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본능적으로 손을 아랫배에 놓았지만 또 도윤에게 들킬까 봐 얼른 손을 치웠다.그러나 이 동작은 더욱 티가 났고, 도윤은 그녀의 모든 것을 포착했다.그가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지아의 심장은 매우 빨리 뛰었다.도윤의 손이 자신의 등에 닿은 순간, 거의 동시에, 지아는 온몸의 털이 곤두섰고, 촘촘한 닭살이 돋았으며 공포스러운 느낌은 그의 손가락이 닿은 곳에서 온몸으로 번졌다.지아는 두려움을 억제하고 가능한 한 자신을 좀 진정시켰다.“뭐 하는 거야?”“지아야, 너 나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지아는 침을 삼키더니 더욱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한 줄 알아? 이도윤, 아무도 네가 짜증난다고 말해준 적 없지? 지금 백채원과 결혼하려고 하는 이상, 왜 또 날 찾아오는 건데!”도윤은 천천히 허리를 굽혔고, 그의 카리스마는 지아를 향해 엄습했다.그리고 그는 지아의 귓가에 대고 살며시 말했다.“지아야, 왜 긴장하고 그래.”그것은 의문이 아니라 확신에 선 대답이었다.지아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그녀 자신도 왜 도윤을 이렇게 무서워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아마도 전에 죽은 아이가 준 충격이 너무 커서, 지아는 계속 도윤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 느꼈을지도 모른다.지아가 이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가능한 한 이 일을 숨기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그녀는 안전했다.지아는 손을 뻗어 도윤을 밀어냈다.“이도윤, 난 널 상대할 시간이 없어.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 난 잘 거야.”말하면서 지아는 평소처럼 이불을 들추고 도윤을 등지고 누웠다.지아는 가슴에 손을 얹자, 자신의 심장 소리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 무서웠다. 심지어 자신이 가볍게 떨리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무서웠다.다행히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그녀에게 이불을 잘 덮어준 다음 또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럼 푹 쉬어.”말하면서 도윤은 일어섰고, 시선은 침대 머리맡의
도윤은 세 글자를 말했을 뿐이지만, 강미연은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대표님, 말할게요, 다 말할게요!”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사람은 너무 빨리 자백하는 거 아닌가? 난 아직 압력을 가하지 않았는데.’“음.”“화원에서 다듬은 장미를 버리는 게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서 저는 저녁에 가지고 나가 한 송이에 천원 씩 팔았습니다. 저는 고의로 돈을 탐내는 게 아니라, 사정이 빠듯해서요. 게다가 할머니가 또 아프셨기에 그런 겁니다. 정말 죄송해요 대표님,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도윤은 미간을 더욱 세게 찌푸렸다. “네가 말하고 싶은 게 바로 이건가?”강미연은 눈물을 글썽였다.“또, 또 있습니다, 다 말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장미를 다듬을 때 손이 떨려서 부주의로 하트 모양을 사과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표님, 제가 아마추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 약간 열이 나서 그런 겁니다.”도윤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얼굴에 이미 귀찮은 기색이 나타났다.“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난 지금 지아에 관한 일을 말하라고 한 건데. 너 요 며칠 그녀를 돌보면서 그녀에게 무슨 변화가 있는지 발견했어?”강미연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아가씨요? 그녀는 요즘 입맛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그리고?”“다른 건 없었습니다, 아가씨는 성격이 좀 싸늘하셔서 저희와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지아의 당부를 생각하며, 강미연은 절대로 지아를 팔아먹으려 하지 않았다.그러다 도윤이 갑자기 한마디 던졌다.“그녀는 지금 임신해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는데, 왜 진작에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거야? 만약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네가 책임질 건가?”강미연은 눈을 크게 떴다.“대표님, 아가씨께서 임신하신 것을 진작에 알고 계셨어요? 근데 아가씨께서 비밀을 지키라고 하셨는데.”미연은 사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또 겪어본 일이 얼마 없었기에 바로 넘어왔다.도윤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강미연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도윤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요 며칠 동안 도윤은 지아를 무척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설사 그가 백채원과 결혼하려 한다 하더라도 지아를 진심으로 대했고, 장원의 사람들 모두 눈여겨보고 있었다.‘그런데 이 전남편이란 사람은 어떻게 아내의 임신 반응도 모르는 것일까?’“아가씨께서는 전에 아무런 경험도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3개월이나 입덧을 한데다 태아가 좀 불안정했기에 임신 초기에 매일 주사를 맞아야 했어요. 저희 엄마도 그 주사를 맞은 적이 있는데 엄청 아프다고 하셨어요.”“하지만 아가씨는 그 아이에 대해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비록 40여 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기 심장소리가 나타나지 않았고, 의사는 이 아이를 남길 것을 건의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이 아이를 지우라고 하셨어요. 아가씨는 의사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더 달라고 애걸복걸하셨고요. 그때 아가씨는 매우 두려웠지만 다행히 그녀는 끝까지 버텼고, 50 일 후, 마침내 심장소리가 나타났어요.”강미연은 여기까지 말하자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아가씨도 아주 재수가 없었어요. 임신 두 개월 될 때, 갑자기 피를 흘렸는데, 아가씨는 몹시 놀라서 병원에서 일주일간 입원하고서야 그 아이를 지켜냈어요.”미연의 말에 도윤은 점차 자신이 애써 홀시하던 그 기간에 대한 기억을 되찾게 했다.도윤은 그렇게 연약한 지아가 매일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는다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그때 지아는 첫번째 임신 검사를 할 때, 의사가 아이가 불안정하다고 말했을 때, 울면서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그러나 난 뭐라고 대답했지?’그때 도윤은 지아의 목소리만 들으면 짜증이 났고, 아이를 언급하면 조율의 몸 속에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아 그에 의해 표본으로 된 그 아이를 생각하게 했다.그래서 도윤은 차갑고 얄팍하게 입을 열었다.“아이를 지킬 수 없다고? 그럼 지워버려.”그리고 도윤은 바로 전화를 끊었는데, 전화기 너
지아에게 좀 잘 해주라고 한 말, 도윤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지만 그는 끝내 지아를 지금 이 지경으로 몰아붙였다.“그래, 알았어. 그녀는 아직 날 경계하고 있어서 그녀가 임신한 것을 나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거야. 그러니 너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어. 그냥 그녀를 잘 돌봐줘. 만약 다른 어떤 이상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말하고. 장미 장원에서 그녀의 모든 요구를 최대한 만족시켜.”“알겠습니다, 대표님. 대표님은 확실히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군요.”단순한 미연은 자신이 지아를 철저히 팔아먹었단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가 봐.”서재의 문이 닫히자 도윤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고, 다른 한 손은 양요한의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한밤중에 형수님께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양요한은 지금 이미 습관되었다. 도윤이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거라면 거의 지아와 관련된 일이었다.도윤은 먼 곳의 가로등을 주시하면서 잠시 침묵하고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의외로 임신했다면, 언제 유산 수술을 하는 게 가장 좋을까?”양요한은 막 술을 한 모금 마셨는데,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술을 내뿜었다.“뭐라고요? 유산이요? 형수님 임신하셨어요?”“대답해.” 도윤의 말투는 싸늘했다.양요한은 소매로 입을 닦았다.“보통 생리가 끝난지 6주가 될 때, 검사를 하면 되는데, 약으로 유산을 하거나 수술로 유산을 할 경우가 있어요. 약을 쓰는 거라고 보통 7주 이내, 수술을 하는 거라면 보통 40~60일 내로 진행하는 게 가장 좋고요.”.양요한은 전화 이쪽이 침묵에 빠진 것을 보고 또 얼른 입을 열어 한마디 덧붙였다.“형수님께서 임신을 한 거예요? 형수님이라면 내가 충고 좀 할게요. 당초 형수님이 출산한 후의 상황에 대해 대표님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녀는 출혈로 하마터면 죽을 뻔했고, 또 몸을 크게 다쳤죠. 이런 체질은 임신하기 쉽지 않으니 만약 임신했다면 아이를 남겼으면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아이를 지우는 것은 그녀에게 트라우마가 될 가능성이 높아 앞
지아는 눈썹을 찡그렸다.‘이 사람은 또 무슨 약을 잘못 먹었나? 왜 나한테 와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그녀는 왼손으로 도윤의 숨막히는 몸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그의 몸에 닿았을 때 그녀는 축축한 무언가를 만졌다.그것은 피였다.지아는 지금 이런 냄새에 매우 민감했다.지아는 불을 켰고, 도윤의 하얀 셔츠에 피가 마구 흐르는 것을 보았다.‘별장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잠깐 사이에 이렇게 된 거야?’“누가 그랬어?”도윤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손을 내밀어 지아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다.“지아야, 내가 너의 손을 다치게 했잖아, 그러니 내 팔을 가져가. 이제 나한테 화풀이 좀 그만해, 응?”그의 눈빛은 집요한 갈망으로 불타올랐고, 지아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당신 정신 나간 거 아니야?”도윤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피 묻은 손가락으로 지아의 뺨을 어루만졌다.“그래, 나 미쳤어. 지아야, 네가 나를 떠나지 않는 한, 넌 나에게 무엇을 해도 돼.”“그럼 널 죽여도 되는 거야?”피는 도윤의 손끝을 따라 천천히 지아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그는 유난히 부드럽게 웃었다.“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죽으면, 널 볼 수 없잖아. 난 그게 너무 두려워. 지아야, 날 떠나지 마.”지아는 침대 시트에 떨어진 피를 보며 화가 났다.“꺼져.”그녀는 전에 도윤이 그의 어머니에게 심각한 심리적 질병이 있어서 발작하면 자해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도윤은 이 2년 동안 여동생이 죽었다는 슬픔에 빠진 데다 또 지아와의 혼인에 얽매였으니, 심리적인 상태가 이예린보다 많이 좋진 않았다.게다가 이런 정신질환은 유전의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는 지금 이미 자해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지아는 그 섬뜩한 피를 보며 도윤이 미쳐서 자신까지 죽일까 봐 두려웠다.지아는 무의식적으로 아직 형성되지 않은 아이를 감싸면서 도윤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못했다.“할 말 있으면 상처 싸맨 다음 다시 이야기하자. 당신은 잠이 오지 않겠지만 난
도윤은 지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줄곧 괴로움에 빠졌다. 그는 한사코 마음속 깊은 곳의 괴물을 억압하면서 지아를 해칠까 봐 두려워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는 여전히 치밀어 올랐고, 질투는 그의 이성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도윤은 한 번 또 한 번 자신에게 물었다.‘왜 그 아이가 내 것이 아닐까? 그러면 나도 이렇게 괴로울 필요가 없을 텐데.’진환은 그의 상처를 싸매면서 충고했다.“대표님, 좀 진정하세요. 더 이상 이렇게 자신을 다치게 하시면 안 돼요.”도윤은 쓴웃음을 지었다.“진환, 만약 너라면, 넌 어떻게 할 거야?”“대표님, 저에게 아직 아내가 없기 때문에 대표님에게 좋은 의견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진환은 도윤이 지금 마치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하는 사람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그래서 진환은 감히 건의할 수도 없고, 건의하지도 못했다.지아와 도윤이 오늘 이 지경으로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역시 이예린이었다.두 사람 모두 도윤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사람이었고, 이예린이 아무리 잔인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도윤이 여러 해 동안 찾은 여동생이었다.그러나 이 가시를 뽑지 않으면, 지아는 영원히 도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모님께서 이미 한 아이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매우 긴 시간을 들여 그 상처를 치유했고, 그렇게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어 이 아이는 그녀의 목숨입니다. 만약 대표님께서 마음대로 그녀의 아이를 건드렸다면…….”진환은 항상 일이 점점 더 극단적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방관자로서 그들이 보고 싶은 결과가 아니었다.“알아, 나야 당연히 알지.”도윤은 금방 미연의 입에서 지아가 어떻게 이겨냈는지를 알게 되었으니, 그녀는 누구보다도 이 작은 생명의 존재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것을 용납할 수 없
도윤은 그런 소란을 피운 다음, 지아는 며칠 째 그를 보지 못했다.그러나 지아의 마음은 갈수록 불안해졌다.‘그 남자, 뭐라고 발견한 건가?’그러나 도윤이 만약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미쳐버릴 텐데, 절대로 말 한 마디 없이 그녀가 매일 잘 먹고 잘 자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최근에 지아는 음식을 많이 먹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착각인지, 그 음식들은 모두 보양식이었다.지아는 미연에게 물어봤는데, 미연은 그녀가 주방에게 이렇게 준비하라고 분부했다고 말했다.결국 지아는 아이를 임신하느라 매일 엄청 힘든 데다, 입덧도 무척 심했기 때문에 반드시 영양을 많이 보충해야 했다.도윤이 없는 장원은 매일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지만, 지아는 늘 폭풍우가 오기 직전이라 느꼈다.그녀가 매일 의심하는 모습을 보고 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웃었다.“아가씨,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세요. 백씨 집안에서 비록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백채원은 몸이 멀쩡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요구가 엄청 많대요. 그렇게 그 모양으로 됐는데 또 무슨 웨딩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건지. 대표님은 그녀의 매달림에 시달려서 시간을 낼 수 없는 거예요.”매일 지아가 잠든 후에야 도윤은 밤에 몰래 들어와 깊이 잠든 그녀를 지켜보곤 했다.미연은 지아에게 불필요한 심리적인 부담을 줄까 봐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지아는 요즘 잠이 많아 수면의 질도 예전보다 많이 좋아져서 눈치채지 못했다.“그래, 그는 곧 결혼할 거야.”지아는 자신이 임신한 이후, 줄곧 아이에게 신경을 쓰며 이예린에 대한 관심조차 많이 줄었단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이예린이 도윤에 의해 통제되어 단독으로 된 산속의 별장에 갇혔고, 전 의료팀이 심리치료를 해주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지아는 당분간 이예린을 만날 기회가 없었기에 복수조차 할 수 없었다.말하는 사이, 또 한 하인이 보양식을 가져왔다. 지아는 자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후와 같다고 느꼈다. 주방에서는 매일 방식을 바꾸어 그녀에게 음식을
지난번 섬에 도착했을 때, 도윤은 급히 지아와 소계훈을 데려온 후, 소시후에 대해 별로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듣자니 이미 귀국했다고 했는데, 자기가 지아를 데려갔다고 해서 다시 A시로 돌아와 지아를 빼앗을 뜻은 없었다.다시 말해서, 소시후에게 있어 지아는 아마도 일시적인 장남감에 불과했고, 그는 전혀 진심이 아니었다.도윤은 매우 화가 났다.그가 줄곧 사랑해온 여자가 남의 아이를 가졌는데, 그 남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다니.도윤은 자기가 어떤 심정으로 지아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요 며칠간 될수록 자신을 설득하여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그 잡종에 관한 일이었다.그는 아무리 자신을 설득해도 진정하고 그 잡종을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20여 일이면, 곧 수술을 할 수 있을 거야.’‘지아는 몸이 별로 좋지 않아 보기만 해도 아주 말랐으니 그동안 영양을 많이 보충해야 해.’도윤은 또 사람 시켜 몸을 조리하는 식재료를 한 무더기 보냈다.밥을 먹은 다음, 소계훈은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고, 지아는 그를 바라보았다.“아빠, 할 말 있으면 직접 하세요.”소계훈은 재삼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지아야, 너 손목 때문에 도윤에게 화가 난 거지? 내가 깨어난 후에 너희들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는 너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지만 너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다니. 요 며칠 그는 밥을 먹으러 돌아오지도 않고, 항상 널 피하고 다녔어.”“아빠, 나와 그 사이에는 확실히 문제가 좀 있어요. 그가 나를 피하는 것은 내가 지금 화 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지아야, 전에 넌 그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거야? 평생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어딨겠어? 잘못을 알고 고치면, 그냥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지아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데다가 임신 때문에 마음이 초조하여 더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아빠, 우리 사이에는 별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