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고개를 돌려 애써 당황하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부장경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고 지아는 긴장되기 시작했다. 만일 그녀의 신분이 발각된다면 혹시 도윤도 같이 피해를 보진 않을까? 그들은 무조건 자신을 도윤이 심어놓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때 의외로 부장경은 스카프를 건넸다. “여기 물건이 떨어졌습니다.” 지아는 그의 손에 들린 스카프를 보았는데 원래 가방에 묶어 놓았던 게 떨어졌던 것이다. 순간 긴장되었던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감사합니다.” 지아는 급히 밖으로 나갔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장민호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지아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옛 지인을 만났어요. 얼른 가요.” 지아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에 장민호도 더 이상 묻지 않았고 화제를 돌렸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지아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정신이 딴 데 팔린 듯 말했다. “다 좋아요.” “그럼 제가 알아서 고를게요.” 장민호는 지아를 데리고 고급 커플 레스토랑으로 향했는데 사실 전이었다면 그는 이런 곳에는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아를 몇 번 만난 뒤로 그는 무슨 일인지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보기도 하고 특별히 기억해 두기도 했다. 오늘 온 이 레스토랑은 그 중에서도 평가가 가장 높고 환경이 제일 좋은 곳이었다. A의 야경은 아주 예뻤고 온통 눈으로 뒤덮인 도시 전체는 마치 동화에 나올 법한 한 장면 같았다. 지아가 마침 메뉴를 다 골랐을 때 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설마 혹시? 또 부장경과 그의 맞선 상대였던 것이다. 다행히 부장경은 지아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고 지아는 장민호와 몇 마디 나누었는데 갑자기 전화 한 통을 받던 장민호가 안색이 급변하고 말았다. 지아는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하더니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장민호는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죄송합니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겨 지금 당장 가
첫 해 지아는 장민호의 출신을 조사했고 그가 사생아라는 것을 발견했다. 때문에 그가 평생 가장 증오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그의 어머니인 고심옥이었다. 당시 젊고 예뻤던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정실 부인을 쫓아내려다 되려 그에 의해 얼굴이 망가졌고 심지어 장민호까지 가문에서 버려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장민호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에게 여우 같은 첩의 자식이라고 놀림을 당하곤 했다. 고심옥은 줄곧 장씨 가문에 발을 들여놓으려 했고 그로 인해 정신 상태까지 좋지 않아졌다. 장민호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청해 그녀를 보살피도록 했고 적어도 그녀가 먹고 지내는 면의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었다. 하지만 그는 매번 집으로 올 때마다 멀리서 어머니를 지켜보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가진 않았다. 장민호는 마음에 이 어머니란 존재를 품고 있는 동시에 그녀의 과거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아는 그의 어머니가 매일 저녁 비가 오던 눈이 오던 늘 같은 카페에서 두 잔의 커피를 사러 간다는 걸 알고 미리 준비를 해두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녀를 넘어지게 하는 것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당시 장민호가 강미연을 이용하여 지아를 해치려 했을 때는 분명 자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지아에게 당하게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 집은 300평이 넘고 온통 고급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는데 장민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꽤 잘해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때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말했다. “도련님, 제가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사모님께서는 전처럼 커피를 사러 나가셨는데 돌아오시는 길에 넘어지신 것 같아요. 일단 친구 분의 방법대로 임시 처치를 마친 상태이고 지금 안정을 많이 되찾으셨어요.” “제가 가보겠습니다.” 고심옥은 안방의 침대에 누워있었고 오른쪽 얼굴에는 큰 흉터가 하나 있었는데 아마 당시 정실 부인이 남긴 것으로 보였다. “좀 어때요?” 고심옥은 이미 여러 해 동안 장민호를 보지 못했기에 그녀는 장민호가 원래 이렇게 생긴 줄 알
장민호는 지아를 바깥의 거리까지 데려다 주었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두 사람의 몸을 스치고 있었다. 이때 지아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연고는 제가 내일 아침 퀵으로 보내 드릴게요. 민호 씨...” 지아는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무언가 주저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앞으로 더 이상 만나지 말아요.” “왜요?” 장민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아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저 두려워서요.” 장민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뭐가 두려운 거죠?” “그러니까 저는...” 지아는 얼굴이 새빨개졌고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이때 차량 한 대대가 지아 앞에 멈췄고 그제야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제가 민호 씨를 좋아하게 될까 봐서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볼게요.” 지아는 부랴부랴 차에 탔고 엄청난 속도로 떠나 버렸다. 장민호는 그대로 멍하니 눈밭에 서서 지아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머릿속은 온통 새하얘졌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날 좋아한다고?’ ‘그녀의 집안을 부숴버린 나 같은 쓰레기가 뭐가 좋다고?’ 하지만 장민호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왔다. 장민호는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이 그의 몸에 우수수 떨어지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집으로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지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뜨거운 품에 안겼고 도윤은 그녀의 귀를 깨물며 물었다.“또 사람 꼬시러 간 거야?” 그녀는 귀걸이를 뺐고 두 손으로 도윤의 목을 감싸 안아 입을 맞추었다. “화 났어?” “어떨 것 같은데?” “그냥 장민호 어머니의 병을 봐주러 그의 집에 간 것뿐이야. 이제 한 단계만 있으면 그는 날 완전히 사랑하게 될 거야.” 지아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묻어났다.“도윤, 이제 장민호가 모든 진실을 알았을 때 무슨 표정을 지을까? 난 그가 강미연의 무덤 앞에서 무릎 끓고 후회할 모습이 벌써 너무 기대돼.” “죄악을 저지른 자는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도윤은 지아가 이틀 동안 휴가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특별히 자신도 하루 휴가를 냈다. 두 사람은 꼭 안은 채 단잠에 빠졌고 지아가 눈을 떴을 때는 도윤이 곁에서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안 바빠?” “네가 오늘 휴가인 걸 알고 미리 오늘 우리의 일정을 안배해 두었지. 다 잤어?” “응, 무슨 일정?” “서프라이즈야.” 지아는 도윤이 도대체 뭘 준비한 건지는 몰랐지만 일단 준비를 마친 뒤 함께 헬기에 탔다. 헬기는 약 2시간에 거쳐 한 섬에 도착했다. “여기서 휴가를 보내자는 거야?” “아니.” 도윤은 지아의 손을 잡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숲 속에서는 총소리가 들려왔고 도윤은 그녀를 데리고 한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아는 곧바로 도윤의 뜻을 알아챌 수 있었는데 한 아이가 숲속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그건 바로 지윤이었다. 지윤을 발견한 지아는 순간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윤이야.” “오늘 훈련이 끝나는 날이야. 네가 계속 지윤이 어떻게 지내는 지 물어보길래 어떻게 지내는 지 보여주려고 널 여기 데려온 거야.” “지윤은 아주 훌륭해. 이번 야외 훈련에서 또 1등을 했어. 조금 있다가 네가 가서 그 애에게 시상을 해줘.”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지아는 지윤의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다. 3년이란 시간 동안 지윤은 키가 훌쩍 커버렸는데 분명 아직 9살도 안 되는 아이가 170m가 거의 되어 보였다. 지아는 꿈 속에서 지윤을 자주 보곤 했는데 매번 볼 때마다 그는 눈밭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반나절이 지난 후 모든 사람들이 숲속에서 나왔고 지아는 지윤 곁에 있는 아이들이 바로 전에 그를 괴롭히던 아이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의외인 것은 몇 년 사이에 그 아이들이 전부 지윤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지윤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굴복한 모양이다. 도윤은 지아에게 가면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가자, 아들에게 시상할 차례야.”지아는 한 손에는 훈장을,
지윤은 지아의 품에 안긴 채 눈물을 흘렸고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엄마야? 엄마!” 지아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아이를 안은 채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이제야 보러 왔어.” “엄마, 엄마가 나 버린 줄 알았잖아요. 이 섬에서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다고요.” 매년 벚꽃이 필 때마다 지윤은 섬에 가곤 했고 벚꽃이 만개할 때부터 질 때까지 한없이 기다려도 지아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윤은 줄곧 도윤에게서 엄마를 찾지 못했단 소식만 들었고 한 해 또 한 해가 반복될 록 지윤은 설마 엄마가 자신을 버렸기에 보러 오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 엄마가 잘못했어. 엄마가 미안해. 이렇게 오랫동안 보러 오지 않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어떻게 내 새끼를 버렸을 리 있겠어?” 만약 지윤이 맏아들만 아니었다면 지아도 자신이 이 아이를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지윤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울지 마, 엄마는 영원히 널 사랑해.” 분명 훌쩍 커버린 지윤이었지만 울 때는 여전히 아이 같았다. “우리 지윤이 키가 이제 엄마와 비슷해졌네. 시간 참 빨라.” “아빠가 말하길 엄마가 아프셔서 멀리 치료하러 가야 한다고 했는데 다 나았어요?” 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위험한 고비는 이제 다 넘겼어. 엄마가 네 몸 좀 봐도 될까?” 지윤은 여전히 망설였지만 지아는 순식간에 그의 옷을 벗겼고 지윤이 몸에는 여러 군데의 상처가 있긴 했지만 다행히 전부 치명상은 아니었다. “엄마, 걱정 마세요. 아빠가 절 위험한 곳으로 보내진 않아요. 단지 훈련을 열심히 하라고 할 뿐이죠. 그래야 커서 엄마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지윤은 자신의 근육을 보여주며 말했다. “보세요, 저도 이제 남자라고요.” “우리 아들 제일 멋져.” 지아는 이렇게 건강하게 큰 아들을 보면서 아주 기뻤다. “엄마, 아빠가 말하길 여동생 한 명 더 나았다면서요? 눈은 초록색이고요.” 지아는 핸드폰 안의 무무의 사진을 지윤에게 보여주
다음날, 지아는 퀵으로 고심옥에게 연고를 보냈고 자신은 부씨 가문으로 돌아왔다. 이틀 동안 부씨 가문은 꽤 조용했다. 미셸은 하용에게 이끌려 다녔는데 비록 그녀는 하용이 죽도록 싫었지만 부모님과 한 약속이 있었기에 억지로 하용과 협조할 수밖에 없었고 이틀 동안 줄곧 밖에서 그와 데이트를 했다. 미셸이 없는 부씨 가문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왔느냐? 여기 내가 쓴 글을 좀 보거라.” 부남진이 지아를 향해 손짓했다. 지아는 웃으며 다가갔고 주동적으로 먹을 갈며 입을 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것이 각하께서 글을 이렇게 잘 쓰시는 보니 분명 그림도 잘 그리시겠죠?’ 부남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좀 그릴 줄 안단다.” “각하, 정신 상태도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다 네 덕분이지.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을 하련다. 안전을 위해 네가 내 곁에 있어줄 수 있겠지?” “전에 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적 있는데 전 상관없습니다. 각하의 부상이 다 낫기 전까지 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다행이야. 얘야, 네가 이틀 동안 없으니 꽤 그립더구나.” 지아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각하께서는 제가 옆에서 말동무를 해드리는 게 익숙해진 게 아닐까요?” “그런 것 같구나. 내 지위가 높다 보니 나를 쫓아다니며 아부하는 사람은 적지 않아.”“하지만 난 내 베갯머리에 함께인 자와도 할 말이 없어진 지 오랜데 네가 내 곁에 있기만 하면 내가 몇 마디 할 수 있으니 말이야.” 지아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그러다 제가 정 들어 떠나지 못할 것 같아요.” “얘야, 너 정말 꼭 가야 하는 거냐? 네가 남을 수만 있다면 난 어떤 조건이든 다 만족시켜줄 수 있어.” “할아버지의 부상이 다 나으면 저에겐 남아야 할 이유가 없어요. 이해 부탁드릴게요.” 지아가 장난스레 말했다. “전 아직 젊은데 벌써 한 곳에만 평생 머무르고 싶진 않아요. 넓고 큰 세상을 구경하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도움이 필요
들어온 사람은 민연주였다. 그녀는 대체 지아가 무슨 매력으로 부남진의 환심을 산 건지 알아내려는 듯 매번 지아가 약을 다리거나 할 때면 들어와 보곤 했다. 그런데 민연주는 오늘 들어오자마자 이런 장면을 보게 된 것이고 방금 부장경의 속도는 너무 빨랐기에 지아도 미처 막을 수 없었다. 원래도 이틀 전 미셸의 일로 예민해져 있던 민연주가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이 장면을 보고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민연주는 곧바로 지아를 향해 손을 휘둘렀는데 이를 본 부장경은 재빨리 그녀를 뒤로 감쌌고 결국 민연주는 자기 아들의 뺨을 때리고 말했다. “어머니, 지금 이게 뭐하는 겁니까?” “내가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어. 너희 부자 둘 다 저 바깥 사람을 이렇게 챙기고 도는 게 말이 돼? 며칠 전에 선을 보라 해도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고 하더니 저 여자는 어떻게 된 거야?” “네 동생이 한 바보짓도 모자라 이제 너도 날 기 채워 죽이려는 거야?” “어머니, 오해예요. 저와 바네사 씨는 억울하다고요.” “억울해? 내 눈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거야?” 민연주는 부장경을 옆으로 밀치고 눈을 부릅뜬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감히 내 아들을 꼬시려 해? 처음부터 이런 꿍꿍이를 품고 있을 줄 알았어. 지금 네 발로 나갈래? 아니면 내가 쫓아낼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연주는 분명 그날 밤 지아가 약을 탄 그 술을 마시는 걸 보았다. 하지만 필경 그 약을 탄 사람은 자신이니 먼저 그 일을 입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그날 밤 누가 지아의 증상을 완화시켜 준 거지? 설마 내 아들인 건가?’ ‘이 두 사람 내가 모로는 사이에 벌써 그 정도로 발전했던 거야?’ 민연주는 자신의 아들을 마치 늑대에게 빼앗긴 것처럼 지아의 손을 끌며 말했다. “가, 지금 당장 내 남편 앞에 가서 이실직고해.” 이에 지아는 어이가 없었고 왜 미셸이 부씨 가문 사람들을 닮지 않은 건지 이해가 갔다. 이제 보니 부장경은 부남진의 성격을 닮았고 미셸은 바로 어머니인 민연주의 성격을
부장경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고 지아와 아무런 원수도 없긴 했지만 계속 이렇게 가면 상황이 점점 더 커져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지아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부인, 오해하지 마세요. 전 부 선생님께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 게다가 전 이미 아이도 낳았고 남편도 있어요.” 이 말을 들은 부장경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말했다.“하지만 이미 기억을 잃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만일 평생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면요?” “딸도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전 바네사 씨의 딸을 제 친딸처럼 잘 보살필 자신도 있어요. 바네사 씨, 저 진심이예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민연주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장경의 뺨을 내리쳤다. “이 망할 놈아, 그게 지금 무슨 헛소리야? 너 정말 날 기 채워 죽일 생각이야? 네 신부감을 찾으라고 했더니 이런 헌신짝보다도 못한 여자를, 그것도 애까지 딸린! 미쳤어?” “어머니, 저도 이제 성인이예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요.” 이때 머뭇거리더니 지아가 손을 들며 말했다. “저기,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될 까요? 각하, 그리고 부인, 전 정말 하늘에 맹세코 부선생님을 유혹할 생각은 없었어요. 만일 부인께서 그렇게 불안하시다면 제가 지금 바로 부씨 가문을 떠날게요.” 이 말을 들은 부남진이 갑자기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 “새해가 되면 떠나기로 나와 약속 했잖아! 내 허락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어.” 민연주는 부남진의 화 내는 모습에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두 사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 여우 같은 년이 무슨 약이라고 먹인 거야?” 부남진은 싸늘한 눈길로 민연주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겨우 이따위 일로 난리를 친 거야? 저 두 사람이 무슨 못할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당신 아들도 이제 서른이 넘는 어른이니 여자에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니야?” “설마 당신 아들이 남자를 보고 설레야 만족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바네사가 뭐? 젊은 나이에 엄청난 의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