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욱은 오전 내내 돌아오지 않았고, 소망이 여러 차례 물어볼 때마다 지아는 핑계를 대며 얼버무렸다.그렇게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 강욱의 모습에 하빈에게 물어봐도 머뭇거릴 뿐이었다.지아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아무리 센 약이라도 1박 2일이 지나면 진정되지 않나?’다음 날 아침 일찍, 하빈이 막 가려는데 지아가 붙잡았다.“저기요, 임강욱 씨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상대가 분명하게 대답할 때까지 보내주지 않겠다는 기세였다.하빈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욱 형님이 좀 아프세요.”“아프다고요?”지아는 평소에 튼튼하게만 보였던 강욱이 아플 거라곤 전혀 예상 못했다.“솔직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강욱 형님은 그날 밤 약에 취했었는데 두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칠까 봐 다른 방에서 혼자 얼음물에 몸을 담근 채 밤을 보냈어요. 아침저녁으로 온도 차도 크고 찬물로 샤워해도 충분히 차가운데 거기에 얼음까지 넣었어요. 그리고...”지아는 그가 여자를 찾아 해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그리고 뭐요?”“의사가 최선의 해결책은 여자를 찾는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그러지 않고 과량의 진정제를 투여하도록 강요했어요. 거기에 밤새 추운 곳에 있었으니 몸이 강철도 아니고 어떻게 버티겠어요.”지아는 그 과정을 듣고 만감이 교차했다.“지금은 괜찮아요?”“솔직히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어제 밤새 열이 났어요. 강욱 형님께서는 두 사람이 걱정할까 봐, 그리고 혹시 감기라도 옮길까 봐 저에게 대신 식사를 준비하라고 시킨 겁니다.”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가서 만나봐도 돼요?”“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강욱 형님이 절대 아가씨를 외출시키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어요. 열흘 정도만 지나면 도착할 거고,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닙니다.”위독한 것도 아니야.”“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가씨. 저를 구해주신 강욱 형님께서 두 분을 잘 챙기라고 당부했으니 이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가씨.”방문
소망은 그림 속 작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엄마, 삼촌, 오빠, 나, 우리 가족이에요.”한부모 가정은 이게 문제였다. 세상 그 어떤 엄마도 이걸 설명할 수 없을 테고, 그건 지아도 마찬가지였다.반나절 동안 망설이던 지아가 설명했다.“소망아, 삼촌은 삼촌이고, 엄마와 너희만이 가족이야. 삼촌은 너희들 양아빠처럼 우리를 지켜주는 사람이야. 잠깐만 우리와 지내고 언젠가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삼촌은 떠날 거야.”언제나 말 잘 듣는 아이가 지아의 설명을 듣고 자리에서 소란을 피웠다.“안 돼요, 떠나면 안 돼요. 난 삼촌 좋단 말이야!”“그래, 엄마도 네가 삼촌 좋아하는 거 알아. 하지만 아가, 넌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날 거고, 모든 사람이 끝까지 우리와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삼촌도 직업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평생 우리 곁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콩알만 한 눈물이 긴 속눈썹에 맺혔고, 지아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하지만, 하지만...”아이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저 도윤이 떠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지아는 아이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달랬다.“이 세상에서 부모님 말고는 아무도 영원히 네 곁에 있을 수 없어, 알겠어? 삼촌도 아이가 생길 거고, 자기 아이를 보살피면서 살아가야지. 엄마가 나중에 소망이가 보고 싶어 하면 삼촌 만날 수 있게 해 볼게, 알았지?”소망은 코를 훌쩍거리며 지아를 올려다보았다.“그럼 아빠는요?”아이가 다시 물었다.“우리 아빠는요?”“아빠는...”지아는 눈을 감자 도윤의 얼굴이 떠올랐다.만약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걸 그가 알게 된다면 무척 기뻐할 테지만, 그들 사이엔 깊은 원한이 있었다.증오와 미움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그들 사이에는 백채원, 이지윤 남매도 있었다.‘아이에게 아빠가 또 다른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면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아빠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지는 건데, 그래도 아이에겐 좋은 기억만 남겨 줘야지.’지아가 대답했다.“죽었어
하빈의 말대로였다. 도윤은 정말 아파서 밤낮으로 열이 펄펄 끓으며 침대에 누워 시름시름 앓았다.진봉은 오래 함께한 아내처럼 머리맡에서 사과를 깎으며 쉴 새 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보스, 지금 이 꼴을 좀 봐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반년 동안 사모님 뒤를 쫓아다니면서 정체를 숨겨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네요.”진환이 그런 진봉을 노려보았다.“넌 좀 조용히 해. 보스가 원해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진환은 따뜻한 물 한 컵을 도윤에게 가져다주었다.“보스, 따뜻한 물 많이 마셔야 빨리 나아요.”도윤의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말라 있어서 무척 초췌해 보였다.물 한 잔을 다 마신 후 침대에 기대어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던 도윤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제일 먼저 입 밖으로 꺼낸 첫마디는 지아였다.“지아는 어떻게 지내?”“하빈이는 여자만큼이나 꼼꼼한 사람이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사모님의 취향을 줄줄이 읊고 있으니 잘못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도윤의 시선이 망설이는 진봉의 얼굴로 향했다.“말해.”“사모님께서 계속 보스에 대해 물어보셔서 하빈이가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답니다.”“지아가 뭐래?”“사모님께서 보러 오고 싶다고 했는데 하빈이가 거절했답니다.”도윤의 눈빛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비쳤다.“그래.”“보스, 얼른 나으세요. 지난 몇 년 동안 사모님과 떨어져 지내느라 몸도 기운도 다 상하셨잖아요. 예전 같았으면 하룻밤 얼음물에 있었다고 이렇게까지 열이 끓었겠어요?”진환도 옆에서 거들었다.“얘가 말을 좀 밉게 해도 일리가 있습니다. 몸이 예전 같이 않아요. 자주 밤도 새우시잖아요. 보스, 자기 몸도 돌보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사모님을 지켜요? 아직 사모님 죽이려 했던 배후도 밝혀지지 않았잖아요.”도윤은 두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전 같았으면 1년 내내 아픈 적이 없었고, 감기나 독감에 걸렸어도 뜨거운 물 좀 마시면 괜찮아졌을 것이다.지금처럼 이렇게 앓아누웠을 리가.“죽은?”“하빈이한테 가져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고, 강욱이 사흘 동안 오지 않자 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지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지아는 다시 한번 하빈을 멈춰 세웠다.“아픈 건 어떻게 됐어요? 왜 며칠이 지나도 낫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아가씨. 이미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만 형님께서 혹시나 몸에 남아있는 바이러스를 옮길까 봐 걱정하고 계십니다.”지아는 강욱이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건지, 진짜 병에 걸린 건지 알 수 없었다.어쨌든 강욱이 그동안 자신을 잘 대해줬으니 그래도 가서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지아가 말했다. “제가 가볼게요. 지금 어디 있어요?”“그럴 필요 없습니다. 형님께서 분명 오시는 걸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괜찮은지 그냥 한 번만 보고 갈게요. 어느 방에 있나요?”하빈은 망설였다. “그게...”“나한테 말하기 전까지 오늘 이 문 못 나가요.” 하빈은 머리를 긁적였다.“아가씨, 전 그냥 형님이 시켜서 식사 배달하러 온 사람입니다. 저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그냥 한번 보겠다는 거예요.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알겠어요. 그럼 돌아가서 형님한테 말씀드려볼게요.”지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좋은 소식 기다릴게요.”하빈은 도망치듯 도윤에게 달려갔고, 도윤은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열은 내렸지만 체력이 많이 손상되어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도윤이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아픈 것도 있지만 지아를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지아가 자신을 보러 온단 말에 미리 준비를 마쳤다.저녁 식사를 마친 지아는 하빈에게 아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방 번호를 받아 도윤의 방으로 갔다.배에 오른 후 처음으로 외출한 지아는 긴 복도를 따라 걸었고, 바닷바람이 약간은 서늘한 기운으로 그녀를 맞이했다.큰 파도가 배 위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이따금 배가 약간 흔들거리기도 했다.지아가 방 번호를 살펴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서 있었다.여자는 담장에 등
도윤은 지아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이상 더 지아 곁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이런 날이 올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지난 며칠 동안 일부러 피해 다녔지만 그저 그날이 조금만 늦게 오기를 바랐을 뿐이었다.지아는 먼저 도윤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고 옆 의자에 앉았다.“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동안 우리를 그렇게 오래 돌봐줬는데 나는 처음 물을 떠주네요.”도윤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을 몇 번 했다.“감사합니다.”“약 드실래요?”지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괜찮아요. 아직 기침만 계속하네요.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습니다.”“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임강욱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부지런하고 유능하죠. 그런 사람에게 아이만 돌보라고 하기엔 너무 아까워요. 아직 젊은 나이니까 나가서 사회생활도 해야죠.”지아가 정중하게 말하자 도윤은 양손에 컵을 들고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유리잔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시선을 내렸다.긴 침묵 끝에 도윤이 입을 열었다.“제가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게 아가씨를 괴롭히는 거겠죠.”도윤의 갑작스럽고도 직접적인 말에 지아는 조금 당황했다.무뚝뚝한 성격에 자신처럼 그날 밤 일은 그냥 없었던 일처럼 넘어갈 줄 알았다.그런데 도윤이 그 벽을 깨뜨려 정면 돌파하며 자신에게 대답을 강요할 줄이야.지아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깍지 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그 이유도 있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 A시에 도착하면 헤어지려고 했어요.”“소망이가 저 많이 좋아해요.”“알아요.”“그러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도윤은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전남편처럼 당신한테 상처 주지 않을게요. 아껴주고 지켜주고, 돈이 없어서 싫다고 하면 돈도 벌 겁니다. 돈 벌 방법은 많으니까, 당신과 아이는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냥 불쌍해서 그래요. 병이 아직 완치되지도 않았고 몸이 완전히
지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도윤이 덧붙였다.“아가씨가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가씨를 좋아하는 건 내 일이고, 전 예전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아가씨 인생에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아가씨를 좋아하는 건 내 자유이기도 하니까, 날 죽일 수는 있어도 좋아하는 마음은 막을 수 없어요.”그 말을 듣고 있던 지아의 귓불이 달아올랐다. ‘무던하고 장난기 많은 사람은 어디 가고...’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지아는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도윤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이불을 걷어 내렸다.“됐어요. 부담 느낄 필요 없다고 했으니까 데려다줄게요. 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쉬어요.”“아니요. 혼자 돌아갈게요. 어차피 별로 멀지도 않아요.”“밤에는 배가 위험하니까 데려다줄게요.”이미 일어나 재킷을 입은 도윤은 지아의 옷차림이 다소 얇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무심코 블레이저를 꺼내 어깨에 둘러주었다.지아가 거절하기도 전에 도윤이 말했다.“깨끗한 겁니다.”“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저는...”“알아요.”도윤은 문 옆에 서서 지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지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제야 여자 혼자 배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도윤은 반쪽 가면을 써서 평범한 얼굴을 가렸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아우라는 더욱 위험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그 모습을 얼핏 본 지아는 도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곧바로 그런 생각을 뒤편으로 떨쳐버렸다. 도윤과 키는 비슷했지만 몸이 조금 더 튼튼했고, 강욱은 도윤보다 10킬로 정도는 더 마른 것 같았다.늘 양복과 셔츠 차림으로 항상 넥타이를 매는 도윤은 주름 하나 없이 단정했고, 손짓 하나에도 귀족의 기품이 풍겨 나왔다.하지만 강욱은 평소 정장을 입는 일이 드물었고, 흰 셔츠 맨 위 단추 두 개는 풀어헤친 채 셔츠도 바지 안에 넣지 않았다.슈트는 활짝 열어 셔츠의 모서리가 드러나도록 입었다.사람 자체가 캐주얼하고 편안해 보였고, 가면을 쓰고 있으니 사악한 방탕함이 더 느껴졌다.지아는
여전히 기침을 하던 도윤은 지아를 문 앞에 데려다주고 몇 마디 당부한 뒤 자리를 떠났다.지아의 몸이 남들보다 약한 데다 자신의 병도 채 낫지 않아 밀폐된 공간에서 바이러스가 아이와 지아에게 옮을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두 사람의 안전을 위해 도윤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게다가 지아가 이제 겨우 곁에 남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럴 때일수록 지아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이윽고 지아에게 단검을 건네며 마음대로 밖을 나가지만 않는다면 안전하다고 말했다.지아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하빈과 소망은 한창 재밌게 놀고 있었다.소망은 하빈의 얼굴에 별과 달 스티커를 잔뜩 붙이고 목에는 목걸이를, 귀에는 귀걸이를 하고 열 손가락에 인조 손톱까지 붙여놓았다.하빈은 요술봉을 들고 변신하고 있었다.“요리조리 마술...”한 바퀴를 돌기도 전에 문 앞에 서 있는 지아를 보고 미소가 굳어버렸다.“흠! 아가씨 빨리 오셨네요.”‘임강욱은 대체 어디서 이런 사람을 데려오는 걸까? 왜 하빈 씨가 소망이보다 더 신나 보이지?’“제가 괜한 부탁을 드린 건 아니죠?”“아닙니다. 소망 아가씨께서 무척 얌전하세요. 시간도 늦었는데 전 이만 가볼게요.”“소망아, 하빈 삼촌한테 인사해야지.”소망이 손을 흔들었다.“삼촌 안녕.”그러다 소망이는 다시 무언가 떠오른 듯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하빈의 손을 잡았다.“강욱 삼촌은 어딨어요?”지아가 설명했다.“삼촌 병 다 나으면 다시 올 거야. 착하지, 하빈 삼촌은 이제 쉬러 가야 해.”“아.”강욱 삼촌도 함께 돌아올 거라고 기대했던 소망의 눈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혹시 엄마와 삼촌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왜 강욱 삼촌이 며칠째 안 보이고 대신 하빈 삼촌이 오는 걸까? 앞으로 강욱 삼촌을 못 보는 걸까...’한번 싹튼 생각은 뿌리를 박고 싹이 트고 잎이 피는 씨앗처럼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이틀이 더 지났지만 도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
아이를 잃어버렸다. 그녀가 운동하는 틈을 타 몰래 도망친 것이다!항상 착하고 순종적이었던 소망이가 임강욱을 찾으러 몰래 나갈 줄은 정말 몰랐다.이 배가 어떤 곳인지, 얼마나 많은 변태들이 있는지 아이는 모른다.특히 이렇게 작고 예쁜 여자아이가 누군가의 표적이 된다면?이 세상에는 돈 많고 미친 사람들이 많았고, 단순 협박보다 더 무서운 후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예를 들어 여자 다리와 머리카락을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이 다크웹에 미션을 올리면 전문적으로 전 세계에서 적합한 후보자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타깃이 확정되면 그들은 온갖 신분으로 위장해 접근한 뒤 여자들에게 데이트라는 명목으로 해외여행을 가서 팔아넘기기도 했다.일부는 장기나 신체가 팔려 가고, 가치가 떨어지면 변태들에게 팔려 가 불구가 된 수집품이 되기도 했다.그리고 이 유람선에는 그런 변태들이 많았다!무너지기 직전인 지아는 소망이 하빈을 따라잡아 모든 게 무사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도킹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때일수록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힘들게 되찾은 아이인데 반드시 무사해야 했다.지아는 가발과 마스크를 쓰고 아무 옷이나 걸치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아이가 살아있다는 걸 몰랐으면 오히려 그녀의 삶이 조금 나았을까?한번 행복했던 순간을 맛보고 나니 잃는 게 더욱 두려워졌다. 모공 하나, 숨결 하나에도 두려운 기색이 가득했다.지아는 당황한 나머지 도윤의 방으로 달려가다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항암치료의 부작용은 줄어들었지만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풀썩 주저앉는 탓에 눈앞이 어지러웠다.잠시 진정하고 일어날 준비를 하는데 지아의 눈앞에 여자의 하이힐이 나타났다.검은색 가죽으로 둘러싸인 굽이 얄쌍한 하이힐이었다.하얀 여자의 피부가 검은색 그물 스타킹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아가씨, 도와드릴까요?”여자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지아의 시선이 가느다란 다리를 타고 천천히 올라가자 하이웨이스트 짧은 치마에 검은색 티를 입은
이예린은 비록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노련한 태도로 전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새로운 곳에 와서 그런지 잠이 안 오네요. 좀 걸으려고요.” “네 오빠도 여기 있잖니. 그 아이가 네가 나가는 걸 보면 분명히...” 이예린은 곧장 심예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오빠가 제 손발이 이미 회복된 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오빠가 정말 저를 죽이고 싶었다면, 이미 3년 전에 끝냈을 거예요. 하지만 오빠는 누군가처럼 사랑에 눈이 멀어버리는, 마음 여린 사람이라고요.” 당시 도윤은 예린을 죽이지 않고, 단지 손과 발의 힘줄을 끊어버렸다. 그것만으로 지아를 위해 복수를 한 셈이었다.더구나 지아는 죽지 않았기에, 도윤은 더 이상 예린을 해치지 않았다.“너는 전혀 우리를 닮지 않은 모양이구나.”예린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러게요.”사실, 사랑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은 그들 가문에 흐르는 피와 같았다.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도윤도 그러했으며, 예린도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시후가 예린을 구해준 순간부터, 예린은 자신의 목숨이 영원히 시후의 것임을 알았다. “그래, 주변에서만 걸어 다니렴. 괜한 문제는 일으키지 말고.” “알겠어요.”예린은 몇 발짝 걸어가다가 멈추더니, 뒤돌아 심예지를 바라보았다.“엄마.”심예지는 온몸이 굳어버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예린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니?” 심예지는 지난 몇 년 동안 예린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었지만, 예린은 늘 과묵했으며,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예린은 태도마저 차갑고 무관심했기에, 심예지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저 여생 동안 속죄할 기회가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심예지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는데, 예린의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단어는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니는 듯했다.심예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이 차올랐고, 다시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뭐... 뭐라고?”“엄마.”이번에는 예린
전화를 받은 이예린은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말했다.[말씀만 해주세요.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겠어요.]이 대답은 시후가 예상한 대로였다. 과거에도, 그리고 얼마 전에 재회했을 때도, 예린은 시후를 볼 때마다 두려워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평소의 당당한 이예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시후는 연애 경험은 없었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다양한 유형의 여성을 접해왔다. 그래서 예린이 단순히 자신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것 외에도, 깊은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예린이 이씨 가문의 아가씨라 할지라도, 시후 앞에서는 늘 자신감 없는 태도를 보였으니 말이다. 예린은 시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며, 늘 자격지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시후는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제가 선생님의 아버지를 구출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할 수 있겠어?”시후는 예린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예린은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어려울 순 있겠지만, 반드시 해낼게요.]예린은 나이가 어리지만 결단력이 있었다. 예린의 대답에 시후는 한결 안도했다.“뭐든 얘기해줘. 최선을 다해서 널 도울게.”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저 혼자로도 충분하니까요. 사람이 많아지면 오히려 적에게 이상한 낌새만 줄 뿐이에요.]시후는 곧 이예린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보게 되었다. 예린은 명석한 두뇌와 치밀한 계획, 냉혹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만약 예린이 적이었다면, 정말로 두려운 상대가 되었을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양지운이 시후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됐습니까?” “우리 사람들을 철수시켜.” “그 여자의 말을 믿으시는 거예요? 오랜 세월 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인데요.” 시후는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때로는 은혜 하나만으로도 평생 기억되는 법이지
이 말을 할 때 조경선의 얼굴은 거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고, 입가에는 미친 듯한 웃음이 번졌다.“꼭 살아남아서, 그 모든 걸 똑똑히 지켜보도록 해.” 조경선은 다시 소임호에게 영양제를 주사했다. 소임호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는데, 조경선과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남은 힘을 모두 소진한 것 같았다. 소임호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병약한 모습을 보자, 조경선은 결국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조경선은 수년간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계획해 왔다.조경선이 상상했던 장면은 소임호가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애원하며 사과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임호를 붙잡고 나서도, 소씨 가문이 이렇게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임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했으니, 조경선의 분노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날린 주먹이 솜사탕에 파묻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조경선의 가슴속은 분노와 억울함으로 가득 찼다. 그토록 오랜 시간 공들여 계획했지만, 조경선은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조경선은 뼛속 깊이 소임호를 증오하면서도, 소임호가 그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소임호는 조경선이 평생 이루지 못한 소원이자,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소임호를 미워할수록 사랑도 더 깊어졌기에, 조경선은 소임호를 죽이기보다는 그가 자신에게 굴복하며 돌아오기를 원했다.해가 저물 무렵.조경선은 잠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별장 안팎에 놓인 꽃들과 각종 장식은 사실 특정한 용도로 설계된 것이었다. “침입자 발견! 침입자 발견!”기계음이 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조경선은 두 눈을 번쩍 뜨며 침대 옆 협탁에서 가면을 꺼내 얼굴에 썼고, 입가에 음흉한 웃음을 그렸다. “감히 여길 들어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지?”조경선이 손을 한 번 흔들자, 벽에 설치된 스크린에 실시간 CCTV 화면이 투사되
지아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진봉을 바라보며 물었다.“성형?” “예, 성형수술이요.”지아는 그제야 소시월이 왜 자신과 닮았는지, 혹시 소임호와 관련 있는 사람인지 의심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되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손에 든 서류를 훑어보았다.소시월은 13살에 처음 성형수술을 했고, 이후 매년 한 가지씩 성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게다가 20대 중반 이후로는 유지와 보수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그 시절 소시월은 기숙 학교에 다녔기에, 사람들은 반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를 닮아간다고 생각했을 뿐, 의술의 힘으로 얼굴을 바꿨다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아마 그들이 당시에 지아를 해치지 않은 이유도 그녀의 얼굴을 복제하려 했기 때문일 터.그 후, 지아가 쓸모없어지자 암살 계획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지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 가짜 얼굴을 한 꺼풀씩 다 벗겨내 주겠어!”“사모님, 만약 그 여자가 사모님을 계속 암살하려던 배후라면, 그 여자의 등에는 분명히 총상이 있을 겁니다. 그날 저희가 사람들을 데리고 갔을 때, 그 여자는 도망치면서 총을 한 발 맞았었죠.” “당장 알아봐!”지아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는데,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생지옥 같은 나날들이 떠오르는 듯했다.비록 도윤이 한때 지아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결국 그 모든 고통은 누군가가 뒤에서 지아의 삶을 철저히 망가뜨린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소시월은 내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누려야 할 가족의 사랑과 따듯함을 즐겼어. 그것도 모자라서 나를 지옥 속으로 처참히 몰아넣었다고!’지아의 분노는 억누를 수 없을 정도였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모든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그 여자를 감시할 사람을 찾아. 최근 움직임이 많아졌으니,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예.”지아는 머리를 짚으며
안타깝게도 지아가 이미 진실을 알아낸 상태였기에, 장민호의 소식은 늦은 셈이었다.“지금 어디에 계세요?”지아가 급히 물었다.‘민호 씨가 이 일에 연루되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Z국에 있어요. 최근 소씨 가문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 소식을 알아내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틈을 타서 지아 씨에게 위협이 되는 소시월을 제거할 테니까요.]지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아는 처음에 장민호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자신의 의도를 눈치챘을까 봐 걱정했지만, 장민호는 아직 그녀가 Z국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죽이면 안 돼요.”[왜요? 그 여자는 지아 씨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그런 위험한 존재를 살려두면 지아 씨에게 더 큰 위협이 될 거예요.]지아는 핑계를 댔다.“저는 이미 몇 번이나 그 사람한테 암살당할 뻔했고, 그 소씨 가문의 여섯째 딸이라는 사람과도 만났어요. 우리는 나이도 비슷하고, 국적도 달라서 아무런 원한도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저를 죽이려고 했겠어요?” “제 생각엔 누군가 소시월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단지 이용당하는 말일 뿐인 거죠. 그 사람을 죽이는 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그 배후의 사람이 진짜 목표니까요...” 지아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아니라 말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장민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강인했다.[제가 도울게요.]“위험하지 않겠어요? 너무 위험하다면 하지 마세요. 저는 민호 씨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지아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겁니다.]장민호는 마지막으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속죄라고 생각해 주세요.]전화를 끊은 후에도 지아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사건이 윤곽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지만, 주변 상황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특히 소씨 가문이 혼란스러운 지금은 지아가 신분을 밝히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소임호와 조경숙이 자기 친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지아
병원에서 사고를 당한 시언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아는 일찍이 자신과 시후의 계획을 모두 털어놓았다. 다만, 다른 사람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시후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고, 시언이 대외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즉, 두 사람이 안팎에서 호응하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 게다가 소임호 또한 차근차근 사건을 조사하며, 여러 정황으로 인해 배후의 흑막이 조경선이라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조경선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미끼로 삼았다. 하지만 비행기 사고 이후로 소임호와 시후의 연락이 끊겼고, 시언은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며 초조해했다. 그런데 조금 전, 다행히도 소임호의 행방을 알아낸 것이었다.시언은 즉시 이 소식을 지아에게 알렸다. 지아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자, 시언의 목소리를 듣고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순간적으로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지아야?”시언은 지아의 침묵에 걱정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 지아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그냥...]하지만 말을 꺼내자 목소리에 눈물 섞인 떨림이 묻어나왔다.시언이 더욱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이 있다면 숨기지 마. 우리는 이미 네 의형제가 됐어. 우린 가족이라고. 소씨 가문에 이런저런 일이 생겼다고 해도, 난 널 지킬 거야.”시언의 ‘지킨다’라는 말이 지아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했다.시언은 지아의 정체를 알지 못했음에도 여전히 이렇게 다정하고 따듯하게 대해주었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유대일 것이었다. 하지만 지아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왜 소씨 가문 사람들은 내 존재 자체를 몰랐을까?’ 현재 지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경숙은 여섯 번째 아이를 낳은 후 과다출혈로 크게 몸이 상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고 했다.‘가족이 내 존재를 모를 리가 없는데.’ ‘게다가 시영 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남은 건 소시월 뿐이야.’‘소시
소임호는 눈앞의 광기 어린 조경선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조경선, 그동안 정말 행복했니? 그렇게 애써 계획해서 네가 얻은 건 뭐지?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우리는 모두 패배자라고!” “틀렸어.”조경숙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그 당시의 나는 얼굴도 망가지고, 족보에서 제명되고, 가족들에게도 내쳐졌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데, 조경숙은 왜 모든 걸 가져야 해? 시골에서 돌아온 한낱 촌뜨기가 어떻게 나를 대신할 수 있었냐고!” “그래, 난 패배자야. 하지만 너희도 내 시체 위에 서서 잘난 척할 수는 없을걸? 우리 두 쪽 다 망가지는 게 내 승리니까!” 조경선이 고개를 숙여 소임호를 살펴보며 말했다.“당신 꼴을 좀 봐. 떠돌이 개랑 다를 게 뭐야? 참 안쓰럽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곧 소씨 가문은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나는 당신을, 그리고 소씨 가문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말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그래, 난 미쳤어.”“하지만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젠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당신이 똑똑히 느껴야 할 차례야.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경숙은 이제 심세호의 여자가 됐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아?” “참, 그건 모르지? 소씨 가문의 노친네는 이미 죽었고, 당신 아들들도 곧 당신과 함께 무덤으로 갈 거야!” “조경선, 너는 진짜 인간 말종이야!” 소임호는 극도로 분노하며 몸부림쳤고, 쇠사슬은 그의 몸부림으로 인해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조경선은 소임호의 턱을 잡고 비웃으며 말했다. “왜, 불만이야? 그럼 나한테 빌어봐. 그러면 그 자식들한테 고통 없는 죽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꿈 깨.”소임호가 냉소하며 말했다.“죽어도 너한테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당신을 죽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참히 망가지는지 보여줄 수 없잖아. 당신 자식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고,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조경숙은 눈이 멀어 다른 남
여자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넌 먼저 돌아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분간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어요.”시월은 갑자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물었다.“맞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흥, 끝까지 고집불통인 쓰레기 같은 남자. 내가 겪은 교통을 천배, 만 배로 되돌려줄 거야!” 시월의 얼굴에 찰나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동안 아빠가 가족도 잃게 하고, 집안도 망가지게 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 꿈 깨! 이건 그 사람이 나한테 진 빚이라고!” 여자가 소시월의 옷깃을 꽉 잡으며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데, 나는 네 어미야. 네가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나는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엄마, 알겠어요,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당연히 엄마 편이에요.” 소시월은 여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여자의 정서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사실, 그녀의 얼굴도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집착이 너무도 강한 그녀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 고통을 평생 기억하면서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한테 천 배, 만 배로 돌려줄 거야!!” 여자는 평생을 복수 계획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하지만 소시월이 보기에, 복수를 이루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소씨 가문은 지금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소시월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소시월이 떠난 후, 여자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는데, 여자가 자신의 지문을 입력하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여자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는 손과 발이 묶인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광기 어린 집착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소임호
소지훈이 폭로한 충격적인 사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아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출생 비밀을 찾아 헤매던 지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스스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소씨 가문 사람들의 고충에 공감했던 지아는 이제 그들이 자기 혈육임을 알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미끄러졌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들이...” 하지만 더욱 지아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예전에 마주했던 그 시신이 자기 친언니였다는 사실이었다. ‘시영 언니는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 ‘심지어 나는 그걸 전혀 몰랐고,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했어...’ 지아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지아야!”도윤은 지아를 안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침대에 누운 채 찡그린 표정을 한 지아를 보며 도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지아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그런데 간절히 바랐던 가족마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다니.’ 무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아의 곁을 지켰다.도윤은 무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냥 과로한 상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뿐이거든.” 한편, 소씨 가문의 황당한 해프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으며, 소영수의 장례식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들의 싸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소지훈이 이긴 듯 보였으나, 사실 그로 인해 소씨 가문은 체면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시월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해가 뜨기도 전에 황급히 차를 몰아 오래된 별장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까악까악’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장미 덩굴은 낡은 담벼락 위로 기어오르며, 삭막하고 부패한 세상에 한 줄기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햇살이 어둠을 찢으며 온 세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