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깨어났을 때, 이미 저녁이 되었고, 지아는 복도에서 우는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어렴풋이 눈을 떴지만 바로 움직이지 않고 그저 천장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이 모든 것은 마치 꿈과도 같았고, 그저 힘들기만 할 뿐 조금도 진실하지 못했다.도윤은 새빨개진 두 눈으로 지아를 바라보았고 목소리도 심하게 잠겼다.“지아야, 깨어났어?”도윤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 지아는 그가 며칠 밤이나 새워 가며 줄곧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요 며칠 지아는 영양 주사에 의지해왔고, 아무런 식사도 하지 않았기에, 입술이 마르면 도윤은 면봉에 물을 묻혀 그녀에게 닦아주었다.깨어난 후, 지아는 입이 거의 벌어지지가 않았고, 그저 눈알만 굴렸다.“왜 그래? 목이 마르든 배고프든 나에게 말해.”“목말라…….”도윤은 마침내 지아가 스스로 요구를 제기하는 것을 듣고 기뻐해하며 재빨리 일어났다.그러나 그는 자기도 며칠을 쉬지 않고 잘 먹지도 못했다는 것을 깜빡했고, 그렇게 일어난 순간,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해지더니 뜻밖에도 넘어질 뻔했다.다행히 도윤은 쓰러지기 전에 민첩하게 테이블을 부축하고서야 겨우 몸을 바로잡았다.비록 낭패한 모습을 보였지만, 도윤은 멈추지 않고 재빨리 테이블을 향해 달려가 지아에게 물 한 잔을 받아주었다.지아는 도윤이 입고 있는 옷을 보았는데, 여전히 며칠 전에 입었던 그 옷이었다.자신에게 의외의 일이 생긴 그날 밤부터, 도윤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지아야, 급하게 마시지 말고 천천히 마셔.”그의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있었는데, 수염도 조금씩 튀어나왔다.이렇게 초라한 도윤은 예전에 지아가 알고 있었던 그 남자와 완전히 달랐다. 예전의 도윤은 언제나 완벽한 양복 차림에 손만 흔들면 이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왕이었다.그는 예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지아를 챙겨주었다.지아는 목이 몹시 말라서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물을 마셨다.그녀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것을 보고, 도윤은 부드럽게 휴지로 그녀의 입가를 깨끗
지아도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일이 이미 일어난 이상, 그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 후회라는 약은 없으니까.그녀의 목숨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맞바꾼 것이었기에, 앞으로 지아는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내가 다시 어리석은 짓을 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어. 넌 먼저 돌아가서 샤워부터 하고 푹 쉬어. 안심해, 앞으로 난 도망가지 않을 거야.”도윤은 지아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지아는 깨어난 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만약 전의 지아가 우뚝 솟은, 우아하고 고귀하지만 아무런 살상력이 없는 난초였다면, 지금의 지아는 가시 달린 장미로서, 아름답지만 가까이 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시로 찔러 상처를 입히는 듯했다.“지아야, 난 하나도 안 피곤해…….”그는 지아의 현재 상태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에 그녀의 곁을 지키며 상황을 좀 더 살펴 보고 싶었다.지아는 더 이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고 오히려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아까 우는소리 들리던데, 누구야?”“강미연 씨의 부모님, 지금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떠들고 있어. 그 사람은 너를 위해 죽었기에, 난 그들을 봐주었지만, 그들은 도리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줄곧 병원에서 소란을 피웠지.”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도윤의 말에 불만을 품었다.“넌 영원히 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거야. 아이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것은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게 아니야.”말하면서 지아는 이불을 젖혔고, 지금 몸이 회복되지 않아 힘이 별로 없었다.지아는 고개를 돌려 도윤을 바라보았다.“나 좀 부축해 줄래?”“그래.”문이 열리는 순간, 밖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과 함께 여자의 가슴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고막을 파고쳤다.지아는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다. 소박한 옷차림의 한 중년 여성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녀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졌고, 눈은 새빨갛게 붉어져 있었으며 비통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성은 진환의 옷깃을 꽉 쥐고 울부짖고 있었
이런 지아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으니, 조미자는 또 어떻게 정말 그녀를 때릴 수 있겠는가?또한 그녀는 지아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아버지가 식물인간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으며, 지금은 이도윤과 이혼까지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아가 무릎을 꿇는 것을 본 조미자는 오히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가씨, 지금 몸이 많이 약하니까 얼른 일어나요. 바닥은 너무 차요.”조미자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지아의 평평한 배를 보고, 그녀가 틀림없이 조산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게다가 다친 사람은 지아뿐만 아니었다.염경훈은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달려왔다.“아주머니, 미연 씨는 자발적으로 사모님을 보호하려 했으니 사모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제가 미연 씨를 잘 보호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제가 그 벌을 기꺼이 받을게요.”염경훈은 병원에 와서 강은환을 본 적이 있었고, 비록 한 번 밖에 보지 못했지만, 조미자는 염경훈이 딱 봐도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어머, 자네 다리가…….”염경훈 뒤에 있던 병실에서 키가 큰 남자들이 속속 나왔는데, 어떤 사람은 손을 다쳤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다쳤다.“아주머니, 다 저희들의 잘못이니 염 팀장과 상관이 없어요. 미연 씨의 죽음에 지금 가장 슬퍼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염 팀장이에요.”건장하고 훤칠하지만 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니, 장관일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도윤은 지아를 부축한 다음,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고, 사람들을 헤치고 나왔다.이렇게 건장한 남자들 중에서 도윤이 등장하자 복도 전체의 분위기가 변했다.그는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조미자는 이미 숨을 쉴 수 없었다.도윤의 눈에는 핏발이 가득했고, 그 잘생긴 얼굴은 지금 무척 차가웠다.“난 그들의 사장님이자 강미연 씨의 고용주예요. 지금 이미 사람 시켜 강미연 씨의 뒷일과 배상 문제를 처리하라고 했는데.”도윤은 냉정하고 강했다. 진환과 마찬
지아는 눈을 들어 바라보았는데, 키가 크고 마른 소년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이목구비는 미연과 아주 비슷했다.비록 닮았지만 미연은 활발하고 명랑했고, 그녀의 동생은 기질이 음울하고 차가웠다.지아의 눈빛을 감지한 소년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죄송합니다. 제 어머니는 상황을 모르고 이렇게 소란을 피운 것 같습니다.”진환은 이미 강은환에게 설명을 했기에, 그는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고, 단지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숨겼던 것이다. 그러나 조미자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지아는 강은환을 바라보며 가볍게 말했다.“네가 바로 은환이구나, 네 누나가 전에 네 얘기 많이 했는데.”준수한 소년은 눈시울이 빨갰고, 안색이 초췌했다. 그는 다리가 아직 낫지 않아 절뚝거리며 걸어왔다.지아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소년은 털썩하고 지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참회했다.“저는 이 일의 경과에 대해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누나에게 누를 끼쳤고 또 아가씨에게 폐를 끼쳤습니다. 만약 제가 그때 차 사고를 피했다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지아는 한숨을 쉬며 진환더러 그를 일으켜 세우라고 했다.“넌 다리가 좋지 않으니 더 이상 자신을 다치게 하지마. 그들은 이미 계획을 짠 거야. 네가 만약 다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은 네 부모님을 겨냥했을 거야. 그러니까 넌 자책할 필요가 없어. 내가 미연이한테 빚진 거야.”강은환은 지아의 평평한 배를 주시했다. 그는 비록 여자가 아니었지만, 그 한 쌍의 쌍둥이가 그녀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이것은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지아는 다시 조미자를 바라보았다.“아주머니, 미연의 일은 정말 죄송해요. 미연이 이렇게 떠나게 돼서 저도 매우 슬프고요. 저는 아주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지금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더
도윤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상쾌한 몸으로 다시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는 먼저 들어가지 않고 진환에게 물었다. “상황은 어때?”진봉은 얼른 말했다.“아주 이상합니다. 사모님은 떠들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디저트까지 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다른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중간에 경호원들의 부상에 대해 물어보셨고, 또 킬러들을 몇 명이나 잡았는지, 장민호란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아무튼 처음부터 끝까지 사모님은 무척 냉정했습니다.”“넌 어떻게 대답했는데?”“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장민호는 이미 도망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사모님도 다른 말씀 하지 않으셨고, 그저 피곤해서 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진봉은 머리를 긁적였다.“대표님,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사모님이 이렇게 나오시니 저는 오히려 좀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냉정하셔서 등골이 다 오싹하네요.”“지아는 나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도윤은 지아가 자신을 따돌리고 자살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녀는 정말 깨달은 것 같았다.그가 살금살금 들어가자, 침대 위의 사람은 이미 눈을 떴다.그 깨끗한 눈빛에는 확신함이 스쳐 지나갔다.“난 네가 휴식하지 않고 다시 달려올 줄 알았어. 저쪽의 소파 좀 밀어내서 푹 쉬어.”도윤은 지아를 몇 번 더 살펴보았다.“지아야, 너 정말 괜찮은 거야?”“나한테 무슨 일이 더 있겠어? 의사 선생님의 치료에 협조해서 일찍 회복하고 싶은 뿐. 참, 내 오른손 말이야, 지금 약간의 감각이 있는 것 같아. 나한테 가장 좋은 의사 하나 찾아줘. 난 이대로 장애인이 되고 싶지 않아.”이 반년 동안 지아는 비록 오른손의 치료를 멈추지 않았지만, 그녀가 임신했기에, 많은 약물과 치료 방식을 사용할 수 없었다.다행히 지아는 줄곧 침을 놓았기에, 방금 그녀는 자신의 손에 약간의 감각이 생겼다는 것을 발견했다.이것은 아마도 그녀의 엉망진창인 인생에서 유일한 좋은 소식일 것이다
“지아야, 난 지금 일부러 누구의 편을 들고 있는 게 아니야. 이것은 독충 답지가 않거든. 이예린이 만약 정말 너를 죽이려고 했다면, 너에게 독을 탈 기회를 찾아 바로 죽였을 텐데, 굳이 이런 수단을 쓸 필요가 있을까? 너도 지금 독충의 리더가 진수련이라는 거 알잖아. 정일 아저씨가 세상을 떠난 후, 진수련은 독충을 데리고 A시를 떠났어. 이예린도 몇 달 전에 이곳을 떠났고.”도윤은 지아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블랙X를 매수한 사람은 엄청난 재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블랙 넷과 관련이 있어. 이 사람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깔끔하면서도 마음이 독하거든. 지아야, 잘 생각해봐. 혹시 전에 누구 잘못 건드린 적이라도 있니?”지아는 고개를 저었다.“내 과거에 대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난 대학 수업도 마치지 못하고 너와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으니 누구를 건드릴 수 있겠어? 그것도 쉽게 200억을 꺼내 내 목숨을 원하는 사람을.”도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난 이 사람이 네 진정한 부모님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돼. 진희 이모가 백혈병에 걸렸기 때문에 넌 진희 이모와 DNA를 검사했고, 네가 그들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지. 만약 누군가 계속 조사하려는 널 막기 위해 킬러를 고용했다면, 이제 넌 죽기만 하면 아무도 그 비밀을 모를 거야.”이것이 유일한 가능성이었다.지아는 더욱 자신의 진정한 가족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그녀는 지금 살아갈 동력이 생겼다.지아는 두 아이와 미연의 목숨까지 짊어졌으니, 어떻게든 자신의 모든 것을 되찾아야 했다.“블랙 X는 계속 사람을 보내서 날 죽일까?”“결과를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이번에 블랙X는 100명을 동원했고,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사람들도 일반 경호원이 아니란 것을 몰랐기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어. 비록 일부 사람들이 도망쳤지만, 우리는 대부분 사람들을 잡았어. B급과 A급은 말할 것도 없고, C급도 그들에게 있어 아주 소중한 인재야. 임무가 실
지아의 눈빛은 맑지도, 냉정하지도 않았고 오직 끝없는 광기와 고집만이 들어있었다.울화산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섬이라고 불리는 특전사를 훈련시키는 비밀 기지로, 들어가면 거의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고아거나 전쟁 때문에 집을 잃은 아이들, 아무튼 모두 혼자였다.대부분 아주 어릴 때 훈련을 받았는데, 지아처럼 이렇게 큰 사람은 없는 게 아니지만 이 방면의 배경이 있어야 했다.만약 그녀가 이렇게 경솔하게 들어간다면 죽음뿐이었으니 도윤이 놀랄 만도 했다.“지아야, 그런 생각 하지 마. 너 전에 일반인들을 위한 병원을 세우고 싶다고 했잖아. 비록 백채원이 이름을 바꿨지만, 이 병원은 이미 운영을 하기 시작했고, 국내외 최고의 의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리고 나는 진찰받기 불편하고 또 돈이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또 하나의 재단을 설립했는데, 지금까지 이미 백여 명이 도움을 받았어. 그중에는 농아까지 있다고. 그리고 노인들을 위해 스페셜 재단을 설립했어. 이 세상은 완벽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항상 누군가가 아름답게 꾸미고 있단 말이야. 만약 네가 없다면,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진찰받을 돈이 없어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지아는 눈물을 글썽였다.“내가 천하의 모든 사람을 구했다고 해도, 내 친구, 나 자신의 아이조차 구할 수 없으니 아무리 많은 사람을 구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내가 살고 있는 한, 목표는 단 한 가지 뿐, 바로 복수야.”도윤은 가볍게 탄식하며 지아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이제 그만 자.” 지아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하늘에 나타난 그 한줄기의 빛을 바라보며, 눈빛에 하늘을 찌를 듯한 원한이 가득했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배를 만졌는데, 6개월 동안 익숙해진 습관을 일시에 고칠 수가 없었다.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신의 뱃속에 이미 아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활발하고 해맑은 이웃이 어느 날 갑자기 이사를 간 것처럼, 그녀는 아직 익숙해지지
새까만 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찬바람은 촛불을 흔들었고, 사람들은 더욱 슬피 울었다.지아는 자신의 얼굴에 떨어진 빗물을 만지더니 가볍게 중얼거렸다.“미연아, 네가 돌아온 거야?”두 방울의 빗물은 마침 사진 속 미연의 눈에 떨어졌고, 마치 사진 속 사람이 웃음을 머금고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해 보였다.지아는 묘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연아 걱정하지 마, 내가 네 가족들을 잘 챙겨줄게. 앞으로 네 가족이 바로 내 가족이니까 너도 이제 안심하고 떠나. 다음 생에…… 다음 생에는 꼭 좋은 집안에 환생하고.”장례식 이후, 온 마을은 보슬보슬한 이슬에 휩싸여졌다.지아는 급히 떠나지 않고, 미연이 전에 살았던 집으로 향했다.그녀의 가족들은 도시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중요한 날을 제외하고는 평소에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집안은 전체는 낡아 보이며, 마당에 서 있는 사과나무와 포도덩굴은 빗속에서 쓸쓸함을 나타냈다.지아는 포도덩굴 아래에 서 있었는데, 눈앞에 마치 귀여운 소녀가 무더운 여름 저녁에 이곳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과일을 먹으며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누나도 이런 포도를 아주 좋아했는데, 아쉽게도 앞으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겠네요.”강은환은 지아의 곁에 서서 예전의 미연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지아는 매우 진지하게 들었고, 가끔 웃기도 했다.“미연이도 참, 장난꾸러기가 다름없네.”“그래요, 전 마을에서, 우리 누나가 제일 큰 장난꾸러기였어요. 하지만 누나는 성적이 아주 우수했고, 덕분에 우리 가족도 시내로 이사를 갈 수 있었던 거예요. 아빠 엄마는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우리 남매를 부양했고, 난 좋을 날이 곧 다가올 줄 알았어요. 그러나 뜻밖에도…….”지아는 그의 빨개진 눈을 마주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울지 마. 앞으로 내가 바로 네 누나니까 너도 반드시 열심히 공부해서 미연이 실망시키지 말아야 해.”“네.”미연 일가를 공식으로 자신의 가족으로 삼기로 결정한 뒤, 날이 점점 어두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