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귀신도 아니고!’‘이 남자는 일찍 집에 돌아가서 백채원을 달래지 않고 여기에 숨어서 무엇을 하는 거지?’“대표님, 정말 공교롭군.”이도윤은 위아래로 소지아를 한번 훑어보았는데 표정은 차가웠다.“나는 특별히 여기서 널 기다렸어.”소지아는 이도윤이 좀 이상하다고 직감했다. 라이터의 불빛이 그의 얼굴에 비치자, 반은 빛이었고 반은 그림자였다. 마치 천사와 악마가 교차하는 것 같았다.“날 기다렸다고?” 소지아는 침을 삼켰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는 좀 무서웠다.이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앞장섰다.소지아도 그가 도대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어 이도윤의 뒤를 따랐고, 엘리베이터는 바로 꼭대기층으로 뛰어올랐다.옥상 위에는 바람이 휙휙 지나갔다. 비록 봄이 되었지만, 밤바람은 여전히 한기가 섞여 있어 마치 이도윤의 뒷모습처럼 추웠다.소지아는 참지 못하고 목을 움츠렸다. ‘설마 날 해치우려는 것은 아니겠지?’결국 회사 대표님보다 이도윤의 그 포악한 기운은 더욱 강도와도 같았다.연기를 뱉으니, 흰 안개가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먼 곳의 등불은 은하수처럼 이도윤의 뒤에서 반짝였지만 그는 조금도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다.“나를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뭐지?”이도윤은 눈을 들어 그녀를 살펴보았다. ‘흥, 아무런 의도가 없을 때 그녀는 눈빛조차 이렇게 나와 멀리 떨어져 있지.’이런 소지아가 또 어떻게 이도윤의 눈앞에서 일을 할 수 있겠는가?“말해봐, 왜 회사로 들어왔어?” 이도윤은 오른손의 두 손가락으로 담배를 끼고 벽에 기대어 무심코 물었다.소지아는 그가 왜 갑자기 이렇게 물었는지 모른다. ‘설마 무엇을 알아차렸단 말인가?’“내가 이미 말했잖아? 나는 지금의 생활에 싫증이 나서 자아가치를 실현하고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가고 싶어.”이도윤은 한걸음한걸음 소지아에게 다가갔다. 그의 안색은 어두컴컴했고, 소지아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몸이 벽 옆에
의외로 이도윤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손에 든 담배를 버렸다.소지아가 가려고 해도 이도윤은 막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유유히 들려왔다.“소지아, 날 속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이도윤은 소지아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돌아올 줄 알았지만 소지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찬바람은 담배꽁초의 마지막 불똥을 껐고, 소지아의 그림자는 이미 옥상에서 사라졌다.이도윤은 머리를 들어 머리 꼭대기의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겹겹이 쌓인 구름이 밤하늘을 가려 오직 한두 개의 별만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소지아가 숨기고 있는 그 목적은 대체 무엇일까?’이도윤은 그날 소지아의 말을 떠올렸다. ‘만약 소계훈이 예린이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 범인은 누구일까?’“대표님, 사모님 떠나신지 이미 오래됐습니다.”진환은 마치 그의 그림자처럼 어두운 곳에 서 있었다.이도윤은 길게 탄식했다.“진 비서, 예린의 일 다시 한번 조사하고 싶은데.”“사모님을 위해서입니까?”진환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이미 결론 내린 일을 왜 다시 들춰내는 거지?’ 특히 이 일은 이도윤의 마음속에서 가장 큰 트라우마였기에, 조사하긴커녕 평소에는 얘기조차 꺼낼 수 없었다.다시 조사하는 것은 이도윤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다시 한번 생으로 찢어버리는 것과 같으며, 아마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그때는 일이 너무 갑작스레 일어나서 내가 너무 당돌한 것 같아. 증거가 확실해 보였지만, 내가 분노에 눈이 멀어 내린 결정이었지. 그리고 그 후 2년 동안 나는 줄곧 예린을 잃은 슬픔에 잠겨 예린의 죽음을 그녀의 탓이라 생각했고. 만약…….”이도윤의 팔은 한순간 떨렸다.“만약 범인이 정말 소계훈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지아를 마주해야 할까?”많은 일들은 자세히 되새길 수 없었다. 이 일은 이도윤에게 있어서 특히 민감한 화제이기 때문에 모두들 스스로 회피했다.“대표님, 그때의 일은 모두 증거가 있으니 이런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이도윤은 진
소지아는 집에 돌아간 후, 추적기를 확인해 보았는데, 쓰레기장에 들어간 그 추적기가 이미 사라진 외에 기타 몇 개는 이전과 별로 차이가 없으며 큰 변화가 없었다.전효의 전화는 여전히 꺼져 있는 상태였고 소지아는 한숨을 쉬었다.분명히 진실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앞에는 자꾸만 안개가 끼어 있었고, 흩어지지도, 잘 보이지도 않았다.다행히 프로젝트 이쪽은 매우 순조로웠다. 소지아의 기획안은 상대방 회사의 선별을 통과했고, 만나는 시간을 정했다.소지아는 특별히 정장을 입었는데 손바닥은 은은하게 뜨거운 땀이 배어 나왔다.그리고 문을 열자, 그녀는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YH 그룹의 소지아입니다.”흰색 양복을 입은 잘생긴 소년은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지아 누나, 우리 또 만났네요.”소지아는 어리둥절해졌다. “주원아.”그리고 소지아는 그제야 반응했다.“네가 바로 우일 그룹의 주 대표야?”“맞아요, 아버지의 사업을 계승 받은 셈이죠.” 주원은 어쩔 수 없단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난 의사가 되고 싶은데.”전에 소지아의 팀은 우일 그룹의 사람을 접촉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까다로웠고, AB 두 팀도 모두 이 프로젝트를 접촉한 적이 있었지만 기어코 따내지 못했다.유독 C팀만 밑져야 본전이라 계속 우일 그룹을 매달렸다.주원을 본 순간 소지아는 입을 열어 물었다.“주 대표, 이번에 합작에 동의한 원인은 기획안 때문이야, 아니면…… 나 때문이야?”주원은 친절하게 소지아를 위해 의자를 당겼고, 또 종업원에게 음식을 올리라고 했다. 그의 입가에 줄곧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둘 다요.”주원은 소지아 맞은편에 앉아 설명했다.“처음에는 이 기획안이 눈에 띄었기 때문인데, 나중에 누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당시 누나가 나의 목숨을 구해준 것을 봐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이 기획안을 통과시키려 했죠.”“이제 고양이 무섭지 않겠지?” 소지아는 모처럼 웃었다.“네, 하루와 잘 지내고 있
강진을 언급하자 박금란은 바로 눈을 부라렸다.“여자를 아주 밝히는 놈이야.”“그래?”“응,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나가던 파리가 암컷이라도 그 남자는 제자리에 서서 눈여겨볼 거야.”소지아는 더욱 이상하다고 여겼다. ‘이런 사람이 주모자의 부하일까?’“지아야, 이 자식이 너 건드린 거야?” 박금란은 소지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박금란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이번에 지아 너 덕분에 우리는 또 하나의 계약을 체결했고, 판매 임무를 원만히 완수했으니 조금 있으면 그가 올 거야.”말하는 사이, 박금란은 모퉁이에 나타난 양복을 입은 사람을 가리켰다.“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오는 법이지.”소지아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보았는데, 강진은 약 35세 좌우이고 몸매는 뚱뚱하지도 날씬하지도 않으며 한 쌍의 눈은 마치 쥐처럼 빛을 반짝였다.눈빛이 마주치자, 강진은 소지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어보았다.“아, 네가 바로 그 신입이지? 오자마자 큰 건 하나 해냈으니 정말 대단하군.” 강진은 손을 뻗어 소지아의 어깨를 두드리려 했다.그의 동작은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자신의 어깨에 닿기 전에 소지아는 내색하지 않고 자리를 옮기며 냉담하지만 예의 있게 인사를 했다.“과찬이세요.”소지아는 강진과 눈을 마주치며 그의 눈빛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강진의 눈빛은 조금도 소지아를 피하지 않았고, 그 의도 역시 매우 뚜렷했다.“전도가 참 양양하구나!”강진은 또 몇 마디 하고서야 떠났는데, 떠나기 전에 심지어 퇴근할 때 소지아와 밥을 먹으려 했다.그가 떠나자마자 박금란은 바로 입을 열었다.“내가 말했지, 아주 변태라니깐, 그와 좀 떨어져 있어야 해.”“음.”소지아는 강진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의심했다. 만약 이은리의 채팅기록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이 너무 예민했다고 느꼈을 것이다.‘이 사람, 위장을 아주 잘하는군.’“금란아, 나 좀 도와줘.”박금란은 소지아가 입을 여는 것을 듣자마
병원.소계훈은 여전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병상에 누워 매일 영양액과 각종 설비에 의지하며 버티고 있었다.몸은 아주 빠른 속도로 메말라졌고, 특히 사지가 점점 위축되었다.마치 생기를 잃은 꽃처럼 토지의 마지막 영양분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소지아는 이미 며칠째 오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더욱 괴로웠다.소계훈의 볼은 이미 움푹 들어가기 시작했고 소지아의 눈물은 그의 마른 손등에 떨어졌다.“아빠…….”소지아는 언젠가 기적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소계훈은 깨어나 자신을 볼 것이고, 단 한 번이라도, 그녀에게 한 마디라도 할 것이다.“누나, 슬퍼하지 마.”주원은 소지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고, 소지아는 고개를 숙였는데, 지금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소지아가 얼굴을 가리고 몰래 눈물을 훔칠 때, 고개를 들자 주원이 청진기를 들고 소계훈의 심박수를 듣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뭐하는 거야?”주원은 자연스럽게 청진기를 떼고 소지아를 보며 웃었다.“나도 의대생이기 때문에 아저씨의 상황을 좀 살펴보고 싶어서요.”“그럼 부탁할게.”“에이, 부탁은 무슨.”주원은 소계훈에게 간단한 검사를 했는데, 그 동작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소지아는 그가 의대생일 뿐이란 것을 의심했다.“누나, 아저씨 최신 검사 보고서 좀 보여줘요.”“응.”소지아는 모든 보고서를 전부 주원에게 가져다 주었는데 주원은 자세히 보았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고, 잠시 후에야 주원은 고개를 들어 소지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세월의 흔적을 드러냈는데, 평소의 눈빛과는 달랐다.“누나, 아저씨의 병은 아무런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레오라면 수술 성공 확률이 높아요.”소지아는 한숨을 쉬었다.“맞아, 하지만 우리는 많은 방법을 써도 그를 찾지 못했거든.”“누나, 안심해요, 나도 외국의 인맥을 동원해서 누나를 도와 그를 찾을게요.”소지아는 침대 옆에서 뜨거운 수건으로 소계훈의 몸을 닦았다.“우리 아빠가 그날까지 기다릴 수
주원은 소지아를 아파트로 데려다 주었다. 그의 몸에는 소년의 순진함과 성인 남자의 매너가 있었다.직접 소지아에게 차 문을 열어준 다음, 주원은 가방에서 방금 산 목도리를 소지아의 목에 감았다.“아니야, 나 안 추워.”“이건 새로 산 거예요. 따뜻하게 입고 다녀요.”주원이 설명했다.“그래, 가는 길에 조심해, 고마워.”주원은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었다.“오늘 저녁에 산 간식은 그 밥 한 끼가 아니에요. 누나 아직 나에게 큰 턱 하나 사야 해요.”“너도 참.” 소지아는 손을 뻗어 주원의 머리를 비볐다. “여전히 어렸을 때와 똑같아.”그때 소지아는 주원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아이는 줄곧 기억하고 있었고, 일정한 시간마다 그녀에게 물었다.“그럼 다음에 또 만나자.”“음.”차가 멀리 떠나는 것을 보고 소지아는 그제야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주원의 말이 맞아, 난 이렇게 슬퍼할 필요가 없어.’소지아는 자신이 들고 있는 각종 간식들을 보았다. 이렇게 오래 지났어도 주원이 그녀의 입맛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어릴 때부터 소지아는 주원과 알게 되었고, 후에 그는 외국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으며 두 사람은 늘 sns로 얘기를 나누었다.‘언제부터 낯설어졌을까?’아마도 몇 년 전 소지아가 이도윤과 사귄 후였을 것이다. 그녀의 시간은 모두 이도윤에게 주었고, 주원과의 연락은 점차 끊어졌다.주원에 대한 소지아의 인상은 여전히 어릴 때 고양이가 두려워 자신의 집 매화나무에 오르는 그 남자아이에 머물러 있었다.그 어린 얼굴을 생각하자 소지아는 미소를 지었다.인생의 어두운 밤도 나쁘지 않았다. 어두울수록 달과 별은 더욱 밝아졌다.아마 소지아도 시간을 내서 위의 상태를 다시 잘 검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점차 살아갈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문을 열고 소지아는 불을 켰다.그리고 고개를 들자 미소는 얼굴에 굳어졌다.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고, 그는 두 다리를 살짝 벌린 채 두 손을 팔걸이에 마음대로 올려놓
소지아는 웃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엄청 아이러니했다.그녀는 이도윤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버렸다.“이 대표,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요구한 적이 없어. 네가 말하는 그 사모님의 자리조차도. 나는 손을 놓을 수 있었으니, 더는 미련이 없었어.”이도윤의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서 소지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렸고, 지극히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에는 항상 네가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 제자리에 서서 2년이란 시간을 기다리다 정말 지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천천히 나아가다 보니, 봄바람이든, 여름의 매미든, 가을의 잎사귀든, 겨울의 눈이든, 세상 만물이 너보다 중요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소지아는 가볍게 손을 들었고,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가 한때 사랑했던 이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졌다.“이도윤, 나는 너를 철저히 잊지 않았어, 인정해. 아마도 오랜 시간 동안 난 너를 내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을 거야. 너는 여전히 나의 감정에 영향을 줄 것이고, 나의 신경을 건드리겠지. 그러나…… 나는 정말 더 이상 너를 생각할 정력이 없어.”마지막으로 소지아의 손끝은 이도윤의 입술에 떨어졌다.“이도윤, 그동안 치근덕거리면서 피곤하지도 않아? 난 지쳤어. 더 이상 너와 백채원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해 불쾌해하고 싶지도 않고. 앞으로 우리는 각자 편안하게 지낼 수 없을까?”이도윤의 눈동자는 소지아의 얼굴을 똑똑히 비추었다. 분명히 이렇게 익숙하지만 또 낯설어 그로 하여금 종래로 본적이 없다고 느끼게 했다.이도윤은 이를 악물며 간신히 차가운 소리를 냈다.“소지아, 넌 그렇게도 나와 선을 긋고 싶은 거야?”소지아는 평온하게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 순간 그녀는 두려워하지도 위장하지도 않았다.“응, 레오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나도 널 찾아가지 않았을 거야. 비록 나는 백채원을 좋아하지 않지만, 더 이상 그녀가 되고 싶지 않아. 네가 결혼하려 할 때, 너와 끊임없이 얽히는 거 말이야
임건우는 소지아에게 근황을 이야기했다. 소지아는 줄곧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데, 당초에 자신 때문에, 임건우는 이도윤에 의해 외국으로 보내졌다.임건우의 목소리는 지난날과 다름없이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는 외국에서 연수하면서 이미 새로운 환경에 완전히 적응했다.최근에는 성격이 좋은 여자친구까지 사귀었고, 몇 년 뒤 귀국하면 원장 자리까지 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번 연수의 기회도 나쁘지 않았다.임건우는 소지아를 대신해서 내일 위 검사를 안배했다.“지아야,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다시 열심히 사려 하는 네 모습을 보니, 나도 정말 기쁘구나.”“선배, 난 열심히 살아갈 거예요. 하루든 한 달이든 내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거고요.”전화기 쪽에서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 나 방금 또 망친 거 같아요…….”소지아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빨리 가봐요, 선배.”이날 밤, 소지아는 모처럼 긴장을 풀고 목욕을 했다.심지어 그녀는 자신에게 와인을 반 잔 따랐는데, 테라스에 서서 바닷바람을 들으며 술잔을 들기도 했다.소지아는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소지아, 꼭 살아있어야 해!”다음날 아침, 소지아는 휴가를 내고 간단한 흰색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김민아를 불러 모교로 돌아갔다.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학교 주변은 많이 변했고, 상가와 건물이 좀 더 많아졌다.아침 바람은 여자아이들의 머리카락과 막 싹을 틔운 푸른 잎을 흐트러뜨렸고, 새들은 재잘거리며 날개를 펴고 푸른 하늘을 날고 있었다.포장마차에서 군고구마를 굽는 난로는 바깥으로 가벼운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공기 속에는 갓 구운 만두 냄새가 가득했다.햇빛이 소지아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자, 모든 것은 딱 좋았고, 그녀도 이 고통으로 뒤덮인 인간 세상을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김민아는 소지아의 귓가에 대고 쉴 새 없이 과거의 재미있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끔 전 남친에 대해 이야기하면, 김민아는 여전히 실의에 빠졌다.소지아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민아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