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십거리가 돼?이곳 진주시에서 유남준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유남준은 박민정이 사라진 그 시간 동안 연지석이 그녀의 곁에 있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같이 지낸 시간이 많으면 자연스레 없던 정도 생긴다는데, 게다가 둘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연지석 귀에 그런 소문이 들어갈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고?”그의 검은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박민정의 얼굴에도 순간 그늘이 졌다.그녀는 유남준의 이런 말버릇을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대표님. 저희가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선택할 권리는 저에게 있습니다. 이건 지나친 간섭 아닌가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곧바로 유남준을 스쳐 지나갔다.유남준은 그녀에게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말 몇 마디 한 게 다인데 그는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졌다.뭐? 지나친 참견?멀어지는 박민정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그녀가 정말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유남준은 그런 느낌이 미치게 싫었다.그는 핸드폰을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수를 쓰든 그 아이 데려와.”“네.”“그리고 연지석 사업도 계속 공격해. 난 그 자식 것을 철저히 빼앗아야겠어.”전화를 끊은 그의 눈빛은 뭐든 집어삼킬 듯한 어둠에 휩싸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미련 없이 떠나던 박민정의 모습뿐이었다.예전엔 분명 그만을 사랑하겠다고 했던 사람이!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지?이제 연지석을 사랑하게 된 건가?뭐가 어떻게 됐든 그는 반드시 박민정을 다시 뺏어올 거다.그의 것은 그가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 남에게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유남준은 차에 탄 후 담배를 피우며 아이의 사진을 다시 꺼내 봤다.정말 그의 아이라면 박민정은 왜 그를 해외에 숨겨뒀을까?그는 아이를 다시 데려온 후에 낱낱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그리고 뭐가 어떻게 됐든 이번엔 반드시 박민정을 자기 옆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다시는 그의 시선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
박예찬은 이제 막 어린이집에서 수업을 마쳤는데 기사님은 오늘 예전보다 조금 늦게 오는 듯싶다.옆에 있던 유지훈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넌 매일 기사님이 데리러 와?”“안 그러면?”박예찬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유지훈은 거만하게 말했다.“난 매일 우리 집안 어르신들이 데리러 오거든. 증조할아버지는 내게 가족애를 느끼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어.”말을 마친 유지훈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신비롭게 말을 이었다.“오늘은 누가 데리러 오는지 알아?”“누군데?”박예찬은 별로 안 궁금하지만 그냥 물어봤다. 대꾸를 안 하면 쉴 새 없이 재잘거릴 테니까.“우리 할머니.”유지훈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박예찬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고영란은 그의 친할머니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기쁜 걸까?생각에 잠겨있을 때 고영란의 차가 도착했다.고급 리무진에서 내려오는 고영란은 세련된 생활한복 차림에 하이힐을 차려 신었다. 반 백 살 되는 나이에도 우아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었고 제스처마다 고상한 아우라가 흘러넘쳤다.“할머니.”유지훈이 쪼르르 달려갔다.아이가 귀여운 목소리로 외쳤지만 고영란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요 녀석의 부모가 해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남편이 친히 당부했으니 망정이지 그녀는 딴 사람 손자를 데리러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영란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론 옅은 미소를 지었다.“가자.”그녀는 말하면서 박예찬을 힐긋 쳐다보다가 순간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예찬아.”오늘 이리로 온 이유는 바로 제 아들 유남준의 어릴 때 모습을 쏙 빼닮은 박예찬을 보기 위해서이다.고영란은 일부러 조사해보았는데 박예찬은 최근에 금방 귀국하여 조하랑과 함께 지내고 있고 친아빠에 대한 정보는 없다.조하랑을 두어 번 정도 봤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다.박예찬은 고영란의 부름에 얌전하게 대답했다.“안녕하세요, 할머니.”고영란은 예의 바른 아이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유지훈을 뿌리치고 예찬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엄
조하랑은 원래 박예찬에게 겁줄 생각이었지만 아이는 멍청이를 쳐다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결국 그녀가 두 손을 들었다.“나도 알아. 지금 어린 애들에게 맞춰주려고 충분히 노력 중이야.”대답을 마친 박예찬은 본인의 태블릿PC를 꺼내 계속 공부하기 시작했다.어린이집에서 함께 블록을 쌓느라 책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됐다.조하랑은 태블릿PC를 힐긋 들여다봤는데 전부 이상한 부호였고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비교할수록 화만 더 난다니까.아이가 이토록 노력하니 조하랑도 더는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법률 서적을 마저 보며 이지원과의 소송 준비에 한창이었다.이때 갑자기 누군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박예찬이 문 앞에 서 있자 그녀는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이모한테 좋은 거 하나 주려고.”조하랑은 더 의아해졌다. 이때 박예찬이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컴퓨터 앞에 서더니 작은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렸고 1분도 채 안 돼 모니터에 웹사이트가 하나 나왔다. 마우스로 클릭하자 안에 전부 이지원에 관한 자료들이었다.조하랑은 화면에 꽉 찬 이지원의 사생활 자료를 보았고 아무거나 하나 클릭해봐도 전부 그녀가 거액을 들여도 구하지 못하는 스팩타클한 내용이었다.“헐 대박!!! 너네 엄마가 왜 자꾸 너보고 잠자코 숨어 지내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네.”박예찬의 커다란 눈망울은 순수하기 그지없었다.“이모, 설마 어린아이가 이런 걸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거 다 지석 삼촌이 알려준 거야. 이모더러 꼭 우리 엄마 도와주래. 절대 엄마를 속상하게 하지 말고.”조하랑과 연지석은 사석에서 따로 만날 일이 없다. 그러니 지금 박예찬이 하는 말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엄마도 단지 그가 보통 어린이들보다 조금 더 총명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이 정도일 줄은 모른다.만약 엄마가 알게 되면 깜짝 놀라겠지.그러니까 지금 하랑 이모한테도 이 증거 자료들을 예찬이 혼자 구한 거라고
유남준은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는 수중의 서류를 내려놓고 서다희에게 분부했다.“CEO 한 명 영입해!”서다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대표님 말씀은?”“나 한동안 좀 쉬어야겠어.”유남준이 대답했다.“중대한 일 아니면 나한테 보고할 필요 없어.”대기업에서 CEO를 영입하는 건 흔하디흔한 일이지만 서다희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유남준이 이 자리에 앉고 나서부터 모든 일을 직접 해나갔고 본인에게 일말의 휴식시간도 허용하지 않은 채 오직 일에만 몰두했으니까.그런 그가 지금 집행권을 내려놓겠다고 한다.서다희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영입하겠습니다.”서다희가 나간 후 유남준은 서류를 계속 들여다봤지만 머릿속엔 온통 박민정뿐이었다.그는 달갑지 않았다. 전혀 달갑지 않았다.이 몇 해 동안 열심히 일하고 밤낮없이 돈 번 이유가 뭣 때문인데?박씨 일가에 사기당한 빈자리를 채우려고, 금전적인 빈자리뿐만 아니라 이미 짓밟힌 자존심도 다시 세워야 했다!수천억의 재산은 유남준에게 큰 액수가 아니다!하지만 이 수천억 때문에 그는 상류층에서 온갖 굴욕을 당했다.뭇사람들은 그가 여자에게 빌붙어 신분 상승하려다가 바람맞은 바보라고 했다!수천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청각장애의 아내까지 얻었으니 말이다.그리고 지금 그에게 차려진 건 무엇인가?박민정은 일부러 그를 잊은 척했고 무참하게 그를 버렸다...여기까지 생각한 유남준은 넥타이를 살짝 풀어헤치며 본인이 직접 가서 아이를 데려오기로 했다.그리고 박민정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가짜 기억 상실이란 걸 까밝힐 예정이다.그렇게 되면 박민정을 제대로 징벌할 수 있다.따끔한 교훈을 안겨줄 수 있다.유남준이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노크 소리가 그를 사색에서 깨워줬다.“들어와.”사무실 문이 열리고 박민정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오늘 연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맑은 두 눈으로 유남준의 짙은 눈빛과 마주했다.유남준은 헝클어진 넥타이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도 정리했다.“민
유남준은 이렇게 가식적인 홍보 활동을 제일 싫어한다.머리는 거절이라고 외치는데 정작 입밖에 튀어나온 말은 오케이 사인이었다.“그럼 저는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박민정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떠나려는데 뒤에서 유남준의 살짝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이 보러 가는 거라면 옷을 좀 더 챙겨입는 게 좋을 것 같아.”박민정은 어리둥절해졌다.머리 숙여 보니 그제야 상의 단추가 두 개나 풀린 걸 발견했다.날씨가 더워 사무실에서 풀었던 단추를 깜빡하고 채우지 못했다.박민정은 종종걸음으로 대표 사무실을 나와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단추를 채웠다.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머리를 푹 숙이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한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죄송합니다.”박민정은 고개 들어 김인우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했다.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그와 거리를 뒀다.요즘 호산 그룹에서 출근하며 그녀는 김인우와 마주치는 일을 면할 수가 없다.대부분 길을 에돌아 갔는데 오늘은 아예 정면으로 마주쳤다.박민정은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에게 능멸당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김인우는 그녀의 모든 제스처를 지켜보다가 목이 확 멨다. 그는 행여나 박민정을 놀라게 할까봐 아무 말도 못 한 채 곧게 유남준의 사무실로 걸어갔다.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김인우는 사소한 것도 따지고 들고 원한은 반드시 갚는 사람이다.전에 그녀가 조하랑을 대신해 소개팅에 나간 것 때문에 이미 김인우의 심기를 단단히 건드렸다.지난번 바에서 그녀를 겨냥하지 않았다고 앞으로 쭉 겨냥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이 남자는 가끔 보면 유남준보다 더 섬뜩한 사람이다.유남준은 절대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 기껏해야 회피하고 무시하고 사람 마음을 지치게 하는 것뿐이다.하지만 김인우는 여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언제 한번 박민정이 부주의로 김인우를 슬쩍 다쳤다가 한 달 후에 아예 교외로 끌려가 자생 자멸하게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박민정은
유남준은 짙은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괜찮아. 이미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어.”김인우의 눈가에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그는 참지 못하고 계속 더 캐물었다.“너 그런 장소 나가는 거 제일 싫어하잖아?”유남준은 그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담담하게 말했다.“뭐든 예외가 있기 마련이지.”김인우는 더 머무르지 않고 바로 나갔다.그는 라운지에서 마침 박민정이 회사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봤다.그 미소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이때 비서가 김인우에게 다가왔다.“도련님, 회장님께서 오라고 하십니다.”“알았어.”...오후.특수학교.박민정은 새로 연 음악 교실에 가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장애인 어린이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가르쳤다.유남준은 한 무리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문밖에 서 있었다.그는 박민정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걸 처음 본다. 맑고 은은한 피아노 소리가 졸졸 흐르는 물결처럼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유남준은 그녀의 얼굴에 띈 연한 미소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건 거의 본 적 없는 미소였다.“선생님 너무 대단하세요.”“대체 어떻게 배우신 거예요?”아이들은 숭배의 눈길로 박민정을 쳐다봤다.다른 후원자들보다 보청기를 착용한 박민정에게 유난히 더 호감이 갔는데 아마도 공감대가 형성돼서 그런가 보다.박민정은 아이들에게 노력만 하면 반드시 더 우수해질 거라고 말했다.유남준은 줄곧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그에게 박민정은 항상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공주님이고 장점이라곤 전혀 없는 여자였는데 인제 보니 아니었다.위문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박민정은 아이들과 일일이 작별을 고했다.밖에 나오자 유남준이 어느새 경호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용수나무 아래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무 아래에 서 있는 남자는 훤칠한 체격에 차가운 옆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박민정은 그를 향해 걸어갔다.“대표님...”그녀의 부름에 유남준은 얼른 손에 쥔 담배를 껐다.박민정은 실로 의아할 따름이었다. 유남준이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
“네가 해준 밥을 3년이나 먹은 사람이야. 안 괜찮을 리가 있겠어?”유남준이 쏘아붙였다.박민정은 피식 웃으며 음식이 도착한 후 주방에 가서 밥을 지었다.사실 그녀는 전에 요리라곤 전혀 할 줄 몰랐다. 유남준에게 시집간 이후에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다만 유남준은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고마워한 적이 없고 모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였고...그는 거실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서 떼지 못했다. 몇 번을 쳐다봐도 질리지 않았다.박민정은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부러 유남준이 제일 좋아하는 소불고기에 약을 탔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았다.이게 얼마만인가. 그녀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이! 유남준은 좀처럼 수저를 들지 못했다.박민정은 그의 그릇에 소불고기 한 점을 집어줬다.“집에서 먹는 거 괜찮다고 분명 말씀하셨어요 대표님이.”유남준은 묵묵히 수저를 들고 소불고기를 먹었다.박민정은 잔뜩 긴장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를 관찰했다.그녀는 소불고기에 수면제를 탔다.수면제의 양이 적을까 봐 그에게 몇 점이나 더 집어줬 지 모른다.유남준은 짙은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넌 왜 안 먹어?”“저는 별로 배 안 고파요. 대표님 많이 드세요.”박민정은 긴장하여 몰래 손바닥을 꼬집고는 다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유남준은 더 캐묻지 않고 그녀와 함께 묵묵히 식사했다.식사를 다 마쳤지만 그는 좀처럼 졸려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어리둥절해졌다.약을 적게 탄 걸까?“물 한 잔 따라와.”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가려고 했다.이때 유남준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았다.오늘 그녀는 유난히 정성스럽다.분명 그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설마 전에는 다 연기한 거고 오늘 모습이야말로 진심인 걸까?박민정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혹여나 그가 뭐라도 발견한 줄 알고 심장이 덜컹거렸는데 결국 돌아온 대답이 이거였다.“거실에도 물 있는데 왜 주방까지 가려고 그래?”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민정이 말을 이었다.“예쁜 걸 싫어하는 여자는 없어요. 전에는 아마 제가 너무 비천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꼭꼭 숨기고 살았나 봐요.”유남준은 이 말을 듣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러니까 네 말은 전에 다 날 위해서 그랬단 거야?”박민정은 머리를 들어 그를 똑바로 마주 봤다.“기억이 안 난다고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는 화장하는 것도 좋아하고 화려한 옷을 입는 것도 좋아하고 또 그리고 값비싼 액세서리도 너무 좋아해요.”그녀가 전에 그레이 톤의 옷만 입고 메이크업도 안 한 건 유남준이 화낼까 봐 두려워서였다.그녀의 가족이 유남준에게 사기를 쳤으니 본인까지 화려하게 차려입어서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딱 한 번 빨간색 치마를 입고 밖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꽃에 물을 줬는데 유남준이 가차 없이 비난했다.“너희 집안 참 대단해. 사기를 치고도 이렇게 속 편하게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콧노래를 흥얼거려?”그때 이후로 박민정은 집안에서 감히 기뻐할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었으며 예쁘게 차려입는 건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유남준은 이런 것들을 몰라줄 뿐만 아니라 모든 원인을 그녀가 싫어해서 그런 거라고 한다!얼마나 가소로운가.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갔다. 손에 피가 날 때까지 그녀는 힘을 풀지 않았다.유남준은 그렇게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온몸이 노곤해졌다.“그럼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박민정은 화들짝 놀랐다.그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고 허리 숙여 그녀의 좁은 어깨에 턱을 고였다.“왜 난 네가 날 미워하는 것 같지?”박민정은 목구멍에 솜뭉치가 꽉 막힌 기분이었다.‘대체 누가 할 말이야? 남준 씨야말로 날 미워했잖아!’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좀 놓아줄래요?”다만 유남준은 전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뿐더러 더 세게 끌어안았다.“민정아, 내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찾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혹시나 정수미와 박민정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 같아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다.갈 때도 모두 짝을 지어 돌아갔는데 그중 정민기와 진서연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서다희와 민수아도 팔짱을 끼고 가다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하더니 그녀도 임신했다고 알렸다.세 커플 중 오직 방성원과 설인하 두 사람만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서로 떨어져서 걸었다.그리고 이런 상황을 진작에 눈치챈 방성원은 아까부터 마음이 불편했지만 사람이 많아서 애써 참고 있었다.하여 빠르게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김인우가 그의 팔을 잡았다.“성원아, 나도 곧 아이가 태어날 것 같아.” 그러자 방성원이 뜬금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우리 은정이는 이제 곧 두 살이야.”“어쩌라고? 우리 딸이 아마 네 딸보다 더 귀여울걸?”그의 말에 방성원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아직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면서.”순간 김인우는 할 말을 잃었다.그의 말대로 아무리 자기가 딸은 원한다고 무조건 딸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다.그러고 보니 유남준도 딸을 간절히 원했지만 태어난 네 명의 아이는 모두 남자였다. 역시나 딸 복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그러다가 방성원은 문득 설인하와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걸 발견하고 재빨리 김인우에게 말했다.“그만하자.”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설인하를 쫓아갔다.“뭘 이리도 빨리 가?”설인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기다리란 소리도 없었잖아.”방성원은 그녀의 대답에 어이없다가 문득 앞에서 하하호호 즐겁게 걸어가고 있는 두 커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자신과 설인하는 비록 지금 이혼에 대한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고 있었지만 여전히 냉랭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방성원은 지난번 설인하와 연지석 사이를 오해한 게 미안한 것도 있어서 차에 올라탈 때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남자의 돌발행동에 설인하는 온몸이 굳어진 채 고개를 돌리고 그에게 물었다.“뭐 하는 거야?”“손잡고 싶
정수미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만약 어느 날 네 마음이 변했더라도 민정이한테 상처 주지 말고 그냥 우리 정씨 가문으로 보내줘.”여태껏 살아오면서 이미 수많은 일을 겪어온 정수미는 약속이란 게 참 지켜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유남준도 그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자기 말을 증명해 낼 수 있는 게 없었다.하여 허리를 숙이고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비록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말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아는데요. 꼭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전 이미 IM 그룹의 모든 지분을 민정이 명의로 변경했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저희 둘이 헤어지면 민정이가 평생 먹고 남을 돈은 있는 거잖아요.”사실 박민정은 이미 지엔 그룹을 소유하고 있기에 금전적인 면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지만 그래도 유남준이 저렇게 말하니 마음이 든든했고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하여 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래, 나도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게.”“네.”유남준의 입꼬리는 어느새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민정이 수술이 끝났는지 이만 가볼까요?”“그래.”그렇게 유남준은 정수미의 휠체어를 밀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사실 방금 정수미가 당부했던 말은 서주에 있을 때 정근우도 똑같이 말했었다.“만약 우리 민정이를 괴롭히는 날에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때나 지금이나 유남준은 그들의 말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박민정을 지켜주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아 마음이 따뜻했다.박민정의 수술은 점심이 되어서야 끝났고 김인우가 수술실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유남준이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어떻게 됐어?”김인우는 마스크를 벗으며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아마 큰 문제는 없을 텐데 회복되는 걸 지켜봐야 할 것 같아.”유남준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고 정수미와 다른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들 배고프시죠? 얼른 가서 밥부터 먹고 옵시다.”김인우도 웃으며 답했다.“그래요. 밥부터 먹어요.”박민
조하랑은 박민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너 오늘 수술한다고 해서 옆에 있어 주려고, 겸사겸사 정 대표님도 보려고 왔지.”박민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안 깨어나셨어.”“괜찮아, 밖에서 기다릴게.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조하랑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후, 김인우는 그녀의 업무를 전부 다른 사람에게 넘겨줬고 조하랑은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었다.그녀는 박민정곁에 앉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되물었다.“맞다, 남준 씨는?”“예찬이 학교에 데려다주고 바로 올거야.”지금 정민기도 매우 바쁜 시기라 왠지 유남준이 직접 박예찬을 데려다줘야 안심될 것 같았다.“아, 그렇군.”그렇게 조하랑은 박민정의 손을 잡고 또 한동안 위로의 말을 건네는걸 그녀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박민정의 얼굴이 지금 괜찮아 보여도 속은 말이 아니란 걸 조하랑은 다 알고 있었다.“괜찮을 거야, 민정아.”그러고는 박민정을 꽉 안아줬다.김인우는 곁에서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지 몰라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어느 정도 얘기를 나누다가 조하랑은 정수미 보러 들어갔다.정수미는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는데 전혀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다.“정 대표님, 오면서 과일 좀 사 왔어요.”조하랑은 혹시나 정수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최대한 밝게 인사를 건넸다.“하랑 씨, 고마워요.”“저는 민정이 친구이고 민정이 엄마면 제 엄마나 마찬가지예요.”그리고 뒤에 서 있는 김인우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나중에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제 남편한테 말씀 주시면 되겠습니다.”그러자 김인우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정수미에게 말했다.“하랑 씨말대로 혹시나 병원에 불편한 게 있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꼭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알겠어요. 그런데 여기 병원 너무 좋아요.”정수미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박민정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정수미가 중병 환자란 사실마저 잊어버렸다.그리고 얼마 안 남은 시간을 매일 슬픔 속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호들갑에 조하랑은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지금 여기서 어떻게 더 늦게 가란 소리예요? 전 그냥 임산부일 뿐이지 어디 몸이 불편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제발 걷는 것까지 뭐라 하지 말고 좀 가만히 있어 줄래요?”조하랑이 임신한 사실을 안 뒤로부터 김인우는 조하랑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고 먹는 것도 철저하게 관리했다.그리고 지금은 혹시나 넘어질까 봐 걷는 것까지 걱정했다.조하랑은 이제 더 이상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하랑 씨는 제 아내이고 뱃속에는 제 아이가 있는데 제가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 써줘요? 말 좀 들어요, 네?”김인우는 말하면서도 조하랑의 눈치를 힐끔힐끔 봤지만 조하랑은 그냥 못 들은 척 앞으로 직진했다.병원에는 당연히 사람도 많고 급히 걸어가는 의사나 환자, 그리고 병간호는 사람들도 많았다.그 보습을 지켜보던 김인우는 조하랑을 안쪽으로 세우더니 사람들에게 소리쳤다.“여기 임산부가 있는데 혹시나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주세요.”병원 관계자들은 그가 김인우란 사실을 알아차린 뒤 바로 벽 쪽에 붙다시피 지나다녔다.하지만 환자나 환자 가족들은 당연히 김인우가 누구인지, 그가 병원에서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기에 저마다 이상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조하랑은 순간 쥐구멍이 있으면 당장 기어들어 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는데 이렇게 과잉보호하는 남자를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지 문득 의심이 들었다.“그만해요. 인우 씨는 얼굴이 두꺼워서 잘 못 느끼겠지만 전 부끄러워 미치겠어요.”그러나 김인우는 지금 조하랑의 뱃속의 아이가 안전한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역시나 빠르게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고작 임신한 거로 왜 저리 오버야?”“내 말이, 누가 보면 이 병원에서 혼자 임신한 줄?”“너무 저러면 오히려 위험한 일이 더 많이 발생하던데.”“그러니까요. 너무 몸을 사리는 것도 안 좋더라고요. 차라리 그냥 우리처럼 자연스레 행동하는 게 낫지.”“문제는 아직 배도 너무 불러온 게 아니던데요?”몇
어렵게 되찾은 친엄마의 사랑을 다시 잃는 게 두려워서일까?박민정은 그렇게 찬물로 여러 번 얼굴을 씻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아 다시 화장실에서 나왔다.저녁.박민정은 유남준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혼자 남아서 정수미 곁을 지키려 했다.그러나 정윤아도 남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정수미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그렇게 밤이 되자 정수미는 또다시 통증이 밀려와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어 계속 뒤척거리기만 했다.그 모습을 발견한 박민정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엄마, 잠이 안 오면 우리 수다나 떨어요. 어차피 저도 안 피곤하거든요.”정윤아도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모, 우리 얘기나 나눠요.”그러자 정수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래.”정윤아가 먼저 대화의 주제를 꺼냈다.“민정 언니, 언니 어렸을 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데.”어렸을 때라...박민정은 그 시절 행복했던 부분만 말해줬다.“사실 별거 없어요. 그때 저는 한 가정부네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학교 끝나서 집에 돌아오니...”박민정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해주자 정윤아와 정수미는 모두 귀 기울이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특히 정수미는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그녀한테는 너무 소중한 시절이라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들었다.그러다가 중간중간에 정윤아는 궁금한 점도 박민정에게 물었다.그렇게 세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나눴고 정수미의 통증도 어느새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저녁 10시.정수미는 시계를 보다가 문득 내일 박민정의 수술이 생각나 졸린 척 하품했다.“안 되겠다. 나 너무 피곤한데 우리 이만 자자.” “네? 한참 재밌는데 벌써 잔다고요?”정윤아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전 아직 하나도 안 졸려요.”그러자 정수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나 같은 늙은이가 너희 젊은 사람들의 체력을 따라가기 쉬운 줄 알아? 자, 너희 둘은 옆에 칸에 가서 자. 민정이는 내일 수술도 해야 하잖
유남준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망설이고 있었는데 박민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그저 물어본 거예요.”그러고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그거 알아요? 저는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주변 사람들이 제 곁을 떠나는 건 너무 무서워요.”처음에는 박형식이었고 그 뒤로는 은정숙마저 떠나버렸다.그리고 지금은 친엄마인 정수미마저 건강이 점점 악화하고 있다.박민정은 요 며칠 꿈에서 거의 매일 누군가를 떠나보냈는데 깨어나 보면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다.유남준은 그녀를 품에 꼭 안아주며 답했다.“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어느 날 한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야.”다시 만난다는 말에 박민정이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정말 그렇게 될까요?”“당연하지.”예전의 유남준이라면 분명 이런 위로의 말조차 하지 못했을 텐데 오늘날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여태껏 죽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지금 눈앞의 박민정이 슬퍼하니 자신마저 가슴이 저린 것 같았다.박민정은 문득 가게에 다른 손님들도 있는 걸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괜찮은 척 말했다.“남준 씨 말이 맞아요. 어차피 우리도 결국에는 죽을 텐데 이렇게까지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은 여전히 씁쓸해 보였다.그렇게 주문했던 요리가 포장되어 나오자 그들은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빠르게 달려와 박민정에게 말했다.“형수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건 운명에 한 번 맡겨봅시다.”그러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알겠어요.”김인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제가 아무 고통도 없이 정 대표님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네네.”“그러면 민정 씨도 내일 바로 수술 진행할까요?”사실 박민정은 원래 수술 날짜를 뒤로 미루려고 했는데 정수미가 병실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자마자 박민정을 불렀다.“민정아.” 박민정
정수미는 창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예전에 엄마는 키워준 아이들한테 속아서 많은 약을 먹게 되었고 나중에는 어디 갇혔다가 불에 타 죽을뻔하기도 했어. 그때 아마 많은 유해 물질도 같이 마셨을 거야. 비록 네 아빠가 나중에 구해주긴 했지만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온몸에 큰 화상까지 입었어.”“그 이후로 비록 치료를 받았어도 여러 질병이 끊임없이 발생하면서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었어.”박민정은 그녀의 말에 심장이 하도 따끔거려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어렵게 찾은 친엄마가 곧 그녀를 떠나간다.정수미도 진작에 그녀의 슬픈 얼굴을 알아챘지만 뭐라고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사실 박민정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여태껏 잘 키워주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또 병마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민정아... 이렇게 또 너만 두고 가서 엄마가 너무 미안해.”박민정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엄마, 절대 그렇지 않아요. 이건 엄마 잘못도 아니고 엄마 탓도 아니에요.”박민정은 정수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다.그러자 정수미도 어느새 빨개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착한 딸, 엄마 이해해 줘서 고마워.”박민정은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정윤아와 유남준은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두 모녀가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눈치껏 밖으로 나갔다.박민정은 정수미에게 기대어 좀처럼 그녀의 손을 놓지 못했다.이때 정수미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민정아, 나 배고파.”그녀의 말에 박민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뭐 먹고 싶어요? 제가 사 올게요.” “아무거나 다 돼.”그러다가 정수미는 다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배고픈 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직 버틸만하다는 뜻이 아닐까?”그러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당연하죠.”“금방 갔다 올게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병실 밖으로 나와 그제야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유남준에게 말했다.“먹을거리 좀 사 올 테니
정윤아는 한눈에 봐도 다급한 기색이었다.그러자 의사는 마스크를 벗고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겼는데요... 가족분들도 아시다시피 환자분의 지금 상태로는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정윤아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혹시 며칠 전 먹었던 음식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가요?”그러자 의사가 의심의 눈초리로 되물었다.“혹시 환자분은 상태를 전혀 모르고 계셨나요?”정윤아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어떻게 이럴 수가?”의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정윤아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러나 이미 진작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박민정은 덤덤한 얼굴로 의사에게 다가가 말했다.“의사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그러자 의사는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했다.“아닙니다. 얼마 안 남은 시간 동안 환자분과 많은 시간을 나누시길 바랍니다.”“네.”말을 마친 뒤 의사는 자리를 떴다.그렇게 박민정은 정수미의 침대를 밀고 병실로 돌아왔다.정윤아는 뒤따라오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민정 언니, 언니는 고모 상태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박민정도 더는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솔직하게 답했다.“저도 며칠 전에야 알았어요. 그때 윤아 씨는 윤소현 씨한테 한창 속고 있을 때였죠. 저는 엄마의 건강에 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되어 예전에 엄마 주치의였던 분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더니 지금까지 병이 계속 악화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속이고 계셨더라고요.”정윤아는 순간 눈이 새빨개져서는 말까지 더듬었다.“어떻게 이럴 수가...”박민정은 본인도 슬펐지만 오히려 눈앞의 정윤아를 먼저 위로했다.“괜찮으니까 울지 말아요... 그리고 이따 엄마 보러 가서도 꼭 눈물을 참아야 해요, 알겠죠?”정수미는 분명 그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박민정의 말에 정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울지 않을게요. 이런 상황이면 분명 당사자부터 마음이 약해질 텐데 그럴수록 저희가 옆에서 파이팅 해드려야 고모가 병마
박민정은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하랑이 잘 부탁드릴게요. 임신이 처음이라 많이 서툴 텐데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저한테 전화해서 물어보셔도 돼요.”김인우가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산부인과 지식까지는 섭렵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겼다. “그럴게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제가 잘 돌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김인우는 지금 조하랑의 뱃속에 자기 아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기뻤다.그 덕분에 최근 병원의 복지도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박민정과 정수미는 그제야 병원에서 나와 돌아가는 차에 올라탔는데 가는 길 내내 정수미는 오늘 많이 피곤했는지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그러자 박민정이 자기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엄마, 너무 피곤하면 제 어깨에 기대어 한잠 자요.”“그래.”정수미는 박민정의 말대로 그녀에게 기댄 뒤 눈을 꼭 감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박민정은 이상하게 어깨가 축축한 것 같아 고개를 돌렸는데 정수미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순간 깜짝 놀란 박민정은 빠르게 운전기사더러 차를 세우게 했다.“당장 병원으로 다시 가주세요.”“네.”그녀의 말에 운전 기사는 황급히 핸들을 돌려 병원으로 향해 달려갔다.“엄마, 엄마...”박민정은 정수미를 안고 낮은 소리로 불러보았는데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마음이 점점 조급해진 박민정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엄마!”다행히 그들은 빠르게 다시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정수미가 수술실 안에 들어갈 때까지 박민정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이때, 김인우가 다급히 뛰어오더니 그녀의 어깨가 피로 흥건하게 젖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형수님, 무슨 일이에요?”박민정은 그제야 정수미의 병이 재발했다고 알려줬다.그러자 김인우는 침착하게 그녀를 안심시켰다.“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네네.”김인우는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뒤 곧바로 수술실 안으로 뛰어갔다.가기 전에 유남준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말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