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눈을 번쩍 뜨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뭐라 그랬어요?”경훈은 당황한 표정이었다.“보스 방에서 이걸 찾았어요.”경훈에게 여기 머물면서 편히 쉬라는 쪽지였고 또 하나는 두툼한 봉투였다.“보스가 독극물에 중독되어 살아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 때 쓴 유언장인데 이 편지는 사모님께 쓴 거예요.”지아는 무거운 편지를 들고 방으로 돌아가 열어보았다.익숙한 글씨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사인할 때처럼 휘갈겨 쓴 글씨가 아닌 도윤 본인처럼 한 획 한 획 정갈하고 깔끔한 글씨체였다.[지아야,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거야.이 소식을 들으면 네가 기뻐할까, 아니면 슬퍼할까? 정말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니까 생각만큼 두렵지 않고 오히려 편안해. 죽으면 널 찾을 수 있지 않을까?네가 떠난 3년 동안 너를 생각하며 늘 그리워했는데, 내가 중독된 것 같아 너 말고는 다른 해독제가 없어.걱정 마, 지윤이는 키도 많이 크고 몸도 튼튼해졌어. 우리 아들 아주 대단해, 작년에는 3등 공로상까지 받았어. 너는 또 내가 잘 돌보지 않고 목숨을 걸게 했다고 원망하겠지.하지만 그래야만 아이도 더 빠르게 잘 성장할 수 있고 언젠가 내가 죽어도 널 지킬 수 있으니까.네가 옆에 없으니까 애가 나를 닮아 말수가 없어. 같이 있을 땐 말보다 침묵할 때가 더 많아. 종종 네가 준 작은 자물쇠를 들고 오후 내내 앉아서 바라보곤 해.애가 너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 이 편지를 받았다면 벚꽃이 만개하는 봄에 아이를 만나러 가.네가 벚꽃이 피면 같이 보러 간다고 약속해서 해마다 꽃이 피면 애가 함께 머물렀던 섬으로 돌아가서 해가 뜰 때부터 해 질 녘까지, 꽃이 피고 질 때까지 있어꽃이 피는 내내 아이는 널 기다리고 있어.해경이와 소망이도 많이 컸겠지. 아이들이 한 번도 날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게 일생의 한이야. 두 아이를 정말 사랑하지만 아빠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네.난 곧 죽을 거고,
편지지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종이를 꽉 잡은 지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사모님, 저희는 곁에서 두 분을 함께 지켜본 사람들입니다. 보스가 얼마나 사모님을 사랑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시겠지만 그동안 보스가 어떻게 살았는지, 사모님을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모르실 겁니다. 이번 독살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고, 구천에서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지 모릅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보스 본인도 피해자가 아닙니까? 잘 짜인 아가씨의 판에 보스도 속은 겁니다. 보스는 어렸을 때부터 가정이 산산조각 났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의지할 사람은 아가씨뿐이었습니다. 순진하게 아가씨가 전부라고 생각하며 수년 동안 찾았는데 돌아온 답이 그거라면 사모님은 어떤 선택을 하실 겁니까, 화를 내시겠습니까 아님 가족에게 복수를 하시겠습니까?전림의 죽음도 보스 마음속 짐이었습니다. 가까운 형제가 자기 대신 총알을 맞아 죽고 유일한 바람이 백채원을 돌보라는 건데, 보스가 결혼하기 싫어도 백채원의 협박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백채원은 항상 전림이 보스 대신 총을 막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거고, 자신은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아빠가 있었을 거라며 자신을 돌보라는 전림의 유언을 언급했습니다. 사모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선택을 하든 제일 힘든 건 보스였습니다. 사모님도 괴로운데 보스라고 괴롭지 않았겠습니까? 가족이 떠나고 형제가 죽고, 사모님과 인생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보스는 혼자였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잘못을 한 번도 안 할 수가 없는데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이제 한 번 더 사랑하는 게 그렇게 힘드십니까?”경훈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보스는 사모님을 많이 그리워했고 눈과 마음에는 처음부터 사모님밖에 없었습니다. 사모님이 떠나겠다고 하니 밤낮으로 힘들어도 보내줬습니다. 사모님은 아이도 있고 일도 있지만 보스에겐 뭐가 남았습니까? 수많은 적이 노리고 있고 책임과 부담을 짊어지면서 전쟁터를 누비며 혼자 꿋꿋이 버티고 있
절벽에 서니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날리고, 아래는 구름으로 가려져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지아는 도윤이 왜 이 길을 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위험하긴 했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 한은 적어도 감당할 수 있는 길이었다.이 길은 독극물이나 짐승이 없는 유일한 길이고 하늘의 뜻에 달린 데다 도윤은 암벽 등반 경험도 있었다.하지만 도구 없이 무작정 내려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고 조금만 부주의하면 온몸이 가루가 될 수 있었다.“사모님, 보스가 이 길로 갔다고요?”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냄새가 여기서 끊겼고, 여기 밧줄이 있는 걸 보면 떠나기 전에 만든 거예요.”“그럼 제가 찾으러 갈게요.”“그럴 필요 없어요. 이 산은 나만큼 익숙하지도 않고, 게다가 다리에 매일 침을 맞으면 격렬한 운동도 할 수 없는데, 평생 불구로 살고 싶지 않잖아요?”“사모님 말씀은...”지아가 경훈의 어깨를 두드렸다.“제가 갈게요. 제가 있는 곳에선 절대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게요.”어차피 며칠 뒤면 떠날 계획이었기에 산으로 갈 예정이었다.“할머님 잘 돌봐주세요.”“사모님 안 돼요, 위험해요.”“본인이나 챙겨요. 나도 위험한 일 많이 해봐서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지아는 도윤의 밧줄을 따라 천천히 내려와 착지했다. 도윤은 날이 밝아올 때 떠난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두운 곳에선 위험할 테니까.두 시간 정도 차이가 있으니 조금만 빨리 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어차피 지아에겐 처음 오는 곳도 아니고 처음 훈련을 받았을 때 이 절벽부터 시작했었다.매번 도윤이 응급실로 실려 간 후 자신들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듯한 간호사와 의사들이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과 미셸의 따귀를 떠올리면서 지아는 악에 받쳐 출산하기 전 의료 기술을 열심히 공부했고, 출산 직후부터 체력 훈련을 시작했다.병이 완치된 지아는 이제 남자 못지않은 강인한 체력을 갖게 되었다.제비가 돌담을 밟듯 민첩하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경훈도 깜짝 놀랐다.
지아는 지형을 잘 알고 있었지만 급하게 나오느라 장비를 다 챙기지 않은 데다 산속에는 신호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 돌아갈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바위가 미끄러워 몇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졌지만, 다행히 경험이 많았던 그녀는 넘어지면서 나뭇가지를 붙잡았다.격렬하게 잡아당기는 손은 진작 피투성이가 되어 처참했다.재수가 없는 데다 비까지 계속 내렸다.지아는 작은 나무에 서서 숨을 고르며 손바닥을 펴서 피 묻은 손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아팠지만 슬퍼할 시간이 없었고, 가장 시급한 것은 서둘러 절벽 아래로 내려가 도윤을 찾는 것이었다.숲이 워낙 복잡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단검과 총 외에는 아무런 보급품도 없는 상황에서 시간을 지체할수록 도윤과 엇갈리게 될 것이 뻔했다.생각보다 지아는 도윤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원초적인 반응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말로는 싫다고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도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며 지아는 장비도 챙기지 않고 떠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지아는 이를 악물고 남은 여정을 계속했는데, 중간에 몇 번 삐끗했지만 다행히도 길의 마지막 부분에는 아주 긴 덩굴이 있어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쏟아지는 빗줄기 아래 원시림은 특히 으스스해 보였다.맑은 날에도 머리 위 햇빛이 차단되어 있었는데, 흐린 날에는 빛이 더 어두웠다.낮이었다면 나무 그늘에 따라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최악의 상황이다.이런 곳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피난처를 찾아야 하는데, 비가 온 뒤 계곡의 기온이 낮아져 깨끗한 옷이 없으면 체온이 쉽게 떨어지고 뱀이나 벌레에게 물리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하지만 지아는 여전히 도윤이 걱정이 되어 쉴 수가 없었다.도윤은 그보다 두 시간 일찍 출발했는데, 내려올 때는 비가 오지 않았을 테고, 폭우에 그가 남긴 흔적은 모두 씻겨 내려갔을 것이다.지아는 나무 그늘에 서서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키 큰 초목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설명할 수 없는 속상함을 느꼈다.도대체 그녀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어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지아는 갑자기 바닥에서 뛰어올라 뱀 동굴에서처럼 도윤을 꼭 껴안았다.“나쁜 놈, 누가 도망가라고 했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도윤은 한쪽 무릎을 꿇고 동공이 심하게 확장되며 놀라움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어젯밤 지아는 분명 도윤을 역겹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미워했다.그는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고 지아를 울리지 않으려 그녀의 눈앞에서 눈엣가시가 되지 않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하지만 지아의 포옹에 불구덩이에서 타죽었던 재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고, 도윤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마구 뛰며 억눌렸던 감정이 조금씩 되살아났다.“지아야, 뭐라고 그랬어...”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나와 이를 갈았다.“내가 엄청 걱정했다고, 못 들었어?”지아는 도윤의 옷깃을 세게 잡아당기며 자신의 목을 기울여 도윤의 입술에 키스했다.도윤의 머릿속이 펑 터졌다.지... 지금 뭘 본 거지?지아가 먼저 입을 맞추다니.예전엔 지아와 입 맞추려 갖은 방법을 썼는데 오늘 그녀가 먼저 다가오자 도윤은 익숙하지 않은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도윤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고 깨어나자마자 지아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두 사람의 머리 위로 비가 쏟아져 내렸지만 이 순간 시공간이 멈춘 것 같았다.도윤이 그토록 오랫동안 억눌러왔는데 지아라고 다를까.사랑과 증오, 죄책감 사이에서 오고 가다 그토록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서로 낯선 사람이 되길 선택한 것이다.세월이 모든 것을 씻어낸다는 옛말처럼 지아는 지난 몇 년 동안 도윤을 잊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번 재회를 통해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과거 도윤이 지아를 물에서 건져 올린 순간처럼 한 번의 눈빛이 평생의 기억으로 남았다.앞으로 지아는 아무리 멀리 떠나도, 어떤 사람을 만나도 도윤을 잊지 못할 것이다.오래도록 지속된 키스에 이 순간만큼은 지아는 모든 증오를 잊었다.내내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살아 있는 도윤을 보는 순간, 오랫동안 쌓였던
그제야 꿈속에서 깨어난 도윤은 기쁨에 겨워 흥분에 취한 나머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내려오느라 다쳤을 지아를 생각하지 못했다.“지아야, 어디 다쳤어?”지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도윤을 쫓아왔고, 막상 도윤을 만나자 어색한 표정이 가득했다.어젯밤 자신이 당당하게 도윤을 밀어붙였는데 이렇게 빨리 후회할 상황이 오다니.도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머릿속은 엉망이고 마음은 더 혼란스러웠다.“난 괜찮아.”동굴 안에는 불빛도 없었고 밖도 흐릿해서 낮이었지만 실제로는 밤과 비슷했다.다행히 도윤은 야생 생존 경험이 많았기에 비가 오기 전에 마른 장작을 많이 주워 와 자신 대신 지아를 위해 썼다.도윤이 라이터를 꺼내 마른 장작에 재빨리 불을 붙이자 동굴 안의 어둠은 순식간에 따뜻한 빛으로 밝아졌다.도윤이 돌아서서 지아를 바라보니 검은색 방풍 등산복을 입고 있었는데, 여기저기 긁힌 자국에 안에 입은 나시가 보였다.“어디 다쳤어?”도윤이 다시 물었지만 지아는 그간의 경험이 있으니 도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다치긴 누가, 이 산의 길이 너무 익숙해서, 난...”도윤이 손목을 잡아당겨 손을 빼내자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에 마음이 아팠다.“지아야!”“괜찮아, 난 당신 생각만큼 약하지 않아. 이 작은 상처는 며칠이면 나을 거야.”도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미안해, 내가 또 다치게 해서.”“무슨 소리야,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난, 난 그저 여기서 죽으면 사람들이 날 의술에 소질이 없다고 할까 봐 그래서... 읍...”도윤은 이런 식으로 마음에도 없는 지아의 말을 막았고 아무리 바보라도 지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전에는 지아와의 재결합에 서두르느라 자신이 했던 일들 때문에 지아의 마음속에 아직 풀리지 않은 매듭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고, 그 매듭이 풀리지 않았거나 그녀 스스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여전히 지아에게 진심을 보여줄 시간
지아는 큰 셔츠 하나를 찾아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침낭에 누웠다.잠시 후 도윤이 돌아왔을 때 고개를 내민 지아는 두 사람이 신혼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도윤의 몸에 걸친 옷은 방수가 되긴 했지만 꽤 젖어 있었기 때문에 재킷을 벗어서 옷걸이에 걸자 안에는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젖은 옷이 달라붙어 몸의 근육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고 도윤이 낮은 목소리로 부탁했다.“지아야... 나 웃옷 벗어도 되지?”어젯밤의 경험 때문에 감히 지아를 자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지아는 고개를 돌렸다.“응.”도윤은 웃옷을 벗어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가 지아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바보처럼 웃었다.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지아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찾아왔는데,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도윤은 문득 중독된 게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리워하던 지아를 만날 수 있었겠나.겨우 지아의 마음이 풀어졌으니 이제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도윤은 계속 장작을 쌓았지만 마른나무는 금세 타버렸고, 비가 언제까지 내릴지 알 수 없었다.정글은 낮과 밤의 기온 차가 크고, 특히 비 오는 밤에는 더 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가 그치지 않으면 오늘 밤 장작을 많이 태워야 했다.그러려면 미리 장작을 충분히 준비해야 하는데, 아까 많이 모았다고 해도 내일까지 태울 수 없을 것이다. 지아가 곁에 있으니 하루를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지아야, 나 나갔다가 금방 올게.”도윤은 칼을 빼 들고 근처로 갔고, 한 시간 후 맨 어깨에 커다란 장작 뭉치를 짊어지고 뒤에 한 다발을 더 끌고 걸어 들어왔다.옷을 입지 않은 남자의 멋진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도윤의 가슴과 복근, 특히 작업복까지 내려오는 두 개의 치골 라인이 선명하게 보였다.그는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고 머리에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그런 도윤에게 남성 호르몬이 마구 뿜어져 나와 색욕이 많지 않은 지아도 넋 놓고 보느라 눈가에 열기가 올랐다.도윤
지아의 다리는 마네킹처럼 비현실적으로 곧게 뻗은 데다 약탕에 자주 몸을 담그는 습관까지 더해져 발바닥마저 백옥처럼 하얗고 투명한 핑크빛이 감돌았다.지금 이 자세는 그녀의 장점을 그대로 드러내 치명적으로 섹시했다.도윤은 어젯밤 옥수수밭에서 둘이 했던 일을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흥분되는 것이었다.“지아야...”도윤의 입이 말랐고 지아는 고개를 돌려 먹잇감을 바라보는 늑대 같은 그의 눈빛을 보았다.아이를 넷이나 가진 부모였지만 몇 년 동안 만나고 헤어진 탓에 지아는 여전히 소녀처럼 부끄러워했다.심지어 가끔은 무의식적으로 피했다가 너무 내숭 떠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하지만 많은 것들이 지아의 몸속에는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새겨져 있었다.마치 지금처럼 지아는 물도 챙기지 않고 서둘러 침낭으로 들어갔다.지아가 놀란 것을 본 도윤은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물을 꺼내 건네주었다.무심코 도윤의 손에 닿자 아직 마르지 않은 물기가 뜨거운 체온을 타고 느껴지며 자신의 손가락까지 젖는 것 같았다.흠칫한 지아는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말했다.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부부도, 친구도, 낯선 사람도 아닌 묘한 관계였다.한 사람은 또 잘못해서 역겹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두려웠고,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운 상태였다.학창 시절 같은 반 친구를 짝사랑하다가 지우개가 어쩌다 넘어갔고, 지우개를 건네주다가 서로의 손가락이 닿았을 때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설레었던 것처럼 두 사람의 마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도윤은 갈아입을 바지를 찾지 못하고 목욕 타월을 꺼내 둘렀다.밖에서는 빗소리를 제외하고는 가끔 장작이 타는 소리만 들렸다.젖은 옷은 불에 마르면서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지아는 건빵을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고 침낭 속에서 잠이 들었다.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공기를 가득 채우는 향기에 지아는 군침이 들었고 제대로 눈을 뜨기도 전에 귓가에 부드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일어났어?”지아는 정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