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재빨리 조용하라는 손짓을 했고 하인은 재빨리 입을 다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름이 뭐야?”“강미연이요, 저를 미연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강미연은 영리하게 대답했다.“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지?”강미연은 계속 말했다.“대학을 금방 졸업했는데, 원예를 전공해서 장미원을 가꾸러 왔어요.”그녀의 눈빛은 매우 깨끗했다. 지아도 요 며칠 장원에 있는 하인들의 성격을 거의 파악했는데, 적어도 다른 사람이 수다를 떠는 동안 이 소녀는 줄곧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고, 여태껏 잡담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그럼 나 좀 도와줄래?”“아가씨, 별말씀을요. 아가씨는 장미 장원의 주인이니 무슨 요구를 하시든 당연하죠. 저는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에요.”지아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무에게도 들키면 안 돼, 할 수 있겠니?”“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도련님께서 엄청 잘해 주시는 것 같은데, 아가씨가 정말 임신을 했다면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요?”지아는 천천히 말했다.“너도 그가 곧 결혼한다는 거, 알고 있지? 설마 내 아이도 나처럼 영원히 명분 없이 남의 사생아로 살아가야 할까?”강미연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아가씨, 알겠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사러 갈게요.”지아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우선 빨리 자신이 임신했는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했다.식사를 할 때, 지아는 줄곧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고, 입맛이 없었지만 도윤이 아무런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써 참아야 했다.다행히 그때 지아가 임신하자마자 바로 도윤과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임신 초기에 심하게 토했을 때, 도윤은 아예 보지 못했다.그래서 어젯밤에 지아가 헛구역질을 하는 것을 보고, 도윤은 기껏해야 지아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고, 결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오히려 소계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지아야, 너 요 며칠 입
흰색 테스트기 위에는 두 개의 붉은 선이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하나는 색깔이 매우 짙었지만 하나는 매우 옅었다.지아는 그 두 줄을 보았을 때, 호흡이 멈추었고 머리도 새하얘졌다.‘나 임신했어, 내가 정말 아이를 가졌다니!’수많은 복잡한 감정이 일제히 밀려오자, 지아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뜻밖에도 기쁨이었다.지아가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볼 때, 그녀는 이미 눈물투성이로 되었다.지아는 일년 넘는 시간으로 그 아이를 잃은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지금 그녀는 뜻밖에도 다시 임신했다.그녀는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그러나 지아는 곧 이 타이밍에 임신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그녀는 죽지 않고 이미 반년 넘게 살았지만.그녀의 몸에 암세포가 있는 한, 그것은 시한폭탄이었다. 일단 폭발하면 그녀 외에 이 작은 생명까지 죽을 수 있었다.그러나 자신의 뱃속에 또 하나의 작은 생명이 다시 생겼다는 것을 생각하니, 어머니인 지아는 얼굴에 은은한 모성의 빛이 더해졌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왼손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에 놓았다. 비록 지금, 아이는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아 작은 씨앗처럼 생겼지만 지아는 여전히 미소를 금치 못했다.그리고 눈물 하나하나가 세면대에 떨어지며 지아는 중얼거렸다.“아가야, 너 맞지? 네가 또 엄마를 찾으러 온 거지?”지아는 1년 넘게 악몽에 빠졌는데, 매번 악몽을 꿀 때마다 한 아이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곤 했다.이제 아이가 마침내 다시 돌아왔으니, 지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그리고 살아갈 동력이 하나 더 많아졌다.지아는 맹세했다. 이번에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 아이를 잘 보호하겠다고.짧디짧은 10분 동안, 지아는 슬펐다 기뻤다 했다.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서야 지아는 천천히 걸어 나갔고, 얼굴에는 확고함이 더 생겼다.여자는 약했지만 어머니로 된 지금, 그녀는 오히려 힘이 넘쳐났다. 이제부터 그녀는 보호할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지아는 도윤의 의미심장한 눈빛
도윤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이 부탁을 할 때의 지아의 표정을 상상해 봤다. 그녀는 틀림없이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자신을 비웃을 것이다.“아이를 가지자고? 그래, 그럼 너와 네 여동생 중 한 명은 죽어야 해.”지금 그와 지아의 대화는 거의 이렇게 변했다.“당신 왜 아직도 죽지 않은 거야?”“안 죽었는데 왜 왔어?”“오늘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당신은 왜 죽으러 가지 않는 거야? 마땅한 산소를 찾지 못한 건가?”“이도윤, 나 오늘 좋은 무덤 하나 알아보았는데, 당신을 묻기에 아주 적합하더군.”“만약 정말 죽고 싶지 않다면, 내가 당신과 같이 죽을게. 이렇게 하면 당신도 마음 놓고 죽을 수 있지 않겠어?”지아의 얼굴에는 비아냥거리는 미소 외에 싸늘한 웃음이었고, 자신에 대한 애정이 조금도 없었다.하지만 도윤은 그래도 무척 만족했다.적어도 그는 시시각각 지아를 볼 수 있었다.소계훈을 침대에 눕힌 다음, 도윤은 다시 지아의 방으로 갔다. 문을 밀자 그는 지아가 한 손을 자신의 배에 올려놓은 것을 보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넘쳐흘렀다.다만 자신을 본 순간, 지아의 눈빛은 갑자기 차가워졌고 목소리도 날카로워졌다.“노크할 줄도 모르는 거야?”그녀는 마치 온몸에 가시가 돋친 고슴도치처럼 시시각각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미안.”도윤은 나간 다음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여긴 분명 내 집인데, 왜 내가 낯선 사람과 같지?’‘하긴, 나와 예린이 지아에게 많은 빚을 졌지.’그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들어가도 될까?”안에서 지아의 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돼, 꺼져.”그러나 도윤은 여전히 문을 밀고 들어왔고, 지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염치없다니깐.”도윤은 지아의 싸늘한 표정을 무시하고 곧장 걸어왔다.“지아야, 난 단지 네가 좀 보고 싶었을 뿐이야.”“나 보지 마, 정말 토할 것 같아.” 지아는 자신의 입덧 반응에 대해 좋은 핑계를 댔다.도윤은 한숨을
지아의 비웃음에 도윤은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았고 그저 마음이 아팠다.전의 지아는 엄청 해맑은 여자였는데, 지금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자신 때문이었다.“기쁘면 됐어.”지아는 자기가 이렇게 심하게 말을 하면 도윤이 백채원을 감싸며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의 도윤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성질은 오히려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나야 당연히 기분이 좋지. 근데 당신 말이야, 팔자가 너무 센 거 아니야? 전처는 손을 쓸 수 없게 왰지, 약혼녀는 다리가 부러졌지, 어쩜 두 사람은 멀쩡한 사람 하나 없을까?”도윤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는 것을 보며 지아는 속이 후련해졌다.“나 이제 자고 싶으니까 당신도 빨리 꺼져.”“그래, 알았어. 푹 쉬어”도윤은 천천히 떠났고, 떠나기 전에 또 사람 시켜 야식을 준비하여 보내라고 했다.원래 지아는 아무런 입맛도 없었지만, 지금 뱃속에 또 하나의 작은 생명이 있다는 생각과 전에 아이를 잃은 아픔으로 그녀는 이 아이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그래서 지아는 구역질을 참으며 먹었지만, 오히려 이 아이를 너무 얕잡아 보았다.이번에 입덧 반응은 지난번보다 더 강렬했는데, 지아는 방금 입에 넣자마자 바로 토했다.강미연은 안쓰러워하며 그녀의 뒤에서 등을 두드렸다.“아가씨, 이러면 안 되는데요. 뭘 먹자마자 바로 토하다니,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야 해요.”“아니야, 제발 비밀로 해줘,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이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야. 예전에 임신했을 때도 이렇게 토했거든.”강소연은 말을 하려다 참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제가 가서 먹을 것 좀 더 가져다 드릴게요. 이렇게 토하면 안 돼요. 몸이 다 망가지겠어요.”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아무리 불편해도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반드시 버텨야 했다.몇 번 먹고 몇 번 토해도 그녀는 참고 견뎌낼 것이다.지아는 단지 이번에 이 작은 생명이 순조롭게 이 세상에 태어나길 바랄 뿐이었다.지아는 심지어 자신의 아이가 남자인지 아니면 여자인지에 대해 궁금하
민아는 지아의 어깨를 두드렸다.“야, 나도 네 마음 너무 잘 알지. 그때 내가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그 썩을 놈한테 집을 사준 것처럼, 누구나 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시절이 있지 않겠어? 날 봐, 지금은 이렇게 행복하게 돈을 벌고 있잖아.”두 사람은 지난날의 풋풋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기분도 많이 좋아졌다.이때 민아는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지아야, 나 목 좀 마르니까 사과 깎아 줘.”그녀는 여전히 거침없이 계속 말했다.“난 아직도 널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하는데. 그때의 너는 사과도 깎을 줄 몰랐지. 우리가 샘 뵈러 갔을 때, 넌 사과 꼭지만 남을 정도로 사과를 깎았잖아. 그때 우리는 네가 재벌 집 딸이라서 이런 것도 할 줄 모른다고 널 얼마나 비웃었는데. 후에 넌 개도윤을 위해…….”민아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지아가 오른손을 내민 것을 보았는데, 그녀의 손이 나른하게 늘어진 것을 보고 민아는 말을 뚝 그쳤다.“미안, 민아야, 너한테 사과를 깎아줄 수 없을 거 같아. 내가 간호사 찾아올게.”민아는 지아의 손을 잡더니 눈시울은 순식간에 붉어졌다.“누가 그랬어?”“말하자면 길어…….”“그럼 짧게 말하자. 개도윤이지? 그 남자 미친 거야? 어떻게 네 손을 다치게 할 수 있지? 넌 의사가 될 사람이잖아!”모든 사람들은 지아의 꿈이 의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유독 도윤만 신경 쓰지 않았다.지아는 민아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가능한 한 평온한 척했다.“그때의 상황은 좀 복잡했어.”그녀가 담담해 할수록, 민아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줄곧 웃기를 좋아하던 민아였지만, 지금은 지아의 손등에 눈물을 뚝뚝 흘렸고, 목소리조차 떨렸다.“이럴 수가, 개도윤이 어떻게 널…….”민아의 마음속에 있어, 지아는 바로 엄친딸과 같은 존재였는데,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 외에 뛰어난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노래와 춤, 피아노와 바둑 등, 지아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등학교 때, 지아는 학교를 대표해 피아노 대
민아는 코를 훌쩍이며 지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좋은 소식.”지아는 천천히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졌고, 눈을 드리우자 얼굴에는 모성애가 가득했다.“나 임신했어.”“뭐?”민아는 하마터면 자신의 침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그럼 나쁜 소식은?”“이도윤의 아이야.”민아는 한참이 걸려서야 이 소식을 받아들였고, 입을 크게 벌린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한참 동안 냉정한 후에야 민아는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았다.“그러니까, 네가 임신한 이 상황에서, 그가 뜻밖에도 백채원과 결혼하기로 선택한 거야? 그 남자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이 결혼 정말 안 하면 안 되나 보지?”지아는 고개를 저었다.“그는 내가 임신한 거 몰라. 심지어 나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어.”“설마 너 시험관 시술이라도 받은 거야?” 민아는 눈을 깜박였다.“비록 개도윤은 좀 잘생기긴 했지만, 전 세계에 그란 남자만이 있는 건 아니잖아. 넌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혼혈아를 낳을 순 없는 거야?”“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와 관계를 가질 때, 그는 열이 나서 전혀 의식이 없었던 거라고.”“이 개자식은 꿈만 꾸다가 자신의 아이가 생겼다니, 어떻게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지? 넌 어쩌려고? 설마 아이를 낳으려는 건 아니겠지?”지아는 입을 열었다.“맞아, 이 아이를 낳고 싶어.”이 말을 하자마자 민아는 바로 흥분했다.“지아야, 너 미쳤어! 이렇게 할 순 없어. 넌 그 아이가 종양의 크기를 가속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거야? 넌 몸이 좋지 않은 데다 아이는 태반을 통해 끊임없이 네 영양을 섭취할 거야. 그럼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넌 죽을 수도 있다고.”“민아야, 네가 말한 거, 나도 다 알아.”“알면 더욱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게 해선 안 되잖아. 네가 전에 잃어버린 아이를 계속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거 나도 알아. 그러나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야. 지금 네 상태는 간신히 안정되었는데, 심지어 앞으로 5년을 무
지아는 민아의 엄호에 산부인과로 들어갔다.겉으로는 그녀가 민아의 곁을 따라다녔지만, 사실 침대에 누워 옷을 걷어 올린 사람은 지아였다.그녀에게 검사를 해준 중년 여자는 매우 부드러웠다.“안심해요, 내가 자세히 검사해 줄게요.”민아는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이번에 또 반장에게 신세를 졌네.”차가운 기계가 배 위에 떨어지자, 지아는 긴장하면서도 두근거렸다.그녀는 이 반년 동안 몸이 매우 나빴고, 게다가 반년 전에 약물치료까지 받은 적이 있었으니 아이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의사 선생님, 아이의 상황은 어때요?”의사는 가볍게 웃었다.“아직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지금 아기집은 정상적인 크기라 자궁 외 임신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다 정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감사합니다, 선생님.”“아니에요,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해야 한다는 거 기억해요. 야채와 과일도 많이 먹어야 하고 또 엽산도 매일 챙겨먹어야 해요. 알겠죠?”지아는 계속 감사를 드렸고 의사는 손을 흔들었다.“아이가 좀 더 크면 다시 와서 검사해요. 그동안 절대 격렬한 활동을 하지 말고요. 임신 초기는 아주 위험하니까요.”“네, 알았어요.”적어도 잠시 아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 지아는 유난히 기뻐했다.민아는 그녀가 이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고 덩달아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너 좀 봐, 얼마나 오랫동안 너의 이런 미소를 보지 못했는지 몰라. 입이 귓가에 걸릴 것 같아. 이제 또 엄마가 되었으니 앞으로 꼭 심사숙고하고 행동해야 해. 개도윤에게 화만 내지 말고.”“알아, 난 아이를 위해 잘 살 거야.”민아는 또 가슴이 시큰시큰했다. 그녀는 얼른 손을 뻗어 지아를 안았고 울먹이며 말했다.“꼭 잘 지내야 해. 절대 슬퍼하지 말고. 그냥 매일 웃어. 이 아이를 낳으면, 난 그를 내 양아들로 삼을 테니까.”“꼭 그럴게.”“일 있으면 나에게 전화해. 나는 영원히 널 지지할 테니까.”“응, 알았어.”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는데, 입구에서
민아가 이 말을 했다면, 사람들은 아마 그녀가 허튼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매일 입만 나불댄다고.그러나 만약 지아가 말한 것이라면, 마치 사실인 것만 같았다.그녀는 바로 그런 재벌 집 아가씨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해도 귀한 집안 딸과 같았기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민아와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민아는 속으로 자신의 친구를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 ‘이야, 역시 지아네. 만나자마자 날 위해 우리 사장님에게서 점수를 땄다니.’“그렇게 말하니 참 쑥스럽군요. 나도 전에 민아 씨가 지아 씨를 언급한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확실히 남다르군요. 특히 그 상냥함과 친근함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민아 씨와 같은 거친 여자와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 정말 모르겠네요.”민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칭찬하면 그냥 칭찬을 할 것이지 왜 날 은근히 욕하는 거지?’남자는 지아 앞에 가서 손을 내밀었다.“강세찬이라고 해요, 반가워요.”그가 오른손을 내밀었기에 지아는 다소 난처해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강 사장님, 죄송하지만 내가 오른손에 정말 힘이 없어서요.”강세찬의 눈빛은 지아의 늘어진 손에 떨어졌고, 한동안 의아함을 느꼈다.이렇게 아름답고 또 기질이 뛰어난 여자가 오른손에 문제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 같았다. 세찬은 즉시 왼손을 바꾸어 지아와 악수를 했고, 또 바로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지아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눈을 맑게 뜨고 세찬을 쳐다보았다.“민아는 고생을 참고 일을 부지런하게 또 일사불란하게 하는 사람이니 강 사장님이 만약 그녀를 중용한다면, 틀림없이 후회를 하지 않을 거예요.”지아가 이렇게 말한 이상, 세찬도 민아의 험담을 하기가 좀 그랬다.그래서 그는 그저 담담하게 맞장구를 쳤다.“김 비서는 확실히 인내심이 있으면서도 책임감이 있는 조수죠.”“그럼 잘 됐네요. 민아야, 나도 이만 가볼게. 강 사장님은 너에게 할 말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너 보러 올게.”민아는 그녀를 쳐다보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