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혜는 많은 힘을 들여서야 아이의 얼굴을 찍을 수 있었고, 그 생김새는 방금 전의 아이보다 좀 더 청수하게 생겼다.“사모님, 이 아이는 사모님을 닮은 것 같아요. 너무 좋네요. 아들딸 쌍둥이에요.”지아는 눈물을 훔쳤다.“아들이든 딸이든 중요하지 않아. 두 아이 다 건강했으면 됐어.”“걱정 마세요. 아이의 발육은 모두 정상이라 아무런 이상도 없어요. 게다가 두 아이는 성격이 제각기 달라서 하나는 활발하고 하나는 조용하네요. 이따가 이 영상을 사모님 핸드폰으로 보낼게요.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서 보세요.”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에이, 고맙긴요, 다 제가 할 일인데요. 사모님도 안심하세요. 이제 곧 아이들과 만날 수 있을 거예요.”“응.”모든 검사를 마친 다음, 지아도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았다.방으로 돌아가자, 그녀는 또 의사가 보낸 아이의 동영상을 미연에게 보여주었고, 미연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정말 귀여운 아이들이네요. 그들과 만나는 날이 너무 기대돼요.”지아는 자신의 배를 만졌다.“나도 엄청 기대하고 있어. 이 좋은 소식을 얼른 아빠에게 전해줘야지.”“그래요.” 미연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이제 나도 빨리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비해 줘야겠어.”지아의 발걸음은 많이 가벼워졌고, 소계훈의 방에 도착하자 그녀는 바로 입을 열었다.“아빠, 좋은 소식이에요. 아이들 아주 건강하고, 심지어 아들딸 쌍둥이에요. 게다가 하나는 장난기가 많지만 다른 하나는 엄청 조용하고요. 그런데 어느 게 장난꾸러기인지 아세요?”“정답은, 아빠 손녀가 개구쟁이고, 손자는 오히려 얌전한 거예요. 그리고 남자아이는 이도윤 그 나쁜 놈과 많이 닮았지만, 성격은 전혀 닮지 않았어요. 얼마나 웃기를 좋아하는지, 앞으로 웃을 때 엄청 귀여울 거예요. 아빠는 손자 손녀들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빨리 깨어나세요. 아이들도 모두 할아버지가 보고 싶단 말이에요.”소계훈은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았다.이를 본 지아는 얼른 소계훈의
이른 아침, 지아는 악몽 때문에 놀라서 깨어났다.악몽은 머릿속에 또렷이 떠올랐고, 지아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그동안 그녀는 줄곧 마음을 편하게 해서 여태껏 이렇게 무서운 꿈을 꾼 적이 없었다.침대에서 내려오자, 지아는 욕실에 가서 샤워를 했다.물이 나오자, 볼록 나온 배 안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두 아이는 샤워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매번 지아가 목욕할 때, 특히 활발했다.수온은 높지 않았고, 부드러운 물방울이 뱃가죽에 떨어졌다.남들은 임신하면 피부가 거칠어지고 몸에 털도 많아졌지만, 이상하게도 지아는 피부는 부드럽고 매끄러워 가장 아름다운 임산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녀는 한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를 달했다. 아이들의 존재 때문에 지아도 점차 삶에 대한 희망이 생겼다.욕실에서 나왔지만, 기분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텅 빈 방은 더욱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래서 지아는 휴대전화를 보았다.‘몇 달 동안 외부와 연락이 닿지 않았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이상하게도 인터넷에서는 이미 도윤과 백채원에 관한 아무런 소식도 검색할 수 없었는데 마치 누군가 일부러 기사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이 석 달 동안, 지아는 도윤과 만난 적이 없었다.‘그 남자는 지금 백채원의 곁에서 좋은 남편 행세하고 있겠지.’sns를 뒤져보니, 민아는 밤만 되면 슬픈 글을 올렸고, 이튿날에는 여전히 열심히 일을 했다. 보아하니 그녀 최근의 상태도 나쁜 진 않은 것 같았다.‘사장님은 까다롭지만 돈은 정말 많이 주나 보네.’그리고 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도 큰 변화가 없었다.지아의 시선은 그중 한 사람이 공유한 링크에 떨어졌고, 그것은 한 개인 소장품 경매였다.지아는 원래 이런 장소에 별로 흥미가 없었기에, 전에 소씨 집안에 있었던 골동품이 있는지만 살펴보았다.그러나 뜻밖에도 그녀는 정말 자신의 아빠가 줄곧 말한 용과 봉황 모양으로 된 한 쌍의 펜던트를 보았는데, 그것은 소씨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급이라 할 수 있는 펜던트였다
요 며칠, 미연은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다. 심지어 종래로 피부를 관리하지 않던 사람이 특별히 팩을 하기 시작했으니, 그 선배란 사람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미연은 그 누구보다도 이번 짧은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날이 다가오자, 그녀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지만, 또 좀 긴장했다.“아가씨, 저 이 옷 입으면 너무 못생기지 않았나요? 선배는 외국에서 돌아왔으니 제가 촌스럽다고 생각하겠죠?”지아는 원래 자신의 옷을 미연에게 주려고 했지만, 그녀의 가장 싼 옷도 가격이 수천 만 정도 했다.사귀는 것을 전제로 한 이상, 지아는 미연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두 사람도 앞으로 다른 문제 때문에 다투거나 실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아니, 만약 그 사람도 너를 좋아한다면, 네가 어떤 옷을 입어도 예쁘다고 생각할 거야. 안심해, 자신감 가지고 공항으로 가. 부담 갖지 말고.”미연은 곁에 앉은 지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심플한 하얀 치마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말아 올렸으며, 액세서리나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백조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네, 저도 아가씨 따라배울 거예요. 침착하자, 침착해, 선배도 그냥 남자일 뿐, 부담 가질 필요 없어.”미연은 혼잣말을 하다 또 긴장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건 선배잖아! 내가 그동안 줄곧 짝사랑해온 남자! 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는데…….”말하면서 미연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받쳐들며 또 다시 그 선배에게 빠지지 시작했고, 지아는 한숨을 쉬었다.“정말 구제불능이군.”도중에 미연은 지아의 옆에서 재잘거리며, 선배인 장민호가 얼마나 우수하고 또 얼마나 멋지게 등장했는지를 이야기했다.지아는 자신이 캠퍼스 장르의 연애소설까지 쓸 수 있다고 느꼈다.차가 경매장의 지하 차고에 멈추자, 미연은 잠시 이 화제를 멈추었다.“아가씨, 정말 제가 같이 안 가줘도 되는 거예요?”“응, 가서 선배랑 데이트
하지만 부수기도 전에, 문은 안에서 열렸다.지아는 볼록 튀어나온 배를 안고 문 앞에 서 있었고, 염경훈의 절반 빨개진 얼굴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경호원을 바라보았다.도윤의 사람은 그와 성격이 같았는데, 냉정하고 말이 적으면서 또 차분했다.그들은 종래로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도, 또 권세를 믿고 남을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들의 직책은 지아를 보호하는 것이었기에 염경훈도 줄곧 참으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려고 하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여전히 그만두려 하지 않고 더욱 날뛰며 심지어 그의 뺨을 때렸다.이때 지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낯선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말투를 들으면 A시 사람 같지가 않았고, 온몸에 사치품으로 가득 뒤덮여 마치 걸어 다니는 패션모델 같았다.지아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 여자는 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시선은 마지막에 그녀의 배에 떨어졌다.“뭐야, 무슨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냥 임신한 여자잖아.”그녀는 손에 든 2억 정도 하는 핸드백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며 지아에게 건네주었다.“이 방, 나 마음에 들었으니까 나한테 양보해.”그 위에는 공이 8개 적혀 있었지만, 지아는 보지도 않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사과해.”이 말이 나오자,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뭐?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개한테 사과하라니? 내가 누군지 알고 까부는 거야? 난…….”찰싹하는 소리가 나더니 지아는 아주 깔끔하게 뺨을 날렸다.여자는 바로 멍해졌다. 그녀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지아를 보며 말문이 막혔고, 많이 연약해 보이는 임산부가 갑자기 손을 들 줄은 정말 몰랐다.“네가 누구든 관심없어. 하지만 내 경호원에게 사과하려 하지 않는 이상, 나도 내 방식으로 너와 ‘소통’할 수밖에 없어.”지아는 염경훈이 원칙 있는 남자로서 절대로 여자를 때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내가 때리면 되겠네.’“이 미친년이 감히 나를 때려? 우리 엄마 아빠도 나 때린 적이 없는데! 오늘 네 뱃속의 아이까지 모두 죽여버릴 거야!”
사람들 속에서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지아의 눈에는 많은 복잡한 정서가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죄책감을 드러냈다.지아는 신장 이식 수술을 받기로 약속했고, 소시후는 마취까지 했지만, 마지막 고비에 그녀는 뜻밖에도 도윤에게 끌려갔다.그 후 지아는 심지어 사과조차 하지 못했다. 돌아온 후, 도윤은 그녀의 번호를 바꿨고, 지아는 소시후와 연락할 수 없었기에 미안하다는 말을 줄곧 전해주지 못했다.그녀는 두 사람이 이곳에서 만날 줄은 전혀 몰랐다. ‘소 대표님 전에 귀국하지 않았어? 근데 왜 또 A시에 왔을까?’지아는 자신을 원망했고, 소시후는 그녀를 본 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는데, 간단하게 인사를 한 셈이었다.서미나는 여전히 날뛰고 있었는데, 지아가 자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더욱 화가 났다.“임신한 년이 지금 또 누굴 보는 거야? 아이까지 가졌는데, 가만히 있지 않고 다른 남자를 바라보다니?”“이봐요, 말을 좀 똑바로 하죠.” 염경훈은 싸늘하게 경고했다.“말을 똑바로 하라고? 그럼 이런 일을 하지 말아야지. 뱃속에 있는 아이가 누구의 잡종인지, 감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른 남자와 눈빛을 주고받다니. 어머, 이 여자 설마 어느 죽어가는 영감의 애인인 건 아니지?”서미나는 멍청하게도 주위 사람들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사람들 속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말 다 했어?”도윤은 진봉 진환을 데리고 나타났고, 그의 등장과 함께 날카로운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와 사람들은 저절로 입을 다물며 옆으로 물러났다.그의 눈빛은 바로 지아에게 떨어졌다. 비록 매일 미연이 보낸 영상과 사진을 봤지만, 도윤은 사실 이미 3개월 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임신한 후, 지아의 전체적인 느낌은 아주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지아가 처음 임신했을
서미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도윤 오빠가 언제 이런 여자와 결혼했지?’도윤이 결혼하던 날, 서미나는 비행기가 연기되었는데, 후에 그가 한 여자 때문에 결혼식을 참가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보았지만, 그 기사에는 지아의 사진이 없었다.‘세상에 이런 우연이 어디 있어!’서미나의 표정은 아주 풍부했고, 여전히 새언니라는 호칭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도윤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목소리가 차가웠다.“이제 그만들 가보시지.”그의 말에 사람들은 바로 자리를 떠났고, 아무도 남을 엄두가 없었다.그리고 도윤은 문을 닫았다. 서미나는 그의 사촌 여동생이니, 이 일은 그들끼리 조용히 해결하면 됐다.서미나는 뺨을 두 대 맞고 볼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여전히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오빠, 정말 이 여자와 결혼했어요? 그럼 유진이는요? 줄곧 오빠만 기다리고 있는 유진이는 어떡하냐고요! 전에 그 백채원과 결혼하려는 것을 알고, 유진이는 너무 슬픈 나머지 오랫동안 입원했는데, 만약…….”‘유진?’‘또 내가 모르는 여자가 나왔군.’물론 지금의 지아는 이미 도윤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과거에 관심이 없었다.도윤은 싸늘하게 서미나의 말을 끊었다.“서미나, 지금 네 새언니한테 사과하라고 했어!”서미나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이 싸늘하고 도도한 사촌 오빠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도윤은 성격이 비록 쌀쌀했지만, 줄곧 그들을 잘 챙겨주었는데, 오늘은 오히려 이 여자 때문에 그녀를 때렸다.서미나는 마음이 달갑지 않았지만 도윤을 더욱 화나게 할까 봐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미안해요, 새언니. 방금 새언니의 신분을 몰라서 그런 거니까 이렇게 사과할게요.”“사과는 받겠지만 날 새언니라고 부를 필요는 없어. 우린 이미 이혼했거든.”말이 끝나자 지아는 더 이상 서미나를 상대하지 않고 몸을 돌려 창가로 갔다. 이제 경매가 곧 시작될 것이다.이 말에 서미나는 눈빛이 밝아졌다.“오빠, 두 사람 이혼했어요? 어쩐지 가족들 앞에서 그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발표한 적이 없더라니. 그 여자
지아는 심장이 덜컹거렸다. 이 아이는 바로 도윤의 유일한 약점이었고, 지아는 그때 자신이 어떻게 이 두 아이를 지켜냈는지를 잊지 않았다.만약 도윤이 또 한번 미쳐버린다면, 지아는 정말 견딜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도윤은 서미나를 호되게 노려보았다.“입 닥쳐.”“흥, 오빠 만약 내 말 듣지 않으면, 앞으로 틀림없이 이 여자에게 속을 거예요.” 서미나도 바보가 아니어서 더는 도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이때, 새로운 소장품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장미꽃 모양의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이것은 현재 가장 유명한 주얼리 디자이너인 Niko가 직접 디자인한 장미 시리즈였다.대형 스크린에는 이 목걸이가 여러 각도에서 선보이는 광택과 디자인 디테일이 나타났고, 줄곧 자고 싶던 지아는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도윤은 지아가 주얼리에 관심이 있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얼른 물었다.“마음에 들어?”하지만 지아는 오히려 한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입 다물고 말하지 마. 나 지금 소개 듣고 있잖아.”도윤은 말을 하지 않았고, 한쪽에 있던 서미나는 오히려 눈을 크게 떴다. ‘오빠가 뜻밖에도 이 전처를 이토록 사랑하고 있다니!’아래의 경매인은 지금 이 목걸이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이것은 Niko가 많은 정성을 기울여 디자인한 것으로, 그의 여동생이 19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 선물로 그녀에게 주었다.목걸이, 팔찌, 그리고 귀걸이는 하한 세트였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목걸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고, 팔찌와 다이아몬드 귀걸이는 이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높은 가치를 지녔을 것이다.지아는 여러 번 확인해 보았는데, 그녀는 확실히 잘못 보지 않았다.그녀는 그 귀걸이를 본 적이 있었다. 디자인이 독특한 데다 또 다이아몬드가 커서 그녀는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잊히지 않았다.지아는 전에 이예린에게 납치되어 바다로 뛰어들었을 때, 한 배에 숨었고, 그 침몰한 배에서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귀걸이는 바로 그 시체의
“지아야, 어디 가?” 도윤은 재빨리 따라갔다.서미나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이 여자 정신 나간 거 아니야?”지아는 단숨에 옆방으로 달려갔다.“대표님 좀 만나고 싶은데요.”소시후의 비서는 지아를 알고 있었기에 다른 말 하지 않고 바로 문을 열었고, 지아는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소시후는 가죽 소파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소리를 듣고 지아를 바라보았다.“지아 씨, 오랜만이야.”지아는 인사할 겨를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대표님, 혹시 이 목걸이가 대표님 여동생의 것인가요?”“응, 내 동생의 물건이 이번 경매에 나왔다고 해서 특별히 찾아왔어. 그럼 동생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만약 찾지 못하더라도 난 그녀의 생일 선물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아.”이것은 지아가 생각한 것과 똑같았다. 다시 말하면, 지아의 추리는 틀리지 않았고, 그 시체가 바로 소시후가 오랫동안 찾던 여동생이었다.그러나 소시후의 그 초췌한 얼굴을 보며 지아는 도무지 이 잔인한 현실을 말할 수 없었다.“지아 씨, 왜 그래?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야?”“난 이 다이아몬드 귀걸이의 주인을 본 적이 있어요.”지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나 다를까, 이 말을 듣자, 소시후는 안색이 변했다.“언제? 어디서?”“지아야, 넌 지금 임신 중인데, 왜 이렇게 빨리 걷는 거야?” 이때, 도윤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승리자처럼 지아를 꽉 껴안았고, 동시에 눈빛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소시후를 바라보았다.전에 소시후 때문에 도윤은 지아를 오해했고, 이 사람은 지금 가시처럼 그의 마음속에 박혔다.두 사람이 정면으로 맞붙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시후도 이때 일어서서 담담하게 손을 내밀었다.“이 대표님, 오랜만이군요.”“지난번에 급하게 떠나느라 소 대표님과 인사를 하지 못했는데. 내 아내를 잘 보살펴줘서 감사하다는 의미로 이번에 내가 직접 식사 대접하는 건 어떨까요? 이따 경매 끝나면 같이 간단하게 식사 좀 하지 그래요?”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