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목소리는 허스키했다.그 자신만 알고 있었다. 계속 눌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말이다.하지만 박민정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었다. 그녀가 도대체 뭘 하려는 지 알아야 했으니까.박민정은 멈칫하더니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었다.“싫어요?”유남준은 이제야 그녀에게 목적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갑자기 말을 돌렸다.“뭘 오해한 거 아니야? 난 방금 네가 기억을 되찾도록 도왔을 뿐이야.”“오늘은 이만하자. 연회에 참석해야 해.”박민정의 안색은 별로 졸지 않았다.적어서 육, 칠 분 입을 맞추었는데 다 그녀를 갖고 논 거였다니.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손을 그의 몸에서 뗐다.유남준은 먼저 옷을 갈아입은 후 그녀와 함께 연회장에 갔다....연회엔 김인우와 그의 할아버지인 김훈도 함께 참석했다.김훈은 다른 가장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이 기회를 빌어 김인우에게 좋은 아내를 골라주고 싶었다.김인우는 할아버지를 이기지 못해 연회에 참석했다. 그는 먼저 어르신에게 생신 축하 인사를 올린 후 김훈의 명령하에 강제적으로 스무 명의 여자들을 만나봐야 했다.“오늘 말을 안 들으면 집에서 나가! 난 너 같이 못난 손자 없다.”김훈은 손자를 꾸짖었다.“나이가 몇인데 아내도 찾지 못하다니, 정말 우리 집안에 먹칠을 하는구나!”김인우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그는 여자가 부족했던 적이 없었으니까.“알겠어요.”할아버지 말을 거역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의 심장병이 발작할까 봐 두려웠다.의사는 절대 화를 내면 안 된다고 했다. 화가 심장에 해로우니까.김훈은 또 요란하게 차려입은 이지원을 보며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는 잊지 않고 손자에게 경고했다.“잘 기억해 둬. 이 이지원만은 안 돼!”김훈은 사람을 보는 눈이 대단했다.몇 년 전에 이지원이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는 것을 조사해 냈었다. 그리고 지금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가 아주 많은 여우였다.“걱정하지 마세요.”김인우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 박민정이라는 것을 안 후부터 이지원에게 조
이지원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다리를 안고 있는 아이를 보았는데 눈동자엔 귀찮은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티를 내지 않고 허리를 굽혀 웃으며 말했다.“응, 나야.”“꼬마야, 너 왜 혼자 여기 있어? 부모님은?”그녀는 눈앞의 아이를 자세히 보았다. 아이의 오관은 입체적이었고 큰 눈은 사람을 홀릴 정도였다.딱 보아도 아이의 부모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박예찬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지원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줌마가 제 아빠를 뺏었다면서요? 저한테 아빠를 돌려주실 수 있어요?”이지원의 몸은 순간 경직되었다.주위의 재벌 집 사모님들은 이 소리를 듣고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눈동자엔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들은 남자를 통해 지위를 올리려는 연예인을 가장 싫어했다.“정말 파렴치하네!”“유 대표님을 가졌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지. 어떻게 다른 남자를 꼬셔?”“이러니까 유 대표님이 이 여자랑 결혼하지 않았지. 그냥 갖고 놀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이지원은 멘탈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간신히 화를 참고 웅크리고 앉아 박예찬을 바라보며 말했다.“꼬마야, 잘못 기억한 거 아니야?”“난 널 모르고 네 아빠도 몰라.”이렇게 말한 후, 그녀는 다시 박예찬에게 다가가 두 손을 아이의 어깨에 놓고 낮은 목소리로 협박했다.“나쁜 놈, 계속 헛소리했다간 물고기 먹이로 바다에 던져버릴 거야!”이지원은 박예찬이 그저 평범한 아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연기가 그렇게 좋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일 초 후, 아이는 그녀의 손을 힘껏 치더니 울먹이며 말했다.“아줌마,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물고기 먹이로 절 바다에 던지지 말아 주세요...”이지원은 정말 아이의 입을 막고 싶었다.“아니에요...저 아이가 거짓말하고 있어요...”그녀는 급하게 해명했다.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왔다. 어쩔 수 없이 여자를 만나야 했던 김인우도 이곳을 보았다.그는 첫눈에 아이를 알아보았다.
“네.”우선 이 나쁜 놈을 기진맥진하게 만들 것이다.어쨌든 지금 어르신의 생일 파티가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소란을 피울 수 없었다.김인우는 지금 시간이 많았다....한편 유남준과 박민정은 선후로 연회장에 도착했다.박민정은 유씨 집안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어 유남준이 들어간 후에야 들어갔다.유남준은 그녀의 속셈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까 해프닝을 겪고 이지원은 어렵게 연회장에 있는 기자를 매수했다.유남준이 온 걸 보자 그녀는 얼른 상태를 조절하고 다가갔다.“오빠, 연회도 이미 시작했고 다들 어르신께 축하 인사를 드리는데 왜 이제야 왔어요? 나 오빠 오래 기다렸단 말이에요.”유남준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한 일을 보고하는 버릇이 없었다.그래서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다음엔 기다리지 마.”이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 들어오는 박민정을 본 후 뭔가 깨달았다.이지원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유남준이 오자마자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을 앗아갔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유씨 집안의 젊은 대표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고영란은 아들이 무척 자랑스러웠다.유남준은 우선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하얀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있으나 눈만은 밝은 어르신에게 생신 축하한다는 인사를 올렸다.이지원도 이 기회를 빌어 상류 사회에서 자신을 내세우고 싶었다.“할아버지, 저도 오늘 선물을 갖고 왔어요.”어르신은 비록 이지원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고영란처럼 손자가 하루빨리 결혼하기를 바랐다.게다가 며칠 전 이지원이 쓴 노래는 그녀가 얼굴만 반지르르한 게 아님을 증명했다.그래서 그는 이지원이 주는 선물을 묵묵히 받았다.그녀는 빛깔이 엄청 좋은 연옥을 선물했다.이런 물건은 재벌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받았으니 이지원이 이미 유씨 집안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했다.박민정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으면서 그들의 의논 소리를 들었다.“정말 오리가 백조로 되었네.”
그녀에게는 아들의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했다.“아버지, 진정하세요. 제가 바로 쫓아낼게요.”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이지원은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향한 날 선 눈빛에 이상함을 감지했다.고영란은 씩씩거리며 오더니 핸드폰을 그녀의 앞에 내던지며 말했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라!”이지원은 핸드폰을 한 눈 보고는 단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그녀가 막 입을 열고 해명하려 할 때, 고영란이 말을 가로챘다.“여기서 더 창피당하고 싶지 않으면 네 발로 나가라.”유씨 집안에서 연예인 한 명 내쫓는 건 파리 내쫓는 것 만큼 간단한 일이었다.이지원은 자기가 이런 꼴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가정부의 차에서도 한참을 믿기 힘든 듯 멍하니 있었다.그러다 불현듯 박민정이 했던 말이 떠오르며 깨달았다.이 모든 건 그녀가 벌인 짓이란걸!...한편, 조하랑도 이지원에 관한 뉴스를 보게 되었다. 그 뉴스는 애초에 그녀와 박민정이 함께 계획한 일이었다.그리고 일부러 이 타이밍에 공개한 것이다.이지원이 쫓겨나고 나서 그녀는 박민정에게 문자를 보냈다.[저 불여시한테 제대로 골탕 한 번 먹였네. 그러게 누가 나대래.]조하랑은 이지원의 불쌍한 모양새를 보려고 몸을 일으켰다.그러나 그녀의 눈앞에 보인 건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었다.“박예찬?”그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어리둥절하던 그때,보디가드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한 손으로 그를 들쳐업고 김씨 가문의 도련님인 김인우에게로 데려갔다.박예찬은 그 짧은 두 다리로 아등바등했지만 그들의 긴 다리를 이겨내진 못했다.게다가 도망치다가 힘을 다 써버린 탓에 결국 꼼짝도 못 하고 잡혀버렸던 것이다.그는 자기가 아직 어린아이인 것이 너무 싫었다.“이 양아치 같은 놈, 겨우 잡았네.”김인우는 여유롭게 그를 보며 말했다.박예찬은 여전히 그에게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아저씨, 저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전 아저씨 몰라요.”그러자 김인우가 기가 찬 듯 웃었다.
내가 내 아들 패겠다는데 뭐가 문제지?김인우는 이 여자가 수를 쓴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내가 먼저 내 아이임을 인정하게 만들려고.“나한테 접근하려고 꽤 애를 쓴 모양이네요? 전에 있었던 일도 다 당신이 시킨 거지?”조하랑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리고 그건 박예찬도 마찬가지였다.그는 두 모자를 바라보며 서늘하게 말했다.“무슨 심산인지는 몰라도 아이는 내가 책임집니다. 하지만 여자는 아니에요.”조하랑은 어이가 없었다. 박민정이 그녀에게 김인우는 쓰레기라고 말해주긴 했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정말 굉장한 쓰레기인 것 같다.조하랑은 치미는 화를 더 참지 못하고 손을 올려 김인우의 곱상한 얼굴에 뺨을 후려쳤다.김인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책임 같은 소리 하네. 개나 소한테 시집가는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는 안 가!”김인우는 원래 조용한 곳에서 박예찬을 천천히 훈계할 생각이었는데 조하랑이라는 변수가 생길 줄은 몰랐다.설상가상으로 소란스러운 상황에 빠르게 구경꾼들이 몰렸다.2층에서 자기 집안 큰손자를 유심히 지켜보던 김인우의 할아버지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랐다.“저 아가씨는 뉘 집 자식인가?”옆에 있던 비서가 빠르게 대답했다.“조씨 집안 큰딸입니다. 이름은 조하랑이고요.”“내 미래 손자며느리로 저 아이가 딱 좋겠군.”감히 김씨 가문의 큰손자를 때린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한편, 박민정도 그 셋을 발견했다.그녀는 박예찬이 왜 이곳에 있는지, 그것도 김인우와 어쩌다 시비가 붙은 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갔다.박민정이 유남준이 있는 방향으로 슬쩍 시선을 옮겨보니 그도 이미 이쪽 상황을 눈치챈 듯했다.박민정은 다급히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어 김인우와 엮이지 말고 예찬이부터 데려가라 일렀다.한 시간 후,개인 별장 밖에는 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방 안에는 박민정과 조하랑이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박예찬이 서있었다.“예찬아, 네가 왜 유 씨네 저택에 와있는 거니?”박민정이 차
조하랑은 그녀가 찾은 자료를 박민정에게 보여줬다.자료엔 이지원이 해외에서 어떻게 남자를 이용해 가수가 되었는지에 관한 모든 과정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이렇게 더러운 여자인 줄은 몰랐네.”“난 알았어.”박민정이 말했다.“그럼 왜 유남준 씨한테 말 안한거야?”조하랑은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원래 박민정에게 이 사실을 알려 유남준이 알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그럼 두 사람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박민정도 그녀의 마음을 알고 씁쓸하게 말했다.“남준 씨도 사람 하나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니야.”조하랑은 그제야 알 것 같았다.“그럼 대체 왜 이지원 그 여자를 좋아한 거래? 꾀를 쓰는 데에 반하기라도 한 거래? 난 어떤 남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박민정도 예전엔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그녀도 유남준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를 선택한 것처럼 유남준도 이지원이 좋은 여자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한 걸지도.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그 사람이 좋든 나쁘든, 착하든 말든 그 무엇도 상관없게 만드는 것.그러니 팜므파탈이 그렇게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다.박민정은 조하랑을 다독이며 말했다.“괜찮아. 어차피 나 이제 그 사람 사랑하지도 않아.”“응.”고개를 끄덕이는 조하랑.이튿날 아침 아홉 시,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을 올린 누군가.“톱스타 이지원 씨가 유씨 집안 축하연에서 추태를 부렸다는 소식입니다. 이지원은 아이를 괴롭히고 표절했다는 이유로 시댁 눈밖에 밀려나 집에 발을 들인지 십 분 만에 쫓겨났다고 합니다.”인터넷은 아침부터 발칵 뒤집혔다.한편, 주상 엔터테인먼트는 이지원의 지시로 빠르게 실시간 검색어를 지우기가 바빴다..하지만 그녀의 세력이 김인우만큼 크지 않다 보니 실시간 검색어는 내려갈 기미가 안 보였다.어쩔 수 어뵤이 이지원은 유남준의 비서 서다희에게 도움을 청했다.이건 그녀뿐만 아
멀리서 컴퓨터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한 모습의 그녀가 보였다.유남준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갑작스러운 소리에 박민정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유남준의 얼음장 같은 얼굴을 보았다.오늘 아침에 이지원에 대한 뉴스가 보도 된 데다 예전에 그녀를 위해 나서던 유남준의 모습이 떠오르자 박민정은 본능적으로 그가 왜 찾아온 건지 알 것 같았다.이번에도 이지원을 위해 자기를 괴롭히기 위해 온거라 생각한한 박민정은 몸을 일으킨 후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경계 태세에 돌입한 그녀를 보면서도 유남준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아이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지금 당장 나랑 집에 돌아가!”지금 그는 박민정이 기억을 잃은척하는 것 따위 신경 쓸 마음이 없었다.박민정은 황당했다.집?집에 가자고?그녀는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유남준의 얼굴을 한 눈 보았다.“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유남준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더 말하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그의 걸음이 너무 빠른 탓에 박민정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끌려갔다.그녀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차가 주차된 곳까지 끌려갔다. 유남준은 운전석에 앉아서도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박민정은 이런 그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절 데리고 어딜 가는 거예요?”유남준은 차 시동을 걸고 얇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말했다.“두원!”박민정은 그제야 그가 집에 가자고 했던 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그녀는 기억을 잃은 연기도 잊지 않았다.“두원이 어딘데요?”“대표님. 잊으셨나 본데, 저희는 이미 이혼했어요.”그 말에 유남준은 브레이크를 확 밟으며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서 박민정을 바라보았다.“우리가 이혼한 건 어디서 봤어?”멈칫하는 박민정.둘은 이미 이혼서류를 낸 상태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와 이혼숙려기간 때문에 이혼이 정식으로 성립된 상태는 아니었다.하지만 4,5년을 죽은 사람으로 살았는데 둘 사이 결혼생활은
가십거리가 돼?이곳 진주시에서 유남준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유남준은 박민정이 사라진 그 시간 동안 연지석이 그녀의 곁에 있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같이 지낸 시간이 많으면 자연스레 없던 정도 생긴다는데, 게다가 둘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연지석 귀에 그런 소문이 들어갈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고?”그의 검은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박민정의 얼굴에도 순간 그늘이 졌다.그녀는 유남준의 이런 말버릇을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대표님. 저희가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선택할 권리는 저에게 있습니다. 이건 지나친 간섭 아닌가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곧바로 유남준을 스쳐 지나갔다.유남준은 그녀에게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말 몇 마디 한 게 다인데 그는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졌다.뭐? 지나친 참견?멀어지는 박민정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그녀가 정말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유남준은 그런 느낌이 미치게 싫었다.그는 핸드폰을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수를 쓰든 그 아이 데려와.”“네.”“그리고 연지석 사업도 계속 공격해. 난 그 자식 것을 철저히 빼앗아야겠어.”전화를 끊은 그의 눈빛은 뭐든 집어삼킬 듯한 어둠에 휩싸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미련 없이 떠나던 박민정의 모습뿐이었다.예전엔 분명 그만을 사랑하겠다고 했던 사람이!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지?이제 연지석을 사랑하게 된 건가?뭐가 어떻게 됐든 그는 반드시 박민정을 다시 뺏어올 거다.그의 것은 그가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 남에게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유남준은 차에 탄 후 담배를 피우며 아이의 사진을 다시 꺼내 봤다.정말 그의 아이라면 박민정은 왜 그를 해외에 숨겨뒀을까?그는 아이를 다시 데려온 후에 낱낱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그리고 뭐가 어떻게 됐든 이번엔 반드시 박민정을 자기 옆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다시는 그의 시선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
정수미는 방금 차에서 내린 박민정과 진서연을 돌아 보더니 함미현이 자신을 속인 일이 박민정과 관련 있을 거로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민정 씨,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예요?”“함미현 씨 찾으러 왔어요.”박민정은 담담하게 함미현앞으로 걸어가 계약서를 돌려주면서 말했다.“함미현 씨, 호의는 고맙지만, 저는 이 계약서를 받을 수 없어요.”박민정의 손에 쥐여있는 계약서를 보던 함미현은 무릎을 꿇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민정 씨, 저...”함미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소현이 다가와 계약서를 가로채면서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이 계약은 처음부터 무효였어. 당신이 돌려주지 않아도 우린 이 계약을 인정하지 않아.”정수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무슨 계약서인데?”윤소현은 가로챈 계약서를 정수미한테 넘겨주면서 말했다.“엄마, 이거에요. 함미현이 엄마 딸로 권력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푼도 받지 않고 박민정과 수억 원이 되는 큰 계약을 맺었어요. 이 일이 아니었으면 저도 미현이가 엄마 친딸이 아니라는 의심은 하지 못했을 거예요. 정씨 가문의 사람이 어떻게 이런 밑지는 장사를 할 수 있겠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소현 씨는 진작 내가 정수미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협박해 왔잖아요. 오늘 난 당신이랑 같이 죽을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그 계약서는 제가 민정 씨에게 빚진 걸 갚은 거에요. 민정 씨가 전에 저랑 저의 어머니를 도와주었기에 보답하고 싶었던 거예요.“보답?”정수미는 너무 화난 나머지 웃음만 나왔다.“내 돈으로 다른 사람한테 은혜를 갚는다고? 내 친딸로 사칭하고 내 딸이 가져야 할 이익까지 누렸으면서 나한텐 왜 보답을 안 하는 거니?”함미현은 정수미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사실 민정 씨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소현은 어디선가 돌멩이를 주워 함미현의 뒤통수를 내리쳤고 함미현은 바로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정수미는 경악하며 소리쳤다.“윤소현, 이게 무슨 짓이야!”윤소현은 박
반 시간 전, 윤소현과 함미현을 미행하던 정수미의 경호원은 사진을 찍어 정수미한테 보내 상황을 보고했다.“지금 당장 그쪽으로 사람 대기시켜!”정수미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자 급한 마음에 빈손으로 사무실에서 뛰쳐나갔다.한편, 박민정도 함미현의 행동들이 이상하다고 느껴져 사람을 시켜 함미현의 행방을 알아내고는 진서연이랑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어려서부터 누구한테도 맞아 본적 없던 윤소현은 이미 함미현한테 뺨을 몇 대 맞아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고 힘없이 눈물만 뚝뚝 떨구며 빌고 있었다.“미현아, 제발 부탁이야. 이제 날 좀 놔줘.”함미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가 불러들인 사람들한테 지시했다.“천천히 괴롭히면서 잘 혼내줘.”윤소현은 용서를 빌어도 소용이 없자 다시 협박하기 시작했다.“함미현, 내가 오늘 여기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우리 엄마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함미현은 냉정하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엄마가 워낙 날 그렇게 아끼는데 소현 씨까지 죽고 없으면 나한테 더 잘해줄 거에요. 그럼 내가 유일한 정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거고 아무도 날 위협할 수없을 거예요.”말이 끝나자, 함미현은 윤소현의 앞에 다가가서 따귀 한대를 매섭게 후려갈겼다.윤소현은 입꼬리마저 찢어졌고 함미현이 다시 손을 올려 때리려는 찰나 차 한대가 다가와 멈춰서더니 누군가 차에서 내리면서 소리쳤다.“미현아, 그만해.”차에서 내린 사람은 정수미였다.정수미는 사적으로 윤소현과 함미현이 숨기고 있는 게 뭔지 알아내려 했지만, 두 사람을 미행하던 경호원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고 바로 달려왔다.윤소현은 눈시울을 붉히며 구세주라도 본 듯 정수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엄마!”급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정수미를 본 함미현의 얼굴색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고 뒤따라오는 경호원의 포스에 윤소현을 잡고 있던 함미현쪽의 사람들은 겁에 질린 듯 손을 놓아버렸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정수미는 함미현을 보면서 물었다.함미현이 우물쭈
그 말에 박민정은 급히 계약서를 확인해보았다.처음에는 계약서가 정씨 가문에게 유리하도록 수정되었을 거라는 생각에 확인해 본 것이었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들의 앞에 있는 계약서는 지엔 그룹이 사실상 XS 그룹과 무료로 협력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였다.“실수한 거 아니야?”박민정이 함미현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던 찰나, 계약서에서는 한 장의 종이 메모가 떨어져 나왔다.그 종이에는 함미현의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민정 씨, 저와 저희 엄마는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에요.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보답해드릴 건 없지만 이 계약서 꼭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제 작은 성의니까요.]“정말 예상 밖이네요.”진서연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이 계약 적게 잡아도 아마 수천억은 될 텐데, 이렇게 그냥 넘기다니.”박민정은 함미현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통화 중이라는 안내음만 들려왔다.박민정이 진서연에게 말했다.“서연아, 이 계약은 일단 가만히 두자.”“알겠습니다.”진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한편, 함미현은 윤소현에게 자신이 체결하고 온 계약서를 보여주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윤소현이 물었다.“너 미쳤니? 왜 정씨 가문의 재산을 들여서 박민정을 도우려는 거야?”“저는 지금 민정 씨한테 너무 미안해요. 어쨌든 저는 지금 민정 씨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거잖아요. 민정 씨 이렇게나 착한 사람인데...”함미현이 말하던 중, 순간적으로 경계심이 발도한 윤소현은 다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헛소리 좀 하지 마. 그런 소리 다시는 하지 말라고.”“하지만 이게 사실이잖아요!”함미현은 일부러 윤소현을 더 자극했다.“너 지금 어디야? 내가 지금 당장 그쪽으로 갈게.”윤서현은 이 멍청이가 혹시라도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까 두려웠다.“저는 민정 씨한테 조금 더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함미현이 말을 이었다.그러자 윤소현이 다급히 말했다.“거기서 딱 기다려. 내가 곧 갈 테니까.”그녀는 별다른 의심
홍주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도련님, 도련님께서도 언젠가는 도련님만의 행복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유남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래.”홍주영은 유남우에게 약을 가져다주기 위해 자리를 떴다.유남우의 건강 상태가 다시 악화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약을 먹어야 하는 상황까지 되어버린 것이다.유남우는 약을 먹은 후, 휴게실로 이동해 휴식을 취했다.홍주영은 바삐 움직이며 그의 방과 사무실을 정리해주고 저녁 식사까지 주문해주었다.모든 일을 마치고 유남우가 식사를 끝내는 모습을 본 후에야 홍주영은 퇴근했다.밖으로 나와 보니 시간은 이미 밤 8시가 넘어 있었다. 그녀 역시 배가 고파왔다.8시 이후로 저녁을 먹지 않는 것은 그녀에게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모르게 배가 조금씩 아팠다.홍주영은 굳이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차에 올라타 자신의 월세방으로 향했다....함미현은 정씨 가문에 입성한 이후부터 자신만의 세력을 천천히 키워나가고 있었다.사람들 모두 그녀가 정수미의 친딸이라고 생각해왔던 덕에 그녀에게 충성하는 사람들도 자연스레 늘어났다.또 다른 이유로는 정씨 가문의 직원들이 거만하고 제멋대로만 굴던 대저택의 딸 윤소현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함미현은 커다란 사무실에 주위를 둘러보았다.“엄마,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곧장 휴대폰을 집어 들어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은 박민정은 함미현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의아함을 느껴 물었다.“무슨 일이죠?”“민정 씨, 전에 저 도와주신 거 정말 감사드려요. 저는 지금 지엔 그룹에서 일하는 중인데, 민정 씨네 회사가 협력사가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우리 회사와 협력하시는 건 어떨까요?”함미현은 자신이 전에 박민정에게 졌던 빚을 갚고 싶었다.이런 방식으로라도 박민정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앞으로 어떻게 정씨 가문과 접촉하고 정수미에게 복수해야
“어휴,”김인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년간 알고 지냈던 유남준을 떠올려본 김인우는 그가 농담 삼아 하는 말도 알고 보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도 이번만큼은 정말 농담이었을지도 모른다.유남준이 걸어왔다.“오늘 수고 많았어.”깜짝 놀란 김인우가 물었다.“남준아, 일단 칭찬부터 하고 죽이려는 건 아니지?”그 말에 유남준이 김인우를 흘겨보았다. 이 사람에게 정말 피해망상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김인우를 무시한 채 유남준은 박민정과 함께 박예찬을 데리러 갔다.조하랑은 유남준의 앞에서 이토록 겁을 먹은 김인우를 바라보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맨날 내 앞에서 잘난 척만 하더니, 너도 이렇게 쩔쩔매는 사람이 있었네.”김인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때 나한테 부탁했던 일은 잊었나 봐요?”조하랑은 그제야 자신이 김인우를 이용해 강연우를 쫓아냈던 일을 떠올리며 상황 파악을 마치고는 서둘러 사과했다.“미안해요, 방금은 내가 깜빡했나 봐요. 진짜 미안해요.”김인우는 조하랑에게서 사과를 받고 나서야 더 추궁하지 않았다.윤소현은 멀리서 티격태격 중인 김인우와 조하랑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화목하게 웃고 있는 박민정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유남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서로 처음 보는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남우 씨.”“왜?”유남우가 고개를 숙여 윤소현을 바라보았다.“이제 거의 다 끝나가는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죠.”윤소현은 오늘 활동을 통해 유남우와 조금 더 가까워지길 바랐지만 그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평범한 활동들조차 전부 거절했다.“그래.”사실 유남우는 그저 일찍 집에 가고 싶었을 뿐이었다.윤소현은 그의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남우 씨...”윤소현이 말을 꺼내려던 찰나, 유남우의 전화벨이 울렸다.전화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우는 윤소현에
윤소현 팀의 학부모들은 죽기 살기로 뛰었지만 김인우가 속한 팀은 마치 누가 이기든 딱히 상관없다는 듯 일부러 느릿느릿 뛰고 있었다.“이 사람들, 다 뭐 하는 거야?”박예찬이 하품하며 말했다.“역시 어렵겠어요. 서로 눈치 보고 그러는 거죠, 뭐.”“그럼 나한테는 볼 눈치가 없다는 거야?”김인우가 혀를 찼다.“유남우랑 정씨 가문에 비하면 아저씨는 좀 꿇리지 않아요?”박예찬이 대꾸했다.그리고 김인우는 아이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그는 이미 박예찬에게 그 자동차를 얻어준다고 약속까지 했으니 한 번 뱉은 말은 지켜야만 했다.김인우는 그대로 윤소현의 쪽으로 걸어갔다.“지훈아, 이 자동차 아저씨한테 팔래? 나중에 아저씨가 네가 원하는 거 사줄게. 어때?”처음으로 박예찬을 완벽하게 이긴 유지훈은 한껏 들떠 있었다.“안돼요! 이건 제가 이겨서 받은 거란 말이에요. 예찬이도 갖고 싶으면 노력해서 얻으라고 하세요.”오늘은 유지훈이 드디어 박예찬을 이긴 날이었다. 아이는 어린 마음에 승리의 기쁨에 도취해 있었다.김인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하더니 뒤를 돌아 유남준을 바라보며 아프리카로 보낸다는 말은 진심이 아니길 바랐다.유지훈처럼 유치한 아이가 아니었던 박예찬은 김인우에게 다가가 말했다.“아저씨, 그냥 두세요. 장난감 하나 갖고 뭘 그래요. 별거 아니에요.”그 말을 들은 윤소현이 비웃으며 말했다.“장난감 하나도 못 얻는 주제에 그렇게 큰소리를 쳐?”박예찬의 화를 돋우기는 겁났던 유지훈도 눈치를 봐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이건 예찬이가 가질 수 없는 거야.”박예찬은 그런 두 사람을 무시하며 김인우의 팔을 잡았다.“아저씨, 우린 다른 거 하러 가요.”“그래.”김인우는 아이의 말에 흔쾌히 대답했다.그 역시 윤소현이 미리 다른 부모들과 짜고 치는 고스톱 중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챘다.윤소현은 박예찬이 다른 상품을 원하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다시 다른 학부모들에게 시선을 돌렸다.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던 세 사람 중 조하랑이
“잘 되고 있어요. 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에요.”“그럼 다행이네요.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민정 씨.”이윽고 손연서는 박민정의 손을 끌어 잡으며 말했다.“제가 인맥이 넓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이 몇 있으니까, 필요하면 소개해 줄게요.”“네, 그럼 굳이 사양하진 않을게요.”박민정이 웃으며 대답했다.도훈 엄마도 다가와 말을 걸었다.“예찬 엄마, 우리 집이랑도 협력할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그래요.”박민정은 흔쾌히 수락했다.지원의 엄마도 민망한 기색을 보이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다른 학부모들 몇몇을 데리고 도움을 제안했다.박민정은 예상치도 못한 장소에서 여러 협력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역시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는 건 나쁠 게 없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한편, 윤소현과 유남우는 먼 곳에서부터 박민정의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저딴 사람들, 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지.”윤소현이 작게 중얼거렸다.오늘 온 대부분의 엄마들은 이미 최현아에게서 문자를 받은 상태였고 윤소현의 친정이 그 유명한 정씨 가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여기저기서 그녀에게 다가와 아부를 떨어대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윤소현의 눈빛에는 자부심만 가득 들어찼다.“소현 씨, 듣기로는 조금 이따가 계주 경기가 있을 거래요. 그런데 소현 씨는 지금 임신 중이시니까 뛰면 안 되잖아요. 저희가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경기를 취소해달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한 엄마가 아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엄마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맞아요, 맞아요. 취소합시다. 임신한 상태에서 뛰면 안 되죠. 아이부터 지켜야 하는데.”하지만 그 말에 유지훈은 대놓고 싫다는 기색을 내비쳤다.“안돼요, 절대 취소하면 안 돼요! 계주 경기 상품이 한정판으로 새로 나온 차인데, 저랑 예찬이 둘 다 그걸 갖고 싶어 하거든요. 제가 무조건 갖고 말 거예요!”사실 유지훈에게 그 차는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지만 박예찬이 유치원에 온 이후로 자신이 항상
잠시 생각하던 유남준이 말했다.“앞으로 내가 너 만나러 올 때마다 먼저 네 왼손을 잡을게. 어때?”박민정은 처음에는 조금 번거로운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떠올려보니 그 정도 번거로움은 어느 정도 감수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좋아요.”유남준은 말없이 박민정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이제 가끔 어린애처럼 굴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모만 빼면 유남준과 유남우는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그들의 뒤에 서 있던 유남우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고, 윤소현의 얼굴은 화가 난 나머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비록 조금 전의 일이 단순한 오해라는 걸 알긴 하지만 윤소현은 여전히 속이 상했다. 왜 유남우도, 유남준도 모두 박민정의 편만 드는 걸까?“남우 씨, 만약에 나랑 박민정 둘 중 한 명만 선택해야 한다면 남우 씨는 누굴 선택할 거예요?”윤소현이 물었다.유남우는 그런 윤소현을 슬쩍 바라보더니 이내 부드러운 눈빛을 장착한 채 대답했다.“그런 질문은 아무 의미 없어.”윤소현은 그 대답에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유남우의 팔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난 남우 씨가 정확히 대답해줬으면 좋겠어요. 남우 씨는 정말 날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면 박민정을 더 좋아하는 거예요?”그녀는 자신이 박민정에게 밀리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유남우는 왜 박민정을 좋아했던 걸까?박민정은 유남우를 자신보다 먼저 만난 것뿐 아닌가? 만약 유남우를 먼저 만난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그가 지금 좋아할 사람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넌 내 와이프야. 그게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야.”유남우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그 미소에는 따스함이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소현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말했다.“정말이죠? 그럼 오늘 밤엔 꼭 나랑 같이 있어 줘야 해요.”잠시 머뭇거리던 유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 말에 금세 눈물을 그친 윤소현
박민정은 미소를 띤 채 유남우에게 걸어갔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별과 바다를 품고 있는 듯했다.유남우는 넋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눈 부신 햇살에 유남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모습은 유남준과 똑같았다.하지만 박민정은 끝까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유남우를 보며 말했다.“가요.”유남우는 박민정이 자신을 유남준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아무 해명도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앞쪽으로 걸어갔다.임신 중인 박민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아무 말 없는 유남우에 혼잣말을 시작했다.“이따가 예찬이한테 말 좀 잘 해줘요. 화가 좀 난 것 같은데, 남준 씨를 안 부른 제 탓이에요.”유남우는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실수로 이 평온한 순간을 깨뜨릴까 봐 말을 최대한 아꼈다.그들 뒤에서는 전화 통화를 마친 윤소현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눈에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유남우와 박민정의 뒷모습이 들어왔다.윤소현의 동공이 순식간에 좁아지며 두 눈빛에 분노가 가득 찼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그때, 타이밍 좋게 유남준의 차도 도착했다.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걸어간 윤소현은 이내 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박민정을 향해 소리쳤다.“박민정, 염치도 없어?”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윤소현을 발견했다.그리고 유남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그만해, 윤소현.”그제야 박민정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남우 씨였어요?”박민정은 확신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두 걸음 더 다가와 유남우의 팔을 단단히 잡은 윤소현이 말했다.“그럼 누구겠어? 유남준인 줄 알았어?”박민정은 자신이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유남우 역시 자신의 실수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