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는 수중의 서류를 내려놓고 서다희에게 분부했다.“CEO 한 명 영입해!”서다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대표님 말씀은?”“나 한동안 좀 쉬어야겠어.”유남준이 대답했다.“중대한 일 아니면 나한테 보고할 필요 없어.”대기업에서 CEO를 영입하는 건 흔하디흔한 일이지만 서다희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유남준이 이 자리에 앉고 나서부터 모든 일을 직접 해나갔고 본인에게 일말의 휴식시간도 허용하지 않은 채 오직 일에만 몰두했으니까.그런 그가 지금 집행권을 내려놓겠다고 한다.서다희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영입하겠습니다.”서다희가 나간 후 유남준은 서류를 계속 들여다봤지만 머릿속엔 온통 박민정뿐이었다.그는 달갑지 않았다. 전혀 달갑지 않았다.이 몇 해 동안 열심히 일하고 밤낮없이 돈 번 이유가 뭣 때문인데?박씨 일가에 사기당한 빈자리를 채우려고, 금전적인 빈자리뿐만 아니라 이미 짓밟힌 자존심도 다시 세워야 했다!수천억의 재산은 유남준에게 큰 액수가 아니다!하지만 이 수천억 때문에 그는 상류층에서 온갖 굴욕을 당했다.뭇사람들은 그가 여자에게 빌붙어 신분 상승하려다가 바람맞은 바보라고 했다!수천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청각장애의 아내까지 얻었으니 말이다.그리고 지금 그에게 차려진 건 무엇인가?박민정은 일부러 그를 잊은 척했고 무참하게 그를 버렸다...여기까지 생각한 유남준은 넥타이를 살짝 풀어헤치며 본인이 직접 가서 아이를 데려오기로 했다.그리고 박민정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가짜 기억 상실이란 걸 까밝힐 예정이다.그렇게 되면 박민정을 제대로 징벌할 수 있다.따끔한 교훈을 안겨줄 수 있다.유남준이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노크 소리가 그를 사색에서 깨워줬다.“들어와.”사무실 문이 열리고 박민정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오늘 연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맑은 두 눈으로 유남준의 짙은 눈빛과 마주했다.유남준은 헝클어진 넥타이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도 정리했다.“민
유남준은 이렇게 가식적인 홍보 활동을 제일 싫어한다.머리는 거절이라고 외치는데 정작 입밖에 튀어나온 말은 오케이 사인이었다.“그럼 저는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박민정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떠나려는데 뒤에서 유남준의 살짝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이 보러 가는 거라면 옷을 좀 더 챙겨입는 게 좋을 것 같아.”박민정은 어리둥절해졌다.머리 숙여 보니 그제야 상의 단추가 두 개나 풀린 걸 발견했다.날씨가 더워 사무실에서 풀었던 단추를 깜빡하고 채우지 못했다.박민정은 종종걸음으로 대표 사무실을 나와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단추를 채웠다.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머리를 푹 숙이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한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죄송합니다.”박민정은 고개 들어 김인우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했다.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그와 거리를 뒀다.요즘 호산 그룹에서 출근하며 그녀는 김인우와 마주치는 일을 면할 수가 없다.대부분 길을 에돌아 갔는데 오늘은 아예 정면으로 마주쳤다.박민정은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에게 능멸당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김인우는 그녀의 모든 제스처를 지켜보다가 목이 확 멨다. 그는 행여나 박민정을 놀라게 할까봐 아무 말도 못 한 채 곧게 유남준의 사무실로 걸어갔다.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김인우는 사소한 것도 따지고 들고 원한은 반드시 갚는 사람이다.전에 그녀가 조하랑을 대신해 소개팅에 나간 것 때문에 이미 김인우의 심기를 단단히 건드렸다.지난번 바에서 그녀를 겨냥하지 않았다고 앞으로 쭉 겨냥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이 남자는 가끔 보면 유남준보다 더 섬뜩한 사람이다.유남준은 절대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 기껏해야 회피하고 무시하고 사람 마음을 지치게 하는 것뿐이다.하지만 김인우는 여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언제 한번 박민정이 부주의로 김인우를 슬쩍 다쳤다가 한 달 후에 아예 교외로 끌려가 자생 자멸하게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박민정은
유남준은 짙은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괜찮아. 이미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어.”김인우의 눈가에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그는 참지 못하고 계속 더 캐물었다.“너 그런 장소 나가는 거 제일 싫어하잖아?”유남준은 그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담담하게 말했다.“뭐든 예외가 있기 마련이지.”김인우는 더 머무르지 않고 바로 나갔다.그는 라운지에서 마침 박민정이 회사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봤다.그 미소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이때 비서가 김인우에게 다가왔다.“도련님, 회장님께서 오라고 하십니다.”“알았어.”...오후.특수학교.박민정은 새로 연 음악 교실에 가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장애인 어린이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가르쳤다.유남준은 한 무리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문밖에 서 있었다.그는 박민정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걸 처음 본다. 맑고 은은한 피아노 소리가 졸졸 흐르는 물결처럼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유남준은 그녀의 얼굴에 띈 연한 미소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건 거의 본 적 없는 미소였다.“선생님 너무 대단하세요.”“대체 어떻게 배우신 거예요?”아이들은 숭배의 눈길로 박민정을 쳐다봤다.다른 후원자들보다 보청기를 착용한 박민정에게 유난히 더 호감이 갔는데 아마도 공감대가 형성돼서 그런가 보다.박민정은 아이들에게 노력만 하면 반드시 더 우수해질 거라고 말했다.유남준은 줄곧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그에게 박민정은 항상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공주님이고 장점이라곤 전혀 없는 여자였는데 인제 보니 아니었다.위문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박민정은 아이들과 일일이 작별을 고했다.밖에 나오자 유남준이 어느새 경호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용수나무 아래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무 아래에 서 있는 남자는 훤칠한 체격에 차가운 옆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박민정은 그를 향해 걸어갔다.“대표님...”그녀의 부름에 유남준은 얼른 손에 쥔 담배를 껐다.박민정은 실로 의아할 따름이었다. 유남준이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
“네가 해준 밥을 3년이나 먹은 사람이야. 안 괜찮을 리가 있겠어?”유남준이 쏘아붙였다.박민정은 피식 웃으며 음식이 도착한 후 주방에 가서 밥을 지었다.사실 그녀는 전에 요리라곤 전혀 할 줄 몰랐다. 유남준에게 시집간 이후에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다만 유남준은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고마워한 적이 없고 모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였고...그는 거실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서 떼지 못했다. 몇 번을 쳐다봐도 질리지 않았다.박민정은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부러 유남준이 제일 좋아하는 소불고기에 약을 탔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았다.이게 얼마만인가. 그녀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이! 유남준은 좀처럼 수저를 들지 못했다.박민정은 그의 그릇에 소불고기 한 점을 집어줬다.“집에서 먹는 거 괜찮다고 분명 말씀하셨어요 대표님이.”유남준은 묵묵히 수저를 들고 소불고기를 먹었다.박민정은 잔뜩 긴장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를 관찰했다.그녀는 소불고기에 수면제를 탔다.수면제의 양이 적을까 봐 그에게 몇 점이나 더 집어줬 지 모른다.유남준은 짙은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넌 왜 안 먹어?”“저는 별로 배 안 고파요. 대표님 많이 드세요.”박민정은 긴장하여 몰래 손바닥을 꼬집고는 다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유남준은 더 캐묻지 않고 그녀와 함께 묵묵히 식사했다.식사를 다 마쳤지만 그는 좀처럼 졸려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어리둥절해졌다.약을 적게 탄 걸까?“물 한 잔 따라와.”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가려고 했다.이때 유남준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았다.오늘 그녀는 유난히 정성스럽다.분명 그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설마 전에는 다 연기한 거고 오늘 모습이야말로 진심인 걸까?박민정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혹여나 그가 뭐라도 발견한 줄 알고 심장이 덜컹거렸는데 결국 돌아온 대답이 이거였다.“거실에도 물 있는데 왜 주방까지 가려고 그래?”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민정이 말을 이었다.“예쁜 걸 싫어하는 여자는 없어요. 전에는 아마 제가 너무 비천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꼭꼭 숨기고 살았나 봐요.”유남준은 이 말을 듣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러니까 네 말은 전에 다 날 위해서 그랬단 거야?”박민정은 머리를 들어 그를 똑바로 마주 봤다.“기억이 안 난다고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는 화장하는 것도 좋아하고 화려한 옷을 입는 것도 좋아하고 또 그리고 값비싼 액세서리도 너무 좋아해요.”그녀가 전에 그레이 톤의 옷만 입고 메이크업도 안 한 건 유남준이 화낼까 봐 두려워서였다.그녀의 가족이 유남준에게 사기를 쳤으니 본인까지 화려하게 차려입어서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딱 한 번 빨간색 치마를 입고 밖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꽃에 물을 줬는데 유남준이 가차 없이 비난했다.“너희 집안 참 대단해. 사기를 치고도 이렇게 속 편하게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콧노래를 흥얼거려?”그때 이후로 박민정은 집안에서 감히 기뻐할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었으며 예쁘게 차려입는 건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유남준은 이런 것들을 몰라줄 뿐만 아니라 모든 원인을 그녀가 싫어해서 그런 거라고 한다!얼마나 가소로운가.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갔다. 손에 피가 날 때까지 그녀는 힘을 풀지 않았다.유남준은 그렇게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온몸이 노곤해졌다.“그럼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박민정은 화들짝 놀랐다.그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고 허리 숙여 그녀의 좁은 어깨에 턱을 고였다.“왜 난 네가 날 미워하는 것 같지?”박민정은 목구멍에 솜뭉치가 꽉 막힌 기분이었다.‘대체 누가 할 말이야? 남준 씨야말로 날 미워했잖아!’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좀 놓아줄래요?”다만 유남준은 전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뿐더러 더 세게 끌어안았다.“민정아, 내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찾
박민정은 결국 일단 시도를 접기로 했다.너무 오래 허덕거린 탓인지 그녀도 피곤이 마구 미려와 함께 잠들었다.다음날.따사로운 햇살이 포근하게 얼굴에 드리워졌다.유남준은 간만에 이렇게 푹 잤다.눈 떠 보니 박민정이 몸을 쪼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없이 차가운 눈빛은 그 순간 이상하리만큼 온화해졌다.실내에 에어컨을 틀어서 그녀가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있자 유남준은 옷을 덮어주려 했다.이때 박민정이 비스듬히 눈을 떴다.유남준의 다정한 두 눈을 본 순간 그녀는 자연스럽게 말이 새어 나왔다.“남준 씨.”유남준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박민정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품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밀려오는 고통에 그녀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유남준은 횡설수설하는 그녀를 보더니 얼른 잡아당겼다.“방금 뭐라고 불렀어?”“네? 뭐요?”박민정은 모르는 척 얼렁뚱땅 넘기려 했다.이를 눈치챈 유남준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또다시 야유 조로 말했다.“박민정 씨는 참 뭐든 잘 까먹는다니까.”아침에 금방 깼을 때의 부드러운 눈빛과는 달리 지금 그는 한없이 차갑고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다.박민정은 그제야 아까는 자신이 잘못 본 걸 알아채고 눈가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녀가 대학에 들어간 후 유남준은 유앤케이에서 근무했고 그때부터 아예 딴사람으로 변해버린 듯 너무 차가워졌다.이전의 다정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한밤중에 괴롭힘을 당하는 그녀를 찾으러 다니던 유남준은 더더욱 없었다...처음엔 그가 회사 일이 너무 많아 스트레스가 커서 성격이 점점 난폭해지는 거로 여겼다.하지만 나중에 보니 그의 성격은 항상 이랬다. 그녀는 다만 어릴 때 그를 진정으로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대표님, 어제는 제가 식사를 대접해드렸으니 집까지 바래다 드리진 않겠습니다.”박민정이 말했다.그녀는 지금 간접적으로 그를 내쫓고 있다.“내가 갔으면 좋겠어?”박민정이 아무 말 없자 유남준은 표정이 확 어두워
“그래.”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다가 또 그녀에게 당부했다.“이지원은 민 선생이 나라는 걸 몰라. 나도 굳이 알리고 싶지 않고.”“알았어.”이지원이 저번에 한수민과 박민호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말한 이후로 박민정은 최대한 제 신분을 숨기기로 했다.안 그러면 나중에 한수민과 박민호에게 들켰다가 또다시 복잡하게 꼬일 테니까.친엄마라는 자는 끝도 없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갈취하려 하고 동생은 그녀를 배신했다. 이것만 생각하면 박민정은 심장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이지원의 소송 건에 대하여 조하랑과 상세하게 얘기 나눈 후 박민정은 떠날 채비를 했지만 결국 그녀에게 붙잡혔다.“오늘 간만에 만났겠다, 예찬이도 아직 수업 끝나려면 멀었고 우리 근처 백화점 쇼핑하러 가자.”박민정은 그녀의 고집을 못 이겨 결국 동의했다.두 사람은 함께 진주에서 제일 큰 금융 센터로 갔다.조하랑은 감탄을 연발했다.“유남준이 나쁜 남자인 건 맞지만 확실히 능력은 있어. 이런 금융 센터가 전국 각지에 얼마나 많이 생겨났는지 알아? 1년에 벌어들인 돈만 어마어마해. 거기에 땅이며 부동산이며 네트워크까지... 프로젝트가 몇 개인지 감히 짐작할 수가 없다니까. 유남준 재산은 대체 얼마인 거야?”박민정도 감탄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이 몇 해 동안 남준 씨는 확실히 유앤케이랑 호산 그룹을 한층 업그레이드했지.”“맞아. 인성만 좋으면 완벽할 텐데.”조하랑은 그녀의 팔짱을 끼고 백화점으로 들어갔다.명품 의류 매장 앞에 도착하니 종업원이 곧장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조하랑은 피팅하러 갔고 박민정은 휴식 코너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한 손님이 박민정을 주의 깊게 살펴봤는데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 여자는 피팅하고 나온 조하랑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옷 저 주세요.”여기 옷들은 전부 단품이다.조하랑은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경우죠? 이 옷은 제가 먼저 찜했어요!”그 여자는 시큰둥하게 웃었다.“먼저 찜하면 왜요? 돈 냈어요?”조하랑도 뒤질세라 종업원에게
점원은 카드를 건네받고 두말없이 경비원에게 연락해 하예솔을 매장에서 끌어냈다.곧이어 직접 조하랑을 위해 서비스해 드렸다.마음에 드는 옷을 다 사고 나온 조하랑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디오트는 VIP가 없잖아.”“에스토니아에 있을 때 이 브랜드의 디자이너를 만났는데 내 곡을 너무 좋아해 주시면서 카드를 선물하더라고. 이 카드가 있으면 디오트 매니저급은 된다고 하셨는데 나도 오늘 처음 써봐.”박민정이 담담하게 말했다.조하랑은 경배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팔을 꼭 껴안았다.“장하다, 우리 민 선생. 앞으로 잘 부탁해요, 민 선생님.”박민정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래. 미친 거 아니야.”“맞아요. 방금 우리 민 선생님한테 미쳐버렸어요.”두 여자는 한길 내내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돌아갈 때 박민정은 일부러 예찬이와 윤우 옷도 몇 벌 샀다.박예찬의 옷은 조하랑이 대신 주면 되고 박윤우의 옷은 국제택배로 보내면 된다.“나 방금 어린이 치마 예쁜 거 엄청 많이 봤는데 예찬이가 여자애였으면 얼마나 좋아.”조하랑이 탄식했다.두 아이 중 한 명이 여자였다면 분명 눈부시게 예뻤을 것이다.박민정도 딸을 갖고 싶었다.오후 시각, 집에 돌아온 그녀는 작은아들 박윤우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서 백화점에서 산 새 옷들을 보여줬다.화면 속 윤우는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서 눈웃음을 지으며 애교 부렸다.“엄마 너무 좋아, 뽀뽀.”“그래, 뽀뽀.”박민정의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박윤우는 너무 피곤하지만 엄마랑 더 얘기하고 싶었다.“엄마는 윤우 사랑해?”“당연히 사랑하지.”윤우는 진지한 예찬이 형과 달리 애교가 차 넘친다.“그럼 엄마 돌아오면 윤우 진짜 뽀뽀할 거야. 엄마가 사준 새 옷도 다 입어볼 거야. 뭐 귀찮지만 그래도 엄마 사진 찍게 해줄게.”“알았어. 엄마 되도록 빨리 돌아갈게.”윤우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자 박민정은 은정숙과 더 얘기 나눈 후에야 통화를 마쳤다.이어서 그녀는 휴대폰의 숨겨진 앨범을 열고 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