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린은 지아가 자신의 신분을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스터 Y를 통해 자신을 불러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즉시 안색이 변했다.“당신, 미스터 Y와 무슨 사이지?”이예린은 분명히 화가 났고, 마치 지아가 그녀의 중요한 사람을 빼앗은 것 같았다.지아는 소시후에 대한 이예린의 감정을 대충 알아맞힐 수 있었기에 담담하게 입을 웃었다.“네가 맞혀봐.”무척 애매한 대답에 이예린은 더욱 질투를 느꼈다.“내가 당신이 남자를 꼬시기 좋아하는 천한 년일 줄 알았어. 당신은 우리 오빠와 어울릴 자격이 없어. 그리고 당신 마침 잘 왔네, 내가 직접 찾아갈 필요가 없는 거 같군.”이예린은 곧 일어나서 지아에게 손을 대려고 했지만, 일어나기도 전에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하더니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물에 약 탄 거야?”지아는 천천히 이예린을 향해 걸어갔다.“이거 다 당신에게서 배운 건데. 이예린, 우리 사이의 일도 이제 끝내야겠지?”지아는 경호원더러 이예린을 데려가라고 했다. 그녀는 이날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수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히던 날, 지아는 마치 숨을 쉴 수 없는 물고기와 같았다. 그녀는 자신을 뒤덮고 있는 큰 그물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지금 그녀는 마침내 이 주범을 잡았다.이예린은 해변에 걸려 있었는데, 이때 석양이 서쪽으로 지더니 차디찬 해풍이 정면으로 불어왔다. 이예린의 몸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고, 그녀의 체질은 원래 약했기에 바람조차 이겨낼 수 없었다.지아는 손에 비수를 들고 그녀의 옆에 서 있었는데, 다음 순간, 칼로 이예린의 몸을 그었다.피가 순식간에 뿜어져 나오자, 지아의 눈에는 동정심 대신 오직 무관심과 싸늘함 뿐이었다.“이예린, 날 이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난 지금 당신을 어떻게 괴롭혀도 마음이 약해지지가 않거든.”이예린은 아팠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오히려 얼굴에 웃음이 넘쳐났다.“그래? 그날 밤 난 당신에게 그 약을 주사했어야 했는데.”이 여자는 사람을
그 목소리는 마치 찬물 한 대야처럼 지아의 몸을 향해 뿌렸고,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지아는 도윤을 바라보았는데 하얗고 작은 얼굴에는 아직도 이예린의 피가 묻어 있었다.도윤은 이런 지아를 종래로 본 적이 없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지아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지아는 도윤의 눈을 마주했지만 조금도 피하지 않고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이도윤, 너 마침 잘 왔네.”“지아야, 너 진작에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야?”“왜? 놀라워? 네가 날 어떻게 위로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난 이미 이예린에게 손을 대기로 결정했어. 이도윤, 너 이 일을 잘 처리하겠다며? 지금 난 이미 주모자를 잡았어.”지아는 차갑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죽일래, 아니면 내가 직접 죽일까?”이예린의 몸에는 다섯 갈래의 상처가 있었는데 피는 흰 치마를 따라 한 방울씩 해면에 떨어졌고, 그녀는 아주 취약해 보였다.“지아야, 진정해. 우리 말로 하자.”“진정하라고?”지아는 싸늘하게 웃었다.“네가 진정하라고 하면, 난 진정해야 하는 거야? 이 2년 동안 겪은 모든 고통을 잊어버려야 하는 거냐고? 당신들 덕분에 우리 집안은 파산하고, 우리 아빠는 식물인간이 되었어. 그리고 나는 몇 번이고 그녀의 손에 죽을 뻔했는데, 네가 그녀를 안쓰러워할 때 내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는 거야?”“지아야, 그 일이 모두 예린의 잘못이라는 거, 나도 알아. 그녀를 미워하고 날 미워하는 것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내가 내 목숨으로 그녀의 목숨을 바꾸는 건 어때? 그녀를 다치게 하지 마. 나에게 여동생은 그녀 하나밖에 없거든.”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반복했다.“여동생이 하나밖에 없다고? 허, 나는 처음부터 널 믿지 말았어야 했어. 이도윤, 나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고 그녀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희들이 나에게 빚진 거, 천배 만배로 돌려줘! 오늘 이예린은 반드시 죽어야 해.”이때 진환과 진봉 등 사람도 쫓아왔다.“사모님, 제발 진정 좀 하세요.”“그래요, 우리는 앉아서 얘
도윤은 품속에서 거의 숨이 죽어가는 이예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척 심하게 다쳤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고 마치 전쟁을 이기고 돌아온 장군과 같았다.“오빠, 내가 이겼어.”이 말을 마치자, 이예린은 도윤의 품에 안긴 채 혼수상태에 빠졌다.도윤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영원히 지아를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소시후도 지아가 다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고, 주원은 더욱 눈시울을 붉혔다.“누나, 손!”“난 괜찮아.”“뭐가 괜찮은 거예요? 누나는 의사가 될 사람인데, 손을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주원은 긴급히 지아의 상처를 처리하면서 마음 아파했다.어렸을 때, 지아가 의사로 되고 싶다고 해서 주원도 이 길을 선택했지만, 지금,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손을 다쳤다.“의사?”지아는 병상에 누워 허약하게 웃었다.전에 지아는 확실히 좋은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도윤은 그녀의 꿈을 망쳤고, 그녀를 기꺼이 집에서 일하는 가정주부로 만들었다.이번에 도윤은 또 그녀의 손을 망가뜨려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다.도윤을 생각하면 지아는 여전히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을 느낄 수 있었고, 그 통증은 가슴에서 온몸으로 퍼졌다.“나 의사 포기할래.”지아는 눈을 감고 또박또박 말했다.“더 이상 의사로 되고 싶지 않아.”지아는 마지막에 자신의 뒤통수를 세게 때린 사람이 도윤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소시후는 지아가 거대한 슬픔에 잠긴 모습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으로서 그는 지아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지아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지만, 그는 자꾸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지아는 자신의 여동생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지아 씨, 좀만 더 참아. 이제 총알을 뽑을 거야.”“좋아요.” 지아는 다시 눈을 떴다. “앞으로 이 손을 쓸 순 없겠지?”주원은 잠시 침묵하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난 최선을 다해 누나의 손을 지킬 거예요.”그는 상처를 처리하면서 마음속으
지아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암을 앓고 있었던 데다 이번에 또 총을 맞았으니 그날 밤 바로 고열이 났다.그녀는 열 때문에 자신이 마치 바다에서 떠돌고 있다고 생각했고, 입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엄마, 나 추워요. 가지 마요…….”“아가야, 나 버리지 말고 나 데리고 같이 가.”“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아파, 너무 아파…….”주원은 눈시울을 붉히며 지아를 바라보았고, 가슴은 씁쓸하면서도 시큰거렸다.지아는 올해 겨우 21살인데, 왜 이렇게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누나, 내가 누나를 잘 보호할게요, 맹세해요.”지아는 하루 종일 혼수상태에 빠진 후에야 유유히 깨어났는데, 손목의 상처는 이미 붕대를 감고 있었다.하얀 붕대를 통해 안의 상황을 볼 수 없었고, 지아는 움직일 때만 약간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구나, 이도윤은 정말 날 향해 총을 쐈어.’“누나, 깨어났어요.” 주원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흥분을 띠고 있었다.지아는 애써 눈을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주원아, 우리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공해예요! 누나, 우리는 이미 A시를 떠났어요. 안심하세요. 그 남자는 더 이상 우리를 찾을 수 없어요.”주원은 눈에 앳된 기운이 스쳐 지나갔는데, 심기가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그래? 우리 이미 떠났구나.”주원은 얼른 베개로 지아의 허리를 받쳐주었다.“먹을 것 좀 가져올게요. 누나 먼저 베개에 기대서 바다 좀 봐요. 이틀만 더 있으면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거예요.”“응.”주원이 떠나자 소시후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깼어?”한창 멍을 때리며 바다를 보고 있던 지아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대표님, 구해주셔서 감사해요.”만약 소시후가 아니었다면 지아와 주원은 절대로 A시를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소시후는 지아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괜찮아, 별거 아닌걸.”“대표님, 섬에 도착하면 우리 바로 신장 이식 수술을 시작할 수 있어요.”“급하지 않
도윤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뭐라고? 신장 이식?”“네, 지아 아가씨가 만약 신장 이식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면 또 왜 이렇게 많은 검사를 했겠어요?” 간호사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 우리 병원의 신장 이식 수술은 아주 유명하거든요. 게다가 이 신장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니 되도록 빨리…….”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윤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마침내 소시후가 무엇 때문에 이유 없이 손을 써서 지아를 도왔는지를 알게 되었다.지아는 소시후와 신장이 일치했던 것이다.비록 인체는 신장 하나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결국 이는 신체에 약간의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아는 아직 젊었으니 도윤은 그녀가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신장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대표님, 현재 사모님은 이미 A시에 없으며 소시후조차도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저희는 잠시 그들의 행방을 찾을 수 없습니다.”“대표님, 우선 푹 쉬세요. 사모님의 소식이 있으면 저희가 가장 빨리 보고할게요.”도윤은 모든 힘을 동원하여 지아의 행방을 찾았는데, 하필 소시후는 바다에 가라앉은 것처럼 더는 소식이 없었다.도윤은 매일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그는 지아가 총에 맞았을 때의 그 충격 받은 얼굴이 생각났다.그의 마음속에는 마치 수만 마리의 벌레가 끊임없이 그를 깨물고 있는 것 같았고, 이예린이 먼저 호의를 베풀어도 도윤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오빠.” 이예린은 손에 작은 메뚜기 한 마리를 들고 있었다. 어릴 때 도윤은 그녀에게 풀로 작은 동물을 만들어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그러나 이예린은 결국 세 살짜리 아이가 아니었고, 도윤도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왜? 또 어디가 아픈 거야?”이예린은 많이 수척해진 도윤을 보고 입을 열었다.“오빠, 난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이예린에게 사과를 깎아주려던 남자는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믿을 수 없단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뭐라고?
지아는 자신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것을 보고 점차 절망에 빠졌다.소계훈은 지아가 살아갈 마지막 희망이었기에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그가 떠나지 못하게 했다.지아는 원래 소계훈의 몸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지금 오른손을 다쳤기에 수건을 짜는 가장 간단한 일조차 할 수 없었다.주원은 지아의 씁쓸한 표정을 보며, 특별히 그녀를 대신해서 수건을 짠 다음 건네주었고, 또 인내심을 가지고 위로했다.“누나, 너무 슬퍼하지 마요. 이도윤은 총을 쏠 때 특별히 급소를 피했기에 누나의 손은 앞으로 다시 회복될지도 몰라요. 지금은 일단 천천히 휴양하면 돼요.”지아는 피식 웃었다.“그럼 내가 오히려 그에게 살려줘서 고맙다고 해야겠네?”그녀는 힘없이 축 처진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지금 가장 후회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그때 깔끔하게 이예린 그 미친년을 죽이지 못한 거야. 간발의 차이로 그녀를 바다에 던져버릴 수 있었는데.”지아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그때의 이예린을 떠올렸다. 통증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비명조차 지르려 하지 않았던 그 여자는 확실히 정상인이 아니었다.“누나, 이예린은 사실 몸이 좋지 않거든요. 그녀의 생활도 그렇게 좋진 않았어요.”“그럼 난? 난 그동안 행복하게 지냈던 거 같아?” 지아는 쓴웃음을 지었다.“누나…….”주원도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탄식했다.“다 지나갈 거예요.”지금 지아의 세계는 온통 어둠이었다. 그녀는 소계훈의 곤히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그래, 나한테 아직 아빠가 있어. 그러니 다 잘 될 거야. 난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오늘 밤 푹 자요. 내일 아침 일찍 아저씨를 위해 수술을 할 예정이에요.”“응.”이날 밤, 지아는 긴장과 흥분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이날을 반년이나 기다렸다.거의 밤새 잠을 자지 못한 지아는 그렇게 뜬 눈으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그녀는 거듭 확인했다.“주원아, 오늘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그럼요
소시후가 위로하자 지아도 그렇게 긴장하지 않았다. 시간은 아주 빨리 지나갔고, 수술실의 문이 열리더니 지아는 재빨리 달려갔다.“주원아, 어떻게 됐어?”주원은 장갑과 마스크를 벗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안심해요, 누나. 수술은 아주 성공적이니 아저씨는 오늘 안으로 깨어나실 거예요.”전에 너무 많은 변고가 생겼기 때문인지, 지아는 줄곧 매우 두려워했는데, 다행히도 하느님은 이번에 소계훈을 괴롭히지 않았다.그리고 소계훈은 지아가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애를 쓰며 깨어났다.그가 눈을 뜨는 순간, 지아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것만 같았고, 한참 뒤에야 입술을 움직이며 소리쳤다.“아빠, 아빠, 마침내 깨어나셨네요.”소계훈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며 말을 어물거렸다.“지, 쟈야.”주원이 설명했다.“아저씨는 뇌신경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거동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말을 똑똑히 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앞으로 오랜 기간의 재활을 해야 해요.”지아는 연이어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 우리 아빠만 멀쩡하면 다른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주원아, 수고했어.”“수고는 무슨. 이게 다 내가 해야 할 일인걸요. 누나는 손도 불편하니 아저씨를 돌보는 일은 내가 할게요.”지아도 사양하지 않았는데, 지금의 그녀는 확실히 많이 불편했다.비록 소계훈은 깨어났지만 재활하려면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고, 또 그동안 오래 누워 있었기에 즉시 침대에서 내려와 활동할 수 없었다.소계훈이 깨어난 것을 보자, 지아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소계훈도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말할 수가 없었기에 그는 그저 지아의 축 처진 오른손을 주시하고 있었다.“손, 네 손.”지아는 바삐 손을 뒤로 숨겼다.“괜찮아요, 며칠 전에 살짝 다쳤는데 곧 나아질 거예요. 아빠는 일단 몸부터 잘 휴양해요.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난 아무 데도 안 가고 아빠 곁에만 있을 거예요.”소계훈은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진 이 반년 동안 무슨 일이
만약 가능하다면, 소시후는 사실 지아의 신장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자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몇 년 동안 수많은 돈과 인맥을 동원했지만, 자신에게 어울리는 신장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그래서 소시후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지아와의 검사 결과가 의외로 일치했다.그의 신장 기능은 이미 말기에 접어들었고, 지금은 완전히 투석에 의지하여 버티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런 상태를 유지하면, 결국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밖에 없을 것이다.그래서 소시후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소씨 집안 장남으로서 가업을 이끌고 있었기에 가능한 한 빨리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렇지만 지아의 그 하얀 얼굴을 보며 소시후는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정말 힘들다고 느꼈다.“지아 씨, 지금 만약 후회한다면 나에게 말해. 난 절대로 지아 씨 탓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나도 신장을 계속 찾을 수 있거든.”지아는 고개를 저었다.“대표님, 난 이미 결정했어요.”이 세상에 공짜란 없었다. 지아와 소시후는 가족도 친구도 아니었기에 그녀가 유일하게 이 신세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자신의 신장을 그에게 주는 것이었다.게다가 지아는 손을 쓸 수 없는데다 중병까지 앓고 있어서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죽기 전에 소시후를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아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다른 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나는 성인이고, 또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나 자신의 결정을 책임질 수 있거든요. 이 일은 더 이상 미루지 마요. 대표님도 귀국해서 처리해야 할 일이 엄청 많죠? 게다가 지금 아직 여동생을 찾지 못하셨잖아요. 그러니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죠.”소시후는 한숨을 쉬었다.“난 지아 씨보다 더 착하고 친절한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거 같아. 이런 지아 씨가 내 여동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대표님과 같은 오빠가 있을 수 있겠어요.”그녀는 상상을 할 염두조차 없었다.소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