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채원은 마음속으로 엄청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욱 좋은 방법이 없었기에 하는 수없이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지아는 자초지종을 들은 다음 안색이 돌변했다.“그러니까, 넌 우리 엄마와 골수가 일치하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근데 왜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일을 숨긴 거야? 더구나 우리 엄마의 상태가 악화되는 걸 그냥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왜 이제야 이 사실을 밝히려는 거야? 너 정말 양심이 없구나? 내 엄마를 빼앗아 가서 십년 넘게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왜 또 무슨 불만이 있어? 이게 정당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거야?”지아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고 그야말로 속이 터질 것 같았다.‘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고 악독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그 십 년 동안 개 한마리를 키웠어도 너보단 훨씬 나았겠지!”백채원은 흐느꼈다.“나도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아. 하지만 지금은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야. 네가 진심으로 나를 구하고 싶다면, 얼른 방법을 생각해서 날 데리고 나가. 나 가능한 한 빨리 엄마한테 골수를 기증해야 한단 말이야. 더 늦으면 큰일 날 거라고.”지아는 백채원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심호흡을 하면서 진정을 되찾으려고 했다.“안심해, 널 꼭 구할 테니까. 하지만 이건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엄마를 위해서야. 그리고 지금은 아직 안 돼. 난 여기에 몰래 잠입해 들어왔거든.”백채원은 계속 말했다.“그럼 빨리 우리 아빠 좀 구해줘. 우리 엄마, 아니, 그 여자는 이미 미쳤어. 그녀는 우리 아빠를 후회하게끔 만들기 위해 십여 년이나 기다렸다고!”“그때 우리 아빠는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그녀와 결혼했는데, 기억을 회복한 후, 마음속에는 여전히 우리 엄마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그 여자는 한을 품고 날 병원에서 훔쳐가 자신의 딸로 키우며 어릴 때부터 나에게 우리 진짜 엄마가 우리 집안을 망친 주모자라고 세뇌했어. 그래서 그녀가 ‘죽은 후’, 난 여전히 원한을 내
지아는 의문을 가지고 재빨리 떠났지만, 소시후는 갑자기 그녀의 입을 막더니 그녀를 끌고 한쪽으로 숨었다.소시후의 몸에는 은은한 훈향이 났기에 지아는 그라는 것을 알고 크게 놀라지 않았고 그저 그가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다.소시후는 지아에게 아래를 바라보라는 눈빛을 주었다.‘밑에 뭐가 있는 거지?’그들은 2층 테라스에 있었고, 1층의 잔디밭에는 어느새 두 사람이 서 있었다.설령 그중 한 사람이 자신을 등지고 있다 하더라도, 지아는 한눈에 상대방을 알아볼 수 있었다.그 사람은 바로 이도윤이었다.그리고 그는 몸매가 가녀리고 하얀 치마를 입은 여자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그것은 방금 그들과 만난 이예린이었다.‘이도윤의 목적은 독충을 일망타진하는 것인데, 설마 그는 진작에 그 사람이 바로 이예린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단 말인가?’이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자 지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러나 지아는 또 고개를 저었다. ‘이도윤은 그래도 날 사랑하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이런 일로 날 속이지 않을 거야.’‘이건 그냥 우연일 거야. 그도 최근에 무언가를 눈치챈 거야.’그러나 다음 순간, 지아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이거 놔!” 이예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해왔다.“예린아, 너 이예린 맞잖아.” 도윤은 씁쓸하게 말했다.“부인할 필요 없어. 만약 날 관심하지 않았다면, 넌 레오가 날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을 테니까. 난 이미 조율과 다시 유전자 검사를 했어.”이예린은 도윤을 등지고 있었고, 가면으로 가린 얼굴은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왜 굳이 날 찾으러 온 건데? 그냥 여동생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라고.”이 말은 즉 자신이 바로 이예린이란 것을 묵인한 것과 다름없었다.위층의 지아는 실망을 느끼며 온몸이 차가워졌다.‘이도윤은 심지어 나보다 더 일찍 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조율의 무덤을 건드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도윤이었어.’‘근데 웃기게도 그는 줄곧 날 속이고 있었다니. 심지어 내가 진실을 조사하는
지아는 계속 듣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떠났다.그곳에 남아있는 그 자체가 바로 그녀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동안 이도윤에 대한 나의 사랑, 정말 보잘것없군.’비록 이예린은 소씨 집안과 지아의 인생을 망쳤지만, 도윤은 여전히 그녀를 자신의 착한 여동생이라 여기고 있었다.지아는 그날 밤 이예린이 자신에게 독약 주사를 놓아주려고 한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하마터면 이 세상을 떠날 뻔했다.그래서 아래층에 있는 도윤이 숨 쉬는 것조차 지아는 징그럽다고 느꼈다.‘전에 내 앞에서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 대신 끝까지 조사할 거라고 말했지만, 결국 증거를 없애버려 내가 영원히 진실을 알 수 없게 하려고 작정했던 거야.’‘이게 바로 이도윤의 진심이란 말인가?’지아는 떠날 때 테라스에서 돌을 하나 주웠는데, 한순간, 그녀는 정말 도윤의 머리에 그 돌을 던지고 싶었다.지아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떠났다.이예린의 목소리는 전보다 많이 굵어졌고, 이번에 그녀는 위장하지 않았다.“네 여동생은 이미 죽었어. 지금 네 앞에 있는 난 단지 시체일 뿐이야.”이예린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감정도 없었다. 도윤은 어릴 때의 이예린이 무척 귀엽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분명히 꽃 같은 나이의 소녀인데, 왜 죽어가는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일까?’“예린아, 너 내 동생 맞잖아. 오빠한테 말해봐. 그동안 왜 집에 돌아오지 않은 거지? 그리고 분명히 지아가 네 새언니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왜 또 그런 일을 한 거야?”이예린은 그에게서 벗어났다.“다 내가 한 거 맞으니까 그녀를 위해 복수하고 싶다면 그냥 날 죽여. 어차피 나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까.”말을 마치자 이예린은 목을 꼿꼿이 치켜세웠고 두려운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도윤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넌 지아와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왜 소씨 집안을 망치려고 한 거지?”요 며칠 도윤은 머릿속으로 이예린과 다시 만나는 장면을 수도 없이 상상해왔지만 유독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다.이예린은 심지
백정일은 아직 여기에 있었기에, 이 결정적인 순간에 도윤은 백정일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이예린을 자극하지 않았다.이예린을 만났을 때의 모든 복잡한 감정은 결국 실망으로 변했다. 도윤은 어릴 때 분명히 그렇게 귀여운 여자애가 어떻게 오늘처럼 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너 성형했어?”심지어 이예린보다 조율이 더 이씨 집안사람 같았다. 도윤은 지금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응.” 이예린은 오히려 솔직하게 말했다. 도윤이 묻는 한, 그녀는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왜?”그녀는 도윤의 시선을 피했다.“이제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여긴 안전한 곳이 아니니까 그만 떠나고, 날 본 적 없는 걸로 해”하지만 도윤은 이예린의 앞을 가로막았다.“넌 집에 돌아가려 하지도, 나란 오빠를 인정하려 하지도 않고 심지어 지아에게 상처까지 줬어. 그러니 적어도 설명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무엇 때문에 억울한 사람들을 죽인 거지? 넌 어렸을 때 기르던 새끼 고양이가 죽어도 슬퍼서 며칠 동안 밥을 먹지 않았잖아. 근데 어떻게 지금 이런 모습으로 된 거지?”도윤은 그때 이예린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후에 지아가 줄곧 기르던 하루조차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그 슬픈 일을 떠올릴까 봐.이예린은 가볍게 웃었다.“내가 정말 고양이가 죽었기 때문에 슬퍼한 거라 생각한 거야?”그녀는 턱을 치켜들며 입가에 도윤이 본 적이 없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내가 새끼 고양이에게 수면제를 먹였거든. 매일 밤 울부짖어서 얼마나 짜증이 나던지. 근데 정말 아깝군. 겨우 약을 3일 먹였을 뿐인데 바로 죽었다니.”지금의 이예린은 그 익숙한 눈동자 외에 완전히 낯선 사람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도윤의 곁에 몇 년 동안이나 있었지만, 그는 알아보지 못했다.“왜 죽인 거야? 싫으면 그냥 남에게 주면 되잖아.”“그럼 누가 나랑 놀아주는데? 오빠는 그때 무척 바쁘지, 엄마는 또 가끔 정신병이 발작하지, 아빠는 일 년 내내 얼굴조차
이예린은 도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응, 그런 괴로운 나날을 참을 만큼 참았으니까. 그래서 도망갔어. 바깥 세상을 보러 가고 싶었다고. 다만 그때의 나는 여전히 순진했고, 이 세상에 엄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모두 착하다고 생각했어…….”여기까지 말하자 그녀는 멈추더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도윤은 계속 물었다.“설사 어머니가 널 괴롭혔다 하더라도, 지아는 무슨 죄가 있는 거지? 그녀를 그렇게 괴롭힌 이유가 대체 뭐야?”“지아, 지아, 그놈의 지아.” 이 이름을 듣자 이예린의 눈빛은 갑자기 으스스해졌다.그녀는 흥분해지더니 심지어 도윤의 옷깃까지 잡아당겼다.“내가 오빠 찾으러 돌아간 적이 없을 거 같아? 그때 오빠 눈에는 나란 여동생이 있긴 한 거냐고? 오빠 마음속에는 그녀밖에 없었지. 난 오빠가 그녀에게 웃고, 그녀를 아끼는 모습을 보았어. 마치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녀는 얼마나 행복하게 웃던지…….”억지로 참았던 눈물은 이 순간 뺨을 따라 떨어졌고, 이예린은 소리를 질렀다.“오빠는 내가 그동안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 알아? 오빠를 다시 볼 수 있기 위해 내가 무엇을 겪었는지 아냐고?”따뜻한 눈물은 도윤의 손등에 떨어졌다.“내가 그 어두운 굴레에서 도망쳐 나와 목숨을 걸고 오빠를 찾으러 갈 때, 오빠는 오히려 그 소지아만 사랑했어. 분명히 내가 오빠의 가족인데 말이야. 오직 나만이 오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이예린은 편집증적인 모습을 드러냈고, 도윤은 그 모습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자학적인 어머니에게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발병할 때마다 이예린과 같은 눈빛을 보였다.정신병은 유전될 수 있었고, 이예린은 또 어릴 때부터 줄곧 어머니의 학대 속에서 자랐다. ‘설마 그녀에게도 이런 증상이 생긴 건가?’“예린아, 넌 내 여동생이자 내 가족이고, 지아는 내 아내이자 네 새언니이니 그녀도 너의 가족이지. 넌 그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해야 해.”“사랑? 내가
뽀얀 피부와 대조를 이룬 그 상처는 무척 끔찍해 보였다. 도윤은 즉시 이예린의 소매를 위로 걷어 올렸다. 팔 전체에 상처가 있는 것을 보자 그는 또 그녀의 다른 손을 살폈다.도윤을 놀라게 한 그것은 그 한두 개의 흉터뿐만 아니었는데, 이예린이 일부 화상까지 입었단 것이었다. 피부에 가득한 그 구불구불한 흉터는 보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야?”이예린은 맹렬하게 도윤에게서 벗어났고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와 상관없어. 날 죽이지 않을 거면 난 이제 떠날 거야. 앞으로 내가 죽든 살든, 오빠와 상관없는 일이라고.”말을 마치자 이예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고, 도윤은 막고 싶었지만 막지 못했다.그는 지금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요 몇 년 동안 예린은 밖에서 도대체 무엇을 겪은 거야?’……방안의 지아는 어두운 얼굴로 말을 하지 않았고, 그저 물끄러미 자신의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소시후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이제 볼일 다 봤겠지? 이곳은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내가 바래다 줄게.”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일인데?”“대표님, 날 도와 백채원을 구해 주실 수 있나요?”소시후는 고개를 저었다.“지아 씨는 어머니를 구하고 싶은 거지? 백채원의 골수가 지아 씨 어머니와 일치하더라도 그녀는 병원의 요구대로 정상적인 상태에서 기증해야만 하거든. 지금의 백채원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으니 신체기능은 일반인과 비교할 수가 없지. 이런 상태에서 다시 골수를 기증하는 것은 그녀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야. 지아 씨도 의대 나왔으니 나보다 더 잘 알 텐데.”“만약 지아 씨 어머니에게 남은 시간이 아직 좀 있다면, 백채원이 회복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만, 지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장 좋은 방법은 백채원의 목숨으로 지아 씨 어머니의 목숨을 살리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아 씨 어머니는 반드시 나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지
소시후는 씁쓸하게 웃었다.“전 세계에 인구가 그렇게 많았으니 신장을 하나 찾는 것은 확실히 어렵지 않지만, 어려운 것은 합법적인 신장을 찾는 거야.”이 말을 듣자 지아는 바로 깨달았다. 천웅과 독충 두 조직의 의견이 점차 갈라진 것도 협력 이념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었다.자발적으로 장기를 기부하는 사람들은 결국 소수였다. 대부분은 암시장의 사람들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멀쩡한 사람을 잡아와서 장기를 팔았던 것이다.소시후는 품성이 훌륭했기에 당연히 그런 신장을 원하지 않았다.“대표님, 떠나시기 전에 나와 신장이 일치하는지 검사해보는 건 어때요?”“지아 씨, 그게 무슨 말이야?”지아는 가볍게 웃었다.“대표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나도 대표님과 아주 특별히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우리의 신장이 일치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만약 정말 일치하다면, 난 대표님과 거래를 하고 싶은데.”소시후는 눈살을 찌푸렸다.“지아 씨,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직접 나에게 말해봐.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반드시 도울 테니까.”“신장이 일치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요. 괜찮아요. 사람마다 신장이 두 개 있으니 하나 정도 없어도 아무런 영향이 없잖아요?”하물며 지아는 이미 불치병에 걸렸으니 죽기 전에 최대한 남을 돕고 싶었다.세상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저 얻어먹을 수 있는 그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소시후는 앞에 있는 이 여자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 겨우 21살밖에 안되는 나이였지만, 지아의 눈빛은 희망이 없어 보였고,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아팠다.그 순간, 소시후는 심지어 지아가 자신의 친여동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는 그녀를 제대로 관심하고 보호할 수 있었다.“대표님, 그래도 될까요?” 지아는 재삼 부탁했다.소시후는 어쩔 수 없었다.“지아 씨가 원한다면.”어차피 소시후는 요 몇 년 동안 줄곧 적합한 신장을 찾지 못했기에, 그는 지아의 신장이 자신과 일치할 거라 믿지 않았다.그는 앞에 있는 소녀가 억지
도윤은 지아의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만약 병원에 가는 것뿐이었다면, 지아는 굳이 한밤중에 떠날 필요가 있었을까?그러나 이예린의 일은 그로 하여금 지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했다. 도윤은 이미 전처럼 지아를 거칠게 대할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지아 곁으로 걸어간 다음 부드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한밤중에 집에서 나온 거야? 경호원까지 따돌리고. 그러다 위험에 부딪히면 어쩌려고? 내가 말했잖아, 밖은 아직 위험하니까 어딜 가던 경호원 데리고 있으라고.”지아가 소시후의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니 도윤도 지아의 불만을 불러일으킬까 봐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다.“잠이 안 와서 나왔어.”도윤은 자신의 손등을 만지며 지아를 떠보았다.“소시후의 차에 올랐다고 들었는데, 그와 친한 사이야?”“아니. 단지 우리의 모두 성이 소씨이기 때문이야. 게다가 난 그를 구한 적이 있어서. 마침 그도 병원에 가는 길이라 날 태워줬을 뿐이야.”지아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간단하게 말했다.“너 어젯밤에 독충의 기지에 갔다며? 뭐 좀 알아냈어?”지아의 눈빛은 도윤의 그 잘생긴 얼굴에 떨어졌는데, 이는 그녀가 도윤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도윤은 대답을 하려 했지만, 머릿속에는 이예린의 그 상처투성이로 된 팔이 떠올랐다.그는 아직 이 일을 처리할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적어도 도윤은 지아를 다치게 하지 않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그러나 도윤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렸다. 그가 지아에게 모든 사실을 숨기기로 결정했을 때, 이것이 바로 그녀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큰 상처란 것을.“한 고성에 찾아갔는데, 그곳은 현재 독충의 비밀 기지야.”지아는 도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의 표정을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그래? 뭘 발견했는데?”“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몰래 찾아갔는데, 확실히 아주 큰 정보를 얻었어. 독충으로부터 많은 비밀 연구 개발 자료를 복사했거든. 이미 기술부에 넘겨 처리하라고 했어.”“자료 말고, 다른 사람 못 봤어?”도윤은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