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컴퓨터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한 모습의 그녀가 보였다.유남준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갑작스러운 소리에 박민정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유남준의 얼음장 같은 얼굴을 보았다.오늘 아침에 이지원에 대한 뉴스가 보도 된 데다 예전에 그녀를 위해 나서던 유남준의 모습이 떠오르자 박민정은 본능적으로 그가 왜 찾아온 건지 알 것 같았다.이번에도 이지원을 위해 자기를 괴롭히기 위해 온거라 생각한한 박민정은 몸을 일으킨 후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경계 태세에 돌입한 그녀를 보면서도 유남준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아이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지금 당장 나랑 집에 돌아가!”지금 그는 박민정이 기억을 잃은척하는 것 따위 신경 쓸 마음이 없었다.박민정은 황당했다.집?집에 가자고?그녀는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유남준의 얼굴을 한 눈 보았다.“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유남준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더 말하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그의 걸음이 너무 빠른 탓에 박민정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끌려갔다.그녀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차가 주차된 곳까지 끌려갔다. 유남준은 운전석에 앉아서도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박민정은 이런 그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절 데리고 어딜 가는 거예요?”유남준은 차 시동을 걸고 얇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말했다.“두원!”박민정은 그제야 그가 집에 가자고 했던 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그녀는 기억을 잃은 연기도 잊지 않았다.“두원이 어딘데요?”“대표님. 잊으셨나 본데, 저희는 이미 이혼했어요.”그 말에 유남준은 브레이크를 확 밟으며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서 박민정을 바라보았다.“우리가 이혼한 건 어디서 봤어?”멈칫하는 박민정.둘은 이미 이혼서류를 낸 상태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와 이혼숙려기간 때문에 이혼이 정식으로 성립된 상태는 아니었다.하지만 4,5년을 죽은 사람으로 살았는데 둘 사이 결혼생활은
가십거리가 돼?이곳 진주시에서 유남준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유남준은 박민정이 사라진 그 시간 동안 연지석이 그녀의 곁에 있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같이 지낸 시간이 많으면 자연스레 없던 정도 생긴다는데, 게다가 둘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연지석 귀에 그런 소문이 들어갈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고?”그의 검은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박민정의 얼굴에도 순간 그늘이 졌다.그녀는 유남준의 이런 말버릇을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대표님. 저희가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선택할 권리는 저에게 있습니다. 이건 지나친 간섭 아닌가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곧바로 유남준을 스쳐 지나갔다.유남준은 그녀에게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말 몇 마디 한 게 다인데 그는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졌다.뭐? 지나친 참견?멀어지는 박민정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그녀가 정말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유남준은 그런 느낌이 미치게 싫었다.그는 핸드폰을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수를 쓰든 그 아이 데려와.”“네.”“그리고 연지석 사업도 계속 공격해. 난 그 자식 것을 철저히 빼앗아야겠어.”전화를 끊은 그의 눈빛은 뭐든 집어삼킬 듯한 어둠에 휩싸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미련 없이 떠나던 박민정의 모습뿐이었다.예전엔 분명 그만을 사랑하겠다고 했던 사람이!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지?이제 연지석을 사랑하게 된 건가?뭐가 어떻게 됐든 그는 반드시 박민정을 다시 뺏어올 거다.그의 것은 그가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 남에게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유남준은 차에 탄 후 담배를 피우며 아이의 사진을 다시 꺼내 봤다.정말 그의 아이라면 박민정은 왜 그를 해외에 숨겨뒀을까?그는 아이를 다시 데려온 후에 낱낱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그리고 뭐가 어떻게 됐든 이번엔 반드시 박민정을 자기 옆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다시는 그의 시선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
박예찬은 이제 막 어린이집에서 수업을 마쳤는데 기사님은 오늘 예전보다 조금 늦게 오는 듯싶다.옆에 있던 유지훈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넌 매일 기사님이 데리러 와?”“안 그러면?”박예찬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유지훈은 거만하게 말했다.“난 매일 우리 집안 어르신들이 데리러 오거든. 증조할아버지는 내게 가족애를 느끼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어.”말을 마친 유지훈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신비롭게 말을 이었다.“오늘은 누가 데리러 오는지 알아?”“누군데?”박예찬은 별로 안 궁금하지만 그냥 물어봤다. 대꾸를 안 하면 쉴 새 없이 재잘거릴 테니까.“우리 할머니.”유지훈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박예찬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고영란은 그의 친할머니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기쁜 걸까?생각에 잠겨있을 때 고영란의 차가 도착했다.고급 리무진에서 내려오는 고영란은 세련된 생활한복 차림에 하이힐을 차려 신었다. 반 백 살 되는 나이에도 우아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었고 제스처마다 고상한 아우라가 흘러넘쳤다.“할머니.”유지훈이 쪼르르 달려갔다.아이가 귀여운 목소리로 외쳤지만 고영란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요 녀석의 부모가 해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남편이 친히 당부했으니 망정이지 그녀는 딴 사람 손자를 데리러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영란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론 옅은 미소를 지었다.“가자.”그녀는 말하면서 박예찬을 힐긋 쳐다보다가 순간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예찬아.”오늘 이리로 온 이유는 바로 제 아들 유남준의 어릴 때 모습을 쏙 빼닮은 박예찬을 보기 위해서이다.고영란은 일부러 조사해보았는데 박예찬은 최근에 금방 귀국하여 조하랑과 함께 지내고 있고 친아빠에 대한 정보는 없다.조하랑을 두어 번 정도 봤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다.박예찬은 고영란의 부름에 얌전하게 대답했다.“안녕하세요, 할머니.”고영란은 예의 바른 아이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유지훈을 뿌리치고 예찬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엄
조하랑은 원래 박예찬에게 겁줄 생각이었지만 아이는 멍청이를 쳐다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결국 그녀가 두 손을 들었다.“나도 알아. 지금 어린 애들에게 맞춰주려고 충분히 노력 중이야.”대답을 마친 박예찬은 본인의 태블릿PC를 꺼내 계속 공부하기 시작했다.어린이집에서 함께 블록을 쌓느라 책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됐다.조하랑은 태블릿PC를 힐긋 들여다봤는데 전부 이상한 부호였고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비교할수록 화만 더 난다니까.아이가 이토록 노력하니 조하랑도 더는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법률 서적을 마저 보며 이지원과의 소송 준비에 한창이었다.이때 갑자기 누군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박예찬이 문 앞에 서 있자 그녀는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이모한테 좋은 거 하나 주려고.”조하랑은 더 의아해졌다. 이때 박예찬이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컴퓨터 앞에 서더니 작은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렸고 1분도 채 안 돼 모니터에 웹사이트가 하나 나왔다. 마우스로 클릭하자 안에 전부 이지원에 관한 자료들이었다.조하랑은 화면에 꽉 찬 이지원의 사생활 자료를 보았고 아무거나 하나 클릭해봐도 전부 그녀가 거액을 들여도 구하지 못하는 스팩타클한 내용이었다.“헐 대박!!! 너네 엄마가 왜 자꾸 너보고 잠자코 숨어 지내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네.”박예찬의 커다란 눈망울은 순수하기 그지없었다.“이모, 설마 어린아이가 이런 걸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거 다 지석 삼촌이 알려준 거야. 이모더러 꼭 우리 엄마 도와주래. 절대 엄마를 속상하게 하지 말고.”조하랑과 연지석은 사석에서 따로 만날 일이 없다. 그러니 지금 박예찬이 하는 말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엄마도 단지 그가 보통 어린이들보다 조금 더 총명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이 정도일 줄은 모른다.만약 엄마가 알게 되면 깜짝 놀라겠지.그러니까 지금 하랑 이모한테도 이 증거 자료들을 예찬이 혼자 구한 거라고
유남준은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는 수중의 서류를 내려놓고 서다희에게 분부했다.“CEO 한 명 영입해!”서다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대표님 말씀은?”“나 한동안 좀 쉬어야겠어.”유남준이 대답했다.“중대한 일 아니면 나한테 보고할 필요 없어.”대기업에서 CEO를 영입하는 건 흔하디흔한 일이지만 서다희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유남준이 이 자리에 앉고 나서부터 모든 일을 직접 해나갔고 본인에게 일말의 휴식시간도 허용하지 않은 채 오직 일에만 몰두했으니까.그런 그가 지금 집행권을 내려놓겠다고 한다.서다희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영입하겠습니다.”서다희가 나간 후 유남준은 서류를 계속 들여다봤지만 머릿속엔 온통 박민정뿐이었다.그는 달갑지 않았다. 전혀 달갑지 않았다.이 몇 해 동안 열심히 일하고 밤낮없이 돈 번 이유가 뭣 때문인데?박씨 일가에 사기당한 빈자리를 채우려고, 금전적인 빈자리뿐만 아니라 이미 짓밟힌 자존심도 다시 세워야 했다!수천억의 재산은 유남준에게 큰 액수가 아니다!하지만 이 수천억 때문에 그는 상류층에서 온갖 굴욕을 당했다.뭇사람들은 그가 여자에게 빌붙어 신분 상승하려다가 바람맞은 바보라고 했다!수천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청각장애의 아내까지 얻었으니 말이다.그리고 지금 그에게 차려진 건 무엇인가?박민정은 일부러 그를 잊은 척했고 무참하게 그를 버렸다...여기까지 생각한 유남준은 넥타이를 살짝 풀어헤치며 본인이 직접 가서 아이를 데려오기로 했다.그리고 박민정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가짜 기억 상실이란 걸 까밝힐 예정이다.그렇게 되면 박민정을 제대로 징벌할 수 있다.따끔한 교훈을 안겨줄 수 있다.유남준이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노크 소리가 그를 사색에서 깨워줬다.“들어와.”사무실 문이 열리고 박민정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오늘 연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맑은 두 눈으로 유남준의 짙은 눈빛과 마주했다.유남준은 헝클어진 넥타이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도 정리했다.“민
유남준은 이렇게 가식적인 홍보 활동을 제일 싫어한다.머리는 거절이라고 외치는데 정작 입밖에 튀어나온 말은 오케이 사인이었다.“그럼 저는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박민정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떠나려는데 뒤에서 유남준의 살짝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이 보러 가는 거라면 옷을 좀 더 챙겨입는 게 좋을 것 같아.”박민정은 어리둥절해졌다.머리 숙여 보니 그제야 상의 단추가 두 개나 풀린 걸 발견했다.날씨가 더워 사무실에서 풀었던 단추를 깜빡하고 채우지 못했다.박민정은 종종걸음으로 대표 사무실을 나와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단추를 채웠다.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머리를 푹 숙이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한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죄송합니다.”박민정은 고개 들어 김인우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했다.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그와 거리를 뒀다.요즘 호산 그룹에서 출근하며 그녀는 김인우와 마주치는 일을 면할 수가 없다.대부분 길을 에돌아 갔는데 오늘은 아예 정면으로 마주쳤다.박민정은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에게 능멸당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김인우는 그녀의 모든 제스처를 지켜보다가 목이 확 멨다. 그는 행여나 박민정을 놀라게 할까봐 아무 말도 못 한 채 곧게 유남준의 사무실로 걸어갔다.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김인우는 사소한 것도 따지고 들고 원한은 반드시 갚는 사람이다.전에 그녀가 조하랑을 대신해 소개팅에 나간 것 때문에 이미 김인우의 심기를 단단히 건드렸다.지난번 바에서 그녀를 겨냥하지 않았다고 앞으로 쭉 겨냥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이 남자는 가끔 보면 유남준보다 더 섬뜩한 사람이다.유남준은 절대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 기껏해야 회피하고 무시하고 사람 마음을 지치게 하는 것뿐이다.하지만 김인우는 여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언제 한번 박민정이 부주의로 김인우를 슬쩍 다쳤다가 한 달 후에 아예 교외로 끌려가 자생 자멸하게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박민정은
유남준은 짙은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괜찮아. 이미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어.”김인우의 눈가에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그는 참지 못하고 계속 더 캐물었다.“너 그런 장소 나가는 거 제일 싫어하잖아?”유남준은 그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담담하게 말했다.“뭐든 예외가 있기 마련이지.”김인우는 더 머무르지 않고 바로 나갔다.그는 라운지에서 마침 박민정이 회사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봤다.그 미소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이때 비서가 김인우에게 다가왔다.“도련님, 회장님께서 오라고 하십니다.”“알았어.”...오후.특수학교.박민정은 새로 연 음악 교실에 가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장애인 어린이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가르쳤다.유남준은 한 무리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문밖에 서 있었다.그는 박민정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걸 처음 본다. 맑고 은은한 피아노 소리가 졸졸 흐르는 물결처럼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유남준은 그녀의 얼굴에 띈 연한 미소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건 거의 본 적 없는 미소였다.“선생님 너무 대단하세요.”“대체 어떻게 배우신 거예요?”아이들은 숭배의 눈길로 박민정을 쳐다봤다.다른 후원자들보다 보청기를 착용한 박민정에게 유난히 더 호감이 갔는데 아마도 공감대가 형성돼서 그런가 보다.박민정은 아이들에게 노력만 하면 반드시 더 우수해질 거라고 말했다.유남준은 줄곧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그에게 박민정은 항상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공주님이고 장점이라곤 전혀 없는 여자였는데 인제 보니 아니었다.위문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박민정은 아이들과 일일이 작별을 고했다.밖에 나오자 유남준이 어느새 경호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용수나무 아래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무 아래에 서 있는 남자는 훤칠한 체격에 차가운 옆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박민정은 그를 향해 걸어갔다.“대표님...”그녀의 부름에 유남준은 얼른 손에 쥔 담배를 껐다.박민정은 실로 의아할 따름이었다. 유남준이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
“네가 해준 밥을 3년이나 먹은 사람이야. 안 괜찮을 리가 있겠어?”유남준이 쏘아붙였다.박민정은 피식 웃으며 음식이 도착한 후 주방에 가서 밥을 지었다.사실 그녀는 전에 요리라곤 전혀 할 줄 몰랐다. 유남준에게 시집간 이후에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다만 유남준은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고마워한 적이 없고 모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였고...그는 거실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서 떼지 못했다. 몇 번을 쳐다봐도 질리지 않았다.박민정은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부러 유남준이 제일 좋아하는 소불고기에 약을 탔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았다.이게 얼마만인가. 그녀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이! 유남준은 좀처럼 수저를 들지 못했다.박민정은 그의 그릇에 소불고기 한 점을 집어줬다.“집에서 먹는 거 괜찮다고 분명 말씀하셨어요 대표님이.”유남준은 묵묵히 수저를 들고 소불고기를 먹었다.박민정은 잔뜩 긴장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를 관찰했다.그녀는 소불고기에 수면제를 탔다.수면제의 양이 적을까 봐 그에게 몇 점이나 더 집어줬 지 모른다.유남준은 짙은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넌 왜 안 먹어?”“저는 별로 배 안 고파요. 대표님 많이 드세요.”박민정은 긴장하여 몰래 손바닥을 꼬집고는 다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유남준은 더 캐묻지 않고 그녀와 함께 묵묵히 식사했다.식사를 다 마쳤지만 그는 좀처럼 졸려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어리둥절해졌다.약을 적게 탄 걸까?“물 한 잔 따라와.”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가려고 했다.이때 유남준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았다.오늘 그녀는 유난히 정성스럽다.분명 그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설마 전에는 다 연기한 거고 오늘 모습이야말로 진심인 걸까?박민정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혹여나 그가 뭐라도 발견한 줄 알고 심장이 덜컹거렸는데 결국 돌아온 대답이 이거였다.“거실에도 물 있는데 왜 주방까지 가려고 그래?”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