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란의 위협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전향자는 철저히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금세 당시의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하늘과 땅에 대고 맹세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 우유에 독이 든 줄 몰랐어요. 그 우유를 제가 마셨다가 병원에 실려 가고 난 뒤에야 뭔가 잘못된 걸 알게 됐죠. 그래서 명란이를 찾아가 따졌더니 그제야 딸이 계획을 털어놓았어요. 이후로는 절대로 아이에게 독을 먹이지 않았어요.”전향자는 이명란을 비난하며 말했다. “그때 저도 명란이에게 속은 것뿐이에요. 당신들이 찾는 사람은 바로 명란이에요. 제가 아이에게 독 먹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 아이는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할 거예요.”지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그렇다고 깨끗한 척은 하지 마세요. 독을 먹이지 않은 건, 할머니도 결국 책임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더 잔인한 방법을 선택했잖아요. 아이를 속여서 집에 보낸 뒤, 결국 홍수에 휩쓸리게 만든 거잖아요.”이명란과 그녀의 가족은 모두 악마였지만, 화연은 이런 악몽 같은 상황에서도 결국 살아남았다.“선생님, 저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어요. 제 남편들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저 혼자 시골에서 먹고 살길도 없는데, 제가 어린아이를 어떻게 키우겠어요? 아이가 7살이 되어서 학교에 보내려고 했는데, 딸년이 양심도 없어서 저한테 돈 한 푼도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이가 저 같은 가난한 늙은이와 함께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죠.”전향자가 어떤 의도였든, 결국 화연에게 독이 든 우유를 먹이지 않은 덕분에 화연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할머니, 저희가 할머니를 모신 이유는 지금 이 사건의 증인으로 나서서 경찰에 협조해 그때 있었던 일을 낱낱이 밝히길 원하기 때문이에요.”이명란은 눈을 감고,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제발 미셸만은 살려주세요. 미셸은 어쨌든 사모님께서 정성으로 키운 아이입니다. 사모님의 친딸이나 다름없습니다. 미셸이
미셸은 자기 생모의 피가 묻은 과도를 쥔 채 민연주를 향해 걸어갔다. 이 광경은 어처구니없고, 아이러니한 모습이었다. 하용은 미셸이 화연을 해칠까 봐 화연의 앞을 가로막았고, 부장경은 놀라서 새하얘진 얼굴로 민연주 앞을 지켰다.“세상에! 살인이다!”전향자는 비명을 지르며 피가 튈까 봐 멀리 도망갔다.지아는 이 광경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이 가족은 정말 정상적이 아니네. 어머니는 자식을 인정하지 않고, 자식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어.’‘이명란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자기 친딸도 엄마에게 조금의 연민조차 없었어. 이명란은 그런 대가를 치러 마땅하지.’민연주는 서둘러 미셸을 막아섰다. “이쪽으로 오지 마.”“엄마, 어떻게 나를 버릴 수 있어요? 나는 설이에요. 내가 엄마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엄마가 나를 어떻게 부인할 수 있어요.”부장경은 칼을 든 미셸을 간단하게 제압했다. 미셸은 사실 다른 사람들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빠, 오빠는 나를 제일 아꼈잖아.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미셸의 눈물에 부장경이 느끼는 감정은 오직 단 한 가지였다. ‘악어의 눈물...'오늘 이명란의 세 모녀가 보여준 행동들은 부장경에게 크디큰 충격을 주었다. 잔혹함도 유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지아는 이명란의 상처를 살펴보고 응급 처치를 했다. 집에는 더 이상의 의료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지아는 경호원들에게 이명란을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이명란이 저지른 일들은 분명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부씨 가문의 저택에서 죽는다면 부씨 가문에게는 큰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미셸은 다시 방으로 끌려가 감시를 받으며 지내게 되었다. 민연주는 사람들을 불러서 혈흔이 있는 카펫을 교체하게 했고, 하용은 화연을 조심스럽게 달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화연은 이미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화연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지만
화연은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감기만 하면 이명란을 찌른 칼에서 떨어지던 그 선명한 피의 붉은색이 떠올랐다. 지아는 예정된 시간에 와서 화연에게 침을 놓으며 말했다.“고모님이 잠들지 않고 계시는 거 알아요.”화연은 눈을 뜨고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네.” 지아는 은침을 내리며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고모님의 잘못은 너무 착하고, 지나치게 마음이 여리다는 거예요.”“지아야...”지아는 마치 아이같이 순수하고 맑은 화연의 눈동자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제가 고모님을 구해드린 이유도 바로 고모님의 이 눈동자 때문이었어요. 고모님은 정말 예전의 저와 많이 닮았거든요. 저도 한때는 사람들과 잘 지내면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었죠. 하지만, 고모님,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오히려 고모님이 남을 너무 많이 생각할수록, 그 사람들은 그것을 더 당연하게 여길 거예요.”“사실, 고모님의 연약함은 고모님 자신에게만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들 수 있어요.”그 순간 지아는 과거에 강미연이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그때 죽지 않았다면 미연이는 지금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모든 걸 잃고 땅속에 묻히고 말았어...’“지아야,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남을 구하려는 집착은 이제 내려놓으셔야 해요. 그 사람들에게 자기 운명은 자기 스스로 감당하게 두세요. 불필요한 동정은 하지도 말고, 이제 고모님 자신만 생각하세요. 그리고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사라진 고모님의 아이를 기억하세요. 조금 더 단호해지셔야 고모님도, 가족도 지킬 수 있어요. 제 말, 이해하셨죠?”지아는 화연이 자신이 했던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랐다. 지나친 선량함은 결국 남의 손에 내가 쥐여주는 칼이 될 뿐이니까.화연은 평평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소지아는 백채원이 저지른 일들을 절대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도윤의 일은 차치하고라도, 백채원 때문에 자신의 부모님, 특히 아버지 소계훈이 죽은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지아가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여 소계훈을 구해냈지만, 그는 결국 백채원 때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도대체 왜 악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버젓이 살아가는 것일까?’...“엄마.”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지아는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소녀는 바로 백채원과 꼭 닮은 모습이었지만, 키는 지아의 아들 지윤보다 훨씬 작았다. ‘이 아이... 바로 이채나군...’이채나, 전림과 백채원 사이의 유일한 혈육. 지금 채나가 아마 학교에서 돌아온 듯, 아직 교복 차림이었다.채나의 얼굴을 보자, 지아는 그동안 이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채원은 딸을 보자 눈이 반짝였다. “우리 딸, 어서 엄마한테 와서 얼굴 좀 보여줘.”채나의 눈은 전효와 많이 닮아 있었다. 지아는 채나를 통해 채원과 전림, 두 사람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이 아이랑 우리 지윤이의 생일도 얼마 안 남았네. 올해 두 아이 다 만으로 아홉 살이 되는구나...’전효 때문일까, 지아는 이상하게도 채나에게는 아무런 악감정이 들지 않았다.“이분은 누구세요?” 채나의 시선이 지아에게로 향했다.채원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딸, 이분은 명의 바네사 선생님이야. 엄마 아픈 다리를 많이 회복시켜 주셨어. 이분 덕분에 수술만 하면 엄마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야.”채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도 나중에 의사선생님 되고 싶어요. 나중에 선생님께 질문해도 돼요?”지아는 어린 시절 채나와 지윤이 함께 자랐던 것이 기억났다. 지윤은 독립적이었고, 채나보다 훨씬 발육이 좋았다. 지윤이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채나는 겨우 소파를 붙잡고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모녀 간의 혈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채나는
지아는 이들의 복잡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딸이 도윤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이것 역시 지아가 도윤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너무 많은 ‘가시’가 있었고, 그 가시들을 다 뽑아낸다고 해도 남은 상처는 여전히 지아에게 과거의 아픔과 고통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것이다. 도윤과 지아 사이에는 백채원과 이채나뿐만 아니라, 도윤의 여동생 이예린도 존재했다. 최근 며칠 동안 도윤과 지아는 가까워졌지만, 채나가 도윤을‘아빠’라고 부른 한마디는 마치 차가운 물이라도 끼얹은 듯 지아의 마음속 도윤에 대한 열기를 식혀버렸다.[음, 오늘은 조금 어려울 것 같아.]도윤은 천천히 말했다. [아빠 일이 좀 많아서. 나중에 시간 나면 꼭 데리러 갈게. 함께 가고 싶은 식당도 예약해 둘게.]도윤은 채원과 얽히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만약 식사한다면, 그것은 오직 채나와 단둘이서 할 생각이었다.채나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묻어났다. 아이도 진정으로 도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채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내일 엄마한테 수술해 주신대요. 아빠, 오늘 밤에 우리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면 안 돼요?”잠시 후, 도윤은 마침내 승낙했다. [그래, 아빠 퇴근하고 나서 갈게.]지아는 도윤이 왜 승낙했는지 알고 있었다. 며칠 전, 도윤은 밤에 담을 넘으려다 실패한 적이 있었다. 어젯밤에는 부남진이 직접 부하들을 데리고 와 도윤을 붙잡았고, 도윤은 외벽을 넘으려다 결국 궁지에 몰렸다. 미리 도윤에게 신호를 보내주던 사람도 다른 곳으로 전출되어, 도윤은 어쩔 수 없이 붙잡히고 말았다.부남진은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도윤을 바라보았다. “이 늦은 밤에 자네는 이걸 운동 삼아 하는 거라고 생각해야 하나?”도윤조차도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일이 알려지면 도윤의 입장에서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 부남진에게 몇 마디 훈계를 들은 후, 도윤은 경비병의 호위를 받아
지아는 두 손가락으로 백지수표를 집어 들며 차가운 시선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백호는 담담하게 답했다. “사적인 이유입니다. 선생님이 협조해 주길 바랍니다.”“하지만 제가 이미 동생분에게 내일 수술 성공 확률이 높다고 말씀드렸습니다.”백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수술이란 시험과 같은 것이죠. 가끔 실수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그럼 백호 씨의 뜻대로 하죠.” 지아는 펜을 들어 수표에 ‘200억’이라는 금액을 적었다. “백호 씨, 이 정도면 괜찮으신가요?” 지아는 일부러 큰 금액을 불렀다.백호는 수표를 한 번 쓱 보고 말했다. “문제없어요. 좋을 대로 하세요.”지아는 수표를 챙기며 말했다. “그럼, 좋은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백호는 ‘바네사’의 명성을 들어왔었다. ‘바네사’는 어느 병원에도 속해 있지 않고, 사람을 살리거나 치료하는 것도 그녀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백호는 ‘바네사’가 이 거래를 받아들일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바네사’가 동의해주었다.백채원은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도윤이 도착한 것은 꽤 늦은 시간이었고, 지아는 차실에서 백중권을 모시고 차를 마시며 도윤이 오는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도윤의 손에는 투명한 작은 선물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흰색과 빨간색 에콰도르 장미로 만든 작은 눈사람이 들어 있었다. 그 눈사람은 옆으로 빼뚜름하게 산타모자를 걸치고 있었고, 매우 귀여워 보였다.이제야 도윤이 늦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선물을 사러 갔던 것이다.채나는 멀리서 도윤을 보자마자 달려갔다. 도윤은 눈사람을 채나에게 건네주었고, 아이는 무척 기뻐하며 도윤의 팔을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우리 채나도 많이 컸구나!”도윤은 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채원은 오랜 시간 화장을 하고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객관적으로 보면, 채원의 외모는 미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식사 자리에서 백중권은 진지한 표정으로 도윤의 손을 잡고 말했다.“내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다, 도윤아. 원래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손녀사위감은 자네였는데, 자네와 채원이는 인연이 없었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많은 걸 바라지 않겠네. 다만 우리 두 집안의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앞으로 우리 집안에 해를 끼치지 말고, 많이 도와주게나.”백중권이 이 말을 할 때 백호는 잔을 꽉 쥐고 있었지만, 백중권의 시선을 의식하자 백호는 다시 가식적인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지아는 이전에 백호가 하용과 만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백호가 분명 하씨 가문과 한 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백중권의 말에 백호가 불만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백호야, 너도 도윤이에게 많이 배워야 한다.”백호는 잔을 들며 도윤에게 겸손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도윤은 백호의 시선을 스치며 알 수 없는 깊은 눈빛을 보였다. “그래요.”채원도 잔을 들어 올리며 도윤에게 말했다. “도윤 씨, 나 내일 수술 받는데... 와줄 수 있겠어요?”채원은 도윤에게 수없이 거절당했기에, 이번에도 도윤이 어떻게 대답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와 행동에는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었다.“그래.”이 수술은 지아가 집도하는 것이었고, 도윤은 지아와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 특히 그는 이제 부씨 가문의 저택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결국 채원의 제안을 승낙했다.채원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도윤 씨가 있으면 난 정말로 안심이 될 거예요.”백호는 채원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속에서 질투가 일어나 마치 수천 마리의 벌레가 그의 심장을 갉아먹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 질투 때문에 백호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졌다.지아는 아무렇지 않게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았다. ‘백호는 진심으로 백채원을 사랑했지. 정말 뼛속까지 깊이 사랑했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채원의 눈과 마음속에는 오직
지아는 목소리를 낮추며 도윤을 밀었다. “장난치지 마.”하지만 차가운 눈 속에서 도윤은 술기운에 살짝 취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난 네가 그리웠어. 이제는 저 ‘늙은이’가 담 넘는 것도 막아.”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서글픔이 묻어 있었고, 지아는 비록 현장을 보지 못했지만 그 장면을 상상하니 꽤 흥미진진했다. ‘언제나 단단하고 고고했던 이도윤이 그런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을까?’지아는 발끝을 살짝 들어 도윤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알았어, 그만해. 밤에 보상해줄게.”두 사람은 자신들 가까이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 광경을 몰래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채나였다. 채나는 엄마가 또 그 ‘나쁜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밖으로 나왔지만, 자신이 본 화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채나는 의식이 생긴 후로 줄곧 아버지 이도윤을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특히 어머니 백채원에게는 더욱 냉담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빠가 엄마에게 미소 지은 적이 없었어. 아빠는 늘 엄마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지.’ ‘난 그게 아빠의 원래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아빠가 의사 선생님에게 따뜻한 미소를 짓고,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안아주다니!’ ‘나에게조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그 미소를...’ ‘왜일까? 아빠는 엄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면서, 다른 여자에게는 저렇게 따뜻하게 웃어주는 걸까.’채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토록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아빠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채나는 언젠가 아빠가 다시 엄마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장면을 본 이상, 그 희망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다.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벗어나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는데, 다이닝 룸으로 돌아오니 채나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백중권이 말했다. “채나가 엄마를 찾으러 갔는데, 너희는 못 봤니?”지아는 눈빛이 흔들렸고, 무슨 일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