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린은 미스터 Y가 자신의 죄를 물으려고 찾아온 줄 알았지만, 사실상 소시후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냥 그녀를 돌려보냈다.백채원도 이 성에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안 두 사람은 떠나지 않았고, 오정인의 안내에 스위트룸으로 들어갔다.소시후는 방에 도청 설비가 전혀 없다는 것을 검사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이제 마음대로 물어봐도 돼.”“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거예요?”“응, 내가 그녀를 구해줬거든. 다만 그때의 그녀는 많이 불쌍했지. 몸이 대부분 화상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절반 이상 화상을 입었기 때문에 처음에 나도 지아 씨가 찾으려는 사람이 그녀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했어.”지아는 아연실색했다.“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좀 이상하더라니.”“그 아이는 화상을 입은 것 외에 몸에 많은 상처가 있었어. 내가 그녀를 주웠을 때, 그녀는 겨우 숨이 붙어있는 상태였고 뼈만 남을 정도로 말랐어. 온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는데, 반년 정도 휴양한 후에야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고.”그때를 생각하니 소시후는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반역자를 따라 천웅을 떠났고, 나도 더 이상 이 아이를 본 적이 없었어. 말하자면 나와 그녀도 몇 번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지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대표님은…….”“이미 짐작했겠지? 그럼 나도 이제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천웅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야.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처음에 나의 초심은 더 많은 사람을 돕는 것이었어. 그러나 일이 뜻밖에도 오늘처럼 될 줄이야. 비록 독충은 이미 스스로 다른 조직을 세웠지만, 그녀들도 감히 천웅과 정면으로 맞설 엄두가 없어. 내 체면을 봐서라도 말이야.”지아는 그제야 상황을 똑똑히 파악했다. ‘내가 무심결에 구한 사람이 뜻밖에도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니.’“이번엔 정말 고마워요.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 먼저 쉬세요. 대표님 휴식하는 거 방해하지 않을게요.”“여기에 남아서 백채원을 찾으
백채원은 마음속으로 엄청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욱 좋은 방법이 없었기에 하는 수없이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지아는 자초지종을 들은 다음 안색이 돌변했다.“그러니까, 넌 우리 엄마와 골수가 일치하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근데 왜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일을 숨긴 거야? 더구나 우리 엄마의 상태가 악화되는 걸 그냥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왜 이제야 이 사실을 밝히려는 거야? 너 정말 양심이 없구나? 내 엄마를 빼앗아 가서 십년 넘게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왜 또 무슨 불만이 있어? 이게 정당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거야?”지아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고 그야말로 속이 터질 것 같았다.‘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고 악독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그 십 년 동안 개 한마리를 키웠어도 너보단 훨씬 나았겠지!”백채원은 흐느꼈다.“나도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아. 하지만 지금은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야. 네가 진심으로 나를 구하고 싶다면, 얼른 방법을 생각해서 날 데리고 나가. 나 가능한 한 빨리 엄마한테 골수를 기증해야 한단 말이야. 더 늦으면 큰일 날 거라고.”지아는 백채원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심호흡을 하면서 진정을 되찾으려고 했다.“안심해, 널 꼭 구할 테니까. 하지만 이건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엄마를 위해서야. 그리고 지금은 아직 안 돼. 난 여기에 몰래 잠입해 들어왔거든.”백채원은 계속 말했다.“그럼 빨리 우리 아빠 좀 구해줘. 우리 엄마, 아니, 그 여자는 이미 미쳤어. 그녀는 우리 아빠를 후회하게끔 만들기 위해 십여 년이나 기다렸다고!”“그때 우리 아빠는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그녀와 결혼했는데, 기억을 회복한 후, 마음속에는 여전히 우리 엄마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그 여자는 한을 품고 날 병원에서 훔쳐가 자신의 딸로 키우며 어릴 때부터 나에게 우리 진짜 엄마가 우리 집안을 망친 주모자라고 세뇌했어. 그래서 그녀가 ‘죽은 후’, 난 여전히 원한을 내
지아는 의문을 가지고 재빨리 떠났지만, 소시후는 갑자기 그녀의 입을 막더니 그녀를 끌고 한쪽으로 숨었다.소시후의 몸에는 은은한 훈향이 났기에 지아는 그라는 것을 알고 크게 놀라지 않았고 그저 그가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다.소시후는 지아에게 아래를 바라보라는 눈빛을 주었다.‘밑에 뭐가 있는 거지?’그들은 2층 테라스에 있었고, 1층의 잔디밭에는 어느새 두 사람이 서 있었다.설령 그중 한 사람이 자신을 등지고 있다 하더라도, 지아는 한눈에 상대방을 알아볼 수 있었다.그 사람은 바로 이도윤이었다.그리고 그는 몸매가 가녀리고 하얀 치마를 입은 여자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그것은 방금 그들과 만난 이예린이었다.‘이도윤의 목적은 독충을 일망타진하는 것인데, 설마 그는 진작에 그 사람이 바로 이예린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단 말인가?’이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자 지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러나 지아는 또 고개를 저었다. ‘이도윤은 그래도 날 사랑하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이런 일로 날 속이지 않을 거야.’‘이건 그냥 우연일 거야. 그도 최근에 무언가를 눈치챈 거야.’그러나 다음 순간, 지아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이거 놔!” 이예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해왔다.“예린아, 너 이예린 맞잖아.” 도윤은 씁쓸하게 말했다.“부인할 필요 없어. 만약 날 관심하지 않았다면, 넌 레오가 날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을 테니까. 난 이미 조율과 다시 유전자 검사를 했어.”이예린은 도윤을 등지고 있었고, 가면으로 가린 얼굴은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왜 굳이 날 찾으러 온 건데? 그냥 여동생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라고.”이 말은 즉 자신이 바로 이예린이란 것을 묵인한 것과 다름없었다.위층의 지아는 실망을 느끼며 온몸이 차가워졌다.‘이도윤은 심지어 나보다 더 일찍 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조율의 무덤을 건드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도윤이었어.’‘근데 웃기게도 그는 줄곧 날 속이고 있었다니. 심지어 내가 진실을 조사하는
지아는 계속 듣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떠났다.그곳에 남아있는 그 자체가 바로 그녀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동안 이도윤에 대한 나의 사랑, 정말 보잘것없군.’비록 이예린은 소씨 집안과 지아의 인생을 망쳤지만, 도윤은 여전히 그녀를 자신의 착한 여동생이라 여기고 있었다.지아는 그날 밤 이예린이 자신에게 독약 주사를 놓아주려고 한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하마터면 이 세상을 떠날 뻔했다.그래서 아래층에 있는 도윤이 숨 쉬는 것조차 지아는 징그럽다고 느꼈다.‘전에 내 앞에서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 대신 끝까지 조사할 거라고 말했지만, 결국 증거를 없애버려 내가 영원히 진실을 알 수 없게 하려고 작정했던 거야.’‘이게 바로 이도윤의 진심이란 말인가?’지아는 떠날 때 테라스에서 돌을 하나 주웠는데, 한순간, 그녀는 정말 도윤의 머리에 그 돌을 던지고 싶었다.지아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떠났다.이예린의 목소리는 전보다 많이 굵어졌고, 이번에 그녀는 위장하지 않았다.“네 여동생은 이미 죽었어. 지금 네 앞에 있는 난 단지 시체일 뿐이야.”이예린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감정도 없었다. 도윤은 어릴 때의 이예린이 무척 귀엽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분명히 꽃 같은 나이의 소녀인데, 왜 죽어가는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일까?’“예린아, 너 내 동생 맞잖아. 오빠한테 말해봐. 그동안 왜 집에 돌아오지 않은 거지? 그리고 분명히 지아가 네 새언니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왜 또 그런 일을 한 거야?”이예린은 그에게서 벗어났다.“다 내가 한 거 맞으니까 그녀를 위해 복수하고 싶다면 그냥 날 죽여. 어차피 나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까.”말을 마치자 이예린은 목을 꼿꼿이 치켜세웠고 두려운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도윤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넌 지아와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왜 소씨 집안을 망치려고 한 거지?”요 며칠 도윤은 머릿속으로 이예린과 다시 만나는 장면을 수도 없이 상상해왔지만 유독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다.이예린은 심지
백정일은 아직 여기에 있었기에, 이 결정적인 순간에 도윤은 백정일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이예린을 자극하지 않았다.이예린을 만났을 때의 모든 복잡한 감정은 결국 실망으로 변했다. 도윤은 어릴 때 분명히 그렇게 귀여운 여자애가 어떻게 오늘처럼 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너 성형했어?”심지어 이예린보다 조율이 더 이씨 집안사람 같았다. 도윤은 지금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응.” 이예린은 오히려 솔직하게 말했다. 도윤이 묻는 한, 그녀는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왜?”그녀는 도윤의 시선을 피했다.“이제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여긴 안전한 곳이 아니니까 그만 떠나고, 날 본 적 없는 걸로 해”하지만 도윤은 이예린의 앞을 가로막았다.“넌 집에 돌아가려 하지도, 나란 오빠를 인정하려 하지도 않고 심지어 지아에게 상처까지 줬어. 그러니 적어도 설명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무엇 때문에 억울한 사람들을 죽인 거지? 넌 어렸을 때 기르던 새끼 고양이가 죽어도 슬퍼서 며칠 동안 밥을 먹지 않았잖아. 근데 어떻게 지금 이런 모습으로 된 거지?”도윤은 그때 이예린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후에 지아가 줄곧 기르던 하루조차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그 슬픈 일을 떠올릴까 봐.이예린은 가볍게 웃었다.“내가 정말 고양이가 죽었기 때문에 슬퍼한 거라 생각한 거야?”그녀는 턱을 치켜들며 입가에 도윤이 본 적이 없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내가 새끼 고양이에게 수면제를 먹였거든. 매일 밤 울부짖어서 얼마나 짜증이 나던지. 근데 정말 아깝군. 겨우 약을 3일 먹였을 뿐인데 바로 죽었다니.”지금의 이예린은 그 익숙한 눈동자 외에 완전히 낯선 사람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도윤의 곁에 몇 년 동안이나 있었지만, 그는 알아보지 못했다.“왜 죽인 거야? 싫으면 그냥 남에게 주면 되잖아.”“그럼 누가 나랑 놀아주는데? 오빠는 그때 무척 바쁘지, 엄마는 또 가끔 정신병이 발작하지, 아빠는 일 년 내내 얼굴조차
이예린은 도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응, 그런 괴로운 나날을 참을 만큼 참았으니까. 그래서 도망갔어. 바깥 세상을 보러 가고 싶었다고. 다만 그때의 나는 여전히 순진했고, 이 세상에 엄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모두 착하다고 생각했어…….”여기까지 말하자 그녀는 멈추더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도윤은 계속 물었다.“설사 어머니가 널 괴롭혔다 하더라도, 지아는 무슨 죄가 있는 거지? 그녀를 그렇게 괴롭힌 이유가 대체 뭐야?”“지아, 지아, 그놈의 지아.” 이 이름을 듣자 이예린의 눈빛은 갑자기 으스스해졌다.그녀는 흥분해지더니 심지어 도윤의 옷깃까지 잡아당겼다.“내가 오빠 찾으러 돌아간 적이 없을 거 같아? 그때 오빠 눈에는 나란 여동생이 있긴 한 거냐고? 오빠 마음속에는 그녀밖에 없었지. 난 오빠가 그녀에게 웃고, 그녀를 아끼는 모습을 보았어. 마치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녀는 얼마나 행복하게 웃던지…….”억지로 참았던 눈물은 이 순간 뺨을 따라 떨어졌고, 이예린은 소리를 질렀다.“오빠는 내가 그동안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 알아? 오빠를 다시 볼 수 있기 위해 내가 무엇을 겪었는지 아냐고?”따뜻한 눈물은 도윤의 손등에 떨어졌다.“내가 그 어두운 굴레에서 도망쳐 나와 목숨을 걸고 오빠를 찾으러 갈 때, 오빠는 오히려 그 소지아만 사랑했어. 분명히 내가 오빠의 가족인데 말이야. 오직 나만이 오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이예린은 편집증적인 모습을 드러냈고, 도윤은 그 모습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자학적인 어머니에게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발병할 때마다 이예린과 같은 눈빛을 보였다.정신병은 유전될 수 있었고, 이예린은 또 어릴 때부터 줄곧 어머니의 학대 속에서 자랐다. ‘설마 그녀에게도 이런 증상이 생긴 건가?’“예린아, 넌 내 여동생이자 내 가족이고, 지아는 내 아내이자 네 새언니이니 그녀도 너의 가족이지. 넌 그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해야 해.”“사랑? 내가
뽀얀 피부와 대조를 이룬 그 상처는 무척 끔찍해 보였다. 도윤은 즉시 이예린의 소매를 위로 걷어 올렸다. 팔 전체에 상처가 있는 것을 보자 그는 또 그녀의 다른 손을 살폈다.도윤을 놀라게 한 그것은 그 한두 개의 흉터뿐만 아니었는데, 이예린이 일부 화상까지 입었단 것이었다. 피부에 가득한 그 구불구불한 흉터는 보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야?”이예린은 맹렬하게 도윤에게서 벗어났고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와 상관없어. 날 죽이지 않을 거면 난 이제 떠날 거야. 앞으로 내가 죽든 살든, 오빠와 상관없는 일이라고.”말을 마치자 이예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고, 도윤은 막고 싶었지만 막지 못했다.그는 지금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요 몇 년 동안 예린은 밖에서 도대체 무엇을 겪은 거야?’……방안의 지아는 어두운 얼굴로 말을 하지 않았고, 그저 물끄러미 자신의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소시후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이제 볼일 다 봤겠지? 이곳은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내가 바래다 줄게.”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일인데?”“대표님, 날 도와 백채원을 구해 주실 수 있나요?”소시후는 고개를 저었다.“지아 씨는 어머니를 구하고 싶은 거지? 백채원의 골수가 지아 씨 어머니와 일치하더라도 그녀는 병원의 요구대로 정상적인 상태에서 기증해야만 하거든. 지금의 백채원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으니 신체기능은 일반인과 비교할 수가 없지. 이런 상태에서 다시 골수를 기증하는 것은 그녀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야. 지아 씨도 의대 나왔으니 나보다 더 잘 알 텐데.”“만약 지아 씨 어머니에게 남은 시간이 아직 좀 있다면, 백채원이 회복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만, 지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장 좋은 방법은 백채원의 목숨으로 지아 씨 어머니의 목숨을 살리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아 씨 어머니는 반드시 나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지
소시후는 씁쓸하게 웃었다.“전 세계에 인구가 그렇게 많았으니 신장을 하나 찾는 것은 확실히 어렵지 않지만, 어려운 것은 합법적인 신장을 찾는 거야.”이 말을 듣자 지아는 바로 깨달았다. 천웅과 독충 두 조직의 의견이 점차 갈라진 것도 협력 이념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었다.자발적으로 장기를 기부하는 사람들은 결국 소수였다. 대부분은 암시장의 사람들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멀쩡한 사람을 잡아와서 장기를 팔았던 것이다.소시후는 품성이 훌륭했기에 당연히 그런 신장을 원하지 않았다.“대표님, 떠나시기 전에 나와 신장이 일치하는지 검사해보는 건 어때요?”“지아 씨, 그게 무슨 말이야?”지아는 가볍게 웃었다.“대표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나도 대표님과 아주 특별히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우리의 신장이 일치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만약 정말 일치하다면, 난 대표님과 거래를 하고 싶은데.”소시후는 눈살을 찌푸렸다.“지아 씨,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직접 나에게 말해봐.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반드시 도울 테니까.”“신장이 일치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요. 괜찮아요. 사람마다 신장이 두 개 있으니 하나 정도 없어도 아무런 영향이 없잖아요?”하물며 지아는 이미 불치병에 걸렸으니 죽기 전에 최대한 남을 돕고 싶었다.세상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저 얻어먹을 수 있는 그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소시후는 앞에 있는 이 여자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 겨우 21살밖에 안되는 나이였지만, 지아의 눈빛은 희망이 없어 보였고,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아팠다.그 순간, 소시후는 심지어 지아가 자신의 친여동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는 그녀를 제대로 관심하고 보호할 수 있었다.“대표님, 그래도 될까요?” 지아는 재삼 부탁했다.소시후는 어쩔 수 없었다.“지아 씨가 원한다면.”어차피 소시후는 요 몇 년 동안 줄곧 적합한 신장을 찾지 못했기에, 그는 지아의 신장이 자신과 일치할 거라 믿지 않았다.그는 앞에 있는 소녀가 억지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