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에 서서 아직 들어가지 않은 소지아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그저 웃기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도대체 어떤 집안으로 시집을 간 거야?’백정일 말고 진심으로 변진희를 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전에 그녀는 최선을 다해 어르신을 모셨지만, 그는 오히려 그녀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결국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백정일일 뿐이었다. 만약 그가 백채원의 목숨으로 변진희을 살린다면, 변진희는 깨어난 후 절대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물며 백정일은 어렸을 때부터 백채원을 키웠고, 이미 그녀를 자신의 친딸로 여겼다.그러니 그는 대체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아무리 선택해도 결과는 고통스러웠고, 백정일 역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이때 간호사가 달려왔다.“변 사모님 가족분들 맞죠? 환자분 이미 깨어났는데, 지금 가족분들 만나고 싶어해요.”백정일은 즉시 고개를 돌려 간호사를 따라갔고 지아도 재빨리 따라갔다.주치의가 입구에 서서 당부했다.“환자분의 뜻에 따르면 지금 중환자실에서 나와 남은 시간을 가족분들과 함께 보내고 싶다네요. 물론 결정권은 가족분들에게 있죠.”중환자실에서는 병문안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매번 응급처치를 할 때마다 변진희의 몸에 엄청난 상처를 입혔다. 아무튼 그 안에 있으면 무척 괴로웠다.이런 방식으로 구해낸 환자도 오래 살진 못했다.백정일은 지아를 바라보았고, 지아는 슬픔에 잠긴 남자를 부축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엄마의 뜻대로 해요.”변진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지아는 적어도 그녀가 편하게 떠났으면 했다.이때 변진희가 밀려나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엄청 수척해졌고, 얼굴은 손바닥의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비록 그녀는 많이 아파보였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진희야, 많이 고생했지.”“엄마.”지아도 변진희의 이런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유난히 괴로웠고, 전의 원한은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그녀는 몹시 아팠지만, 아직 백채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
결국 백정일은 변진희의 퇴원 수속을 밟았고, 집에 가서 요리까지 했다. 변진희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는데, 몸은 매우 허약했다.그녀는 백채원에게 전화를 한 번 또 한 번 걸었고, 지금까지도 시종 백채원을 걱정하고 있었다.백정일은 변진희가 슬퍼하지 않도록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이번 생에 그녀는 이미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했으니, 백정일은 변진희가 아쉬움을 안고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상관하지 마. 그 계집애는 원래 제멋대로여서 며칠 있다 집에 돌아올지도 몰라.”“하긴.”변진희는 백채원이 자신을 여전히 싫어한다고 생각했을 뿐,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식사하는 동안, 변진희는 이도윤에게 백채원은 아주 좋은 여자이니 앞으로 반드시 백채원에게 잘해줘야 하고 또 백채원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고 끊임없이 당부했다.도윤도 차가운 기운을 거두고 일일이 승낙했다.비록 백채원이 없었지만, 변진희는 여전히 매우 즐거웠고, 심지어 술을 두 잔 마셨는데, 얼굴은 이미 새빨개졌다.그녀는 지아더러 자신과 함께 노을을 보러 가자고 했고, 보는 내내 그녀의 입은 쉬지 않았다.“지아야, 만약 내가 오늘처럼 될 줄 알았다면, 난 전에 너와 함께 있었던 모든 시간을 소중히 여겼을 거야. 나중에 네 아버지가 깨어나면, 나 대신 미안하다는 말 좀 전해줘. 내가 그의 마음을 저버렸거든.”“네.”“엄마는 진심으로 네가 행복을 얻을 수 있길 바라거든. 그러니 더 이상 채원이가 도윤을 빼앗은 일로 원망하지마, 응?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무것도 바꿀 수 없잖아.”“안심해요, 난 그녀와 빼앗지 않을 거예요. 그런 남자를 포기한 이상, 난 다시 돌아보지 않을 거예요.”변진희는 지아를 오랫동안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았다.“넌 참 착한 아이야.”그러나 이 세상은 가장 불공평했고, 상처를 받는 것은 항상 착한 아이들이었다.이튿날 날이 밝자, 백정일은 특별히 변진희를 데리고 산에 가서 해돋이를 보았다. 변진희는 그의 품에 안겨 하늘에 나타난 금색 햇빛을 바라보았다.그
하룻밤 사이에 부모님 모두 잃은 백채원은 슬픔에 잠겼지만, 자신의 몸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전 A시가 마치 짙은 검은 안개에 휩싸인 것 같았다.어르신은 아들 며느리가 모두 죽었다는 것을 알고, 화병이 나서 병원에 실려갔고, 그 바람에 백정일의 장례식도 급히 치러졌다.뿌연 하늘 아래, 지아는 검은색 드레스에 검은 우산을 쓴 여자가 백정일의 묘비 앞에 한참 동안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 아름다운 얼굴은 오히려 분노 때문에 일그러졌다. 진수련은 백정일이 마지막에 뜻밖에도 변진희와 함께 죽는 것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설령 그녀가 수십년 동안 계획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헛수고였다.진수련은 백정일이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사정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명했다.결국 진수련이 모든 것을 잃은 사람으로 되었다.지아는 그녀의 곁으로 걸어갔다.“이게 바로 당신이 원하는 결과인가요?”진수련은 뒤를 돌아보았다.“네가 어떻게 여기에.”그녀는 놀라움을 느꼈는데, 지아가 여기에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여기에서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어요. 이것은 아저씨가 남긴 편지인데, 당신에게 전해주라고 하셨어요.”진수련은 손을 뻗어서 받으려 했지만 지아는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그 당시 병원에서 아이를 바꾼 사람이 당신이었으니, 내 친부모님이 누구인지, 당신은 알고 있겠죠?”진수련은 눈을 가늘게 떴다.“지금 나 협박하는 거니?”“아니요, 거래일 뿐이에요. 당신은 나에게 친부모님의 신분을 알려주고, 나는 이 편지를 당신에게 주는 거죠. 설마 여태껏 아저씨를 사랑하면서 그의 마음속에 자신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궁금하지도 않는 거예요?”진수련은 지아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어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네 신세에 대해, 난 말할 수 없어. 그러나 조언 하나 해주지. 죽기 싫으면 A시에 가만히 있어. 그렇지 않으면 넌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거야.”말을 마치고 그녀는 몸을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지아는 우산을 쓰고 묘비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그녀의 몸이 흠뻑 젖은 것을 보고, 도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다가가 입을 열었다.“돌아가자, 시간도 늦었는데.”지아는 수시로 사라질 것처럼 그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그녀는 또 한 번 가족을 잃었고, 지금은 더욱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이는 도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도윤은 두 팔을 뻗어 지아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녀는 검은 우산 아래에 서서 그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지아야, 슬퍼하지 마, 내가 있잖아.”‘당신이 있기에 내가 슬픈 거야.’바람은 휙휙 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지아의 가녀린 그림자는 더욱 강인해졌다.지아는 말을 하지 않고 곧장 떠났다. 이제 그녀도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한 마디도 하지 않는 지아를 보며 도윤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설득했다.‘나 자신에게 시간을 좀 더 주자. 난 꼭 지아의 마음속 상처를 치유할 테니까.’그녀가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도윤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서재로 갔다.진환은 사실대로 보고했다.“작은 아가씨의 일에 대해 좀 알아냈는데, 그 당시 아가씨는 유괴범에 의해 남쪽의 한 외진 산으로 유괴되었고, 한 시골의 총각이 아가씨를 사서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뭐?” 도윤은 거의 이를 갈며 말했다.“그 시골은 작고 또 가난했고, 마을 사람들도 무척 어리석었습니다. 아가씨는 어렸을 때 잘 지내지 못했는데, 듣자니 줄곧 쇠사슬에 묶인 채 저녁에는 밖에 있는 개집에서 자고, 돼지와 같이 밥을 먹었고, 심지어 어린 나이에 농사일까지 맡았다고 합니다. 자칫하면 매를 맞아야 했고요.”도윤의 손등에는 핏줄이 나타났다. ‘예린이가 유괴를 당했을 때, 겨우 몇 살인데!’‘이씨 집안의 도도한 큰 아가씨가 어떻게 그런 대접받을 수 있단 말인가?’“그 집안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어?”“죽었습니다. 몇 년 전에 큰 불에 타 죽었는데, 아가씨는 그때
주원은 지아가 이미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죄책감이 들어 있었다.“누나.”“그래, 오랜만이네.” 지아는 먼저 인사를 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렸다.주원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는데, 마치 잘못을 한 아이가 자신의 손끝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누나도 알다시피 내가 바로 레오예요.”“응.”“미안해요,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닌데, 난…….”“내가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때 내가 납치당했을 때, 네가 납치범에게 전화를 걸었지? 그래서 넌 쉽게 나를 찾을 수 있었고, 또 방법을 강구해서 나를 데리고 떠날 수 있었던 거야.”주원은 자신이 모든 것을 숨긴 데다 또 지아를 해친 사람들과 함께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누나, 모두 내 잘못이에요. 날 탓하든 미워하든 상관없지만, 나는 누나를 해치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알아.”만약 주원이 지아를 죽이고 싶었다면, 그녀는 오늘까지 살 수 없었을 것이다.다만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 지아는 남에게 속거나 배신을 당했기에, 이제 그 누구도 믿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진심으로 아끼던 동생까지 줄곧 자신을 속이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안심해요, 아저씨는 무사하니까요. 내가 이번에 아저씨에게 수술을 해서, 꼭 무사히 깨어날 수 있도록 할게요.”“고마워.”자신과 거리를 두는 지아를 보며 주원은 입을 벌렸지만 결국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이것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주원은 지아가 차라리 자신을 욕하고 때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누나, 미안해요.”지아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주원을 쳐다본 뒤 냉정하게 말했다.“정말 나에게 미안하다면, 이예린에 대해 말해줘.”주원은 즉시 고개를 들어 지아를 바라보았는데, 마치 그녀가 이 일을 안 것에 대해 놀란 것 같았다.“놀랄 필요 없어.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 만약 네가 정말 나를 누나로 여기고 또 우리 어렸을 때의 우정을 기억한다면
지아는 이미 주원과 함께 섬에 가서 소계훈을 찾으려 했는데, 떠나기 전에 그녀는 중요한 일이 하나 있었다.차는 해변에서 멈추었고, 주원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누나, 뭐하려는 거예요?”“별거 아니야, 그냥 한 사람과 결판을 봐야 해서.”말한 다음 지아는 차 문을 닫았다.그녀의 강인한 뒷모습을 보며 주원은 불안하기 시작했다. 다시 만난 지아는 변화가 너무 컸고 전보다 무서울 정도로 냉정해졌다.‘설마 이예린을 찾으러 가려는 건 아니겠지? 안 돼, 이예린은 악마야, 누나 혼자 어떻게 그녀를 당해낼 수 있겠어?’“누나, 바보 같은 짓 하지 마요!” 주원은 유리창을 두드렸지만, 지아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지아는 이번이 이예린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오늘 이후, 그녀는 A시를 철저히 떠날 것이다. 앞으로 암으로 죽든 다른 일로 죽든, 지아는 더 이상 이도윤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이때 도윤은 방금 중요한 회의를 마쳤는데, 그는 피곤함에 미간을 비비며 물었다.“몇 시야?”“곧 5시가 되어 가는데, 대표님 오늘 집에 돌아가서 식사를 하실 겁니까?”‘집에 돌아간다고?’도윤은 요즘 지아를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어 그녀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야.”바로 이때, 진봉의 전화가 들어왔고 도윤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지?”“대표님, 사모님 오늘 백화점에 가셨는데,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설마 또 이 기회를 타서 도망치시려는 건 아니겠죠?”‘도망을 쳐? 그녀는 갈 곳이 어딨다고?’“잘 찾아봐. 그녀는 지금 떠날 리가 없어.”지아는 지금 의지할 곳이 없는데다 또 A시에 남아 진실을 조사해야 했으니 그녀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예.”도윤은 지아를 찾으러 가려고 일어섰지만 또 경호원의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작은 아가씨는 고성을 떠났습니다.”“따라가, 금방 갈게.”요 며칠 도윤은 줄곧 이예린을 접근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 기회가 나타났다.그는 진봉에게 연락했다
이예린은 지아가 자신의 신분을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스터 Y를 통해 자신을 불러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즉시 안색이 변했다.“당신, 미스터 Y와 무슨 사이지?”이예린은 분명히 화가 났고, 마치 지아가 그녀의 중요한 사람을 빼앗은 것 같았다.지아는 소시후에 대한 이예린의 감정을 대충 알아맞힐 수 있었기에 담담하게 입을 웃었다.“네가 맞혀봐.”무척 애매한 대답에 이예린은 더욱 질투를 느꼈다.“내가 당신이 남자를 꼬시기 좋아하는 천한 년일 줄 알았어. 당신은 우리 오빠와 어울릴 자격이 없어. 그리고 당신 마침 잘 왔네, 내가 직접 찾아갈 필요가 없는 거 같군.”이예린은 곧 일어나서 지아에게 손을 대려고 했지만, 일어나기도 전에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하더니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물에 약 탄 거야?”지아는 천천히 이예린을 향해 걸어갔다.“이거 다 당신에게서 배운 건데. 이예린, 우리 사이의 일도 이제 끝내야겠지?”지아는 경호원더러 이예린을 데려가라고 했다. 그녀는 이날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수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히던 날, 지아는 마치 숨을 쉴 수 없는 물고기와 같았다. 그녀는 자신을 뒤덮고 있는 큰 그물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지금 그녀는 마침내 이 주범을 잡았다.이예린은 해변에 걸려 있었는데, 이때 석양이 서쪽으로 지더니 차디찬 해풍이 정면으로 불어왔다. 이예린의 몸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고, 그녀의 체질은 원래 약했기에 바람조차 이겨낼 수 없었다.지아는 손에 비수를 들고 그녀의 옆에 서 있었는데, 다음 순간, 칼로 이예린의 몸을 그었다.피가 순식간에 뿜어져 나오자, 지아의 눈에는 동정심 대신 오직 무관심과 싸늘함 뿐이었다.“이예린, 날 이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난 지금 당신을 어떻게 괴롭혀도 마음이 약해지지가 않거든.”이예린은 아팠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오히려 얼굴에 웃음이 넘쳐났다.“그래? 그날 밤 난 당신에게 그 약을 주사했어야 했는데.”이 여자는 사람을
그 목소리는 마치 찬물 한 대야처럼 지아의 몸을 향해 뿌렸고,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지아는 도윤을 바라보았는데 하얗고 작은 얼굴에는 아직도 이예린의 피가 묻어 있었다.도윤은 이런 지아를 종래로 본 적이 없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지아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지아는 도윤의 눈을 마주했지만 조금도 피하지 않고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이도윤, 너 마침 잘 왔네.”“지아야, 너 진작에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야?”“왜? 놀라워? 네가 날 어떻게 위로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난 이미 이예린에게 손을 대기로 결정했어. 이도윤, 너 이 일을 잘 처리하겠다며? 지금 난 이미 주모자를 잡았어.”지아는 차갑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죽일래, 아니면 내가 직접 죽일까?”이예린의 몸에는 다섯 갈래의 상처가 있었는데 피는 흰 치마를 따라 한 방울씩 해면에 떨어졌고, 그녀는 아주 취약해 보였다.“지아야, 진정해. 우리 말로 하자.”“진정하라고?”지아는 싸늘하게 웃었다.“네가 진정하라고 하면, 난 진정해야 하는 거야? 이 2년 동안 겪은 모든 고통을 잊어버려야 하는 거냐고? 당신들 덕분에 우리 집안은 파산하고, 우리 아빠는 식물인간이 되었어. 그리고 나는 몇 번이고 그녀의 손에 죽을 뻔했는데, 네가 그녀를 안쓰러워할 때 내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는 거야?”“지아야, 그 일이 모두 예린의 잘못이라는 거, 나도 알아. 그녀를 미워하고 날 미워하는 것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내가 내 목숨으로 그녀의 목숨을 바꾸는 건 어때? 그녀를 다치게 하지 마. 나에게 여동생은 그녀 하나밖에 없거든.”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반복했다.“여동생이 하나밖에 없다고? 허, 나는 처음부터 널 믿지 말았어야 했어. 이도윤, 나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고 그녀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희들이 나에게 빚진 거, 천배 만배로 돌려줘! 오늘 이예린은 반드시 죽어야 해.”이때 진환과 진봉 등 사람도 쫓아왔다.“사모님, 제발 진정 좀 하세요.”“그래요, 우리는 앉아서 얘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