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은 자기 생모의 피가 묻은 과도를 쥔 채 민연주를 향해 걸어갔다. 이 광경은 어처구니없고, 아이러니한 모습이었다. 하용은 미셸이 화연을 해칠까 봐 화연의 앞을 가로막았고, 부장경은 놀라서 새하얘진 얼굴로 민연주 앞을 지켰다.“세상에! 살인이다!”전향자는 비명을 지르며 피가 튈까 봐 멀리 도망갔다.지아는 이 광경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이 가족은 정말 정상적이 아니네. 어머니는 자식을 인정하지 않고, 자식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어.’‘이명란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자기 친딸도 엄마에게 조금의 연민조차 없었어. 이명란은 그런 대가를 치러 마땅하지.’민연주는 서둘러 미셸을 막아섰다. “이쪽으로 오지 마.”“엄마, 어떻게 나를 버릴 수 있어요? 나는 설이에요. 내가 엄마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엄마가 나를 어떻게 부인할 수 있어요.”부장경은 칼을 든 미셸을 간단하게 제압했다. 미셸은 사실 다른 사람들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빠, 오빠는 나를 제일 아꼈잖아.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미셸의 눈물에 부장경이 느끼는 감정은 오직 단 한 가지였다. ‘악어의 눈물...'오늘 이명란의 세 모녀가 보여준 행동들은 부장경에게 크디큰 충격을 주었다. 잔혹함도 유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지아는 이명란의 상처를 살펴보고 응급 처치를 했다. 집에는 더 이상의 의료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지아는 경호원들에게 이명란을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이명란이 저지른 일들은 분명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부씨 가문의 저택에서 죽는다면 부씨 가문에게는 큰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미셸은 다시 방으로 끌려가 감시를 받으며 지내게 되었다. 민연주는 사람들을 불러서 혈흔이 있는 카펫을 교체하게 했고, 하용은 화연을 조심스럽게 달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화연은 이미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화연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지만
화연은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감기만 하면 이명란을 찌른 칼에서 떨어지던 그 선명한 피의 붉은색이 떠올랐다. 지아는 예정된 시간에 와서 화연에게 침을 놓으며 말했다.“고모님이 잠들지 않고 계시는 거 알아요.”화연은 눈을 뜨고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네.” 지아는 은침을 내리며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고모님의 잘못은 너무 착하고, 지나치게 마음이 여리다는 거예요.”“지아야...”지아는 마치 아이같이 순수하고 맑은 화연의 눈동자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제가 고모님을 구해드린 이유도 바로 고모님의 이 눈동자 때문이었어요. 고모님은 정말 예전의 저와 많이 닮았거든요. 저도 한때는 사람들과 잘 지내면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었죠. 하지만, 고모님,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오히려 고모님이 남을 너무 많이 생각할수록, 그 사람들은 그것을 더 당연하게 여길 거예요.”“사실, 고모님의 연약함은 고모님 자신에게만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들 수 있어요.”그 순간 지아는 과거에 강미연이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그때 죽지 않았다면 미연이는 지금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모든 걸 잃고 땅속에 묻히고 말았어...’“지아야,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남을 구하려는 집착은 이제 내려놓으셔야 해요. 그 사람들에게 자기 운명은 자기 스스로 감당하게 두세요. 불필요한 동정은 하지도 말고, 이제 고모님 자신만 생각하세요. 그리고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사라진 고모님의 아이를 기억하세요. 조금 더 단호해지셔야 고모님도, 가족도 지킬 수 있어요. 제 말, 이해하셨죠?”지아는 화연이 자신이 했던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랐다. 지나친 선량함은 결국 남의 손에 내가 쥐여주는 칼이 될 뿐이니까.화연은 평평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소지아는 백채원이 저지른 일들을 절대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도윤의 일은 차치하고라도, 백채원 때문에 자신의 부모님, 특히 아버지 소계훈이 죽은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지아가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여 소계훈을 구해냈지만, 그는 결국 백채원 때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도대체 왜 악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버젓이 살아가는 것일까?’...“엄마.”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지아는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소녀는 바로 백채원과 꼭 닮은 모습이었지만, 키는 지아의 아들 지윤보다 훨씬 작았다. ‘이 아이... 바로 이채나군...’이채나, 전림과 백채원 사이의 유일한 혈육. 지금 채나가 아마 학교에서 돌아온 듯, 아직 교복 차림이었다.채나의 얼굴을 보자, 지아는 그동안 이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채원은 딸을 보자 눈이 반짝였다. “우리 딸, 어서 엄마한테 와서 얼굴 좀 보여줘.”채나의 눈은 전효와 많이 닮아 있었다. 지아는 채나를 통해 채원과 전림, 두 사람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이 아이랑 우리 지윤이의 생일도 얼마 안 남았네. 올해 두 아이 다 만으로 아홉 살이 되는구나...’전효 때문일까, 지아는 이상하게도 채나에게는 아무런 악감정이 들지 않았다.“이분은 누구세요?” 채나의 시선이 지아에게로 향했다.채원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딸, 이분은 명의 바네사 선생님이야. 엄마 아픈 다리를 많이 회복시켜 주셨어. 이분 덕분에 수술만 하면 엄마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야.”채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도 나중에 의사선생님 되고 싶어요. 나중에 선생님께 질문해도 돼요?”지아는 어린 시절 채나와 지윤이 함께 자랐던 것이 기억났다. 지윤은 독립적이었고, 채나보다 훨씬 발육이 좋았다. 지윤이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채나는 겨우 소파를 붙잡고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모녀 간의 혈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채나는
지아는 이들의 복잡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딸이 도윤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이것 역시 지아가 도윤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너무 많은 ‘가시’가 있었고, 그 가시들을 다 뽑아낸다고 해도 남은 상처는 여전히 지아에게 과거의 아픔과 고통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것이다. 도윤과 지아 사이에는 백채원과 이채나뿐만 아니라, 도윤의 여동생 이예린도 존재했다. 최근 며칠 동안 도윤과 지아는 가까워졌지만, 채나가 도윤을‘아빠’라고 부른 한마디는 마치 차가운 물이라도 끼얹은 듯 지아의 마음속 도윤에 대한 열기를 식혀버렸다.[음, 오늘은 조금 어려울 것 같아.]도윤은 천천히 말했다. [아빠 일이 좀 많아서. 나중에 시간 나면 꼭 데리러 갈게. 함께 가고 싶은 식당도 예약해 둘게.]도윤은 채원과 얽히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만약 식사한다면, 그것은 오직 채나와 단둘이서 할 생각이었다.채나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묻어났다. 아이도 진정으로 도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채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내일 엄마한테 수술해 주신대요. 아빠, 오늘 밤에 우리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면 안 돼요?”잠시 후, 도윤은 마침내 승낙했다. [그래, 아빠 퇴근하고 나서 갈게.]지아는 도윤이 왜 승낙했는지 알고 있었다. 며칠 전, 도윤은 밤에 담을 넘으려다 실패한 적이 있었다. 어젯밤에는 부남진이 직접 부하들을 데리고 와 도윤을 붙잡았고, 도윤은 외벽을 넘으려다 결국 궁지에 몰렸다. 미리 도윤에게 신호를 보내주던 사람도 다른 곳으로 전출되어, 도윤은 어쩔 수 없이 붙잡히고 말았다.부남진은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도윤을 바라보았다. “이 늦은 밤에 자네는 이걸 운동 삼아 하는 거라고 생각해야 하나?”도윤조차도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일이 알려지면 도윤의 입장에서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 부남진에게 몇 마디 훈계를 들은 후, 도윤은 경비병의 호위를 받아
지아는 두 손가락으로 백지수표를 집어 들며 차가운 시선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백호는 담담하게 답했다. “사적인 이유입니다. 선생님이 협조해 주길 바랍니다.”“하지만 제가 이미 동생분에게 내일 수술 성공 확률이 높다고 말씀드렸습니다.”백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수술이란 시험과 같은 것이죠. 가끔 실수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그럼 백호 씨의 뜻대로 하죠.” 지아는 펜을 들어 수표에 ‘200억’이라는 금액을 적었다. “백호 씨, 이 정도면 괜찮으신가요?” 지아는 일부러 큰 금액을 불렀다.백호는 수표를 한 번 쓱 보고 말했다. “문제없어요. 좋을 대로 하세요.”지아는 수표를 챙기며 말했다. “그럼, 좋은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백호는 ‘바네사’의 명성을 들어왔었다. ‘바네사’는 어느 병원에도 속해 있지 않고, 사람을 살리거나 치료하는 것도 그녀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백호는 ‘바네사’가 이 거래를 받아들일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바네사’가 동의해주었다.백채원은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도윤이 도착한 것은 꽤 늦은 시간이었고, 지아는 차실에서 백중권을 모시고 차를 마시며 도윤이 오는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도윤의 손에는 투명한 작은 선물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흰색과 빨간색 에콰도르 장미로 만든 작은 눈사람이 들어 있었다. 그 눈사람은 옆으로 빼뚜름하게 산타모자를 걸치고 있었고, 매우 귀여워 보였다.이제야 도윤이 늦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선물을 사러 갔던 것이다.채나는 멀리서 도윤을 보자마자 달려갔다. 도윤은 눈사람을 채나에게 건네주었고, 아이는 무척 기뻐하며 도윤의 팔을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우리 채나도 많이 컸구나!”도윤은 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채원은 오랜 시간 화장을 하고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객관적으로 보면, 채원의 외모는 미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식사 자리에서 백중권은 진지한 표정으로 도윤의 손을 잡고 말했다.“내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다, 도윤아. 원래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손녀사위감은 자네였는데, 자네와 채원이는 인연이 없었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많은 걸 바라지 않겠네. 다만 우리 두 집안의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앞으로 우리 집안에 해를 끼치지 말고, 많이 도와주게나.”백중권이 이 말을 할 때 백호는 잔을 꽉 쥐고 있었지만, 백중권의 시선을 의식하자 백호는 다시 가식적인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지아는 이전에 백호가 하용과 만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백호가 분명 하씨 가문과 한 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백중권의 말에 백호가 불만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백호야, 너도 도윤이에게 많이 배워야 한다.”백호는 잔을 들며 도윤에게 겸손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도윤은 백호의 시선을 스치며 알 수 없는 깊은 눈빛을 보였다. “그래요.”채원도 잔을 들어 올리며 도윤에게 말했다. “도윤 씨, 나 내일 수술 받는데... 와줄 수 있겠어요?”채원은 도윤에게 수없이 거절당했기에, 이번에도 도윤이 어떻게 대답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와 행동에는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었다.“그래.”이 수술은 지아가 집도하는 것이었고, 도윤은 지아와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 특히 그는 이제 부씨 가문의 저택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결국 채원의 제안을 승낙했다.채원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도윤 씨가 있으면 난 정말로 안심이 될 거예요.”백호는 채원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속에서 질투가 일어나 마치 수천 마리의 벌레가 그의 심장을 갉아먹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 질투 때문에 백호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졌다.지아는 아무렇지 않게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았다. ‘백호는 진심으로 백채원을 사랑했지. 정말 뼛속까지 깊이 사랑했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채원의 눈과 마음속에는 오직
지아는 목소리를 낮추며 도윤을 밀었다. “장난치지 마.”하지만 차가운 눈 속에서 도윤은 술기운에 살짝 취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난 네가 그리웠어. 이제는 저 ‘늙은이’가 담 넘는 것도 막아.”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서글픔이 묻어 있었고, 지아는 비록 현장을 보지 못했지만 그 장면을 상상하니 꽤 흥미진진했다. ‘언제나 단단하고 고고했던 이도윤이 그런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을까?’지아는 발끝을 살짝 들어 도윤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알았어, 그만해. 밤에 보상해줄게.”두 사람은 자신들 가까이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 광경을 몰래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채나였다. 채나는 엄마가 또 그 ‘나쁜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밖으로 나왔지만, 자신이 본 화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채나는 의식이 생긴 후로 줄곧 아버지 이도윤을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특히 어머니 백채원에게는 더욱 냉담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빠가 엄마에게 미소 지은 적이 없었어. 아빠는 늘 엄마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지.’ ‘난 그게 아빠의 원래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아빠가 의사 선생님에게 따뜻한 미소를 짓고,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안아주다니!’ ‘나에게조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그 미소를...’ ‘왜일까? 아빠는 엄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면서, 다른 여자에게는 저렇게 따뜻하게 웃어주는 걸까.’채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토록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아빠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채나는 언젠가 아빠가 다시 엄마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장면을 본 이상, 그 희망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다.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벗어나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는데, 다이닝 룸으로 돌아오니 채나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백중권이 말했다. “채나가 엄마를 찾으러 갔는데, 너희는 못 봤니?”지아는 눈빛이 흔들렸고, 무슨 일
도윤과 지아의 아이들 중 지윤은 여전히 외부에서 훈련 중이었다. 나머지 세 아이도 각기 다른 곳에 있었고, 이 모든 것은 과거에 지아가 스스로 도윤과 아이들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아는 도윤조차도 아이들이 어디에서 학교를 다니는지 알 수 없게 비밀에 부쳤다.설령 도윤이 채나에게 잘해줄 만한 이유가 있다 해도, 지아는 도윤이 남의 아이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지아는 운전대를 꽉 잡으며 스스로에게 채나에게 화내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결국 지아는 부씨 가문 저택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갔다....한편, 백씨 가문의 저택에서는 백채원이 백호의 폭력적인 욕망에 억눌려 있었다. 차가운 거울 앞에서 백호의 거친 행동을 참아내며 채원은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몇 분이 지나고서야 백호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물러났다.채원은 그의 어깨를 꽉 물며 소리쳤다. “이 쓰레기 같은 놈!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어!”백호는 광기로 가득 찬 표정으로 답했다. “너에게 내 아이를 낳게 할 거야!”“넌 미쳤어!” 채원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같은 놈의 아이를 가질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백호는 그녀의 턱을 꽉 잡고 말했다. “넌 평생 내 거야! 절대 너를 떠나보내지 않을 거다.”채원은 자신이 왜 이런 미친 사람과 얽히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거만한 그녀도 할아버지인 백중권에게는 한마디도 감히 꺼내지 못했다. 백중권은 이미 오늘 내일을 알 수 없는 풍전등화 같은 나이였고, 이런 일로 자극을 받았다가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랐기 때문이다.채원은 이미 부모님을 떠나보냈다. 백중권은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채원은 백호의 모든 학대를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었다. 이제 채원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수술을 통해 다시 걷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