에 서 있는 지아를 보고 미소가 굳어버렸다.“흠! 아가씨 빨리 오셨네요.”‘임강욱은 대체 어디서 이런 사람을 데려오는 걸까? 왜 하빈 씨가 소망이보다 더 신나 보이지?’“제가 괜한 부탁을 드린 건 아니죠?”“아닙니다. 소망 아가씨께서 무척 얌전하세요. 시간도 늦었는데 전 이만 가볼게요.”“소망아, 하빈 삼촌한테 인사해야지.”소망이 손을 흔들었다.“삼촌 안녕.”그러다 소망이는 다시 무언가 떠오른 듯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하빈의 손을 잡았다.“강욱 삼촌은 어딨어요?”지아가 설명했다.“삼촌 병 다 나으면 다시 올 거야. 착하지, 하빈 삼촌은 이제 쉬러 가야 해.”“아.”강욱 삼촌도 함께 돌아올 거라고 기대했던 소망의 눈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혹시 엄마와 삼촌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왜 강욱 삼촌이 며칠째 안 보이고 대신 하빈 삼촌이 오는 걸까? 앞으로 강욱 삼촌을 못 보는 걸까...’한번 싹튼 생각은 뿌리를 박고 싹이 트고 잎이 피는 씨앗처럼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이틀이 더 지났지만 도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
아이를 잃어버렸다. 그녀가 운동하는 틈을 타 몰래 도망친 것이다!항상 착하고 순종적이었던 소망이가 임강욱을 찾으러 몰래 나갈 줄은 정말 몰랐다.이 배가 어떤 곳인지, 얼마나 많은 변태들이 있는지 아이는 모른다.특히 이렇게 작고 예쁜 여자아이가 누군가의 표적이 된다면?이 세상에는 돈 많고 미친 사람들이 많았고, 단순 협박보다 더 무서운 후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예를 들어 여자 다리와 머리카락을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이 다크웹에 미션을 올리면 전문적으로 전 세계에서 적합한 후보자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타깃이 확정되면 그들은 온갖 신분으로 위장해 접근한 뒤 여자들에게 데이트라는 명목으로 해외여행을 가서 팔아넘기기도 했다.일부는 장기나 신체가 팔려 가고, 가치가 떨어지면 변태들에게 팔려 가 불구가 된 수집품이 되기도 했다.그리고 이 유람선에는 그런 변태들이 많았다!무너지기 직전인 지아는 소망이 하빈을 따라잡아 모든 게 무사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도킹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때일수록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힘들게 되찾은 아이인데 반드시 무사해야 했다.지아는 가발과 마스크를 쓰고 아무 옷이나 걸치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아이가 살아있다는 걸 몰랐으면 오히려 그녀의 삶이 조금 나았을까?한번 행복했던 순간을 맛보고 나니 잃는 게 더욱 두려워졌다. 모공 하나, 숨결 하나에도 두려운 기색이 가득했다.지아는 당황한 나머지 도윤의 방으로 달려가다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항암치료의 부작용은 줄어들었지만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풀썩 주저앉는 탓에 눈앞이 어지러웠다.잠시 진정하고 일어날 준비를 하는데 지아의 눈앞에 여자의 하이힐이 나타났다.검은색 가죽으로 둘러싸인 굽이 얄쌍한 하이힐이었다.하얀 여자의 피부가 검은색 그물 스타킹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아가씨, 도와드릴까요?”여자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지아의 시선이 가느다란 다리를 타고 천천히 올라가자 하이웨이스트 짧은 치마에 검은색 티를 입은
지아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폭발할 것만 같았고,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봤어요? 어디 있어요?”조이가 지아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나랑 같이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요.”여자의 말은 악마의 유혹이었다.‘만약 아이가 손에 있다면 바로 넘겨주면 그만인걸, 왜 굳이 나까지 데려가려는 걸까.’지아는 아이 말고 자신도 타깃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배후에 숨어있던 살인자일까?’아니, 그녀였다면 이런 식이 아니라 더 쉽고 거친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이 여자는 A국 억양을 사용하긴 했으나 A시 출신은 아닌 것 같았고, 외모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오래된 원한이 아니라면 새로운 원수일 것이다.지아는 만일을 대비해 며칠 전 강욱이 준 단검에 손을 가져갔다.그리고는 차분한 얼굴로 모르는 척 물었다.“정말 아이가 당신과 함께 있나요? 다행이네요. 너무 어려서 잃어버리면 위험에 빠질까 봐 걱정했는데. 그쪽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아니나 다를까, 지아의 칭찬을 들은 조이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지아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저도 지나가다 봤어요. 배가 안전하지 않아서 일단 제가 데려갔죠. 급하게 다니는 걸 봐서 그쪽 아이가 아닐까 추측했고요.”“그럼 빨리 저를 데려다줘요.”지아는 매우 불안한 표정이었다.조이가 웃으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바로 데려다줄게요.”여자가 돌아서는 순간 지아의 표정이 바뀌며 재빨리 손을 썼다.지아는 여자의 종아리를 발로 찼고, 상대가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꿇으려는 순간 태클을 걸어 여자의 목에 칼날을 들이댔다.“내 아이를 돌려주지 않으면 당신 죽여버릴 거야!”지아는 자신의 힘이 충분하지 않기에 기회는 단 한 번의 공격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상대에게 숨을 돌릴 기회를 주면 자신은 죽는다!하여 매끄럽게 일련의 동작을 취한 지아는 상대가 아무리 빠르게 반응을 해도 이미 칼끝을 목에 겨누고 있었다.“그렇게 안 봤는데 꽤 매섭네요.”조이는 전혀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
어느 정도냐면, 화장기 하나 없이 파운데이션도, 쉐딩도, 립스틱이나 눈썹 하나 칠하지 않았는데도 지아의 피부는 새하얗고 섬세했으며, 말랑한 입술은 자연스러운 핑크빛을 띠고 있었고, 눈썹은 그리지 않아도 짙었으며 오똑한 코에 자연스러운 이목구비가 입체적이고 뚜렷했다.지금 지아가 차갑게 노려보고 있어도 조이는 그녀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했다.지금껏 수많은 여자를 보았지만 맨얼굴로 눈앞에 있는 여자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어쩐지 내가 최선을 다해 유혹했는데도 그 남자는 꿈쩍하지도 않더라.’이렇게 예쁜 여자를 봤는데 다른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조이가 손을 뻗어 지아의 뺨을 쓰다듬었다.“얼굴이 정말 예쁘네.”지아는 홀린 듯한 여자의 표정을 보며 전혀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 같지 않았다. 예전에 그녀를 노리고 왔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당신 대체 누구야,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거야? 돈 때문이라면 아이는 보내주고, 돈은 원하는 만큼 불러.”도윤과 이혼했을 때 2천억을 받았고, 매년 회사 주식 배당금과 도윤이 전에 준 돈까지 합치면 지아의 계좌엔 천문학적인 액수의 금액이 있었다.예전에는 도윤에게 들킬까 봐 감히 쓰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노출되는 게 낫겠다 싶었다.“오호, 후하기도 하셔라. 얼마나 줄 수 있는데?”지아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상대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지아 스스로도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지도, 적지도 않은 금액을 불러 협상할 여지를 두려 했다.“20억.”납치범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액수였다.조이가 손을 뻗어 지아의 뺨을 만졌다.“꽤 솔깃하지만, 난 돈에 관심 없으니까 날 탓하지 말고 그 남자를 원망해.”지아는 혼란스러웠다.‘아프리카에 있는 남자?’“사람 잘못 본 거 아닌가요? 제 전남편은 아프리카에 있고 우리는 몇 년 동안 연락이 끊겼어요.”“쯧쯧,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사람을 가지고
이틀 동안 도윤은 몸이 전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진봉과 진환도 곧 A시에 도착할 것 같아 배에서 슬그머니 내렸다.그동안 배에서 체결한 계약서를 제때 돌려보내고 회사의 몇 가지 문제를 처리해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에서 내렸을 때 지아가 의심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기 위함이었다.평온하고 조용한 나날이 지속되고, 하빈은 하던 대로 지아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러 왔다.그런데 날이 밝기도 전에 깜짝 놀랄 일이 생길 줄이야.누군가 하빈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설마 지아인가?’표정이 확 변한 도윤은 마침 회의 중이었기에 미처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다.도윤이 하빈에게 눈치를 주자 하빈이 먼저 문 앞으로 다가가 살펴보았다.“아무도 없어요.”문을 열고 몸을 내밀어 보니 아무도 없고 문 앞에 상자만 놓여 있었다.“이상하네. 웨이터가 보낸 작은 선물일까요?”호기심에 상자를 열어본 하빈은 안에 든 사진을 보고 충격에 상자를 떨어뜨렸다.“보스, 사모님과 아가씨한테 큰일이 생겼어요!”그 말 한마디에 온라인 회의 중이던 도윤은 서둘러 중단하고 헤드폰을 벗고 컴퓨터 전원을 껐다.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도윤이 하빈에게 물었다.“뭔데?”하빈은 상자를 들고 뛰어왔다.“보스, 이거 보세요.”상자 안에는 사진 두 장과 작은 흰토끼 인형이 들어 있었다.사진 속에는 잠옷 차림의 소망이가 뭘 봤는지 눈물이 가득 맺혀 있는 모습이었고, 다른 사진에는 그날 밤 조이의 모습처럼 밧줄로 기둥에 묶여 있는 지아의 모습이었다.젠장!도윤은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그래도 여자라고 적당히 참아주었고 그날로 정신을 차릴 줄 알았는데, 목표를 지아로 변경할 줄이야.‘천국의 길을 열어줬는데, 본인이 기꺼이 지옥의 길을 가겠다면야.’“사람 불러서 나랑 같이 가.”“네, 보스.”도윤은 화장 할 시간이 없어 가면으로 얼굴 전체를 가렸다.그러고는 대충 외투를 집어 들고 빠르게 밖으로 향했다.기억을 더듬어 그날 밤 그
조이에게 약물을 투여받은 지아는 몸이 나른해지고 머리가 어지럽고 무거워 나며 반응이 둔감해졌다.지아는 조이가 말하는 게 들리긴 했지만 몇 초 후에야 겨우 반응할 수 있었다.머리로는 도망가고 싶어도 손발이 말을 듣지 않고 나른해나며 힘이 하나도 없었다.자신도 주사를 맞았는데 소망이는 어떻게 됐을까?‘어디 있지, 변태들이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떡하지?’지아는 강제로 옷이 갈아입혀지고 화장하고 머리까지 치장했다.조이는 화려하게 꾸미고 달처럼 차갑고 고고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하느님도 참 후하셔. 너한테 이런 얼굴을 다 주고.”조이는 변태처럼 지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지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역겨웠고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릴 안 보내주면 후회할 거야. 내 전남편이 너희를 가만두지 않아...”“허, 네 말대로 전남편이잖아. 네 내연남이나 관리 잘해.”“우린 그냥 친구야.”“너랑 무슨 사이든 날 건드렸으니까 복수할 거야.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줄 거라고.”“대체 뭘 하려는 거야?”“곧 알게 될 거야.”지아의 눈은 가려지고 몸은 새장 같은 좁은 공간에 갇혔다.“이거 놔!”약물의 영향으로 지아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소망이, 아이는 어디 있지?’그러다 귓가에 앳된 목소리가 울렸다.“삼촌 어디 있어요?”“착하지, 곧 삼촌을 만나게 될 거야.”“소망아! 소망아, 어디 있니?”“엄마!”눈 앞을 가리던 무언가 사라지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빛에 적응하자 자신과 똑같이 은색 드레스를 입은 소망이가 보였다.두 사람만이 두 개의 철창에 갇혀 있었다.“엄마!”소망의 손가락이 난간을 움켜쥐고 정신이 또렷한 걸 보아 약을 먹지는 않은 것 같았다.지아는 서둘러 어린 딸을 달랬다.“무서워하지 마. 엄마 여기 있어.”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었다.하빈은 자신이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