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윤과 전림은 사촌 형제였기에, 두 사람은 생긴 게 약간 비슷했다.어릴 때부터 전림은 백채원을 좋아했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도윤이었고, 세 사람 사이의 감정은 확실히 복잡했다.후에 백채원의 생일에 도윤은 가지 않았지만 전림은 참석했다.그녀는 술을 마신 후 전림을 도윤으로 여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가졌다.그때 전림은 무척 기뻤고, 백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며 심지어 그녀와 결혼할 준비까지 했다.그는 전에 도윤의 앞에서 이런 생활을 끝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면 도윤은 그를 집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전림은 백채원과 아이에게 따뜻한 집을 주고 싶었다.그러나 신은 사람을 놀리는 것을 좋아했다. 마지막 임무에서 전림은 목숨을 잃었고, 죽기 전에 백채원을 도윤에게 맡겼다.사실 전림은 백채원이 처음부터 그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몰랐다. 그날 밤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 백채원은 아이를 지울 작정이었는데, 바로 이때 전림이 죽었던 것이다.도윤은 그녀 앞에 나타나 그것은 전림의 유일한 아이였기에 반드시 남겨야 한다고 간청했다.아이를 남기는 조건은 바로 도윤이 자신과 결혼하는 것이었다.처음에 백채원은 지금처럼 날뛰지 않았고 그녀는 무척 불안했다.그러나 백채원은 도윤이 정말 동의할 줄은 전혀 몰랐는데, 그는 그녀에게 좀 더 기다리라고 했다.그때 지아도 임신했기 때문에 도윤은 비록 지아를 냉담하게 대하기 시작했지만, 그녀가 임신했을 때 이혼으로 타격을 주고 싶지 않았다.이 아이는 도윤과 지아가 모두 무척 바란 아이였기에, 그 후 도윤은 그저 지아를 무시했고, 백채원에게만 신경을 썼다.도윤은 백채원이 원하는 것을 모두 주었고, 지아를 슬프게 해도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백채원은 욕심이 점점 커지더니 결국 지아를 건드리려 했다.도윤은 전림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번마다 방임했다.그 후 백채원은 모든 것을 편안하게 누리
병원.긴급치료를 거쳐 변진희는 마침내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전보다 더욱 불쌍하고 허약해 보였다.백정일은 링거를 맞지 않은 그녀의 손을 잡았고, 짧은 시간에 많이 야윈 여자를 보면서 마음은 더욱 아팠다.“진희야, 미안하다. 다 내가 아이를 잘 가르치지 못해서 그래.”백정일은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분명히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변진희도 이렇게 화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변진희는 힘없이 웃었다.“괜찮아, 나 지금 별일 없잖아. 채원이 탓하지 마. 그녀는 아직 어려서 그래.”“이미 두 아이의 엄마인데, 어리긴 뭐가 어려? 내 딸이 어떤 사람인지 난 잘 알고 있어. 그녀는 시종 그녀 어머니 일 때문에 당신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야.”변진희는 오히려 백정일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사실 나도 다 이해해. 그녀는 그렇게 어렸을 때 엄마를 잃었으니 나를 미워하는 것도 당연하지. 난 그녀를 원망하지 않아.”“가끔 나는 당신이 채원이를 좀 원망했으면 좋겠는데. 그럼 나도 마음이 좀 편해질 수 있거든. 앞으로 그녀더러 오라고 하지 않을게. 당신 제발 몸조심해. 골수는 내가 반드시 찾을 테니까.”변진희도 의사에게서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고, 그녀는 자신을 비웃었다.“난 이 일생동안 아무런 아쉬움도 없어. 당신은 나를 이렇게 잘 대해주었으니 나는 아주 행복해. 이제 죽어도…….”백정일은 얼른 그녀의 입을 막았다.“허튼소리, 지금 기술이 이렇게 발달한데, 당신을 구할 방법이 꼭 있을 거야.”“나는 단 한 가지 소원밖에 없어. 그 아이를 만나서 직접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응급치료를 받는 동안, 변진희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그중 대부분이 지아에 관한 것이었고, 거의 모두 그녀 어릴 적의 모습이었다.“내가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졌어.”백정일은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안심해. 내가 꼭 지아를 찾아줄게.”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도윤은 비로
이도윤이 대답하지 않자, 백정일은 계속 말했다.“골수를 기증하는 것은 신장 이식하는 것과 달리 기증자에게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않을 거야. 지아가 전에 납치당한 일에 대해 원망을 품고 있다는 거,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진희는 그래도 그녀의 엄마였으니 모녀 사이에 또 무슨 원수가 있겠는가. 그녀를 만나게 해줘. 내가 직접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아저씨, 저는 지아를 감금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핸드폰도 줄곧 통화할 수 있는 상태고요. 만약 그녀가 원한다면, 아저씨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겠죠?”도윤은 고개를 들어 연기를 내뿜었다.“그녀가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지난번 납치 사건에서 지아는 이미 심리적으로 아주 큰 상처를 받았으니 나는 그녀가 이런 일로 방해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아요.”두 사람의 대화는 줄곧 이쯤이면 멈추었지만, 변진희와 관련된 일이었기에 백정일도 체면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도윤아, 네 마음속에 채원이 없다는 거, 나도 다 안다. 그녀와 결혼하려는 것도 단지 백씨 집안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지?”“그런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요.”“좋아, 그럼 거래를 하자.”백정일은 몸을 돌려 도윤을 바라보았다.“난 백씨 집안을 대신하여 이 혼사를 취소하고, 대선 때, 우리 집안이 자네 편에 설 것을 보증하네. 자네는 지아가 골수를 기증할 수 있도록 설득만 하면 돼.”도윤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아저씨는 백채원이 나와 얼마나 결혼하고 싶은지 잘 아시면서도, 그녀의 미래를 걸다니. 어떻게 보면 두 사람 정말 똑닮았네요.”똑같은 이기심, 똑같은 사랑꾼.“만약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지아라면, 자네는 나보다 더 할 뿐, 덜 하지 않을 텐데.”백정일은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자네가 정말 채원이를 사랑한다면, 나도 이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 거야. 나도 다 겪어본 사람이라 사랑이 없는 혼인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무 잘 알지. 세상 사람들은 어쩌면 결혼하는 것을 자신의 무덤을 파는 거라고 말하겠어.”“난 기억을
소지아는 섬에서 며칠간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는데 매일 먹고 자고 노니 생활의 질이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그녀는 맨발로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며 손에 물통을 들고 가끔 게 한두 마리를 보면 서둘러 집게로 통에 집어넣었다.하루도 내려와서 도와주려고 했지만, 막 뛰어내리자, 발을 데였는지 또 얼른 제자리로 돌아갔다.지아는 적지 않은 게를 잡고 가축구역을 향해 걸어갔는데, 게들을 안에 붓자, 닭, 오리, 거위들은 미친듯이 추격하기 시작했다.이런 생기발랄한 장면을 보며 지아의 기분도 많이 좋아졌다.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다음 밥을 먹으려고 하자, 지아는 마침 주원의 전화를 받았다.“누나, 요즘 잘 지내고 있어요?”“그럭저럭이야.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자고 있고, 또 납치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지.”“그럼 됐어요. 누나에게 아저씨가 무사히 섬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요. 방금 섬의 의사더러 검사를 진행하라고 했는데, 아저씨의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예요.”지아도 이 말을 듣고 마침내 걱정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얼른 물었다.“레오 쪽은? 시간 잡았어?”“네. 그는 곧 갈 거예요. 다만 아저씨는 수술 전 준비를 해야 해서, 수술 일정은 두 주일 뒤로 잡았어요.”긍정적인 대답을 받자 지아의 기분은 더욱 좋아졌다.“이 수술은 아주 위험하니까 난 우리 아빠 곁에 있고 싶은데.”지금 이 순간, 지아는 진실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소계훈이 수술할 때 곁에 가족이 있길 바랐다.“누나, 내가 특별히 사람을 찾아 누나의 전화 신호에 따라 위치를 추적하라고 했는데, 누나 쪽의 신호가 누군가에 의해 일부러 감춰져서 전혀 찾을 수가 없어요.”“응, 내가 있는 이 작은 섬은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거든.”“괜찮아요, 누나, 며칠 후에 내가 직접 가서 아저씨 돌볼게요. 난 최선을 다해 그를 보호할 거예요.”“고마워.”“에이, 고맙긴요. 이번에 누나를 데리고 떠나지 못해서 나도 줄곧 양심의 가책을 느꼈어요. 누나 두려워하지 마요. 다음에 난 절대로 그에게 누나를
전화를 끊은 뒤, 이도윤은 앞에 있는 새로운 증거들을 보았다.소지아가 A시에 없는 동안 그는 손을 놓아 독충의 행방을 추적하며 이전의 일을 조사하는데 전념했다.도윤은 손씨 남매의 고향으로 찾아갔고, 그 아이가 이미 며칠째 실종됐다는 말을 들었다. 근처의 촌민들에게서 아이의 사진을 찾았는데, 그 아이는 간소연과 많이 닮았지만 동시에 손호영과도 좀 닮았다.그리고 손씨 남매도 이 도시에서 사라졌다.사람을 데려오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는 모든 걸 증명할 수 있었다.애초에 간소연이 소계훈의 아이를 임신하여 막다른 골목에 몰렸고 후에 정신병에 걸려 자살했다는 사실도 거짓으로 들통난 셈이었다.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소계훈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그 사람은 교통사고를 도윤에게 전가하려고 했고, 또 그전에 모든 것을 계획했다.그러나 그녀는 도윤을 다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요 목적은 그와 지아의 감정을 이간질하려는 것이었다.도윤과 지아를 이혼시키기 위해 상대방은 정말 갖은 방법을 썼고, 몇 년이란 시간과 무수한 정력을 들여 이 일을 계획했다.사건의 진상은 태반이 드러났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물속에 숨겨져 있었다.‘나와 지아를 갈라놓는 것이 대체 그녀에게 무슨 좋은 점이 있는 거지? 만약 사모님의 자리를 위해서라면, 이 2년 동안 나에게 접근하는 그 어떤 여자도 없었는데.’‘그리고 이예린의 죽음과 소계훈은 도대체 관계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이것을 본 다음, 도윤은 한쪽에 있는 진환에게 말했다.“주원 그 녀석은?”“아직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로 보입니다. 그는 요 며칠 회사에 있거나 퇴근 후에 바로 집에 갔는데, 가끔 접대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상황이 없습니다.”“그가 접대하는 그 사람들은?”“모두 사람을 보내서 주시하고 있는데, 아직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저희가 안착한 도청기의 배터리가 곧 나갈 거 같습니다.”“대표님, 저는 이번 주에 줄곧 그 녀석을 주시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우리가 잘못 의심한 게 아닐까
주씨 집안의 작은 정원에는 벚나무 하나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비밀 통로 입구가 숨겨져 있었고, 주원은 안으로 훌쩍 뛰어내렸다.성 밖의 모 지하 기지.주원은 검은색의 로프를 입고 가면을 쓴 채 지문을 입력하여 들어갔다.어둡고 긴 계단을 지나자, 공기 속에는 곰팡이 냄새와 썩은 냄새가 가득했다.이 문을 지나면, 안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각종 최첨단 기계 설비는 짙은 블루 색을 띠고 있었고, 곳곳에서 로봇을 볼 수 있었다.입구에서 주문을 입력하자 귓가에 차가운 기계 소리가 울렸다.“검증이 통과되었습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레오.”주원은 즉시 앞으로 걸어갔지만 누군가 그를 가로막았다.그리고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그 늙은이를 어디로 데려갔지?”가면 아래의 주원의 얼굴은 소지아 앞에서 선보인 부드러움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팔꿈치를 뒤로 힘껏 내리쳤고, 여자는 즉시 비켜섰다.바로 이 틈을 타서 주원은 맹렬하게 여자를 잡아당겼고, 두 사람은 위치를 교환했다.그는 한 손으로 여자의 팔을 잡아당기며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뒤통수를 억눌렀고, 그녀의 얼굴을 벽에 박았다.여자의 여우 가면은 벽과 마찰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그러나 주원은 힘을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네가 무엇을 하든 상관 없지만, 그녀만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응?”“흥.” 여자는 가볍게 웃었다.“정말 비천하기 짝이 없군. 그 소지아가 도대체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길래 당신들 같은 남자들이 하나같이 매달리는 거지?”“너와는 상관없어! 소씨 집안의 일에 더 이상 끼어들지 마, 그렇지 않으면…….”주원은 목소리를 낮추었다.“나도 그에게 손을 댈 수 있으니까.”“대봐, 손을 대 보라고. 그가 정말 소지아와 같은 쓸모없는 병신인 줄 알아?”여자는 개의치 않았다.“너 이번에 제대로 당했다면서.”여자의 비웃음은 사정없이 주원의 귓가에 울렸고, 그는 아픈 곳을 찔린 듯 손에 힘을 더 주었다.“너 진작에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던
소지아는 섬에서 또 이틀 정도 머물었고, 휴대폰을 켜기만 하면 백정일의 문자가 들어왔는데, 그녀는 아예 휴대폰을 꺼버렸다.그리고 푹신푹신한 큰 침대에 누우면 지아는 해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비록 여기에 있는 것은 매우 좋았지만, 그녀는 자꾸 이도윤이 한 말을 떠올리곤 했다. ‘그는 언제 날 데리고 돌아갈 수 있을까?’지아는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었다.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지만 소계훈은 기다릴 수 없었고, 얼마 후 바로 수술을 진행해야 했다.지아는 다시 한번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약간 피곤해 보였다.“왜 그래?”“이도윤, 나 돌아가고 싶어.”“조금만 기다려, 내가 직접 데리러 갈게.”“그런데…… 난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단 말이야.”“내게 시간을 좀 더 줘.” 도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지아에게 말할 수 없었다. 독충의 소굴을 철저히 제거해야만 지아가 안전할 수 있었다.“만약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도 돼.” 도윤은 여전히 인내심 있게 말했다.소계훈의 상황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기에 지아는 도윤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우리 아빠의 소식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을 뿐이야.”“지아야, 네가 나타나지 않는 한, 네 아버지는 절대로 안전할 거야. 섬에서 나 기다려.”도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날 밤의 일을 조사하게 했는데, 소계훈을 데려간 그 무리의 사람들은 독충과 약간 비슷했다.같은 조직인 이상, 어떻게 두 부류의 사람을 파견할 수 있겠는가?이 일은 마치 거대한 그물과 같았다. 사실은 분명 눈앞에 있는 것 같지만, 또 많은 점들은 곳곳에서 이상함을 드러내고 있었다.도윤은 청소 아주머니에 관한 많은 일들을 회상했고, 그녀는 줄곧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한 번은 도윤이 감기에 걸려 기침을 했는데, 청소 아주머니는 사무실을 청소할 때 그 기침 소리를 듣고, 다음날 그녀가 직접 끓인 생강차를 가지고 와서 기침을 멎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도윤은 아주머
요 며칠 백정일은 더 이상 이도윤을 찾아오지 않았고, 출발하기 전, 진환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백 선생님은 이미 포기한 겁니까?”“그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내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겠지.”도윤이 섬에 가지 않는 한, 그 섬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지아는 틀림없이 안전할 거야.’진환은 방탄복을 건네주었다.“대표님, 만일을 대비해서 얼른 입으세요. 지금 가슴에 입은 칼상처도 아직 낫지 않았잖습니까.”“음.”도윤은 새까만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난날의 햇빛이 없어 온 세상은 마치 먹구름에 휩싸인 것 같았다.차를 몰던 진환은 초조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이렇게 무더운 것을 보면 또 비가 오려는 것 같은데. 비가 올 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네요.”“큰비는 이 도시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줄 텐데, 나쁠 게 뭐가 있겠어. 운전이나 해.”도윤은 잠시 후에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그리고 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참지 못하고 출발하기 전에 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는 안심할 수 있었다.지아는 방금 오리에게 먹이를 주었고, 큰 거위 한 마리에게 쫓겨 우리를 세 바퀴나 돌았다.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전화를 받았다. “어.”“뭘 했길래 숨조차 잘 쉬지 못하는 거야?”“방금 거위한테 쫓겼거든. 힘들어 죽겠어.”지아는 나무 그늘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전문적인 사람이 매일 지아의 일상을 촬영한 후 도윤에게 보내곤 했는데, 도윤은 그녀가 큰 거위에게 쫓기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고, 차가운 입꼬리는 참지 못하고 올라갔다.따라서 목소리마저 많이 부드러워졌다.“푹 쉬고, 몸을 잘 휴양해.”“이도윤, 너 뭐 잘못 먹었어?”지아는 잊지 않았다. 전에 그녀는 도윤에게 자신이 아프다고 말했지만, 도윤은 오히려 그녀를 비꼬았다.“지아야, 우리에게 아이가 또 생길 거야.”말을 마치자 도윤은 전화를 끊었고, 지아는 손으로 부채질하며 더위를 식혔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