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십거리가 돼?이곳 진주시에서 유남준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유남준은 박민정이 사라진 그 시간 동안 연지석이 그녀의 곁에 있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같이 지낸 시간이 많으면 자연스레 없던 정도 생긴다는데, 게다가 둘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연지석 귀에 그런 소문이 들어갈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고?”그의 검은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박민정의 얼굴에도 순간 그늘이 졌다.그녀는 유남준의 이런 말버릇을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대표님. 저희가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선택할 권리는 저에게 있습니다. 이건 지나친 간섭 아닌가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곧바로 유남준을 스쳐 지나갔다.유남준은 그녀에게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말 몇 마디 한 게 다인데 그는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졌다.뭐? 지나친 참견?멀어지는 박민정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그녀가 정말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유남준은 그런 느낌이 미치게 싫었다.그는 핸드폰을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수를 쓰든 그 아이 데려와.”“네.”“그리고 연지석 사업도 계속 공격해. 난 그 자식 것을 철저히 빼앗아야겠어.”전화를 끊은 그의 눈빛은 뭐든 집어삼킬 듯한 어둠에 휩싸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미련 없이 떠나던 박민정의 모습뿐이었다.예전엔 분명 그만을 사랑하겠다고 했던 사람이!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지?이제 연지석을 사랑하게 된 건가?뭐가 어떻게 됐든 그는 반드시 박민정을 다시 뺏어올 거다.그의 것은 그가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 남에게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유남준은 차에 탄 후 담배를 피우며 아이의 사진을 다시 꺼내 봤다.정말 그의 아이라면 박민정은 왜 그를 해외에 숨겨뒀을까?그는 아이를 다시 데려온 후에 낱낱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그리고 뭐가 어떻게 됐든 이번엔 반드시 박민정을 자기 옆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다시는 그의 시선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
박예찬은 이제 막 어린이집에서 수업을 마쳤는데 기사님은 오늘 예전보다 조금 늦게 오는 듯싶다.옆에 있던 유지훈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넌 매일 기사님이 데리러 와?”“안 그러면?”박예찬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유지훈은 거만하게 말했다.“난 매일 우리 집안 어르신들이 데리러 오거든. 증조할아버지는 내게 가족애를 느끼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어.”말을 마친 유지훈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신비롭게 말을 이었다.“오늘은 누가 데리러 오는지 알아?”“누군데?”박예찬은 별로 안 궁금하지만 그냥 물어봤다. 대꾸를 안 하면 쉴 새 없이 재잘거릴 테니까.“우리 할머니.”유지훈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박예찬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고영란은 그의 친할머니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기쁜 걸까?생각에 잠겨있을 때 고영란의 차가 도착했다.고급 리무진에서 내려오는 고영란은 세련된 생활한복 차림에 하이힐을 차려 신었다. 반 백 살 되는 나이에도 우아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었고 제스처마다 고상한 아우라가 흘러넘쳤다.“할머니.”유지훈이 쪼르르 달려갔다.아이가 귀여운 목소리로 외쳤지만 고영란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요 녀석의 부모가 해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남편이 친히 당부했으니 망정이지 그녀는 딴 사람 손자를 데리러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영란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론 옅은 미소를 지었다.“가자.”그녀는 말하면서 박예찬을 힐긋 쳐다보다가 순간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예찬아.”오늘 이리로 온 이유는 바로 제 아들 유남준의 어릴 때 모습을 쏙 빼닮은 박예찬을 보기 위해서이다.고영란은 일부러 조사해보았는데 박예찬은 최근에 금방 귀국하여 조하랑과 함께 지내고 있고 친아빠에 대한 정보는 없다.조하랑을 두어 번 정도 봤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다.박예찬은 고영란의 부름에 얌전하게 대답했다.“안녕하세요, 할머니.”고영란은 예의 바른 아이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유지훈을 뿌리치고 예찬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엄
조하랑은 원래 박예찬에게 겁줄 생각이었지만 아이는 멍청이를 쳐다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결국 그녀가 두 손을 들었다.“나도 알아. 지금 어린 애들에게 맞춰주려고 충분히 노력 중이야.”대답을 마친 박예찬은 본인의 태블릿PC를 꺼내 계속 공부하기 시작했다.어린이집에서 함께 블록을 쌓느라 책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됐다.조하랑은 태블릿PC를 힐긋 들여다봤는데 전부 이상한 부호였고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비교할수록 화만 더 난다니까.아이가 이토록 노력하니 조하랑도 더는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법률 서적을 마저 보며 이지원과의 소송 준비에 한창이었다.이때 갑자기 누군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박예찬이 문 앞에 서 있자 그녀는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이모한테 좋은 거 하나 주려고.”조하랑은 더 의아해졌다. 이때 박예찬이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컴퓨터 앞에 서더니 작은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렸고 1분도 채 안 돼 모니터에 웹사이트가 하나 나왔다. 마우스로 클릭하자 안에 전부 이지원에 관한 자료들이었다.조하랑은 화면에 꽉 찬 이지원의 사생활 자료를 보았고 아무거나 하나 클릭해봐도 전부 그녀가 거액을 들여도 구하지 못하는 스팩타클한 내용이었다.“헐 대박!!! 너네 엄마가 왜 자꾸 너보고 잠자코 숨어 지내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네.”박예찬의 커다란 눈망울은 순수하기 그지없었다.“이모, 설마 어린아이가 이런 걸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거 다 지석 삼촌이 알려준 거야. 이모더러 꼭 우리 엄마 도와주래. 절대 엄마를 속상하게 하지 말고.”조하랑과 연지석은 사석에서 따로 만날 일이 없다. 그러니 지금 박예찬이 하는 말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엄마도 단지 그가 보통 어린이들보다 조금 더 총명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이 정도일 줄은 모른다.만약 엄마가 알게 되면 깜짝 놀라겠지.그러니까 지금 하랑 이모한테도 이 증거 자료들을 예찬이 혼자 구한 거라고
유남준은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는 수중의 서류를 내려놓고 서다희에게 분부했다.“CEO 한 명 영입해!”서다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대표님 말씀은?”“나 한동안 좀 쉬어야겠어.”유남준이 대답했다.“중대한 일 아니면 나한테 보고할 필요 없어.”대기업에서 CEO를 영입하는 건 흔하디흔한 일이지만 서다희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유남준이 이 자리에 앉고 나서부터 모든 일을 직접 해나갔고 본인에게 일말의 휴식시간도 허용하지 않은 채 오직 일에만 몰두했으니까.그런 그가 지금 집행권을 내려놓겠다고 한다.서다희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영입하겠습니다.”서다희가 나간 후 유남준은 서류를 계속 들여다봤지만 머릿속엔 온통 박민정뿐이었다.그는 달갑지 않았다. 전혀 달갑지 않았다.이 몇 해 동안 열심히 일하고 밤낮없이 돈 번 이유가 뭣 때문인데?박씨 일가에 사기당한 빈자리를 채우려고, 금전적인 빈자리뿐만 아니라 이미 짓밟힌 자존심도 다시 세워야 했다!수천억의 재산은 유남준에게 큰 액수가 아니다!하지만 이 수천억 때문에 그는 상류층에서 온갖 굴욕을 당했다.뭇사람들은 그가 여자에게 빌붙어 신분 상승하려다가 바람맞은 바보라고 했다!수천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청각장애의 아내까지 얻었으니 말이다.그리고 지금 그에게 차려진 건 무엇인가?박민정은 일부러 그를 잊은 척했고 무참하게 그를 버렸다...여기까지 생각한 유남준은 넥타이를 살짝 풀어헤치며 본인이 직접 가서 아이를 데려오기로 했다.그리고 박민정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가짜 기억 상실이란 걸 까밝힐 예정이다.그렇게 되면 박민정을 제대로 징벌할 수 있다.따끔한 교훈을 안겨줄 수 있다.유남준이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노크 소리가 그를 사색에서 깨워줬다.“들어와.”사무실 문이 열리고 박민정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오늘 연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맑은 두 눈으로 유남준의 짙은 눈빛과 마주했다.유남준은 헝클어진 넥타이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도 정리했다.“민
유남준은 이렇게 가식적인 홍보 활동을 제일 싫어한다.머리는 거절이라고 외치는데 정작 입밖에 튀어나온 말은 오케이 사인이었다.“그럼 저는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박민정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떠나려는데 뒤에서 유남준의 살짝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이 보러 가는 거라면 옷을 좀 더 챙겨입는 게 좋을 것 같아.”박민정은 어리둥절해졌다.머리 숙여 보니 그제야 상의 단추가 두 개나 풀린 걸 발견했다.날씨가 더워 사무실에서 풀었던 단추를 깜빡하고 채우지 못했다.박민정은 종종걸음으로 대표 사무실을 나와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단추를 채웠다.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머리를 푹 숙이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한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죄송합니다.”박민정은 고개 들어 김인우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했다.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그와 거리를 뒀다.요즘 호산 그룹에서 출근하며 그녀는 김인우와 마주치는 일을 면할 수가 없다.대부분 길을 에돌아 갔는데 오늘은 아예 정면으로 마주쳤다.박민정은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에게 능멸당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김인우는 그녀의 모든 제스처를 지켜보다가 목이 확 멨다. 그는 행여나 박민정을 놀라게 할까봐 아무 말도 못 한 채 곧게 유남준의 사무실로 걸어갔다.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김인우는 사소한 것도 따지고 들고 원한은 반드시 갚는 사람이다.전에 그녀가 조하랑을 대신해 소개팅에 나간 것 때문에 이미 김인우의 심기를 단단히 건드렸다.지난번 바에서 그녀를 겨냥하지 않았다고 앞으로 쭉 겨냥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이 남자는 가끔 보면 유남준보다 더 섬뜩한 사람이다.유남준은 절대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 기껏해야 회피하고 무시하고 사람 마음을 지치게 하는 것뿐이다.하지만 김인우는 여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언제 한번 박민정이 부주의로 김인우를 슬쩍 다쳤다가 한 달 후에 아예 교외로 끌려가 자생 자멸하게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박민정은
유남준은 짙은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괜찮아. 이미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어.”김인우의 눈가에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그는 참지 못하고 계속 더 캐물었다.“너 그런 장소 나가는 거 제일 싫어하잖아?”유남준은 그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담담하게 말했다.“뭐든 예외가 있기 마련이지.”김인우는 더 머무르지 않고 바로 나갔다.그는 라운지에서 마침 박민정이 회사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봤다.그 미소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이때 비서가 김인우에게 다가왔다.“도련님, 회장님께서 오라고 하십니다.”“알았어.”...오후.특수학교.박민정은 새로 연 음악 교실에 가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장애인 어린이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가르쳤다.유남준은 한 무리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문밖에 서 있었다.그는 박민정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걸 처음 본다. 맑고 은은한 피아노 소리가 졸졸 흐르는 물결처럼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유남준은 그녀의 얼굴에 띈 연한 미소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건 거의 본 적 없는 미소였다.“선생님 너무 대단하세요.”“대체 어떻게 배우신 거예요?”아이들은 숭배의 눈길로 박민정을 쳐다봤다.다른 후원자들보다 보청기를 착용한 박민정에게 유난히 더 호감이 갔는데 아마도 공감대가 형성돼서 그런가 보다.박민정은 아이들에게 노력만 하면 반드시 더 우수해질 거라고 말했다.유남준은 줄곧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그에게 박민정은 항상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공주님이고 장점이라곤 전혀 없는 여자였는데 인제 보니 아니었다.위문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박민정은 아이들과 일일이 작별을 고했다.밖에 나오자 유남준이 어느새 경호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용수나무 아래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무 아래에 서 있는 남자는 훤칠한 체격에 차가운 옆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박민정은 그를 향해 걸어갔다.“대표님...”그녀의 부름에 유남준은 얼른 손에 쥔 담배를 껐다.박민정은 실로 의아할 따름이었다. 유남준이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
“네가 해준 밥을 3년이나 먹은 사람이야. 안 괜찮을 리가 있겠어?”유남준이 쏘아붙였다.박민정은 피식 웃으며 음식이 도착한 후 주방에 가서 밥을 지었다.사실 그녀는 전에 요리라곤 전혀 할 줄 몰랐다. 유남준에게 시집간 이후에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다만 유남준은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고마워한 적이 없고 모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였고...그는 거실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서 떼지 못했다. 몇 번을 쳐다봐도 질리지 않았다.박민정은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부러 유남준이 제일 좋아하는 소불고기에 약을 탔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았다.이게 얼마만인가. 그녀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이! 유남준은 좀처럼 수저를 들지 못했다.박민정은 그의 그릇에 소불고기 한 점을 집어줬다.“집에서 먹는 거 괜찮다고 분명 말씀하셨어요 대표님이.”유남준은 묵묵히 수저를 들고 소불고기를 먹었다.박민정은 잔뜩 긴장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를 관찰했다.그녀는 소불고기에 수면제를 탔다.수면제의 양이 적을까 봐 그에게 몇 점이나 더 집어줬 지 모른다.유남준은 짙은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넌 왜 안 먹어?”“저는 별로 배 안 고파요. 대표님 많이 드세요.”박민정은 긴장하여 몰래 손바닥을 꼬집고는 다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유남준은 더 캐묻지 않고 그녀와 함께 묵묵히 식사했다.식사를 다 마쳤지만 그는 좀처럼 졸려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어리둥절해졌다.약을 적게 탄 걸까?“물 한 잔 따라와.”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가려고 했다.이때 유남준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았다.오늘 그녀는 유난히 정성스럽다.분명 그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설마 전에는 다 연기한 거고 오늘 모습이야말로 진심인 걸까?박민정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혹여나 그가 뭐라도 발견한 줄 알고 심장이 덜컹거렸는데 결국 돌아온 대답이 이거였다.“거실에도 물 있는데 왜 주방까지 가려고 그래?”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민정이 말을 이었다.“예쁜 걸 싫어하는 여자는 없어요. 전에는 아마 제가 너무 비천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꼭꼭 숨기고 살았나 봐요.”유남준은 이 말을 듣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러니까 네 말은 전에 다 날 위해서 그랬단 거야?”박민정은 머리를 들어 그를 똑바로 마주 봤다.“기억이 안 난다고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는 화장하는 것도 좋아하고 화려한 옷을 입는 것도 좋아하고 또 그리고 값비싼 액세서리도 너무 좋아해요.”그녀가 전에 그레이 톤의 옷만 입고 메이크업도 안 한 건 유남준이 화낼까 봐 두려워서였다.그녀의 가족이 유남준에게 사기를 쳤으니 본인까지 화려하게 차려입어서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딱 한 번 빨간색 치마를 입고 밖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꽃에 물을 줬는데 유남준이 가차 없이 비난했다.“너희 집안 참 대단해. 사기를 치고도 이렇게 속 편하게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콧노래를 흥얼거려?”그때 이후로 박민정은 집안에서 감히 기뻐할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었으며 예쁘게 차려입는 건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유남준은 이런 것들을 몰라줄 뿐만 아니라 모든 원인을 그녀가 싫어해서 그런 거라고 한다!얼마나 가소로운가.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갔다. 손에 피가 날 때까지 그녀는 힘을 풀지 않았다.유남준은 그렇게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온몸이 노곤해졌다.“그럼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박민정은 화들짝 놀랐다.그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고 허리 숙여 그녀의 좁은 어깨에 턱을 고였다.“왜 난 네가 날 미워하는 것 같지?”박민정은 목구멍에 솜뭉치가 꽉 막힌 기분이었다.‘대체 누가 할 말이야? 남준 씨야말로 날 미워했잖아!’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좀 놓아줄래요?”다만 유남준은 전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뿐더러 더 세게 끌어안았다.“민정아, 내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찾
방 안에서는 이미 유성혁이 상의를 벗은 채 박민정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었다. 그때, 최현아가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여보!”“뭐야?” 유성혁은 갑작스러운 방해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유남준이 돌아왔어요.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까 얼른 옷부터 입어요!” 최현아가 다급하게 외쳤다.유성혁은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어떡하지? 어떡하지? 유남준이 내가 박민정과 함께 있는 걸 알게 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에요. 얼른 옷 다 입고 숨어요. 여기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최현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유성혁은 허겁지겁 옷을 걸쳐 입으며 당부했다.“꼭 나랑 관련 없는 일처럼 해줘. 아직 아무것도 못 했다고!”“알았어.” 최현아는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를 방에서 밀어내고 나서야 최현아는 박민정 쪽으로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동서.” 그녀는 살며시 불렀다.박민정은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최현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유남준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기를.그녀는 박민정의 몸을 가볍게 감싸 이불을 덮어준 후,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다.잠시 후, 약효가 다소 풀렸는지 박민정은 흐릿한 눈빛으로 천천히 눈을 떴는데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웠다.그때였다.쿵!문이 거칠게 열리며 유남준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민정이는 어디 있어요?”최현아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을 막아섰다.“남준 씨! 갑자기 웬일이에요? 마침 남준 씨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요.”유남준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민정이는요?”“아마 술을 잘 못 마셔서 그런가 봐요. 지금 쉬고 있어요. 원래 남준 씨 방으로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전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최현아가 태연한 척 대답했다.분명 박민정은 오늘 칵테일을 한 모금 정도 마셨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냥 음료나
박민정은 홀로 홀 대각에 앉아 있다가 어딘가 불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이 감각... 낯설지 않았다.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최현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동서, 벌써 가려고?”“네.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가볼게요.”최현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내가 바래다줄까? 어차피 나도 딱히 할 일 없는데.”“아니에요, 괜찮아요.”박민정이 정중히 거절하자 최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물었다.“그런데 남준 씨는? 어디 갔어?”“일이 있어서 나갔어요.”그 말을 듣자 최현아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그래? 그럼 다행이네. 내가 데려다줄게, 길을 잃으면 곤란하잖아.”“괜찮아요. 길은 기억하고 있어요.”설령 잊는다 해도 하인들에게 물으면 될 일이었다.박민정은 가볍게 웃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걸음을 옮길수록 몸이 이상했는데 발이 휘청이고 머리가 묘하게 어지러웠다.최현아는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다가왔다. 이대로 그녀를 그냥 보낼 리 없었으니까.“괜히 사양하지 마.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최현아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지금은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하지만 점점 시야가 흐릿해졌다.혹시 몸에 다시 문제가 생긴 걸까? 머릿속이 어지럽고 다리가 힘없이 풀렸다.마지막 남은 의식으로 박민정은 힘겹게 입을 뗐다.“...구급... 구급차를 불러줘요...”그러나 그녀가 완전히 쓰러지기 직전, 최현아가 그녀를 붙잡았는데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구급차? 정말 순진하기도 하지.”최현아는 비웃듯 말하며 박민정을 외딴 곳으로 끌고 갔다. 곧 어둠 속에서 몇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최현아가 지시한 대로 움직였다.박민정은 서쪽에 있는 빈집으로 실려 갔다.최현아는 남자들을 향해 싸늘하게 경고했다.“오늘 일
박민정이 고개를 들자 날카로운 기색이 어린 최현아의 시선과 마주쳤다.“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저쪽에서 사촌 언니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같이 갈래?”최현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요, 전 혼자가 좋아서요.”박민정은 조용히 거절했다.최현아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었지만 그 눈빛은 싸늘했다.“그래? 알겠어.”박민정은 그녀가 이대로 물러설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최현아는 곁에 앉았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최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나도 시끄러운 분위기는 별로야. 어차피 동서도 혼자고, 나도 혼잔데, 같이 있어도 괜찮잖아?”이렇게 나오니 박민정은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게다가 여기는 유씨 가문 안이었기에 자신이 뭐라고 그녀를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박민정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유씨 가문의 젊은 친척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 사이, 최현아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슬쩍 박민정의 잔을 힐끔거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교활한 빛이 스쳤고 이내 일부러 놀란 척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동서, 이것 좀 봐.”그녀가 화면을 내밀자 박민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화면에는 에릭에 대한 연예 뉴스가 떠 있었다.박민정이 그 기사를 읽는 사이, 최현아는 잽싸게 손을 뻗어 박민정의 잔을 건드렸다. 긴장한 듯한 그녀의 손길이 빠르게 움직였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에릭 씨, 동서네 회사 직원 맞지? 설마 남자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가십 뉴스잖아요. 아마 거짓일걸요.”박민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에릭이 그런 취향이라면 연지석과 그렇게 티격태격할 리가 없었다. 연지석처럼 잘생긴 남자가 앞에 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건 정말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였다.“그렇지? 요즘 매체들은 자극적인 소문을 너무 많이 퍼뜨려.”최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문득 박민정에게 물었다.“오늘 밤엔 안 돌아가겠네?”
“뭐?”유성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고 곧이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비웃었다.“그 여자, 가식 떨기는 끝내주더니. 진짜 정절을 지키는 여자인 줄 알았잖아. 그리고 유남준, 그렇게 대단하다면서? 어째서 자기 동생 하나 제대로 손보지도 못하는 거야?”유성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최현아는 그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는데 그가 무슨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와서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여보, 당신이 예전부터 그 여자를 원했던 거, 난 다 알고 있어요. 내가 도와줄게요.”유성혁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당신은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당신밖에 없어.”최현아는 그가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모습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당신이 날 사랑하는 건 알지만 동시에 여전히 민정 씨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난 다른 여자들처럼 질투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저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긴 듯했다.유성혁은 원래부터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순간적으로 그의 흥미가 자극되었다.“당신 정말 최고야. 하지만 박민정은 너무 고고한 척하는 년이잖아. 절대 동의하지 않을걸? 그리고 유남준이 알면 난 팔다리가 부러질 거라고.”최현아는 그가 결국 겁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여보, 당신은 참 어리석어요. 민정 씨가 거절하는 건 당신이 어디 가서 이 사실을 떠벌릴까 봐 그런 거죠. 내가 잘 설득하면 오늘 밤엔 당신 것이 될 거예요.”“정말이야?” 유성혁의 눈빛이 반짝였다.“당연하죠. 그러니까 깨끗하게 씻고 기다리고 있어요.” 최현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유성혁은 기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좋아! 약속한 거다!”그는 들뜬 표정으로 손을 비비며 자리를 떠났다.최현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박민정은 유남준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마치 새롭게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남준 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앞으로 나한테 고맙다는 말 하지 마.”둘은 부부였으나 박민정은 늘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이 말에 박민정은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깜빡했어요.”“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마.” 유남준이 덧붙이자 박민정은 말문이 막혔고 무슨 말을 해도 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알겠어요.”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그 모습을 본 유남준은 다시금 마음이 아려왔다. “가자, 좀 쉬어야지.”“네.”박민정은 그의 뒤를 따라 두 사람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그곳에 도착하자 유남준은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고 집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이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던 박민정은 소파에 앉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맞다, 아이들은요?”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아이들은 본가에서 안전해. 게다가 오늘 가문의 여러 친척들도 모일 건데 아이들이 그 사람들과 친해지면 나중에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리를 비우는 게 실례가 되진 않을까요?”“아니.”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어.”그의 말에는 어떠한 허세도 섞여 있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의 능력을 믿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어젯밤 잠을 설친 탓인지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은 가끔씩 시선을 들어 그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예전에는 일할 때 누구도 그의 집중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박민정이 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이었다.그가 얼마나 그녀를 바라보고
“아버지, 드세요. 이건 제가 직접 정성 들여 고운 탕이에요. 백세를 넘긴 한의학자의 비법을 배워 만든 거라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꽤 걸렸어요. 드시면 장수하실 거예요.”유석진이 아부하듯 말하자 유명훈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이냐?”“그럼요. 제가 아버지를 속이겠습니까? 제가 해외에서 돌아온 이유도 아버지를 잘 모시고 장수하시게 하려는 거죠.”유석진은 유남준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아버지와 달리, 유명훈의 환심을 사는 데 능숙했다.그래서인지 유명훈은 늘 그쪽을 편애했다.“석진아, 우리 집에서는 네가 가장 효심이 깊구나.” 유명훈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물론 이 나이가 되면 누구나 늙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하지만 유명훈은 늙고 싶지 않았고 죽음은 더더욱 두려웠다. 그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에서 수혈을 받기까지 했다.“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동생과 아이들도 다 효심이 깊어요.” 유석진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유남준에게 보냈다. “그렇지, 남준아?”유남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말로 유명훈도 그의 성격을 아는 터라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다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으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히 있어라.”그렇게 말했지만 모인 이들은 각자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유명훈은 문득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민정아.”“네, 할아버지.” 박민정이 공손하게 대답하자 유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불렀다.이제 모두의 시선이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아, 넌 이제 우리 유씨 가문의 중요한 일원이야. 네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냐?”“많이 나아졌어요.” 박민정은 조용히 대답했다.“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완전히 회복되면 가정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회사 일은 남준이에게 맡기고 말이다.”유명훈은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그가 유남준과 박민정의 결혼을 허락한 것도 당시 박민정의 가문이 유씨
박민정은 그에게 안긴 채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고 가슴 한편이 알 수 없는 먹먹함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들어 유남준의 등을 두드렸다. “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자요.” 유남준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더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박민정은 저항하지 않고 그의 품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풀어냈다.이제는 그녀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발코니로 나가 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새벽 여섯 시가 되자 유남준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에게 덮여 있는 담요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있었다.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가 돌아왔을 때 박민정이 곁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간 걸까?혹시 꿈을 꾼 걸까 싶어 그는 2층 방으로 올라가 욕실에서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잠을 청했다.박민정은 그의 움직임을 들었지만 상태가 괜찮아 보이자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아침 여덟 시, 유남준은 평소처럼 정시에 일어났고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아한 태도로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는데 박민정은 그의 맞은편에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다가 놀라고 말았다.어젯밤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오늘은 마치 전혀 취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였다.유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하고는 눈을 들어 그녀의 맑은 눈과 마주쳤다. “왜?”“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박민정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식사를 이어갔다.두 아이도 식탁 위의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결국 참지 못한 박윤우가 작은 목소리로 여름 박예찬에게 물었다. “형, 나 왜 집이 이상한 것 같지?”“조용히 하고 만두나 먹어.”“아, 응.”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가족들은 청명을 맞아 조상을 기리기 위해 본가로 향했다.차가 본가 대문 앞에 멈추자마자 고영란이 반갑게 달려 나왔다. “윤우야, 예찬아, 어서 할머니한테 오렴.”유남우도 그녀 옆에 서서 서슴없이 박민정을
유남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택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확인했는데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박민정은 다가가기가 너무 부끄러워 멀리서 그 여자 형체랑 똑같이 제작된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마음에 들어요? 저는 상관없긴 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이런 기괴한 물건에 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민정아,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아?”그의 말에 박민정은 깜짝 놀랐다.“왜요?”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 구매한 물건이었다.“오해하지 말아요. 사람마다 생리적 욕구가 있기 마련이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희는 부부잖아요. 그렇죠?”유남준은 그녀가 자기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역시나 박민정은 그가 왜 화 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라가며 다시 설명했다.“원래는 다른 여자를 찾아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저희는 현재 부부잖아요. 또 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서로 사랑했다고 해서 그렇게 처리하는 건 아닌 것 같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머리가 아파서 소파에 털썩하고 앉았다.“알겠으니까 그만 말해.”‘날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지?’‘그저 성욕을 못 참아서 안달 난 짐승으로 생각하나?’박민정은 그제야 입을 꾹 닫았는데 순간 거실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진 것 같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박민정이 그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자러 갈게요. 내일 옛 저택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그러나 유남준은 여전히 토라진 말투로 답했다.“응. 마음대로 해.”그러나 박민정은 그가 화 났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기쁜 마음으로 돌아섰다.유남준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더니 멍한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그냥 이대로 가는 거야?”그리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그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제우스 클럽.방성원과 유남준은 술을 마시며
그리고 침대에 던져지고 나서야 박민정은 이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재빨리 이불을 몸에 둘렀다.“오지 말아요!”그러나 유남준의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민정아, 나도 남자야.”시간도 많이 흘렀고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매일 그냥 잠만 자려고 하자니 그도 나름 괴로웠다.그리고 이 상태로 두 사람이 계속 지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병들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유남준은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그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또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하여 다 포기한 채 가만히 누워 온전히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을 무렵 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엄마.”박예찬과 박윤우가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박민정을 불렀다.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진서연이랑 설인아, 그리고 민수아까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으나 두 아이도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있는 힘껏 유남준을 밀쳐냈다.하여 오늘에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멈춰야 했다.박민정이 황급히 방에서 나오니 두 아이가 마침 문 앞에 서 있었다.“엄마, 자고 있었어? 왜 얼굴이 빨개?”박윤우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게...”겨우 설명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유남준이 갑자기 방 안에서 나오더니 한껏 어두운 얼굴로 두 아이에게 물었다.“왜 벌써 왔어?”“추석이라 수업이 일찍 끝났어요.”박예찬은 뭔가 눈치챈 듯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러나 박윤우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엄마, 저 쓰레기 아빠랑 같이 잔 거야?”“아니.”박민정은 단번에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저 찾을 물건이 있어서.”“무슨 물건인데?”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질문 공세에 박민정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가 겨우 답했다.“책.”“무슨 책? 나도 같이 찾아볼게.”“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