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아가 이 말을 했다면, 사람들은 아마 그녀가 허튼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매일 입만 나불댄다고.그러나 만약 지아가 말한 것이라면, 마치 사실인 것만 같았다.그녀는 바로 그런 재벌 집 아가씨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해도 귀한 집안 딸과 같았기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민아와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민아는 속으로 자신의 친구를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 ‘이야, 역시 지아네. 만나자마자 날 위해 우리 사장님에게서 점수를 땄다니.’“그렇게 말하니 참 쑥스럽군요. 나도 전에 민아 씨가 지아 씨를 언급한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확실히 남다르군요. 특히 그 상냥함과 친근함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민아 씨와 같은 거친 여자와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 정말 모르겠네요.”민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칭찬하면 그냥 칭찬을 할 것이지 왜 날 은근히 욕하는 거지?’남자는 지아 앞에 가서 손을 내밀었다.“강세찬이라고 해요, 반가워요.”그가 오른손을 내밀었기에 지아는 다소 난처해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강 사장님, 죄송하지만 내가 오른손에 정말 힘이 없어서요.”강세찬의 눈빛은 지아의 늘어진 손에 떨어졌고, 한동안 의아함을 느꼈다.이렇게 아름답고 또 기질이 뛰어난 여자가 오른손에 문제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 같았다. 세찬은 즉시 왼손을 바꾸어 지아와 악수를 했고, 또 바로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지아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눈을 맑게 뜨고 세찬을 쳐다보았다.“민아는 고생을 참고 일을 부지런하게 또 일사불란하게 하는 사람이니 강 사장님이 만약 그녀를 중용한다면, 틀림없이 후회를 하지 않을 거예요.”지아가 이렇게 말한 이상, 세찬도 민아의 험담을 하기가 좀 그랬다.그래서 그는 그저 담담하게 맞장구를 쳤다.“김 비서는 확실히 인내심이 있으면서도 책임감이 있는 조수죠.”“그럼 잘 됐네요. 민아야, 나도 이만 가볼게. 강 사장님은 너에게 할 말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너 보러 올게.”민아는 그녀를 쳐다보
펑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기에서 어떤 무거운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도윤의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임신했다고?”“그녀는 엽산을 먹고 있던데, 임신하지 않았다면 그걸 왜 먹어?”도윤은 이를 갈았다.“네가 잘못 본 거 아니야?”“야, 난 비록 외국에서 자랐지만, 그래도 한글은 알아보거든! 내가 엽산을 몰라봤을 거 같아?”전화는 바로 끊겼다.강세찬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사람 또 왜 이래? 요즘 은근히 수상한데.’민아는 재빨리 지아에게 달려가 엽산을 그녀에게 주었다.“이거 비타민 박스에 넣어서 먹는 거 잊지 마.”“고마워.”“고맙긴, 날 위해서라도 넌 건강하게 이 아이를 낳아야 해.” 민아는 지아의 어깨를 두드렸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다 또 무슨 생각을 한 듯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 눈에 띄진 않았지?”“안심해, 나 엄청 빠르게 달려왔어. 게다가 이 포장은 알록달록해서 우리 사장님과 같은 남자는 엽산이 뭔지 전혀 알아볼 수도 없을 거야.”지아도 세찬에 대해 아무런 인상도 없었다. 그녀는 세찬이 도윤과 아는 사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그럼 됐어, 푹 쉬어, 너무 빡세게 일하지 말고.”“응, 너도 자신을 잘 챙기고. 내가 휴가 내면 너 보러 갈게. 일 있으면 나에게 전화하고. 난 하나도 안 귀찮으니까 너도 괜히 날 귀찮게 한다고 생각하지 마.”“알았어.”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고, 지아는 포장함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엽산을 비타민 박스에 넣은 다음 떠났다.자신의 아이를 생각하니 그녀는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심지어 푸른 하늘과 흰 구름만 봐도 즐거웠다.지아는 또 특별히 자신이 좋아하는 간식과 버블티를 사서 돌아갔다.아이가 생긴 후, 그녀는 단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이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아가야, 이건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버블티야, 맛있는지 한 번 먹어 볼래?’‘그리고 이 무스 케이크, 엄마가 10년 넘게 먹었는데, 네가 무사히 태
지아는 본능적으로 손을 아랫배에 놓았지만 또 도윤에게 들킬까 봐 얼른 손을 치웠다.그러나 이 동작은 더욱 티가 났고, 도윤은 그녀의 모든 것을 포착했다.그가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지아의 심장은 매우 빨리 뛰었다.도윤의 손이 자신의 등에 닿은 순간, 거의 동시에, 지아는 온몸의 털이 곤두섰고, 촘촘한 닭살이 돋았으며 공포스러운 느낌은 그의 손가락이 닿은 곳에서 온몸으로 번졌다.지아는 두려움을 억제하고 가능한 한 자신을 좀 진정시켰다.“뭐 하는 거야?”“지아야, 너 나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지아는 침을 삼키더니 더욱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한 줄 알아? 이도윤, 아무도 네가 짜증난다고 말해준 적 없지? 지금 백채원과 결혼하려고 하는 이상, 왜 또 날 찾아오는 건데!”도윤은 천천히 허리를 굽혔고, 그의 카리스마는 지아를 향해 엄습했다.그리고 그는 지아의 귓가에 대고 살며시 말했다.“지아야, 왜 긴장하고 그래.”그것은 의문이 아니라 확신에 선 대답이었다.지아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그녀 자신도 왜 도윤을 이렇게 무서워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아마도 전에 죽은 아이가 준 충격이 너무 커서, 지아는 계속 도윤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 느꼈을지도 모른다.지아가 이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가능한 한 이 일을 숨기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그녀는 안전했다.지아는 손을 뻗어 도윤을 밀어냈다.“이도윤, 난 널 상대할 시간이 없어.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 난 잘 거야.”말하면서 지아는 평소처럼 이불을 들추고 도윤을 등지고 누웠다.지아는 가슴에 손을 얹자, 자신의 심장 소리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 무서웠다. 심지어 자신이 가볍게 떨리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무서웠다.다행히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그녀에게 이불을 잘 덮어준 다음 또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럼 푹 쉬어.”말하면서 도윤은 일어섰고, 시선은 침대 머리맡의
도윤은 세 글자를 말했을 뿐이지만, 강미연은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대표님, 말할게요, 다 말할게요!”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사람은 너무 빨리 자백하는 거 아닌가? 난 아직 압력을 가하지 않았는데.’“음.”“화원에서 다듬은 장미를 버리는 게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서 저는 저녁에 가지고 나가 한 송이에 천원 씩 팔았습니다. 저는 고의로 돈을 탐내는 게 아니라, 사정이 빠듯해서요. 게다가 할머니가 또 아프셨기에 그런 겁니다. 정말 죄송해요 대표님,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도윤은 미간을 더욱 세게 찌푸렸다. “네가 말하고 싶은 게 바로 이건가?”강미연은 눈물을 글썽였다.“또, 또 있습니다, 다 말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장미를 다듬을 때 손이 떨려서 부주의로 하트 모양을 사과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표님, 제가 아마추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 약간 열이 나서 그런 겁니다.”도윤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얼굴에 이미 귀찮은 기색이 나타났다.“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난 지금 지아에 관한 일을 말하라고 한 건데. 너 요 며칠 그녀를 돌보면서 그녀에게 무슨 변화가 있는지 발견했어?”강미연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아가씨요? 그녀는 요즘 입맛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그리고?”“다른 건 없었습니다, 아가씨는 성격이 좀 싸늘하셔서 저희와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지아의 당부를 생각하며, 강미연은 절대로 지아를 팔아먹으려 하지 않았다.그러다 도윤이 갑자기 한마디 던졌다.“그녀는 지금 임신해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는데, 왜 진작에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거야? 만약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네가 책임질 건가?”강미연은 눈을 크게 떴다.“대표님, 아가씨께서 임신하신 것을 진작에 알고 계셨어요? 근데 아가씨께서 비밀을 지키라고 하셨는데.”미연은 사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또 겪어본 일이 얼마 없었기에 바로 넘어왔다.도윤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강미연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도윤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요 며칠 동안 도윤은 지아를 무척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설사 그가 백채원과 결혼하려 한다 하더라도 지아를 진심으로 대했고, 장원의 사람들 모두 눈여겨보고 있었다.‘그런데 이 전남편이란 사람은 어떻게 아내의 임신 반응도 모르는 것일까?’“아가씨께서는 전에 아무런 경험도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3개월이나 입덧을 한데다 태아가 좀 불안정했기에 임신 초기에 매일 주사를 맞아야 했어요. 저희 엄마도 그 주사를 맞은 적이 있는데 엄청 아프다고 하셨어요.”“하지만 아가씨는 그 아이에 대해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비록 40여 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기 심장소리가 나타나지 않았고, 의사는 이 아이를 남길 것을 건의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이 아이를 지우라고 하셨어요. 아가씨는 의사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더 달라고 애걸복걸하셨고요. 그때 아가씨는 매우 두려웠지만 다행히 그녀는 끝까지 버텼고, 50 일 후, 마침내 심장소리가 나타났어요.”강미연은 여기까지 말하자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아가씨도 아주 재수가 없었어요. 임신 두 개월 될 때, 갑자기 피를 흘렸는데, 아가씨는 몹시 놀라서 병원에서 일주일간 입원하고서야 그 아이를 지켜냈어요.”미연의 말에 도윤은 점차 자신이 애써 홀시하던 그 기간에 대한 기억을 되찾게 했다.도윤은 그렇게 연약한 지아가 매일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는다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그때 지아는 첫번째 임신 검사를 할 때, 의사가 아이가 불안정하다고 말했을 때, 울면서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그러나 난 뭐라고 대답했지?’그때 도윤은 지아의 목소리만 들으면 짜증이 났고, 아이를 언급하면 조율의 몸 속에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아 그에 의해 표본으로 된 그 아이를 생각하게 했다.그래서 도윤은 차갑고 얄팍하게 입을 열었다.“아이를 지킬 수 없다고? 그럼 지워버려.”그리고 도윤은 바로 전화를 끊었는데, 전화기 너
지아에게 좀 잘 해주라고 한 말, 도윤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지만 그는 끝내 지아를 지금 이 지경으로 몰아붙였다.“그래, 알았어. 그녀는 아직 날 경계하고 있어서 그녀가 임신한 것을 나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거야. 그러니 너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어. 그냥 그녀를 잘 돌봐줘. 만약 다른 어떤 이상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말하고. 장미 장원에서 그녀의 모든 요구를 최대한 만족시켜.”“알겠습니다, 대표님. 대표님은 확실히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군요.”단순한 미연은 자신이 지아를 철저히 팔아먹었단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가 봐.”서재의 문이 닫히자 도윤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고, 다른 한 손은 양요한의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한밤중에 형수님께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양요한은 지금 이미 습관되었다. 도윤이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거라면 거의 지아와 관련된 일이었다.도윤은 먼 곳의 가로등을 주시하면서 잠시 침묵하고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의외로 임신했다면, 언제 유산 수술을 하는 게 가장 좋을까?”양요한은 막 술을 한 모금 마셨는데,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술을 내뿜었다.“뭐라고요? 유산이요? 형수님 임신하셨어요?”“대답해.” 도윤의 말투는 싸늘했다.양요한은 소매로 입을 닦았다.“보통 생리가 끝난지 6주가 될 때, 검사를 하면 되는데, 약으로 유산을 하거나 수술로 유산을 할 경우가 있어요. 약을 쓰는 거라고 보통 7주 이내, 수술을 하는 거라면 보통 40~60일 내로 진행하는 게 가장 좋고요.”.양요한은 전화 이쪽이 침묵에 빠진 것을 보고 또 얼른 입을 열어 한마디 덧붙였다.“형수님께서 임신을 한 거예요? 형수님이라면 내가 충고 좀 할게요. 당초 형수님이 출산한 후의 상황에 대해 대표님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녀는 출혈로 하마터면 죽을 뻔했고, 또 몸을 크게 다쳤죠. 이런 체질은 임신하기 쉽지 않으니 만약 임신했다면 아이를 남겼으면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아이를 지우는 것은 그녀에게 트라우마가 될 가능성이 높아 앞
지아는 눈썹을 찡그렸다.‘이 사람은 또 무슨 약을 잘못 먹었나? 왜 나한테 와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그녀는 왼손으로 도윤의 숨막히는 몸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그의 몸에 닿았을 때 그녀는 축축한 무언가를 만졌다.그것은 피였다.지아는 지금 이런 냄새에 매우 민감했다.지아는 불을 켰고, 도윤의 하얀 셔츠에 피가 마구 흐르는 것을 보았다.‘별장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잠깐 사이에 이렇게 된 거야?’“누가 그랬어?”도윤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손을 내밀어 지아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다.“지아야, 내가 너의 손을 다치게 했잖아, 그러니 내 팔을 가져가. 이제 나한테 화풀이 좀 그만해, 응?”그의 눈빛은 집요한 갈망으로 불타올랐고, 지아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당신 정신 나간 거 아니야?”도윤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피 묻은 손가락으로 지아의 뺨을 어루만졌다.“그래, 나 미쳤어. 지아야, 네가 나를 떠나지 않는 한, 넌 나에게 무엇을 해도 돼.”“그럼 널 죽여도 되는 거야?”피는 도윤의 손끝을 따라 천천히 지아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그는 유난히 부드럽게 웃었다.“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죽으면, 널 볼 수 없잖아. 난 그게 너무 두려워. 지아야, 날 떠나지 마.”지아는 침대 시트에 떨어진 피를 보며 화가 났다.“꺼져.”그녀는 전에 도윤이 그의 어머니에게 심각한 심리적 질병이 있어서 발작하면 자해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도윤은 이 2년 동안 여동생이 죽었다는 슬픔에 빠진 데다 또 지아와의 혼인에 얽매였으니, 심리적인 상태가 이예린보다 많이 좋진 않았다.게다가 이런 정신질환은 유전의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는 지금 이미 자해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지아는 그 섬뜩한 피를 보며 도윤이 미쳐서 자신까지 죽일까 봐 두려웠다.지아는 무의식적으로 아직 형성되지 않은 아이를 감싸면서 도윤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못했다.“할 말 있으면 상처 싸맨 다음 다시 이야기하자. 당신은 잠이 오지 않겠지만 난
도윤은 지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줄곧 괴로움에 빠졌다. 그는 한사코 마음속 깊은 곳의 괴물을 억압하면서 지아를 해칠까 봐 두려워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는 여전히 치밀어 올랐고, 질투는 그의 이성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도윤은 한 번 또 한 번 자신에게 물었다.‘왜 그 아이가 내 것이 아닐까? 그러면 나도 이렇게 괴로울 필요가 없을 텐데.’진환은 그의 상처를 싸매면서 충고했다.“대표님, 좀 진정하세요. 더 이상 이렇게 자신을 다치게 하시면 안 돼요.”도윤은 쓴웃음을 지었다.“진환, 만약 너라면, 넌 어떻게 할 거야?”“대표님, 저에게 아직 아내가 없기 때문에 대표님에게 좋은 의견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진환은 도윤이 지금 마치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하는 사람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그래서 진환은 감히 건의할 수도 없고, 건의하지도 못했다.지아와 도윤이 오늘 이 지경으로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역시 이예린이었다.두 사람 모두 도윤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사람이었고, 이예린이 아무리 잔인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도윤이 여러 해 동안 찾은 여동생이었다.그러나 이 가시를 뽑지 않으면, 지아는 영원히 도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모님께서 이미 한 아이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매우 긴 시간을 들여 그 상처를 치유했고, 그렇게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어 이 아이는 그녀의 목숨입니다. 만약 대표님께서 마음대로 그녀의 아이를 건드렸다면…….”진환은 항상 일이 점점 더 극단적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방관자로서 그들이 보고 싶은 결과가 아니었다.“알아, 나야 당연히 알지.”도윤은 금방 미연의 입에서 지아가 어떻게 이겨냈는지를 알게 되었으니, 그녀는 누구보다도 이 작은 생명의 존재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것을 용납할 수 없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