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지아는 갑자기 바닥에서 뛰어올라 뱀 동굴에서처럼 도윤을 꼭 껴안았다.“나쁜 놈, 누가 도망가라고 했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도윤은 한쪽 무릎을 꿇고 동공이 심하게 확장되며 놀라움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어젯밤 지아는 분명 도윤을 역겹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미워했다.그는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고 지아를 울리지 않으려 그녀의 눈앞에서 눈엣가시가 되지 않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하지만 지아의 포옹에 불구덩이에서 타죽었던 재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고, 도윤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마구 뛰며 억눌렸던 감정이 조금씩 되살아났다.“지아야, 뭐라고 그랬어...”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나와 이를 갈았다.“내가 엄청 걱정했다고, 못 들었어?”지아는 도윤의 옷깃을 세게 잡아당기며 자신의 목을 기울여 도윤의 입술에 키스했다.도윤의 머릿속이 펑 터졌다.지... 지금 뭘 본 거지?지아가 먼저 입을 맞추다니.예전엔 지아와 입 맞추려 갖은 방법을 썼는데 오늘 그녀가 먼저 다가오자 도윤은 익숙하지 않은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도윤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고 깨어나자마자 지아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두 사람의 머리 위로 비가 쏟아져 내렸지만 이 순간 시공간이 멈춘 것 같았다.도윤이 그토록 오랫동안 억눌러왔는데 지아라고 다를까.사랑과 증오, 죄책감 사이에서 오고 가다 그토록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서로 낯선 사람이 되길 선택한 것이다.세월이 모든 것을 씻어낸다는 옛말처럼 지아는 지난 몇 년 동안 도윤을 잊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번 재회를 통해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과거 도윤이 지아를 물에서 건져 올린 순간처럼 한 번의 눈빛이 평생의 기억으로 남았다.앞으로 지아는 아무리 멀리 떠나도, 어떤 사람을 만나도 도윤을 잊지 못할 것이다.오래도록 지속된 키스에 이 순간만큼은 지아는 모든 증오를 잊었다.내내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살아 있는 도윤을 보는 순간, 오랫동안 쌓였던
그제야 꿈속에서 깨어난 도윤은 기쁨에 겨워 흥분에 취한 나머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내려오느라 다쳤을 지아를 생각하지 못했다.“지아야, 어디 다쳤어?”지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도윤을 쫓아왔고, 막상 도윤을 만나자 어색한 표정이 가득했다.어젯밤 자신이 당당하게 도윤을 밀어붙였는데 이렇게 빨리 후회할 상황이 오다니.도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머릿속은 엉망이고 마음은 더 혼란스러웠다.“난 괜찮아.”동굴 안에는 불빛도 없었고 밖도 흐릿해서 낮이었지만 실제로는 밤과 비슷했다.다행히 도윤은 야생 생존 경험이 많았기에 비가 오기 전에 마른 장작을 많이 주워 와 자신 대신 지아를 위해 썼다.도윤이 라이터를 꺼내 마른 장작에 재빨리 불을 붙이자 동굴 안의 어둠은 순식간에 따뜻한 빛으로 밝아졌다.도윤이 돌아서서 지아를 바라보니 검은색 방풍 등산복을 입고 있었는데, 여기저기 긁힌 자국에 안에 입은 나시가 보였다.“어디 다쳤어?”도윤이 다시 물었지만 지아는 그간의 경험이 있으니 도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다치긴 누가, 이 산의 길이 너무 익숙해서, 난...”도윤이 손목을 잡아당겨 손을 빼내자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에 마음이 아팠다.“지아야!”“괜찮아, 난 당신 생각만큼 약하지 않아. 이 작은 상처는 며칠이면 나을 거야.”도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미안해, 내가 또 다치게 해서.”“무슨 소리야,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난, 난 그저 여기서 죽으면 사람들이 날 의술에 소질이 없다고 할까 봐 그래서... 읍...”도윤은 이런 식으로 마음에도 없는 지아의 말을 막았고 아무리 바보라도 지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전에는 지아와의 재결합에 서두르느라 자신이 했던 일들 때문에 지아의 마음속에 아직 풀리지 않은 매듭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고, 그 매듭이 풀리지 않았거나 그녀 스스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여전히 지아에게 진심을 보여줄 시간
지아는 큰 셔츠 하나를 찾아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침낭에 누웠다.잠시 후 도윤이 돌아왔을 때 고개를 내민 지아는 두 사람이 신혼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도윤의 몸에 걸친 옷은 방수가 되긴 했지만 꽤 젖어 있었기 때문에 재킷을 벗어서 옷걸이에 걸자 안에는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젖은 옷이 달라붙어 몸의 근육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고 도윤이 낮은 목소리로 부탁했다.“지아야... 나 웃옷 벗어도 되지?”어젯밤의 경험 때문에 감히 지아를 자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지아는 고개를 돌렸다.“응.”도윤은 웃옷을 벗어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가 지아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바보처럼 웃었다.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지아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찾아왔는데,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도윤은 문득 중독된 게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리워하던 지아를 만날 수 있었겠나.겨우 지아의 마음이 풀어졌으니 이제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도윤은 계속 장작을 쌓았지만 마른나무는 금세 타버렸고, 비가 언제까지 내릴지 알 수 없었다.정글은 낮과 밤의 기온 차가 크고, 특히 비 오는 밤에는 더 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가 그치지 않으면 오늘 밤 장작을 많이 태워야 했다.그러려면 미리 장작을 충분히 준비해야 하는데, 아까 많이 모았다고 해도 내일까지 태울 수 없을 것이다. 지아가 곁에 있으니 하루를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지아야, 나 나갔다가 금방 올게.”도윤은 칼을 빼 들고 근처로 갔고, 한 시간 후 맨 어깨에 커다란 장작 뭉치를 짊어지고 뒤에 한 다발을 더 끌고 걸어 들어왔다.옷을 입지 않은 남자의 멋진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도윤의 가슴과 복근, 특히 작업복까지 내려오는 두 개의 치골 라인이 선명하게 보였다.그는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고 머리에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그런 도윤에게 남성 호르몬이 마구 뿜어져 나와 색욕이 많지 않은 지아도 넋 놓고 보느라 눈가에 열기가 올랐다.도윤
지아의 다리는 마네킹처럼 비현실적으로 곧게 뻗은 데다 약탕에 자주 몸을 담그는 습관까지 더해져 발바닥마저 백옥처럼 하얗고 투명한 핑크빛이 감돌았다.지금 이 자세는 그녀의 장점을 그대로 드러내 치명적으로 섹시했다.도윤은 어젯밤 옥수수밭에서 둘이 했던 일을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흥분되는 것이었다.“지아야...”도윤의 입이 말랐고 지아는 고개를 돌려 먹잇감을 바라보는 늑대 같은 그의 눈빛을 보았다.아이를 넷이나 가진 부모였지만 몇 년 동안 만나고 헤어진 탓에 지아는 여전히 소녀처럼 부끄러워했다.심지어 가끔은 무의식적으로 피했다가 너무 내숭 떠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하지만 많은 것들이 지아의 몸속에는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새겨져 있었다.마치 지금처럼 지아는 물도 챙기지 않고 서둘러 침낭으로 들어갔다.지아가 놀란 것을 본 도윤은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물을 꺼내 건네주었다.무심코 도윤의 손에 닿자 아직 마르지 않은 물기가 뜨거운 체온을 타고 느껴지며 자신의 손가락까지 젖는 것 같았다.흠칫한 지아는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말했다.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부부도, 친구도, 낯선 사람도 아닌 묘한 관계였다.한 사람은 또 잘못해서 역겹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두려웠고,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운 상태였다.학창 시절 같은 반 친구를 짝사랑하다가 지우개가 어쩌다 넘어갔고, 지우개를 건네주다가 서로의 손가락이 닿았을 때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설레었던 것처럼 두 사람의 마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도윤은 갈아입을 바지를 찾지 못하고 목욕 타월을 꺼내 둘렀다.밖에서는 빗소리를 제외하고는 가끔 장작이 타는 소리만 들렸다.젖은 옷은 불에 마르면서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지아는 건빵을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고 침낭 속에서 잠이 들었다.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공기를 가득 채우는 향기에 지아는 군침이 들었고 제대로 눈을 뜨기도 전에 귓가에 부드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일어났어?”지아는 정신이
도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자른 대나무를 조립하기 시작했다.고기를 굽는 동안 나무껍질과 덩굴을 모아 약간의 가공을 거쳐 밧줄로 만들었다.그는 여전히 상의를 입지 않았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자 등 전체에 상처가 드러내며 매우 남자다운 모습을 보였다.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설명하며 작업을 했다.“땅이 벌레 때문에 더러울까 봐 대나무를 잘라서 간이침대를 만들어 밤에도 편안하게 잘 수 있게 하려고.”도윤은 이 작업에 익숙해서 최대 30분 만에 침대를 만들 수 있었다.옆에는 그가 가져온 나뭇잎과 마른풀이 있었는데, 모두 습기가 조금도 없이 말리려고 미리 불 옆에 놓아두었다. 이런 폭우 속에서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정도였다.아무 느낌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하룻밤만 자면 되는 건데 왜 귀찮게 그래?”“널 위해선 귀찮은 거 없어.”도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업에 고개를 파묻은 채 말했다.지아가 침대 너비를 훑어보니 도윤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동굴에 불이 있다고 해도 오랜 시간 자고 나면 습기가 있을 테고, 몸속의 독이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기에 지아가 말을 꺼냈다.“저기...”도윤은 지아를 돌아보았다.“왜 그래. 어디가 불편해? 또 손이 아파?”“아니.”지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도윤의 시선이 조금 당황스러웠다.“내 말은 어차피 만들 거면 도윤 씨 것도 하나 만들어. 이 시기엔 원래 비가 많고 내일 또 큰 비가 올지 모르는데 폭우 속에서 간다는 건 말도 안 돼.”“난 필요 없어, 귀찮아. 남자는 바닥에 드러누우면 그만이야. 밖에서 그렇게 많은걸 따질 필요가 없지.”고개를 푹 파묻고 일에 몰두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오만한 대표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도윤이 다시 한번 대나무 장대를 잡으려는 순간 작은 손이 그의 손을 잡았다.그 앞에 맨발로 서 있는 지아의 등 뒤로 불빛이 펄떡이며 뛰어올랐다.“내 말대로 해.”“알았어.”도윤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힐끗 보았다.“근데 침낭이 하나밖에 없어서 싱
이 남자가...전에는 무모하고 위압적인 태도로 원하는 건 뭐든 요구하는 데 익숙했는데, 갑자기 예의를 갖추자 지아는 다소 어색했다.“나 배고파.”지아가 거절하자 도윤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지만,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많이 먹어.”그렇게 말하며 도윤은 조용히 다시 침대를 만들러 갔다.지아는 멧돼지 고기를 한입 베어 물며 얼굴을 만져보니 동굴의 온도 때문인지 뜨겁고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의 든든한 뒷모습을 보면 그런 남자를 미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어젯밤의 자극적인 정사는 지아에게도 남달랐다.미움은 제쳐두고, 그런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잠자리에 드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었다.하지만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감정이다. 일련의 일들을 생각만 해도 지아는 가슴을 막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윤과의 친밀한 행위는 과거 자신에 대한 배신과도 같았다.도윤은 다 잊었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과거의 지아는 검은 수렁 속에 갇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지아는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진정으로 앞을 바라보지 못한 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이 모든 일들이 겪고 난 후 지아는 자신이 여전히 도윤을 사랑한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이 마음을 어떡해야 할까.분명 지금은 도윤도 많이 변해서 조심스러워졌지만 지아는 그런 모습을 원하지 않았다.그녀가 보고 싶었던 건 자신감 넘치고 강인한 도윤의 모습이었다.숲에서 멧돼지를 망설임 없이 깔끔하고 단호한 손놀림으로 죽인 것처럼.지아는 도윤이 우유부단해져서 자신 때문에 또다시 함정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지아야, 다 끝났어, 내가 해볼게.”도윤은 침대에 누워 두 번 구르며 지탱력을 테스트하고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나뭇잎과 건초를 더 깔며 입으로 중얼거렸다.“호랑이를 만나지 못한 게 아쉽네. 호랑이 가죽을 벗겨 이불을 만들 수 있는데...”도윤은 지아와 함께 있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돌보았고 이건 남편으로서 당연한 의무였다.예전에는
지아는 씻고 나니 온몸이 편안해졌고, 마음도 서서히 맑아져 이미 결심한 뒤였다.뒤돌아보니 도윤이 작은 노인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그는 물고기 덫을 짜느라 바빴다. 떠나기 전에 건빵과 물 두 병, 과일 몇 개를 가져왔는데 원래 의도는 샘물 좀 마시고 야생 과일을 따서 먹으며 가능한 한 빨리 여길 떠나는 것이었다.하지만 폭우와 갑작스러운 지아의 등장으로 모든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내일도 비가 올 것 같자 도윤은 서둘러 물고기 덫을 뜨고 낚시 준비를 했다.지아는 어느새 도윤이 만든 대나무 침대에 앉아 새하얀 두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피곤하지 않아?”지아가 물었다.어떻게 피곤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는 밤새 잠도 못 자고 오늘도 하루 종일 바빴으며, 불 옆이 엄청나게 더워서 이마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곧 끝나. 저기 강에 사는 물고기들은 살이 통통해. 비가 멈춘 뒤 물가에 내려가면 내일 생선을 먹을 수 있을 거야.”말하며 도윤은 지아의 다리에서 시선을 떼고 물고기 바구니를 챙겨 어둑어둑한 밤 속으로 들어갔다.돌아왔을 때 그의 머리와 몸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는데, 찬물로 샤워를 한 게 분명했다.지아가 돌아보자 남자의 모습은 갓 목욕을 마친 인어처럼 보였고, 잘 다듬어진 복근을 따라 물방울이 신비로운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늘어져 있었는데 전에 있던 매서움은 사라지고 부드러움이 보였다.남자 아이돌 리더처럼 허리 몇 번 흔들면 여자들이 미칠 것 같았다.지아는 문득 얼마 전 봤던 영상 속에서 마스크와 모자를 쓴 남자들이 카메라 앞에서 몸을 흔들자 그 밑에 여자들이 수만 개의 댓글을 달며 난리를 부리던 게 떠올랐다.도윤의 몸은 일부러 헬스클럽에서 단련한 근육과는 달리 온몸에 난 상처가 야성미를 더했다.어느새 도윤은 지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양옆에 손을 지탱했다.앉아 있는 지아 위로 도윤이 살짝 몸을 숙이자 그의 몸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녀를 감쌌다.“뭘 보고 있는 거야?”지아는 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지아는 대나무 침대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하지만 속검은 도윤이 일부러 침대를 1.2미터 정도로밖에 만들지 않았는데 어디로 도망가겠나.곧 지아의 손바닥이 대나무 침대 가장자리에 닿았다.어젯밤엔 욱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다. 강욱의 신분으로 자신을 만졌을 때도 지아는 역겨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인간은 화가 나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입히는 경향이 있었고 지아는 다시 그 말을 할 리가 없었다.“홧김에 한 말이야.”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지아는 어제와 같은 담대함이 없었다.도윤은 야생 표범처럼 침대에 무릎을 꿇고 조금씩 앞으로 기어갔다.곧 지아는 그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에 완전히 둘러싸였고 두 손으로 겨우 온몸을 지탱하고 있었다.도윤의 입술이 지아의 가늘고 하얀 목에 닿자 지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며 불리한 상황에 부닥쳤다.얇은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지아는 부드러운 도윤의 말을 들었다.“이러면 어때, 역겨워? 역겹다면 그만할게.”남자는 그녀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사람의 마음과 본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도윤은 확실히 달인이었다.지아는 섬세하게 피어난 꽃처럼 폭우 속에서 가볍게 흔들리며 몸을 떨었다.도윤의 입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진득한 느낌에 지아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가슴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급격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얇은 입술이 지아의 머리카락에 닿았고, 이로 비녀를 물어 부드럽게 빼내자 지아의 수천 가닥 검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졌다.도윤은 지아가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이 좋았다. 나른하면서 매혹적이었다.비녀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댔다.“지아야, 넌 이런 모습일 때가 가장 아름다워.”이렇게 말하며 도윤은 비녀의 끝으로 지아의 피붓결을 따라 스쳐 지나갔는데 시원한 촉감이 쇄골을 지나 계속 내려가다가 단추 앞에서 멈췄다.마치 금기의 게임을 하는 것처럼 도윤은 부드럽게 물었다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