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아직도 유남준이 얼굴을 굳힌 채 아무도 없는 곳으로 그녀를 끌고 가 호통을 쳤던 걸 기억한다."아직도 덜 창피해?”유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장미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할 일 없으면 가서 일이나 더 해, 이런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그때, 박민정은 그 자리에서 마음이 반쯤 식었다."다른 남자들은 다 남자가 여자한테 고백하는데, 내가 당신한테 고백하면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어요.”어쨌든 두 사람은 이미 결혼했는데, 계속 진전이 없자 그녀는 결국..."앞으로 사랑한다는 말 꺼내지도 마, 유치해."유남준은 한마디를 내던지고는 떠났다.그때부터, 박민정은 사랑을 입에 담지 못했다.그렇게 많은 다정한 연인들이 매일 사랑을 입에 달고 사는 느낌을 그녀는 여태껏 느껴본 적이 없다.펑-!올해는 불꽃놀이를 허가했는데 날이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는데도 벌써 멀리서 불꽃놀이 소리가 나면서 박민정의 정신을 일깨웠다.그녀는 자신을 품에 안은 유남준을 바라보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어떤 트라우마는 한번 생기면 치유하기가 정말 어렵다."유남준 씨, 우리 다 어린애가 아닌데, 유치하게 굴지 마요.”그녀는 그를 떼어 놓았다.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뜻밖에도 붉은 반점이 촘촘히 깔려 있는 것을 보았다."당신 알레르기가 있어요...”유남준은 얼굴이 간지럽다고 생각은 했지만 알레르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박민정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가요, 지금 민기 씨에게 전화해서 병원에 데려다 줄게요.”정민기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겨우 한 시간밖에 안 됐는데 유남준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채 나타났다.두 사람은 유남준을 병원으로 데려와 검사를 받게 했다.박민정은 그가 꽃가루 알레르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꼬치구이를 먹어도 알레르기가 생길 줄은 몰랐다. 체질이 강하지 않은 타입인 것 같다.나중에 알레르기 테스트를 한 후에야 유남준이 꼬치구이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인과 일부 사람들이 사용하는 특정 향수
유남준은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박민정은 그를 부르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 바로 용건을 말했다.“지석이에게 상처 입혔어요?”유남준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거짓말하지 마요." 박민정이 이어서 말했다.유남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응.”"네? 진짜로 때린 거에요?”박민정은 믿을 수가 없었다.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연지석을 때렸고 심지어 중상을 입혔다고?박민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유남준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유남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박민정이 연지석 때문에 자신을 때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비록 아프지는 않지만, 그는 달갑지 않았다.그냥 남자잖아? 때리면 때리는거지. 묻어버리지 않은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유남준은 입으로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민정아, 남자끼리는 갈등이 있는게 정상이야. 게다가 우리는 연적이라 싸우는 게 이상하지 않아.”"그냥 싸움이라니? 민기 씨 말로는 지석이는 아직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어요."박민정은 화가 치밀어 다시 주먹으로 내리쳤다.유남준은 피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박민정이 이렇게 다른 남자를 보호하는 모습을 보니 지금 당장 연지석 곁으로 날아가서 그를 죽여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앞으로는 안 할게."하지만 여전히 입은 살아 있었다.박민정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이렇게 근육이 많아서야 그를 때리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연지석이 그에게 맞아 병실에 들어갔다는 생각을 하고는 이대로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손을 들어 그의 팔을 매섭게 꼬집었다.마침내 유남준의 안색이 달라졌다.“민정아, 아파.”그렇게 꼬집는 건 정말 좀 아팠다."그냥 꼬집는 것도 아픈데, 지석이는요?”"걔가 나를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걔가 아니었다면 나는 외국에서 죽었을 텐데, 당신은 그때 뭘 했는데요?”"뭘 했냐고요.”박민정이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힘껏
집에 돌아온 박민정은 사 온 음식을 윤우한테 요기하라고 건넸다. 그러고는 유남준한테 눈길도 주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갔다.유남준은 그녀가 일시적으로 삐쳐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 박민정은 말 한마디 없었다.윤우도 그들 사이의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신이 나서 어깨춤이 절로 나올 것만 같았다.‘엄마 성질을 건드린 모양인데? 쌤통이다, 쓰레기 아빠한테 이런 날이 다 오다니, 하하하!'밥 먹을 때 윤우는 일부러 박민정한테 반찬을 집어달라, 먹여달라 하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녀의 관심이 온통 자신에게 쏠려있다는 걸 유남준한테 과시하듯이 말이다.“엄마, 저 닭고기 먹고 싶은데 너무 멀어. 엄마가 먹여주면 안 돼?”“어, 그래.”박민정은 내내 윤우만 챙겼다. 유남준이 손을 뻗어 음식을 집으려 했다.던 젓가락으로이 몇 번을 집어도이 음식이 나집히지 않아못하고 빈 젓가락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그는 불평 없이 묵묵히 밥을 먹었다.식사가 끝나고 온 가족이 TV를 보고 있는데 거실에서는 박민정과 윤우의 말소리만 들렸다.그녀가 화장실을 간 틈을 타 윤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아저씨도 이젠 알겠죠? 엄마의 영원한 보배는 저예요. 아저씨는 언제 누구한테 대체될지도 모르는 임시용일 뿐이라고요.”가뜩이나 불안한데 윤우까지 한술 더 뜨니 유남준은 더 심란하여 미간을 좁혔다.“그 입 좀 다물어.”“싫은데요!”윤우는 그를 향해 혀를 내밀며 메롱을 했다. 하지만 또 이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런데 대체 어쩌다가 엄마 성질을 은 어떻게 건드린 거예요?”웬만하면 거의 화를 내지 않는 순한 성격의 박민정이 화를 냈다는 것에 윤우는 호기심이 동했다.유남준은 일일이 설명해 주기가 귀찮아 눈을 흘겼다.“어린놈이 뭘 안다고 캐물어.”“누가 어린놈이에요, 흥!”윤유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엄마가 쓰레기 아빠를 멀리하기만 하면 그 이유가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자리에 바로 앉아 TV를 시청했지만 프로그램들이 하나같이
“그러면 사과하고 배상하고 난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씻으러 갈 거니까 이 손 놔요, 어서.”박민정은 가차 없었다. 유남준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을 놓았지만 손등에는 옅은 이빨 자국이 남아있었다.그녀가 욕실로 들어간 후, 유남준은 서다희한테 전화를 걸었다.“연지석에 대해 알아봐, 지금 위치가 어딘지.”저편에 있는 서다희의 눈동자에 의문이 담겼다. 설마 설날부터 사람을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대표님, 며칠 전에 알아봤는데 연지석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요. 너무 몰아붙이지 말고 여지를 좀 남겨두는 게 어떨까요?”“사람을 보내서 안전하게 지켜줘, 죽지 않도록.”유남준의 말을 들은 서다희는 너무나 놀랐랍고 잘못 들은 줄로 알아,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네?”“민정이가 연지석의 일에 대해 알아버렸어. 나한테 배상하고 사과하래. 네가 대신 예전에 뺏어왔던 프로젝트 몇 개를 도로 던져줘, 그걸로 배상하고 사과한 셈 치자.”이 정도로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유남준도 난생처음이다. 그가 착한 자선가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서다희는 이제야 그 원인을 알았다.‘역시 사모님 때문이군.’“알겠어요, 바로 조치하겠습니다.”“할 때 증거를 남겨놓는 걸 잊지 마. 민정이도 알 수 있게끔.”유남준이 마지막에 당부했다. 그가 사과하겠다는 말은 절대 진심일 리 없었다.“네.”...왕년의 섣달그믐날은 모두 은정숙과 함께였지만 올해는 그녀도 없고 임신도 하여, 박민정은 샤워를 마치고는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잠이 든 지 얼마 안 되어 커다란 인영이 방으로 들어와 긴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화들짝 놀란 박민정은 눈을 번쩍 떴다. 어둡고 은은한 무드 조명이 유남준의 얼굴을 비추었다.“어떻게 들어왔어요?”분명히 문을 잠갔는데?유남준은 그녀를 꼭 껴안고 묻는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연지석 일은 이미 서 비서한테 말해놨어. 그러니까 이제 화 풀어.”박민정은 그가 왜 연지석을 죽음의 변두리까지 몰고
하지만 박민정은 윤우까지 데려갔다가 유씨 집안 사람들한테 두 아이가 그 집안 핏줄임이 들키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특히 고영란은 예찬이를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하여 그녀가 막 거절하려고 하는 그때, 윤우가 한발 먼저 재빠르게 대답했다.“좋아요, 아저씨. 그런데 날 집에 데려가면 이젠 아저씨가 제 새아빠가 되는 거예요?”윤우는 호기심으로 어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진난만하게 물었다.새아빠라는 단어에 유남준의 낯빛이 복잡하게 변했다.그러거나 말거나 윤우는 일부러 큰소리로 외쳤다.“새아빠, 우리 새아빠 집에 가요.”한창 우유를 마시고 있던 박민정은 입안의 우유를 뿜어낼 뻔하였다.“윤우야, 막 부르면 안 돼!”그제야 윤우는 장난기를 거두고 말했다.“엄마, 우리 아저씨랑 같이 그 집으로 가요. 매일 여기 있으려니 너무 심심해요. 의사 아저씨도 나한테 자주 밖으로 나가 기분 전환하라고 그랬어요. 그래야 아픈 것도 덜 하다고요.”윤우가 자신의 병에 대해 얘기하며 요구할때 박민정은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알았어. 가자, 그럼.”유남준이 이대로 마음이 변치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두 아이의 신상에 대해 그한테 알려줄 날이 올 것이고, 그렇다면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세 식구는 옷을 갈아입고 별장에서 나왔다.그들을 데리러 온 이한석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번에 왔을 때는 경황이 없어 윤우를 찬찬히 살피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윤우는 유남준의 어릴 때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었다.기사한테 차 문을 열게 하여 세 사람이 차에 타고난 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고영란이 최근에 몰래 조사하고 있는 누군가가 설마 이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아침에 그의 딸 이혜림한테서 온 집에 돌아오고 싶다는 메시지를 상기하며 손에 든 휴대폰을 더 꽉 쥐었다. 그리고 결심을 내렸다.‘아빠가 어떻게든 널 돌아오게 만들 거야.’...차 안에 앉은 윤우는 컨디션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윤우는 유씨 집안에
밖에 서 있는 박민정과 윤우는 정말로 한 쌍의 아름다운 모자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한엄마와 귀엽고 깜찍한 만찢남 아들.친척 중 어떤 사람은 슬그머니 나와 둘을 살펴보기까지 했는데, 아이가 정말 유남준을 많이 닮았다고 느꼈다.그들의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감지한 윤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역시 쓰레기 아빠 집에는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윤우는 박민정을 올려다보며 얘기했다.“엄마, 나 오줌 마려워.”“그래? 엄마가 화장실로 데려다줄게.”박민정은 윤우를 데리고 근처 화장실로 갔고, 도착하자 윤우는 말했다.“엄마는 먼저 돌아가서 아저씨를 기다려. 아저씨가 나와서 우릴 못 찾으면 어떡해. 내가 길 아니까 이따 엄마 찾아갈게.”화장실이 별로 멀지도 않은 것 같아 박민정은 승낙했다.“그러면 나와서 엄마를 못 찾겠으면 전화해, 알았지?”윤우와 예찬이는 모두 아이용 스마트 워치를 착용하고 다녔다.“응, 알겠어.”윤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다른 한편, 홀 안에는 유남준의 친척들이 대부분 와 있었지만 유독 유남우만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유남준의 사촌 형 유성혁도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고개를 푹 떨구고 유남준을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전에 박민정을 희롱하다가 유남준에 의해 차가운 강물에 던져져 하마터면 얼어 죽을 뻔했던 그 일이 있고 난 뒤, 최현아는 그와 이혼하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쳤지만 그가 온갖 다짐을 하고 손이 발이 되게 빌어서야 이혼소동을 가까스로 무마하게 되었다.그 생각에 유성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또한 박민정이 어떤 아이와 같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최현아한테 얼른 나가보라고 했다.최현아가 나가보니 무심하고도 도도한 표정의 박민정이 홀로 바깥에 서 있었다. 그녀의 외모가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남편이 한때 그녀한테 홀렸었다는 생각만 하면 속에서 천불이 날 것만 같았다.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번뜩이면서 거만한 얼굴로 하이힐
한낱 모델일 뿐인 최현아의 시어머니는 이 집안에서 존중받기 힘들었다. 하지만 고영란은 달랐다. 그녀의 친정은 KC 그룹이고 오빠와 동생들은 정재계는 물론 불법 조직까지 주무르는 돈과 권력을 갖고 있어, 그들앞에서 자신은 개미 목숨과도 다름없었다. 최현아는 고영란을 시어머니로 두지 못한 것이 너무 한스러웠다. 그랬다면 자신의 아들유지훈은 진작에 유씨 집안 지분을 갖고도 남았을 것이다.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최현아는 예의 바르게 고영란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곁에 있는 윤소현을 향해서도 미소를 지었다.윤소현도 그녀를 보며 방긋 웃었다.“형님.”“그래.”최현아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인사를 받고는 떠났다.그녀가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윤소현은 박민정을 싫어하는 사람이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나중에 최현아와 몰래 관계를 잘 맺어야겠다고 생각했다.윤우가 보이지 않자 고영란은 물었다.“너랑 같이 온 그 애는 어디 갔어?”“윤우는 화장실에 있어요.”박민정이 대답하자 고영란은 화장실이 있는 쪽을 기웃거리며 지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화장실로 들어간 윤우는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와 홀로 들어갔다.유씨 일가 친척들이 워낙에 많은 데다 아이를 데려온 친척들도 꽤 되어 사용인은 윤우를 보고도 막지 않았다. 윤우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홀 안으로 들어갔고, 사람들 속에서 쓰레기 아빠가 한창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한테 꾸지람을 듣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저 사람이 내 증조할아버지겠지? 저 할아버지도 분명 좋은 사람이 아닐 거야.”윤우는 작게 중얼거리며 비싼 정장 차림으로 유명훈 곁에 앉아서 과일을 먹고 있는 유지훈한테로 시선을 돌렸다.유지훈의 자신만만하고 우쭐대는 모습은 마치 그가 이 집의 주인인 것만 같았다.“쪼그만 게.”전에 예찬이가 유지훈에 대해 얘기해 준 적이 있었다. 예찬인 척 이 저택에 왔을 때도 지훈이와 마주쳤었다. 윤우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할머니와 할어버지는 보
윤우는 사실 그리 더럽고 지저분한 일을 할 애가 아니었다. 그저 유남준의 바지에 물을 묻혔을 뿐이다. 유남준의 바지를 닦는 척하며 윤우가 말했다.“엄마가 그러는데 새아빠 노릇은 원래 친아빠보다 하기 힘든 거래요.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잘 닦아드릴게요.”모두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고 늘 엄숙한 얼굴로 웃음을 아끼던 유명훈도 웃음을 참느라 코가 벌렁벌렁했다.그러나 여전히 이성은 남아있었다.‘저 애는 누굴까, 남준의 아들인 건가?’유남준한테 물어보려는 그때, 곁에 앉은 유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물었다.“예찬아, 너 방금 우리 삼촌을 뭐라고 불렀어?”예찬이라고?윤우는 더 이상 감추지 않고 커다란 눈동자로 유지훈을 보며 말했다.“난 예찬이 아니야. 연윤우라고 해. 아저씨가 우리 엄마랑 같이 있기로 했으니까 이제 나의 새아빠가 되는 거야.”지훈이는 윤우의 말을 듣고 더 어리둥절했다.예찬이와 똑같이 생겼는데 왜 예찬이가 아니라고 하는 거지?자세히 보니 앞에 있는 아이와 예찬이가 유일하게 다른 점은 낯빛이 더 창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찬이처럼 정색한 말투가 아니었다.유명훈은 둘의 대화를 듣고 더 의문이 들었다.“네 엄마가 누구냐?”“박민정이에요, 할아버지.”윤우가 대답하자 유명훈의 지팡이를 쥔 손에 시퍼런 핏줄이 불거졌다.“그럼 넌 누구야? 네 친아빠는 또 누구고?”윤우가 재차 입을 열려는데 유남준은 그의 덜미를 번쩍 들었다.“얘를 밖에 내보낼게요.”“거기 서!”유명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우를 향해 걸어왔다.이때 유남준한테 잡힌 윤우가 겨우 고개를 들며 말했다.“새아빠, 나절로 갈 수 있어요.”드디어 윤우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 유명훈은 아이의 얼굴이 유남준의 어릴 적 모습과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다.“너... 너 대체 누구의 아이야?”윤우는 속으로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전 연지석과 박민정의 아들이에요.”유명훈이 미간을 좁히며 캐물었다.“연지석은 또 누구야?”“연지석은 이 세상에서 제일 대단하.
고영란은 투박하기 그지없는 윤소현의 말투를 들으며 왜 이런 여자가 유씨 가문에 시집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혀 상류층의 여인 다운 기품이 없었다.“그럼 남준이는? 아직도 안 왔어요?”잠시 망설이던 집사가 대답했다.“큰 도련님은 지금 두원 별장에 계십니다. 설날엔 안 오실 거라고 하셨어요.“박민정을 찾지 못한 유남준이 아직도 우울에 빠져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고영란은 더 묻지 않았다.“알겠어요. 이제 음식 준비 부탁해요.”“네.”집사는 곧바로 사람들에게 음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영란은 두 아이를 베이비 시터에게 맡기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식탁에는 윤소현, 박윤우, 박예찬 그리고 고영란 이렇게 네 명뿐이었다. 오늘따라 식탁이 아주 썰렁하게만 느껴졌다.“고기 많이 먹어.”고영란은 두 아이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윤소현은 두 아이에게 지나친 애정을 쏟는 고영란을 바라보며 질투심으로 불편한 마음을 안고 음식을 먹었다.그때, 식탁으로 다가온 집사가 말했다.“사모님, 정 대표님이 오셨는데요.”정수미는 박민정이 자신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박민정의 행방을 찾는 동시에 네 명의 외손자들을 자주 찾아왔다.그녀는 이제라도 박민정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상하기 위해 외손자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쏟아붓고 있었다.“고마워요.”고영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미를 맞이하러 갔다. 그리고 윤소현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의 뒤를 따라나섰다.하지만 박윤우와 박예찬은 식사에만 집중하며 정수미의 등장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아이들 역시 이제는 정수미가 엄마의 친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복잡했다.“엄마, 저녁 식사 중이었는데, 같이 드실래요?”윤소현은 웃는 얼굴로 정수미에게 말했다.하지만 정수미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이미 먹고 왔어. 이번에는 그냥 아이들 보러 온 거야.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네.”윤소현은 정수미의 냉한 태도를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
1년 후, 설날.해외의 어느 한 소도시.박민정은 직접 송편을 빚으며 설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남우 오빠, 언제 도착해?”유남우는 이미 공항에 도착한 상태였다.“아마 저녁 9시쯤 도착할 거야.”“알겠어. 기다리고 있을게.”박민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유남우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래도 배고프면 먼저 먹고 있어. 알겠지?”“알겠어, 나도 바보 아니거든.”박민정이 웃으며 대꾸했다.곧 비행기를 타야 했던 유남우는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비행기에 올라탄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지난 1년 동안 그는 박민정을 여러 장소로 옮기며 정기적으로 그녀에게 최면을 걸어왔다.그로 인해 박민정은 많은 것을 잊어버렸고 이제는 유남우와 유남우가 만들어준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었다.유남우는 가족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해외에 자주 나가지는 않았다. 해외로 나간다고 해도 그저 일 때문이라고만 둘러댔다.오늘은 가족들과 함께 설날을 보낼 예정이었지만 마침 걸려온 박민정의 전화에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올해 설 만큼은 박민정과 함께하고 싶었다.그 시각, 유씨 가문의 집.윤소현은 방 안에서 쉴 새 없이 울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짜증 내고 있었다.“왜 이렇게 울기만 하는 거야?”베이비 시터가 다가와 말했다.“배가 고픈 모양이네요. 제가 데리고 나가서 우유 먹일게요.”“얼른 데리고 가, 얘 정말 짜증 나 죽겠네.”윤소현은 아들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돌이 지난 두 남자아이와 함께 있던 고영란의 모습을 보자마자 질투심이 밀려왔다.“어머님, 편애가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다혜 울고 있는 건 들리지도 않으세요? 손자들 돌봐주실 시간은 있으시면서 손녀는 신경도 안 쓰시네요?”고영란은 그녀의 불평에 눈살을 찌푸렸다.고영란은 손녀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다혜에게는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윤소현이 낳은 딸은
“정말 실망이다.”정수미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윤소현은 힘겹게 일어나 그녀를 쫓아가며 말했다.“엄마, 함미현 일 기억 안 나세요? 저도 그때처럼 될까 봐 두려워서 그랬어요. 엄마도 아시잖아요.”정수미는 함미현 얘기가 나오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정말 함미현한테 진실을 안 물어봤을 것 같니?”그 말에 윤소현의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설마 정수미가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조사를 마쳤을 줄은 몰랐다.“함미현 일은 제가 다 말씀드렸잖아요. 엄마가 어렵게 찾은 딸을 잃게 될까 봐, 혹시라도 진실을 알게 되면 상처 받으실까 봐 그랬던 거예요.”정수미는 그 말에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랬다고? 그런데 미현이는 네가 박민정이 친딸이라는 걸 알고 그랬다고 하던데. 내가 평생 친딸을 못 찾게 하려고 미현이한테 연기시킨 거라더라.”윤소현이 변명해 보려고 했지만 정수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제 거짓말 좀 그만해. 너 계속 이럴 거면 나도 더는 너 내 딸로 인정 못 해.”그 말에 윤소현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정수미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윤소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진짜 딸을 찾았다고 이제는 날 버리겠다는 거야? 박민정을 원한다는 거야? 하지만 이걸 어째. 박민정한테는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윤소현이 중얼거렸다.밖으로 나온 정수미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비서의 기척을 느꼈다. 비서는 애써 정수미를 위로해주며 말했다.“아가씨께서는 아무 문제 없으실 겁니다.”정수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난 정말 실패한 엄마야. 친딸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바로 옆에 내 딸을 두고도 못 알아봤어. 그런 주제에 양딸이 그렇게나 버릇없이 굴었는데도 난 계속 감싸기만 하다가 내 친딸을 해칠 뻔했어. 아마 민정이는 지금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비서를 통해 알아본 박민정은 마지막으로 정수미를 만났던 날, 심각한 모욕을 당하고 조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소식
박예찬은 연락이 닿는 순간, 박윤우가 서둘러 물었다.“형, 엄마 어떻게 됐어?”박예찬 역시 박윤우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금방 수술을 마치고 나온 동생을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무슨 소리야, 그게? 엄마 잘 계셔.”박윤우는 형마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스럽게 이마를 찌푸렸다.“형까지 나를 세 살 먹은 어린아이로 생각하는 거야? 이렇게 오랫동안 엄마가 날 보러 안 왔다는 건, 분명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잖아. 그리고 요즘 아빠도 거의 매일 밖에만 있고, 정민기 아저씨도 요즘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들었어. 엄마 실종된 거 맞지?”박예찬은 동생이 이 정도로 많이 알고 있을 줄 몰랐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더는 숨기지 않았다.“맞아, 엄마 실종됐어. 그리고 아직도 못 찾았고.”“어떻게 그럴 수 있어?”박윤우는 확신 어린 소식을 듣는 순간, 밀려오는 걱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엄마 납치당한 거 아니야?”“그럴 가능성도 있지.”박예찬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넌 이제 막 수술을 끝냈으니까 잘 쉬어야 해. 절대 다른 사람들 걱정시키지 말고, 엄마 돌아오실 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해. 그래야 엄마도 기뻐하실 거야.”박윤우는 자신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알겠어.”전화를 끊은 아이는 다시 병상에 누웠다.최근 며칠 동안 정수미도 손자들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다.지금 그녀는 밀려오는 후회를 멈출 수 없었다. 만약 박민정을 조금만 더 일찍 찾았더라면,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그날, 윤소현은 풀려났다.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곧장 정수미에게 달려가 울음을 터뜨리며 하소연했다.“엄마, 저는 다시는 못 돌아오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그 나쁜 놈이, 유남준이 저를 가둬놨어요. 너무 어둡고, 너무 조용해서 미치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임산부를 그런 곳에 가둬놨어요!”정수미는 그런 윤소현의 불쌍한 표정
유남준의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있었고 정돈되지 못한 모습이 전반적으로 초췌해 보였다.“이지원 조사하고 왔는데, 민정이의 실종과는 아무 관련도 없던데요.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예요?”만약 윤소현이 임신 중인 아이가 유씨 가문의 아이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정수미의 양녀만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당장이라도 윤소현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윤소현의 수려한 얼굴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그럴 리 없어요, 이지원이 분명 저한테 그랬다고요. 박민정이랑 그 두 아이들 처리해준다고...”윤소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남준은 천천히 윤소현의 앞으로 다가갔다.“말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정말로 이지원이었어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요.”윤소현이 다시 대답했다.유남준은 바닥나버린 인내심에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윤소현은 다시 어둠과 침묵 속에 갇혀 버렸다.“남준 씨, 얼른 저 내보내 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제발 나 좀 꺼내달라니까!”그제야 윤소현은 자신이 유남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밖으로 나온 유남준은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찍혀있었지만 그중 일부는 정수미에게서 온 것들이었고, 다른 몇 통은 고영란에게서 온 것이었다.그는 제일 먼저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시죠?”“유 대표, 민정이 소식은 있나요?”정수미가 조심스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직 없습니다.”유남준이 대답했다.정수미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더욱 절망스러워졌다.“그럼... 소현이는 어떻게 됐나요?”윤소현은 어릴 때부터 정수미가 직접 지켜봐 왔던 아이였고, 그 아이와 깊은 정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현재 임신 중이었다.“소현 씨도 아무 일 없습니다.”“그럼, 소현이 좀 풀어줄 수 있을까요? 내가 직접 물어볼게요.”정수미가 다시 물었다.정수미는 어렸을 때부터 온갖 호사만 누리며 살아온 윤소현이 그런 감금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수미 본인 역시 윤소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엄마...”이지원은 떠보듯 정수미를 부르고는 말을 이었다.“엄마, 언니가 사라졌어요.”그녀는 박민정의 일부터 처리한 후 윤소현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도무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정수미는 멍한 표정으로 뒤돌아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뭐?”“소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저도 모르겠어요. 오늘 언니랑 같이 산부인과 검진 가려고 했는데, 어딜 갔는지 갑자기 사라졌어요.‘이지원이 대답했다.정수미는 멍한 표정으로 이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상황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유남준이 사람들을 데리고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윤소현은 제가 가둬놨습니다.”유남준이 말했다.정수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현이는 왜 가둔 거죠?”“민정이의 실종은 분명 윤소현이랑 관련이 있으니까요.”유남준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이지원에게로 옮기며 말했다.“윤소현이 그러더라, 이지원 네가 내 아이들 데리고 갔다고. 민정이는 아이들 찾으러 간 거라고 하던데, 어디로 데려간 거야?”그 말에 이지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준 오빠?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저랑 민정 언니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하지만 유남준이 그녀의 말을 믿어줄 리 없었다.곧바로 몇 명의 경호원이 다가와 이지원을 제압했다.“끌고 가!”이지원은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유남준의 수법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그녀가 스스로 이곳에 등장한 것도 전부 유남우 때문이었다. 그가 이지원에게 직접 유남준을 찾아가 박민정의 실종이 자신과는 관련 없다는 사실을 어필하라고 조언해주었기 때문이었다.“오해예요, 오빠. 소현 언니가 왜 그런 얘길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민정 씨 아이들 데리고 간 적 없어요.”뒤이어 그녀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정수미를 바라보았다.“엄마, 엄마.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 그동안 집에만 있었고, 어디 간 적도 없어요.”하지만 정수미는
정수미는 그 질문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대답했다.“유 대표는 이미 내가 민정이 친엄마라는 걸 알고 있었죠?”유남준은 그 말에도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되물었다.“그런데 대표님은 제 말 안 믿었잖아요.”정수미는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다 내가 어리석었어요, 내 잘못이에요... 저도 너무 후회 중이에요.”그동안 윤소현이 늘 박민정에 대해 안 좋은 얘기만 늘어놨던 탓에 정수미는 박민정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못했다.그 탓에 정수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박민정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줘버렸다.박민정이 자신을 찾아왔던 그때도, 정수미는 그녀를 가차 없이 비웃고 쫓아내 버렸다.“지금 민정이 어디 있어요? 찾았어요?”눈시울이 붉어진 정수미가 다시 물었다.유남준은 폐허로 시선을 돌리며 자신의 손에 꽉 쥐고 있던 반지를 보여주었다.“마지막으로 추적된 곳이 여기인데, 방금 민정이 반지를 찾았어요.”그가 낮게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정수미는 몸을 휘청이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기색을 보였다.놀란 비서가 다급히 정수미를 부축해 주었다.“대표님.”“얼른, 얼른 주변 수색해!”정수미가 지시했다.“알겠습니다.”비서는 곧바로 인력을 충원해 폐허 속에 남았을지도 모를 박민정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밤이 깊도록 폐허 속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박민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저 박민정과 관련된 물건만 몇 가지 발견되었을 뿐이었다.비서는 멍하니 서 있는 정수미의 곁에 서서 슬쩍 말을 꺼내 보았다.“아가씨 말이에요,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그 말에 정신을 차린 정수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비서를 올려 보았다.“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대로 봐야 할 것이고, 죽었다면 죽은 대로 시체를 봐야만 했다.정수미는 박민정이 이렇게 실종됐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민정이 여기 없는 거 확실해. 다른 데서 계속 찾아봐.”“네.”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유남준도 폐허
“뭐라고요?”정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실종됐다는 거예요?”“저도 잘은 몰라요.”설인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아무튼 벌써 이틀이에요. 이틀 동안 찾아 헤매는 중인데 도통 안 보이네요.”그 말을 들은 정수미가 몸을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그런 그녀를 비서가 붙잡아 주었다.“조심하세요, 대표님.”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정수미는 비서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겨우 찾았는데 실종이라니?”“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누가 데려갔는지는 알아냈으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비서가 애써 정수미를 위로했다.“그래, 얼른 사람 보내서 민정이 좀 찾아내.”정수미가 말했다.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박민정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박민정을 찾아낼 것이다.“알겠습니다.”정씨 가문에서도 사람들을 시켜 전국적으로 박민정을 수색하기 시작했다.힘없이 자리를 뜨는 정수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설인하는 의아했다. 정수미가 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민정 씨, 제발 빨리 좀 돌아와요.”설인하가 혼자 중얼거렸다....한편, 유남준은 거의 진주 시내 전체를 뒤집다시피 했지만 박민정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유남준은 주변 지역에까지 사람을 보내 수색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그렇게 마침내, 단서를 발견했다.유남준은 즉시 차를 몰고 그곳으로 향했다.그리고 정수미는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 역시 박민정을 찾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결국, 두 세력이 힘을 합쳐 공동으로 박민정을 수색하기로 했다.그렇게 수색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사람들은 곧장 단서가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도착했을 때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오직 불에 다 타버린 집뿐이었다.차에서 내린 유남준은 망설임 없이 까맣게 불타버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민정아!
그녀가 쥔 친자 확인 감정서에는 두 사람이 모녀 관계라고 적혀 있었다.비서는 다른 병원에서도 받아온 서류들을 건네며 말했다.“이번엔 틀림없습니다, 대표님. 박민정 씨는 대표님의 친딸이 확실합니다. 지난번엔 저희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친자 확인 감정서를 쥔 정수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어떻게... 그 걔가 어떻게 내 딸이야?”박민정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수미는 너무 갑작스러운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그녀 역시 자신이 친딸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 짓들이 얼마나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제 어떡해야 하지?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어떻게 날 이런 식으로 갖고 놀아?”정수미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친자 확인 감정서를 손에 꼭 쥐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만큼 괴로웠다.“내가, 내가 그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라는 작자가 딸한테 오히려 모욕감만 잔뜩 줬으니...”정수미의 마음은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오랫동안 찾고 있던 딸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살아왔다.더군다나 친딸을 괴롭히는 자신의 양딸을 그렇게나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했다.비서 역시 이런 운명의 장난에 착잡함을 느끼고 있었다.“대표님께서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잖아요. 조금 더 일찍 아셨더라면 민정 씨를 해치지 않으셨을 겁니다.”정수미는 비서의 위로에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책을 멈추지 않았다.“그 아이가 날 찾아왔을 때도 난 상처만 잔뜩 줘버렸어. 얼마나 아팠을까.”오랜 세월 동안 눈물이라는 것을 거의 흘려보지 않았던 정수미였지만 하늘의 장난과도 같은 이 상황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난 정말 나쁜 년이야! 어떻게 친딸한테 그럴 수가 있어!”만약 이 세상에 후회 약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전 재산을 내걸고서라도 얻고 싶을 지경이었다.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가 정신 차리라며 자신의 뺨을 수차례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