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채원은 바로 그 사람이 소지아냐고 묻고 싶었는데 묻지 못하고 말을 그대로 삼켰다.두 사람의 약혼이 임박한 것을 보고 백채원은 더 이상 이도윤에게 약혼 시간을 미룰 핑계를 주고 싶지 않았다.이도윤이 자기가 물었다고 말한 이상, 그렇게 믿으면 됐다.설사 소지아와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백채원은 이도윤 앞에서 이 여자를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최근의 이도윤은 아주 이상했다. 전에 소지아를 언급하면, 그의 눈에는 조금도 숨기지 않는 증오가 있었다.그러나 이 몇 달 동안 이도윤은 소지아에 대한 감정이 또 변했고, 그는 또 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좀처럼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백채원은 이런 일에서 이도윤과 말다툼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어요, 참. 이건 내가 직접 만든 떡인데, 맛있는지 먹어봐요.”백채원은 도시락통에서 떡을 하나하나 내놓았고 이도윤은 한 번 보았는데 그것은 모두 지난날 소지아가 습관적으로 그에게 해준 것이었다.백채원은 어디서 자신의 취향을 알아냈는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소지아가 한 것과 똑같았다.이도윤이 케이크를 훑어보는 것을 보고 백채원은 마음속으로 즐거움을 느끼며 얼른 말했다.“내가 가서 커피 끓여 줄게요.”소지아는 틈새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고,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그녀는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 두 사람은 전혀 커플 같지가 않았다.백채원이 바쁘게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이도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궁녀 같았다.그리고 이도윤은 케이크 한 조각을 들고, 머릿속으로 소지아를 생각했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지 못했다.가볍게 한 입 베어 물었는데, 결국 소지아가 만든 그 맛이 아니었고, 이도윤은 다시 내려놓았다.백채원은 커피를 들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맛이 없는 거예요?”“음, 배고프지 않아서.”백채원은 커피를 내려놓고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난 여기서 당신 퇴근할 때까지 기다릴게요.”소지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
백채원은 눈치가 빨라서 이도윤의 불쾌를 느꼈다.“그랬군요, 나도 잘 몰랐어요.”이도윤은 설명하기 귀찮았다.“청소하면 돼요.”“네, 대표님.”아줌마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백채원은 위아래로 그녀를 살펴보았는데, 그녀의 나이가 적지 않아 이도윤과 무슨 관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고 그제야 한쪽에 가서 휴대전화를 놀기 시작했다.소지아는 마음속으로 이도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백채원을 내버려 두면 그만이지만, 청소까지 시키다니, 날 죽이려는 건가?’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어떻게 지금 와서 청소를 할까? 소지아는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아주머니를 몇 번 더 보고 싶었지만, 아주머니는 소지아를 등지고 있었고, 그녀의 앙상한 몸만 볼 수 있었다.머리에 모자까지 쓰고 있어 얼굴을 가렸는데, 실내에서 무엇을 가릴 필요가 있단 말인가?시간은 1분 1초 지났고, 아주머니는 유리를 깨끗이 닦은 다음 이쪽으로 와서 책장을 닦으려 했다.‘만약 발각되면 어떡하지?’원래 소지아는 단지 일을 보고하러 왔을 뿐인데, 이번에 발견되면 정말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었다.소지아는 머리가 아파서 얼른 핸드폰을 들고 이도윤에게 카톡을 보내려고 했다.그러나 그녀는 이미 이도윤의 카톡을 차단해서, 소지아는 어쩔 수 없이 문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책상 위의 핸드폰이 진동하자 이도윤은 미리 예상한 듯 머리도 들지 않았다.‘일부러 그러는 거지!’소지아는 이 사람이 고의적이라고 확신했다!이어서 열 통의 문자를 연달아 보냈지만, 이도윤은 상대도 하지 않았다.소지아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번호에 전화를 걸었고, 이도윤은 한 번 힐끗 보더니 무시했다.‘젠장!’소지아는 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도윤은 오히려 아무 일도 없는 사람과 같다.백채원조차도 이상함을 깨닫고 이도윤을 바라보았다.“도윤 씨, 핸드폰 울렸는데.”이도윤은 무음 모드를 눌렀다.“아무것도 아니야. 스팸전화.”“그래요? 요즘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낯가죽이 두꺼울 까요, 계속 전화를 하다니, 내가 처리해 줄
호랑이 굴에서 나왔다가 다시 늑대 굴에 들어간 셈이었다. 소지아는 그 기획안 언뜻 보더니 서둘러 가져왔다.“너 지금 매우 급하겠지만, 우선 침착해. 우리 부서의 사람들은 아직 내가 돌아가서 네 뜻을 전달하기를 기다리고 있어.”이도윤은 소지아가 당황한 것을 보고 그녀가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긴 숨을 내쉬며 소지아를 놓아주었고, 소지아는 벌떡 일어나 이도윤의 곁에 서서 숨도 감히 쉬지 못했다.“봐봐.”이도윤은 재빨리 훑었고, 마지막에 시선은 또 소지아의 얼굴에 떨어졌다.“아직도 여기에 한달이나 머물고 싶은 거야?”“응.” 소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난 쓸모없는 사람을 남겨두지 않아. 이 프로젝트는 너에게 맡길게.”소지아는 어리둥절했다.“너 지금 날 과녁으로 삼으려는 거니?”“넌 이미 과녁이니 내가 뭘 하든 차이가 있을까?”소지아는 이도윤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기획안을 들었다.“그럼 이 방안은…….”“네가 하라고 했잖아, 날 실망시키지 마.”소지아는 진취심이 없었지만, 이도윤의 핍박을 받아 노력을 해야 했다.“응.”이도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원하지 않으면 빨리 꺼져.”소지아는 쏜살같이 뛰어나갔다.‘또 한 번 무사히 피했군.’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소지아는 문 앞에 흉악하게 서 있는 백채원과 마주쳤다.백채원은 이 엘레베터가 꼭대기층에서 내려오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소지아가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백채원은 다짜고짜 손을 들어 소지아의 얼굴을 때렸다.소지아는 피할 수 없어 이렇게 뺨을 맞았다.이 층에는 두 개의 부서가 있는데 사람이 많았다.백채원도 바보가 아니라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지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천한 면, 두고 보자.”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았고 소문은 곧 퍼졌다.소지아가 기획안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회사의 단톡방에 통지가 뜬 것을 발견했다. “근거가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금지. 위반하는 사람 해고.”사진의 일은 지
소지아가 뺨을 맞은 일은 재빨리 전 부문에 퍼졌고, 또 이도윤이 이번 항목을 단독으로 그녀에게 맡겼다는 일이 퍼졌다. 이는 정말 처음이었다.똑똑한 사람은 이미 낌새를 알아차렸다. 모두들 소지아가 진환이 직접 들여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금 보면 그녀의 빽은 진환이 아니라 이도윤이었다!이를 의식한 C조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했다.어쩐지 소지아가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더라니, 어쩐지 이도윤이 굳이 그녀에게 기획안을 보내라고 했다라니.게다가 회사는 특별히 사진 때문에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이 모든 것은 소지아의 뒤에 뜻밖에도 이도윤이라는 회사 대표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그녀가 이도윤의 애인이라고 해도 어떤가? 백채원도 그저 소지아의 뺨을 한 대 때릴 수밖에 없지 않았나?일시에 모든 사람들은 황공하고 불안했는데, 감히 소지아와 프로젝트를 빼앗긴커녕 얼른 그녀를 아부했다.박금란은 소지아가 원하는 라떼를 공손하게 그녀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지아야, 이것은 내가 직접 가서 사온 라떼야, 설탕 조금, 얼음 가득. 그리고 간식도 좀 샀어.”정교한 떡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빛으로 박금란의 등을 찌르고 있었다.‘소지아를 욕할 때, 가장 신이 나더니, 이제 비위를 맞추는 건 또 1등이군.’소지아는 고개를 들어 박금란을 바라보았고, 박금란은 계속 말했다.“전에는 내가 눈치가 없었으니까 지아야 너도 절대 화나지 마.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고.”소지아는 나른하게 말했다.“빛을 다 가로막았잖아요.”박금란은 소지아의 자리가 사무실에서 햇빛이 가장 좋은 곳에 있는 것을 보고, 그녀가 자신을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 난 바로 옆에 있으니까 무슨 문제가 있으면 나 찾아와.”박금란은 매우 눈치 있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눈빛은 여전히 소지아를 바라보았다.소지아는 탁자 위의 정교한 간식을 보면서 거절하지 않았다. 과거에 그녀는 단 음식을 매우 좋아했
탁자 위의 추적기를 보고 진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이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사모님은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이도윤은 추적기를 들고 다시 안에 쑤셔넣었다.“영준에게 돌려줘.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예, 대표님.”이도윤은 넥타이를 어루만졌다. 소지아가 자신의 비서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이미 의심하기 시작했다.소지아의 성격으로, 자신에게서 멀어질수록 좋은데 또 어떻게 자신의 곁에 남아있으려 할 것인가.‘나한테 원하는 뭔가가 있을 텐데.’돈?소지아는 쉽게 수백억을 기부할 수 있었으니 돈 때문은 아니었다.‘그럼 소계훈밖에 없군.’그날 소지아의 말하려다 그만둔 모습을 생각했다. ‘그녀는 무엇을 알아냈을까?’이도윤이 침묵하고 말을 하지 않자 진환도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떠보며 물었다.“사모님 이쪽은…….”“일단 가만히 있어. 나는 오히려 그녀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보고 싶군.”이도윤의 손가락은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소지아가 여기에 두번이나 왔었다는 것을 생각했다.“이따가 사람 찾아 내 사무실 좀 검사해,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추적기를 넣을 수 있었으니 나에게 뭐 했을지도 몰라.”“알겠습니다, 대표님.”이도윤은 눈을 드리우고 책상 밑을 바라보았는데 눈앞에 또 불쌍하게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지아의 모습이 떠올랐다.이번 조사에서, 이도윤은 뜻밖에도 의외의 수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의 사무실에는 뜻밖에도 작은 감시 카메라 몇 개가 숨겨져 있었다.진환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대표님, 이…….”“소지아가 한 게 아니야.”그녀는 최근에야 사무실에 왔는데, 이 몇 개의 감시 카메라는 모두 사무실의 은밀한 구석에 숨겨져 있었다.소지아는 이렇게 빨리 사무실의 환경을 장악할 수 없었다.진봉은 다급했다.“대체 누가 이렇게 겁이 없는 거죠? 감히 이 물건을 대표님의 사무실에 숨기다니?”“모델을 확인해.”“이 감시 카메라의 대기 시간은 최장 1년이야, 방금 배터리 사
소지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귀신도 아니고!’‘이 남자는 일찍 집에 돌아가서 백채원을 달래지 않고 여기에 숨어서 무엇을 하는 거지?’“대표님, 정말 공교롭군.”이도윤은 위아래로 소지아를 한번 훑어보았는데 표정은 차가웠다.“나는 특별히 여기서 널 기다렸어.”소지아는 이도윤이 좀 이상하다고 직감했다. 라이터의 불빛이 그의 얼굴에 비치자, 반은 빛이었고 반은 그림자였다. 마치 천사와 악마가 교차하는 것 같았다.“날 기다렸다고?” 소지아는 침을 삼켰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는 좀 무서웠다.이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앞장섰다.소지아도 그가 도대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어 이도윤의 뒤를 따랐고, 엘리베이터는 바로 꼭대기층으로 뛰어올랐다.옥상 위에는 바람이 휙휙 지나갔다. 비록 봄이 되었지만, 밤바람은 여전히 한기가 섞여 있어 마치 이도윤의 뒷모습처럼 추웠다.소지아는 참지 못하고 목을 움츠렸다. ‘설마 날 해치우려는 것은 아니겠지?’결국 회사 대표님보다 이도윤의 그 포악한 기운은 더욱 강도와도 같았다.연기를 뱉으니, 흰 안개가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먼 곳의 등불은 은하수처럼 이도윤의 뒤에서 반짝였지만 그는 조금도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다.“나를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뭐지?”이도윤은 눈을 들어 그녀를 살펴보았다. ‘흥, 아무런 의도가 없을 때 그녀는 눈빛조차 이렇게 나와 멀리 떨어져 있지.’이런 소지아가 또 어떻게 이도윤의 눈앞에서 일을 할 수 있겠는가?“말해봐, 왜 회사로 들어왔어?” 이도윤은 오른손의 두 손가락으로 담배를 끼고 벽에 기대어 무심코 물었다.소지아는 그가 왜 갑자기 이렇게 물었는지 모른다. ‘설마 무엇을 알아차렸단 말인가?’“내가 이미 말했잖아? 나는 지금의 생활에 싫증이 나서 자아가치를 실현하고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가고 싶어.”이도윤은 한걸음한걸음 소지아에게 다가갔다. 그의 안색은 어두컴컴했고, 소지아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몸이 벽 옆에
의외로 이도윤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손에 든 담배를 버렸다.소지아가 가려고 해도 이도윤은 막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유유히 들려왔다.“소지아, 날 속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이도윤은 소지아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돌아올 줄 알았지만 소지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찬바람은 담배꽁초의 마지막 불똥을 껐고, 소지아의 그림자는 이미 옥상에서 사라졌다.이도윤은 머리를 들어 머리 꼭대기의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겹겹이 쌓인 구름이 밤하늘을 가려 오직 한두 개의 별만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소지아가 숨기고 있는 그 목적은 대체 무엇일까?’이도윤은 그날 소지아의 말을 떠올렸다. ‘만약 소계훈이 예린이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 범인은 누구일까?’“대표님, 사모님 떠나신지 이미 오래됐습니다.”진환은 마치 그의 그림자처럼 어두운 곳에 서 있었다.이도윤은 길게 탄식했다.“진 비서, 예린의 일 다시 한번 조사하고 싶은데.”“사모님을 위해서입니까?”진환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이미 결론 내린 일을 왜 다시 들춰내는 거지?’ 특히 이 일은 이도윤의 마음속에서 가장 큰 트라우마였기에, 조사하긴커녕 평소에는 얘기조차 꺼낼 수 없었다.다시 조사하는 것은 이도윤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다시 한번 생으로 찢어버리는 것과 같으며, 아마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그때는 일이 너무 갑작스레 일어나서 내가 너무 당돌한 것 같아. 증거가 확실해 보였지만, 내가 분노에 눈이 멀어 내린 결정이었지. 그리고 그 후 2년 동안 나는 줄곧 예린을 잃은 슬픔에 잠겨 예린의 죽음을 그녀의 탓이라 생각했고. 만약…….”이도윤의 팔은 한순간 떨렸다.“만약 범인이 정말 소계훈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지아를 마주해야 할까?”많은 일들은 자세히 되새길 수 없었다. 이 일은 이도윤에게 있어서 특히 민감한 화제이기 때문에 모두들 스스로 회피했다.“대표님, 그때의 일은 모두 증거가 있으니 이런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이도윤은 진
소지아는 집에 돌아간 후, 추적기를 확인해 보았는데, 쓰레기장에 들어간 그 추적기가 이미 사라진 외에 기타 몇 개는 이전과 별로 차이가 없으며 큰 변화가 없었다.전효의 전화는 여전히 꺼져 있는 상태였고 소지아는 한숨을 쉬었다.분명히 진실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앞에는 자꾸만 안개가 끼어 있었고, 흩어지지도, 잘 보이지도 않았다.다행히 프로젝트 이쪽은 매우 순조로웠다. 소지아의 기획안은 상대방 회사의 선별을 통과했고, 만나는 시간을 정했다.소지아는 특별히 정장을 입었는데 손바닥은 은은하게 뜨거운 땀이 배어 나왔다.그리고 문을 열자, 그녀는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YH 그룹의 소지아입니다.”흰색 양복을 입은 잘생긴 소년은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지아 누나, 우리 또 만났네요.”소지아는 어리둥절해졌다. “주원아.”그리고 소지아는 그제야 반응했다.“네가 바로 우일 그룹의 주 대표야?”“맞아요, 아버지의 사업을 계승 받은 셈이죠.” 주원은 어쩔 수 없단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난 의사가 되고 싶은데.”전에 소지아의 팀은 우일 그룹의 사람을 접촉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까다로웠고, AB 두 팀도 모두 이 프로젝트를 접촉한 적이 있었지만 기어코 따내지 못했다.유독 C팀만 밑져야 본전이라 계속 우일 그룹을 매달렸다.주원을 본 순간 소지아는 입을 열어 물었다.“주 대표, 이번에 합작에 동의한 원인은 기획안 때문이야, 아니면…… 나 때문이야?”주원은 친절하게 소지아를 위해 의자를 당겼고, 또 종업원에게 음식을 올리라고 했다. 그의 입가에 줄곧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둘 다요.”주원은 소지아 맞은편에 앉아 설명했다.“처음에는 이 기획안이 눈에 띄었기 때문인데, 나중에 누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당시 누나가 나의 목숨을 구해준 것을 봐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이 기획안을 통과시키려 했죠.”“이제 고양이 무섭지 않겠지?” 소지아는 모처럼 웃었다.“네, 하루와 잘 지내고 있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