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도윤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몸이 불편하다는 건 잘 알았다.“그럼 그쪽은...”“제가 알아서 할게요.”이 정도 얘기했으면 됐다. 더 이상 머무르는 건 상대에게 기회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지아는 물고기처럼 방을 빠져나가 곧바로 문을 잠갔다. 도윤이 동물적인 본능을 자제하지 못할까 봐 방 안의 책상과 의자로 문을 막아버렸다.이 모든 일을 끝내자 지치고 숨이 가빴던 지아는 스르륵 미끄러져 카펫에 앉아 조금 전 남자가 입맞추었던 곳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솔직히 당시에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난생처음 다른 남자에게 안겨 키스한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이상하게도 도윤이 자신의 몸에 손을 얹었을 때, 그녀의 몸은 마치 오랫동안 남자의 손길에 익숙해져 있던 것처럼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옛날 도윤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지아는 급히 찬물로 세수를 하고 물 한 잔을 벌컥 들이켜며 마음속의 열기를 눅잦히려 했다.‘오늘밤 그가 무사하길.’아이의 곁에 누운 지아는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한동안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도윤은 찬물로 샤워를 해도 일시적으로 열기를 식혀주는 작용일 뿐, 꿈틀거리는 본능은 그대로 남아 고통스러웠다.가운을 두르고 밖을 나선 도윤은 진봉의 방문을 열었다. 진봉은 덩치 큰 전리품 더미 한가운데 앉아 아이처럼 행복해하고 있었다.“보스, 왜 그러세요?”놀랍게도 가면을 쓰지 않은 채 본래의 진짜 얼굴로 나타난 도윤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차갑고 하얀 얼굴에 불그스름한 홍조가 무척 이상했다.“누가 약을 탄 것 같은데 약효가 너무 세.”고집스럽고 삐뚤어진 도윤의 성격이라면 지아 말고는 다른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진봉이 얼른 말했다.“사모님도 약을 드시게 할까요? 그럼 깨어나셔도 아무것도 모르잖아요.”도윤은 그런 진봉을 사납게 노려보았다.‘어떻게 사람 머리로 저런 생각을 하지?’“네 머릿속에 잔뜩 들어찬 쓰레기는 집어치
도윤의 이성은 계속해서 무너지기 직전에 다다랐고, 눈은 이미 충혈된 채로 불편함을 참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필요 없습니다.”“대표님, 지금 약물 때문에 계속 이런 상태가 지속될 텐데 해결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땐 여자를 찾는 게 부작용도 없고 가장 직접적인 해결책입니다.”도윤의 붉게 물든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았고 세게 깨물어 얇은 입술엔 피가 스며 나온 채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필요 없다고 했잖아! 약이나 주세요.”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고집쟁이를 또 하나 만났네.’“알았어요. 부작용이 있어도 전 모릅니다. 게다가 지금 경우를 봐선 한 번으로는 효과가 없을 테니 적어도 두 번은 맞아야 할 겁니다.”도윤은 이를 악물었다.“주사 놓으세요.”바늘이 천천히 피부를 찌르자 도윤은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만 떠올렸다.또다시 그녀를 다치게 할 뻔했다.그 시각 또 다른 기이한 방, 야릇한 분위기가 풍기는 방은 네 면이 거울로 되어 사각지대 없이 어떤 각도로든 여자를 볼 수 있었다.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도윤을 유혹하려 했던 조이였다.대어를 낚았다고 생각했는데, 평범한 물고기와는 다르게 악마 물고기를 장난감처럼 여기는 범고래일 줄은 몰랐다.조금 전 방에 들어온 도윤은 방의 구조를 훑어보았고, 조이는 당장이라도 도윤에게 달라붙고 싶었다.그때는 아직 약효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던 도윤이 손을 뻗어 조이의 접근을 막으며 말했다.“나한테 무슨 약을 먹인 거야?”조이는 자신과 상대가 동족일 거란 생각에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작은 약병을 꺼냈다.“이건 나만의 비법인데, 혹시 몰라서 약을 좀 더 넣었어.”도윤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래?”그러다가 시선이 옆에 있는 상자로 향했고, 조이는 곧바로 자신의 보물을 소개했다.“여기 뭐든 다 있어. 원하는 것 말만 해.”도윤은 장난감 몇 개를 발로 툭툭 건드리다 밧줄 몇 가닥을 집어 올렸다.조이가 요염하
지아는 밤새 잠을 거의 못 자고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강욱이 방에 들어올까 봐 걱정하면서도 지아는 강욱이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되었다.배 전체가 파티를 벌이는 동안 지아가 있는 곳만 적막감이 감돌았다.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마루에 앉아 창밖으로 힘없이 차가운 달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지아는 그동안의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웠던 삶의 단편들을 떠올리며 마음이 혼란스러웠다.도대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아이와 헤어지고 하루하루 숨어 지내야 하는 걸까.저 문이 열려도 자신이 뭘 할 수 있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당연히 지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둘의 힘은 하늘과 땅 차이였고, 남자가 정말로 밀어붙인다면 지아는 오롯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아이를 위해 죽음을 택할 수도 없었고, 이 굴욕적인 밤을 영혼에 영원히 새길 수밖에 없었다.어디로 도망칠 수도 없다.지아는 단지 평범한 삶을 원했는데 결국 맞이하게 된 건 이런 결말이었다.그렇게 불안한 밤이 지나 해가 떠오르고, 바다 위로 떠오르는 일출이 장관을 이뤘다.지아는 밤을 지새우다 잠이든지 30분도 되지 않아 쏟아지는 햇빛에 꿈에서 깨어났다.팔을 올려 눈부신 햇빛을 차단하던 지아는 이윽고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 생각나 즉시 술병을 잡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의자와 테이블은 여전히 문에 붙어 있었고, 움직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온 세상이 고요하고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엄마.”침대에서 일어난 소망이는 잠에서 깨어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졸린 눈빛으로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소망이 일어났어?”소망은 배를 만지며 낮게 말했다.“우유.”매일 아침 분유를 마시는 것이 습관이었던 소망이에게 우유를 타주는 것도 강욱의 일이었다.지아는 바삐 말했다.“알았어. 엄마가 지금 바로 우유 타 줄게.”“강욱 삼촌.”소망은 맨발로 침대에서 일어나 꼬리처럼 엄마를 졸졸 따라다녔다.요 며칠 스위트룸에 지내면서 아이는 매일 아침 일찍 강욱의 방으로
강욱은 오전 내내 돌아오지 않았고, 소망이 여러 차례 물어볼 때마다 지아는 핑계를 대며 얼버무렸다.그렇게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 강욱의 모습에 하빈에게 물어봐도 머뭇거릴 뿐이었다.지아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아무리 센 약이라도 1박 2일이 지나면 진정되지 않나?’다음 날 아침 일찍, 하빈이 막 가려는데 지아가 붙잡았다.“저기요, 임강욱 씨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상대가 분명하게 대답할 때까지 보내주지 않겠다는 기세였다.하빈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욱 형님이 좀 아프세요.”“아프다고요?”지아는 평소에 튼튼하게만 보였던 강욱이 아플 거라곤 전혀 예상 못했다.“솔직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강욱 형님은 그날 밤 약에 취했었는데 두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칠까 봐 다른 방에서 혼자 얼음물에 몸을 담근 채 밤을 보냈어요. 아침저녁으로 온도 차도 크고 찬물로 샤워해도 충분히 차가운데 거기에 얼음까지 넣었어요. 그리고...”지아는 그가 여자를 찾아 해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그리고 뭐요?”“의사가 최선의 해결책은 여자를 찾는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그러지 않고 과량의 진정제를 투여하도록 강요했어요. 거기에 밤새 추운 곳에 있었으니 몸이 강철도 아니고 어떻게 버티겠어요.”지아는 그 과정을 듣고 만감이 교차했다.“지금은 괜찮아요?”“솔직히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어제 밤새 열이 났어요. 강욱 형님께서는 두 사람이 걱정할까 봐, 그리고 혹시 감기라도 옮길까 봐 저에게 대신 식사를 준비하라고 시킨 겁니다.”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가서 만나봐도 돼요?”“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강욱 형님이 절대 아가씨를 외출시키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어요. 열흘 정도만 지나면 도착할 거고,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닙니다.”위독한 것도 아니야.”“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가씨. 저를 구해주신 강욱 형님께서 두 분을 잘 챙기라고 당부했으니 이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가씨.”방문
소망은 그림 속 작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엄마, 삼촌, 오빠, 나, 우리 가족이에요.”한부모 가정은 이게 문제였다. 세상 그 어떤 엄마도 이걸 설명할 수 없을 테고, 그건 지아도 마찬가지였다.반나절 동안 망설이던 지아가 설명했다.“소망아, 삼촌은 삼촌이고, 엄마와 너희만이 가족이야. 삼촌은 너희들 양아빠처럼 우리를 지켜주는 사람이야. 잠깐만 우리와 지내고 언젠가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삼촌은 떠날 거야.”언제나 말 잘 듣는 아이가 지아의 설명을 듣고 자리에서 소란을 피웠다.“안 돼요, 떠나면 안 돼요. 난 삼촌 좋단 말이야!”“그래, 엄마도 네가 삼촌 좋아하는 거 알아. 하지만 아가, 넌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날 거고, 모든 사람이 끝까지 우리와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삼촌도 직업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평생 우리 곁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콩알만 한 눈물이 긴 속눈썹에 맺혔고, 지아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하지만, 하지만...”아이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저 도윤이 떠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지아는 아이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달랬다.“이 세상에서 부모님 말고는 아무도 영원히 네 곁에 있을 수 없어, 알겠어? 삼촌도 아이가 생길 거고, 자기 아이를 보살피면서 살아가야지. 엄마가 나중에 소망이가 보고 싶어 하면 삼촌 만날 수 있게 해 볼게, 알았지?”소망은 코를 훌쩍거리며 지아를 올려다보았다.“그럼 아빠는요?”아이가 다시 물었다.“우리 아빠는요?”“아빠는...”지아는 눈을 감자 도윤의 얼굴이 떠올랐다.만약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걸 그가 알게 된다면 무척 기뻐할 테지만, 그들 사이엔 깊은 원한이 있었다.증오와 미움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그들 사이에는 백채원, 이지윤 남매도 있었다.‘아이에게 아빠가 또 다른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면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아빠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지는 건데, 그래도 아이에겐 좋은 기억만 남겨 줘야지.’지아가 대답했다.“죽었어
하빈의 말대로였다. 도윤은 정말 아파서 밤낮으로 열이 펄펄 끓으며 침대에 누워 시름시름 앓았다.진봉은 오래 함께한 아내처럼 머리맡에서 사과를 깎으며 쉴 새 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보스, 지금 이 꼴을 좀 봐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반년 동안 사모님 뒤를 쫓아다니면서 정체를 숨겨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네요.”진환이 그런 진봉을 노려보았다.“넌 좀 조용히 해. 보스가 원해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진환은 따뜻한 물 한 컵을 도윤에게 가져다주었다.“보스, 따뜻한 물 많이 마셔야 빨리 나아요.”도윤의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말라 있어서 무척 초췌해 보였다.물 한 잔을 다 마신 후 침대에 기대어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던 도윤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제일 먼저 입 밖으로 꺼낸 첫마디는 지아였다.“지아는 어떻게 지내?”“하빈이는 여자만큼이나 꼼꼼한 사람이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사모님의 취향을 줄줄이 읊고 있으니 잘못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도윤의 시선이 망설이는 진봉의 얼굴로 향했다.“말해.”“사모님께서 계속 보스에 대해 물어보셔서 하빈이가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답니다.”“지아가 뭐래?”“사모님께서 보러 오고 싶다고 했는데 하빈이가 거절했답니다.”도윤의 눈빛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비쳤다.“그래.”“보스, 얼른 나으세요. 지난 몇 년 동안 사모님과 떨어져 지내느라 몸도 기운도 다 상하셨잖아요. 예전 같았으면 하룻밤 얼음물에 있었다고 이렇게까지 열이 끓었겠어요?”진환도 옆에서 거들었다.“얘가 말을 좀 밉게 해도 일리가 있습니다. 몸이 예전 같이 않아요. 자주 밤도 새우시잖아요. 보스, 자기 몸도 돌보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사모님을 지켜요? 아직 사모님 죽이려 했던 배후도 밝혀지지 않았잖아요.”도윤은 두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전 같았으면 1년 내내 아픈 적이 없었고, 감기나 독감에 걸렸어도 뜨거운 물 좀 마시면 괜찮아졌을 것이다.지금처럼 이렇게 앓아누웠을 리가.“죽은?”“하빈이한테 가져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고, 강욱이 사흘 동안 오지 않자 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지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지아는 다시 한번 하빈을 멈춰 세웠다.“아픈 건 어떻게 됐어요? 왜 며칠이 지나도 낫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아가씨. 이미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만 형님께서 혹시나 몸에 남아있는 바이러스를 옮길까 봐 걱정하고 계십니다.”지아는 강욱이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건지, 진짜 병에 걸린 건지 알 수 없었다.어쨌든 강욱이 그동안 자신을 잘 대해줬으니 그래도 가서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지아가 말했다. “제가 가볼게요. 지금 어디 있어요?”“그럴 필요 없습니다. 형님께서 분명 오시는 걸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괜찮은지 그냥 한 번만 보고 갈게요. 어느 방에 있나요?”하빈은 망설였다. “그게...”“나한테 말하기 전까지 오늘 이 문 못 나가요.” 하빈은 머리를 긁적였다.“아가씨, 전 그냥 형님이 시켜서 식사 배달하러 온 사람입니다. 저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그냥 한번 보겠다는 거예요.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알겠어요. 그럼 돌아가서 형님한테 말씀드려볼게요.”지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좋은 소식 기다릴게요.”하빈은 도망치듯 도윤에게 달려갔고, 도윤은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열은 내렸지만 체력이 많이 손상되어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도윤이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아픈 것도 있지만 지아를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지아가 자신을 보러 온단 말에 미리 준비를 마쳤다.저녁 식사를 마친 지아는 하빈에게 아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방 번호를 받아 도윤의 방으로 갔다.배에 오른 후 처음으로 외출한 지아는 긴 복도를 따라 걸었고, 바닷바람이 약간은 서늘한 기운으로 그녀를 맞이했다.큰 파도가 배 위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이따금 배가 약간 흔들거리기도 했다.지아가 방 번호를 살펴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서 있었다.여자는 담장에 등
도윤은 지아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이상 더 지아 곁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이런 날이 올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지난 며칠 동안 일부러 피해 다녔지만 그저 그날이 조금만 늦게 오기를 바랐을 뿐이었다.지아는 먼저 도윤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고 옆 의자에 앉았다.“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동안 우리를 그렇게 오래 돌봐줬는데 나는 처음 물을 떠주네요.”도윤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을 몇 번 했다.“감사합니다.”“약 드실래요?”지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괜찮아요. 아직 기침만 계속하네요.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습니다.”“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임강욱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부지런하고 유능하죠. 그런 사람에게 아이만 돌보라고 하기엔 너무 아까워요. 아직 젊은 나이니까 나가서 사회생활도 해야죠.”지아가 정중하게 말하자 도윤은 양손에 컵을 들고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유리잔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시선을 내렸다.긴 침묵 끝에 도윤이 입을 열었다.“제가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게 아가씨를 괴롭히는 거겠죠.”도윤의 갑작스럽고도 직접적인 말에 지아는 조금 당황했다.무뚝뚝한 성격에 자신처럼 그날 밤 일은 그냥 없었던 일처럼 넘어갈 줄 알았다.그런데 도윤이 그 벽을 깨뜨려 정면 돌파하며 자신에게 대답을 강요할 줄이야.지아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깍지 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그 이유도 있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 A시에 도착하면 헤어지려고 했어요.”“소망이가 저 많이 좋아해요.”“알아요.”“그러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도윤은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전남편처럼 당신한테 상처 주지 않을게요. 아껴주고 지켜주고, 돈이 없어서 싫다고 하면 돈도 벌 겁니다. 돈 벌 방법은 많으니까, 당신과 아이는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냥 불쌍해서 그래요. 병이 아직 완치되지도 않았고 몸이 완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