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찬은 이제 막 어린이집에서 수업을 마쳤는데 기사님은 오늘 예전보다 조금 늦게 오는 듯싶다.옆에 있던 유지훈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넌 매일 기사님이 데리러 와?”“안 그러면?”박예찬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유지훈은 거만하게 말했다.“난 매일 우리 집안 어르신들이 데리러 오거든. 증조할아버지는 내게 가족애를 느끼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어.”말을 마친 유지훈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신비롭게 말을 이었다.“오늘은 누가 데리러 오는지 알아?”“누군데?”박예찬은 별로 안 궁금하지만 그냥 물어봤다. 대꾸를 안 하면 쉴 새 없이 재잘거릴 테니까.“우리 할머니.”유지훈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박예찬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고영란은 그의 친할머니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기쁜 걸까?생각에 잠겨있을 때 고영란의 차가 도착했다.고급 리무진에서 내려오는 고영란은 세련된 생활한복 차림에 하이힐을 차려 신었다. 반 백 살 되는 나이에도 우아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었고 제스처마다 고상한 아우라가 흘러넘쳤다.“할머니.”유지훈이 쪼르르 달려갔다.아이가 귀여운 목소리로 외쳤지만 고영란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요 녀석의 부모가 해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남편이 친히 당부했으니 망정이지 그녀는 딴 사람 손자를 데리러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영란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론 옅은 미소를 지었다.“가자.”그녀는 말하면서 박예찬을 힐긋 쳐다보다가 순간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예찬아.”오늘 이리로 온 이유는 바로 제 아들 유남준의 어릴 때 모습을 쏙 빼닮은 박예찬을 보기 위해서이다.고영란은 일부러 조사해보았는데 박예찬은 최근에 금방 귀국하여 조하랑과 함께 지내고 있고 친아빠에 대한 정보는 없다.조하랑을 두어 번 정도 봤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다.박예찬은 고영란의 부름에 얌전하게 대답했다.“안녕하세요, 할머니.”고영란은 예의 바른 아이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유지훈을 뿌리치고 예찬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엄
조하랑은 원래 박예찬에게 겁줄 생각이었지만 아이는 멍청이를 쳐다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결국 그녀가 두 손을 들었다.“나도 알아. 지금 어린 애들에게 맞춰주려고 충분히 노력 중이야.”대답을 마친 박예찬은 본인의 태블릿PC를 꺼내 계속 공부하기 시작했다.어린이집에서 함께 블록을 쌓느라 책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됐다.조하랑은 태블릿PC를 힐긋 들여다봤는데 전부 이상한 부호였고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비교할수록 화만 더 난다니까.아이가 이토록 노력하니 조하랑도 더는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법률 서적을 마저 보며 이지원과의 소송 준비에 한창이었다.이때 갑자기 누군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박예찬이 문 앞에 서 있자 그녀는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이모한테 좋은 거 하나 주려고.”조하랑은 더 의아해졌다. 이때 박예찬이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컴퓨터 앞에 서더니 작은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렸고 1분도 채 안 돼 모니터에 웹사이트가 하나 나왔다. 마우스로 클릭하자 안에 전부 이지원에 관한 자료들이었다.조하랑은 화면에 꽉 찬 이지원의 사생활 자료를 보았고 아무거나 하나 클릭해봐도 전부 그녀가 거액을 들여도 구하지 못하는 스팩타클한 내용이었다.“헐 대박!!! 너네 엄마가 왜 자꾸 너보고 잠자코 숨어 지내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네.”박예찬의 커다란 눈망울은 순수하기 그지없었다.“이모, 설마 어린아이가 이런 걸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거 다 지석 삼촌이 알려준 거야. 이모더러 꼭 우리 엄마 도와주래. 절대 엄마를 속상하게 하지 말고.”조하랑과 연지석은 사석에서 따로 만날 일이 없다. 그러니 지금 박예찬이 하는 말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엄마도 단지 그가 보통 어린이들보다 조금 더 총명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이 정도일 줄은 모른다.만약 엄마가 알게 되면 깜짝 놀라겠지.그러니까 지금 하랑 이모한테도 이 증거 자료들을 예찬이 혼자 구한 거라고
유남준은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는 수중의 서류를 내려놓고 서다희에게 분부했다.“CEO 한 명 영입해!”서다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대표님 말씀은?”“나 한동안 좀 쉬어야겠어.”유남준이 대답했다.“중대한 일 아니면 나한테 보고할 필요 없어.”대기업에서 CEO를 영입하는 건 흔하디흔한 일이지만 서다희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유남준이 이 자리에 앉고 나서부터 모든 일을 직접 해나갔고 본인에게 일말의 휴식시간도 허용하지 않은 채 오직 일에만 몰두했으니까.그런 그가 지금 집행권을 내려놓겠다고 한다.서다희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영입하겠습니다.”서다희가 나간 후 유남준은 서류를 계속 들여다봤지만 머릿속엔 온통 박민정뿐이었다.그는 달갑지 않았다. 전혀 달갑지 않았다.이 몇 해 동안 열심히 일하고 밤낮없이 돈 번 이유가 뭣 때문인데?박씨 일가에 사기당한 빈자리를 채우려고, 금전적인 빈자리뿐만 아니라 이미 짓밟힌 자존심도 다시 세워야 했다!수천억의 재산은 유남준에게 큰 액수가 아니다!하지만 이 수천억 때문에 그는 상류층에서 온갖 굴욕을 당했다.뭇사람들은 그가 여자에게 빌붙어 신분 상승하려다가 바람맞은 바보라고 했다!수천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청각장애의 아내까지 얻었으니 말이다.그리고 지금 그에게 차려진 건 무엇인가?박민정은 일부러 그를 잊은 척했고 무참하게 그를 버렸다...여기까지 생각한 유남준은 넥타이를 살짝 풀어헤치며 본인이 직접 가서 아이를 데려오기로 했다.그리고 박민정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가짜 기억 상실이란 걸 까밝힐 예정이다.그렇게 되면 박민정을 제대로 징벌할 수 있다.따끔한 교훈을 안겨줄 수 있다.유남준이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노크 소리가 그를 사색에서 깨워줬다.“들어와.”사무실 문이 열리고 박민정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오늘 연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맑은 두 눈으로 유남준의 짙은 눈빛과 마주했다.유남준은 헝클어진 넥타이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도 정리했다.“민
유남준은 이렇게 가식적인 홍보 활동을 제일 싫어한다.머리는 거절이라고 외치는데 정작 입밖에 튀어나온 말은 오케이 사인이었다.“그럼 저는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박민정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떠나려는데 뒤에서 유남준의 살짝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이 보러 가는 거라면 옷을 좀 더 챙겨입는 게 좋을 것 같아.”박민정은 어리둥절해졌다.머리 숙여 보니 그제야 상의 단추가 두 개나 풀린 걸 발견했다.날씨가 더워 사무실에서 풀었던 단추를 깜빡하고 채우지 못했다.박민정은 종종걸음으로 대표 사무실을 나와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단추를 채웠다.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머리를 푹 숙이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한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죄송합니다.”박민정은 고개 들어 김인우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했다.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그와 거리를 뒀다.요즘 호산 그룹에서 출근하며 그녀는 김인우와 마주치는 일을 면할 수가 없다.대부분 길을 에돌아 갔는데 오늘은 아예 정면으로 마주쳤다.박민정은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에게 능멸당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김인우는 그녀의 모든 제스처를 지켜보다가 목이 확 멨다. 그는 행여나 박민정을 놀라게 할까봐 아무 말도 못 한 채 곧게 유남준의 사무실로 걸어갔다.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김인우는 사소한 것도 따지고 들고 원한은 반드시 갚는 사람이다.전에 그녀가 조하랑을 대신해 소개팅에 나간 것 때문에 이미 김인우의 심기를 단단히 건드렸다.지난번 바에서 그녀를 겨냥하지 않았다고 앞으로 쭉 겨냥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이 남자는 가끔 보면 유남준보다 더 섬뜩한 사람이다.유남준은 절대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 기껏해야 회피하고 무시하고 사람 마음을 지치게 하는 것뿐이다.하지만 김인우는 여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언제 한번 박민정이 부주의로 김인우를 슬쩍 다쳤다가 한 달 후에 아예 교외로 끌려가 자생 자멸하게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박민정은
유남준은 짙은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괜찮아. 이미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어.”김인우의 눈가에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그는 참지 못하고 계속 더 캐물었다.“너 그런 장소 나가는 거 제일 싫어하잖아?”유남준은 그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담담하게 말했다.“뭐든 예외가 있기 마련이지.”김인우는 더 머무르지 않고 바로 나갔다.그는 라운지에서 마침 박민정이 회사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봤다.그 미소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이때 비서가 김인우에게 다가왔다.“도련님, 회장님께서 오라고 하십니다.”“알았어.”...오후.특수학교.박민정은 새로 연 음악 교실에 가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장애인 어린이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가르쳤다.유남준은 한 무리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문밖에 서 있었다.그는 박민정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걸 처음 본다. 맑고 은은한 피아노 소리가 졸졸 흐르는 물결처럼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유남준은 그녀의 얼굴에 띈 연한 미소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건 거의 본 적 없는 미소였다.“선생님 너무 대단하세요.”“대체 어떻게 배우신 거예요?”아이들은 숭배의 눈길로 박민정을 쳐다봤다.다른 후원자들보다 보청기를 착용한 박민정에게 유난히 더 호감이 갔는데 아마도 공감대가 형성돼서 그런가 보다.박민정은 아이들에게 노력만 하면 반드시 더 우수해질 거라고 말했다.유남준은 줄곧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그에게 박민정은 항상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공주님이고 장점이라곤 전혀 없는 여자였는데 인제 보니 아니었다.위문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박민정은 아이들과 일일이 작별을 고했다.밖에 나오자 유남준이 어느새 경호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용수나무 아래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무 아래에 서 있는 남자는 훤칠한 체격에 차가운 옆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박민정은 그를 향해 걸어갔다.“대표님...”그녀의 부름에 유남준은 얼른 손에 쥔 담배를 껐다.박민정은 실로 의아할 따름이었다. 유남준이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
“네가 해준 밥을 3년이나 먹은 사람이야. 안 괜찮을 리가 있겠어?”유남준이 쏘아붙였다.박민정은 피식 웃으며 음식이 도착한 후 주방에 가서 밥을 지었다.사실 그녀는 전에 요리라곤 전혀 할 줄 몰랐다. 유남준에게 시집간 이후에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다만 유남준은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고마워한 적이 없고 모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였고...그는 거실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서 떼지 못했다. 몇 번을 쳐다봐도 질리지 않았다.박민정은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부러 유남준이 제일 좋아하는 소불고기에 약을 탔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았다.이게 얼마만인가. 그녀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이! 유남준은 좀처럼 수저를 들지 못했다.박민정은 그의 그릇에 소불고기 한 점을 집어줬다.“집에서 먹는 거 괜찮다고 분명 말씀하셨어요 대표님이.”유남준은 묵묵히 수저를 들고 소불고기를 먹었다.박민정은 잔뜩 긴장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를 관찰했다.그녀는 소불고기에 수면제를 탔다.수면제의 양이 적을까 봐 그에게 몇 점이나 더 집어줬 지 모른다.유남준은 짙은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넌 왜 안 먹어?”“저는 별로 배 안 고파요. 대표님 많이 드세요.”박민정은 긴장하여 몰래 손바닥을 꼬집고는 다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유남준은 더 캐묻지 않고 그녀와 함께 묵묵히 식사했다.식사를 다 마쳤지만 그는 좀처럼 졸려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어리둥절해졌다.약을 적게 탄 걸까?“물 한 잔 따라와.”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가려고 했다.이때 유남준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았다.오늘 그녀는 유난히 정성스럽다.분명 그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설마 전에는 다 연기한 거고 오늘 모습이야말로 진심인 걸까?박민정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혹여나 그가 뭐라도 발견한 줄 알고 심장이 덜컹거렸는데 결국 돌아온 대답이 이거였다.“거실에도 물 있는데 왜 주방까지 가려고 그래?”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민정이 말을 이었다.“예쁜 걸 싫어하는 여자는 없어요. 전에는 아마 제가 너무 비천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꼭꼭 숨기고 살았나 봐요.”유남준은 이 말을 듣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러니까 네 말은 전에 다 날 위해서 그랬단 거야?”박민정은 머리를 들어 그를 똑바로 마주 봤다.“기억이 안 난다고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는 화장하는 것도 좋아하고 화려한 옷을 입는 것도 좋아하고 또 그리고 값비싼 액세서리도 너무 좋아해요.”그녀가 전에 그레이 톤의 옷만 입고 메이크업도 안 한 건 유남준이 화낼까 봐 두려워서였다.그녀의 가족이 유남준에게 사기를 쳤으니 본인까지 화려하게 차려입어서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딱 한 번 빨간색 치마를 입고 밖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꽃에 물을 줬는데 유남준이 가차 없이 비난했다.“너희 집안 참 대단해. 사기를 치고도 이렇게 속 편하게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콧노래를 흥얼거려?”그때 이후로 박민정은 집안에서 감히 기뻐할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었으며 예쁘게 차려입는 건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유남준은 이런 것들을 몰라줄 뿐만 아니라 모든 원인을 그녀가 싫어해서 그런 거라고 한다!얼마나 가소로운가.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갔다. 손에 피가 날 때까지 그녀는 힘을 풀지 않았다.유남준은 그렇게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온몸이 노곤해졌다.“그럼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박민정은 화들짝 놀랐다.그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고 허리 숙여 그녀의 좁은 어깨에 턱을 고였다.“왜 난 네가 날 미워하는 것 같지?”박민정은 목구멍에 솜뭉치가 꽉 막힌 기분이었다.‘대체 누가 할 말이야? 남준 씨야말로 날 미워했잖아!’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좀 놓아줄래요?”다만 유남준은 전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뿐더러 더 세게 끌어안았다.“민정아, 내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찾
박민정은 결국 일단 시도를 접기로 했다.너무 오래 허덕거린 탓인지 그녀도 피곤이 마구 미려와 함께 잠들었다.다음날.따사로운 햇살이 포근하게 얼굴에 드리워졌다.유남준은 간만에 이렇게 푹 잤다.눈 떠 보니 박민정이 몸을 쪼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없이 차가운 눈빛은 그 순간 이상하리만큼 온화해졌다.실내에 에어컨을 틀어서 그녀가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있자 유남준은 옷을 덮어주려 했다.이때 박민정이 비스듬히 눈을 떴다.유남준의 다정한 두 눈을 본 순간 그녀는 자연스럽게 말이 새어 나왔다.“남준 씨.”유남준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박민정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품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밀려오는 고통에 그녀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유남준은 횡설수설하는 그녀를 보더니 얼른 잡아당겼다.“방금 뭐라고 불렀어?”“네? 뭐요?”박민정은 모르는 척 얼렁뚱땅 넘기려 했다.이를 눈치챈 유남준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또다시 야유 조로 말했다.“박민정 씨는 참 뭐든 잘 까먹는다니까.”아침에 금방 깼을 때의 부드러운 눈빛과는 달리 지금 그는 한없이 차갑고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다.박민정은 그제야 아까는 자신이 잘못 본 걸 알아채고 눈가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녀가 대학에 들어간 후 유남준은 유앤케이에서 근무했고 그때부터 아예 딴사람으로 변해버린 듯 너무 차가워졌다.이전의 다정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한밤중에 괴롭힘을 당하는 그녀를 찾으러 다니던 유남준은 더더욱 없었다...처음엔 그가 회사 일이 너무 많아 스트레스가 커서 성격이 점점 난폭해지는 거로 여겼다.하지만 나중에 보니 그의 성격은 항상 이랬다. 그녀는 다만 어릴 때 그를 진정으로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대표님, 어제는 제가 식사를 대접해드렸으니 집까지 바래다 드리진 않겠습니다.”박민정이 말했다.그녀는 지금 간접적으로 그를 내쫓고 있다.“내가 갔으면 좋겠어?”박민정이 아무 말 없자 유남준은 표정이 확 어두워
박민정이 회사로 복귀한 후 긴장감이 감도는 사람은 윤소현뿐만이 아니었다. 이지원 역시 초조해하고 있었다.어렵사리 다시 연예계에 복귀한 그녀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박민정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드러날까 두려웠다.이지원은 종종 몰래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곤 했다.그날도 촬영을 마친 뒤 그녀의 차는 PMJ 회사 앞에 멈춰 있었다.이지원은 차 안에 앉아 박민정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드디어 박민정이 회사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하이힐을 신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도드라진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박민정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누군지 알아보기 전에 이지원은 그녀 앞까지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민정 씨, 드디어 돌아왔네요.”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의 마음 한구석에 본능적인 반감이 피어올랐다.비록 그녀는 이지원이 저질렀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불쾌감을 느꼈다.이때 진서연이 재빠르게 박민정 앞을 막아섰다.“당신 누구에요?”이지원은 그제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는데 필러로 채워진 얼굴이 드러났다. 시간의 흔적과 연예계의 생존 경쟁 속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으로 외모를 유지하려 애썼다.진서연은 그녀를 알아보자 얼굴을 찌푸렸다.“이지원 씨, 여기 왜 온 거예요? 또 우리 보스한테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에요?”이지원의 눈에 차가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천한 년!'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태가 어떤지 보러 온 거예요.”박민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그렇다면 고맙네요.”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이지원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박민정이 아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혹시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요. 부담 갖지 말고.”이지원은 친절한 척 덧붙였다.“우리 보스가 당신 같은 사람을 찾을 일은 없으니 그만 꺼져요!”진서연
“민정아, 엄마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말아줄래? 날 욕해도, 화를 내도 괜찮으니 제발 그렇게 차갑게만 하지 말아줘, 응?”정수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저는 화낼 이유가 없어요.”박민정은 솔직하게 말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과거에는 기억이 있었기에 정수미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냉대를 받을 때마다 깊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그녀는 눈앞의 정수미를 낯선 사람처럼 느꼈고 그래서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다.정수미는 목이 칼로 베인 듯한 고통을 느꼈다.“모두 내 잘못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어떻게 해야 박민정에게 사죄하고 보상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정수미는 눈을 떨구고 등을 살짝 구부린 채 방을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진서연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이를 다치게 했다니, 무슨 소리죠?”박민정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진서연에게 설명했고 진서연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분노를 터뜨렸다.“윤소현이 어떻게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죠? 제 생각엔 일부러 자기 아이를 다치게 한 게 틀림없어요.”그녀는 단 한마디로 진실을 꿰뚫었지만 박민정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설마. 그래도 자기 친딸인데.”“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진서연은 단호히 말한 뒤 박민정을 위로했다.“보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래.”하지만 진서연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여러 차례 그녀에게 당부를 했다.박민정은 기억을 잃은 후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억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직 성과는 없었다.그녀는 오늘도 진서연과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점심시간, 박민정은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잠깐 밖에 나가겠다며 자리를 떴다.그녀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주
가정부가 나가고 나자 정수미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지?”정수미는 깊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윤소현을 입양했을까?비서도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의 복수심이 너무 강해요. 자신의 딸마저 이용하다니요.”비서는 윤소현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정수미가 박민정, 그녀의 친딸을 미워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수미는 스스로 중얼거리며 비서에게 묻는 듯 자신에게 묻는 듯한 말을 했다.비서는 사적인 가정사에 대해 조언할 수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오랜 고민 끝에 정수미는 윤소현의 방으로 향했다.윤소현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고열까지 나고 있는데도 이렇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소현아!”정수미가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깨우자 윤소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엄마, 이 시간에 무슨 일이길래 제 방에 오신 거예요? 쉬셔야 할 시간 아니에요?”정수미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얘기할 게 있어서 왔다.”윤소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무슨 얘긴데 내일 하면 안 돼요?”“다혜와 민정이에 대한 얘기야.”정수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그 말을 듣자 윤소현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엄마, 박민정한테 경고할 거죠?”흥분한 그녀의 말투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아니, 너한테 경고하려고 왔어.”정수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은 멍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정수미는 가정부가 털어놓은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고 윤소현은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엄마, 그 여자의 헛소리를 믿지 마세요! 다혜의 친엄마인 제가 어떻게 제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처음엔 나도 네 말을 믿었다. 네가 민정이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네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민정이를 경찰에 넘긴 거였어. 그런데 네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 실망이야.”정수미는 깊이 한숨을
비서는 정수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둘째 아가씨는 아이에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사람 같지 않아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래. 하지만 소현이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그때 민정이를 도왔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어떤 난리를 칠지 몰랐겠지.”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혜 일은 빨리 조사해 봐.”“알겠습니다.” 비서가 대답했다.정수미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외손녀를 바라보며 다짐했다.“다혜야, 걱정하지 마. 외할머니가 꼭 널 다치게 한 사람을 찾아낼게.”그녀는 윤소현을 편드는 것도, 박민정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윤소현을 달래며 조용히 진실을 파악하려 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밝혀내기 위해.밤이 깊었을 때, 정수미는 아이를 돌보던 가정부를 불렀다.“자, 말해 봐. 오늘 왜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너한테 뭔가를 줬니?”가정부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저는 거짓말 안 했습니다. 정말로 사모님께서 그랬어요.”정수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아직도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거야? 병원에서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민정이가 다혜를 안은 뒤로 다혜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어떻게 그게 민정이가 했다는 걸로 바뀐 거지? 네가 직접 민정이가 아이를 해치는 걸 봤어?”가정부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얼버무렸다.“민정 아가씨가 다혜를 때리는 걸 희미하게 본 것 같아요...”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희미하게 봤다고? 그럼 왜 그 자리에서 막지 않았지?”가정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 그게 제가 혹시 잘못 본 걸까 봐...”그녀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정수미는 확신했다. 이건 명백히 거짓말이었다.“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면 용서해 줄 테지만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정수미의 위협에 가정부는 몸을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 이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곳을 떠날 생각하지 마.”윤소현은 박민정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며 소리쳤고 박민정은 아무리 해명해도 소용이 없었다.“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예요?”“무릎 꿇고 사과해!”윤소현은 단호하게 네 글자를 뱉었다.그녀는 박민정이 기억을 잃은 틈을 타 그녀를 망신시키고 고통받게 하고 싶었다.‘무릎을 꿇으라고?’박민정은 아이를 해친 적이 없기에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그건 못 해요.”윤소현은 다시 정수미와 고영란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보셨죠? 증거가 다 있는데도 저렇게 나오잖아요. 사과조차 하지 않겠다고요.”그녀는 이어 말했다.“이제 경찰서에 보내는 수밖에 없겠네요.”윤소현은 휴대폰을 꺼내 신고 전화를 걸었다.고영란과 정수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정말 박민정이 그렇게 어린아이를 해쳤다면 사과를 해야 하는 게 맞을 터였다.그러나 박민정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고 결국 경찰에 연행되었다.아이의 상처는 모두 목격자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었고 박민정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만한 다른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그녀는 간단히 사건 경위를 설명한 뒤, 임시로 구금되었다.혼자 차가운 공간에 남겨진 박민정은 종종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마치 예전에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 때 유남준이 그녀를 보석으로 풀어주었다.“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 유남준이 물었다.그는 본가로 돌아갔다가 박민정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하인들에게 물어본 끝에 그녀가 병원에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이후 고영란과 연락을 취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박민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도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내가 그 아이를 해쳤다고 믿어요?”유남준은 거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누가 뭐래도 네가 했을 리 없어. 넌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박민정은
박민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좋아요, 신고해요. 경찰이 와서 모든 걸 조사하게 해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그녀는 나쁜 짓을 하기 않았기에 당당했다.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려 했지만 고영란이 그녀를 막아섰다.“소현아, 분명 이건 오해가 있을 거야. 민정이가 그렇게 어린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니.”정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경찰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니?”그러나 윤소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항의했다.“엄마, 지금 제 딸이 이런 상태인데도 엄마는 저를 외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편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박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그만해요. 차라리 신고해요.”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경찰 조사를 통해서뿐이었다.윤소현은 사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일은 박민정과 무관했으며 그녀 스스로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민정아, 흥분하지 마. 우리 가족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정수미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윤소현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꼬듯 말했다.“좋아요. 우리끼리 해결하죠.”“그럼 말해봐, 박민정. 내 딸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책임질 거야?”“제가 한 일이 아닌데 왜 제가 책임져야 하죠?”박민정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되묻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지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 다혜는 늘 멀쩡했어. 그런데 네가 안은 뒤로 이렇게 됐다고!”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어린 다혜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런데도 윤소현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엄마, 보셨어요? 얘는 끝까지 오리발만 내밀잖아요!”정수미는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다혜는 너무 어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고영란이 오늘 아이를 돌본 보모를 불러왔고 보모는 떨
박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고영란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윤소현이 말한 병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이 병실에서 달려나오더니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들었다.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역시 피할 겨를이 없었고 결국 윤소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세게 내려앉았다.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이 얼굴을 타고 번졌다. 그러나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박민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박민정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고 그렇게 둘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고영란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도저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박민정, 네가 어떻게 다혜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다혜는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뭐?’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전 당신 딸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우리 다혜 몸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고? 너 정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고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집중했다.고영란이 아무리 소리쳐도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다.“소현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윤소현은 그제야 멈췄다.박민정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정수미가 황급히 달려와 박민정의 얼굴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민정아,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불만을 터트렸다.“엄마, 똑같이 엄마 딸인데 우리가 싸웠으면 두 사람 다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박민정만 신경 쓰는 거예요?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돌아보았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봐. 왜 둘이
박민정은 그 아기가 윤소현의 딸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죠?”보모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경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네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온 보모에게 두 아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직접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래기 시작했다.그러나 유다혜는 그녀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 덕분인지 박민정은 아기를 돌보는 법을 잊었더라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먼저 보모에게 아이가 충분히 먹었는지 물었고 이어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며 배탈이 났는지 살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아기가 계속 울자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이렇게 계속 우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보모도 동의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보모가 아기를 다시 받으려던 찰나, 멀리서 윤소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내 딸을 저 여자한테 맡기라고 했어?”윤소현은 높은 굽의 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어와 박민정의 품에서 아이를 거칠게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보모를 질책했다.“내 딸을 당신한테 맡겼더니 이렇게밖에 돌보지 못해?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책임인 줄 알아!”그녀는 이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너도 아이가 있잖아. 내 아이를 왜 안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그 아이가 윤소현의 딸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안았을 리 없었다.보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작은 사모님, 다혜가 계속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잠깐 도와주셨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악의가 없었다고?”윤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야.”그러다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작은 사모님, 아이를 병
윤소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두에 있던 여하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 한 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박민정과 유남준 가족이 함께 웃으며 화목하게 있는 모습이었다.그 광경에 윤소현의 눈빛이 질투로 뒤덮였다. 그녀는 곧바로 고영란을 향해 차갑게 비아냥댔다.“어머니, 저랑 남우 씨가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저도 유씨 가문에서 떳떳하게 맞아들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모른 척하시겠다는 거예요?”고영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소현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유남우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큰 실수로 느껴졌다.“소현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서 남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여긴... 당분간 환영받지 못할 것 같구나.”윤소현은 이 말을 듣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혹시 당신 아들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제가 다 까발릴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고영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소현이 마지막 퇴로조차 거부하자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우리 아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번 말해 보렴.”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뭘 말하냐고요? 당신 아들이 자기 형의 여자를 탐냈다는 거. 이게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유씨 집안의 가풍인가요?”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옆에서 두 아이를 달래며 이 상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다들 뭘 보고 있어?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윤소현은 유남준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유남준 씨, 이 말을 듣기 싫은 거죠? 뭐, 당연하죠. 형의 여자를 뺏어갔다니, 저라도 그런 꼴은 못 참겠어요!”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벌써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댔을 것이다.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