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얼떨떨해졌다.“무슨 말이에요, 그게?”“시치미 떼지 마. 남우 씨가 사석에서 왜 너를 민정이라고 불러?” 윤소현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박민정은 유남우와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윤소현은 그렇게 단순한 사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너 솔직히 말해. 나한테서 남우 씨 뺏으려는 거 아니야? 유남준이 이젠 별 볼 일 없으니까 타깃을 유남우로 바꾸려는 거 아니냐고?!”다짜고짜 무슨 생트집인 건지, 박민정은 그녀를 상대하기도 귀찮았다.“전 이미 남준 씨랑 결혼 했는데, 유남우 씨를 왜 뺏어요?”“내가 모를 줄 알아? 너 유남준이랑 계속 이혼하겠다고 난리잖아!”유남우가 침대에서 그녀와 뜨거운 스킨십을 나누며 박민정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만 생각하면 윤소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누구도 감히 내 남자를 못 뺏어가. 네가 한수민 딸이라고 해도 말이야! 너 딱 기다려.”그녀는 으름장을 놓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화가 잔뜩 난 채 떠나버렸다.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과거에 있은 일은 진작에 내려놓았고, 유남우와 함께 있을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다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박민정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은정숙과 윤우만 신림현에 남겨 두고 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러자 유남준도 짐 정리를 도와주었다.“동생이 갓 약혼했는데, 남준 씨는 여기 좀 더 있을래요?”“아니야, 너랑 같이 돌아갈 거야.”“그래요, 그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짐을 꾸리고 그다음 날 아침에 바로 고영란과 작별하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자 한창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호텔 대문을 나가는데 기사가 갑자기 차를 멈춰 세웠다. 차창을 내리고 밖을 내다보니 유남우가 눈보라 속에 외로이 서 있었다.그는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와 자루 하나를 내밀었다.“뭐예요, 이건?”박민정이 궁금하여 묻자 유남우가 온화한 말투로 대답했다.“약혼식 답례품이야.”박민정은
박민정이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남우는 돌아가는 길에 윤소현이 화가 난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유남우는 어젯밤 일을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나빴다.그는 느릿느릿 다가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한테 할 말 없어요?”윤소현은 아직 주제 파악을 못 해서 유씨 집안에서 공주처럼 사랑을 받을 줄만 알고 있었다.“무슨 말?”유남우는 반문했다.윤소현은 울먹이면서 말했다.“우리는 약혼했고 저는 당신의 약혼녀인데 왜 당신을 만지면 안 되나요?”윤소현은 체면을 지키려 일부러 유남우와 박민정의 일은 묻지 않았다.유남우가 박민정을 좋아한다는 일을 입 밖에 내는 것 자체가 자신이 쪽팔린 것이라고 생각했다.“말했잖아, 결혼하고 나서.”유남우의 말 속에는 부드러움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윤소현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너무 보수적인 거 아니에요?”유남우가 윤소현에게 싫증이 난 나머지 짜증까지 내려고 할 때 비서 홍주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전화를 받고 나서 그는 윤소현한테 한마디로 위로했다.“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돌아오면 말하자.”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투정을 더 부릴 수 없었다.“그럼 먼저 집에 갈게요.”“응.”윤소현은 원래 유 씨네 집으로 이사 와서 살고 싶었는데 유남우는 그가 사는 곳은 아직 인테리어 중이라 새집 인테리어가 끝나면 다시 이사하라고 했다.유남우는 윤소현이 차에 타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야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사실 홍주영은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었다.그는 전화를 걸었다...한 시간 후.윤소현은 기절한 채 어두컴컴한 방에 놓여있었다. 남자 몇 명이 그녀를 둘러싸 서 있었고 그 사이에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방 밖에는 은회색 자동차 안에 유남우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옆에 있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째 도련님, 이러시면 안 좋지 않을까요?”윤소현은 어쨌든 명목상으로 유남우의 약혼녀이니, 만약 이 사람들이 정말 그녀를 윤간한다면 나중에 둘째 도련님이 모조리 죽여버릴지도 모른다.유남우는
유남우는 말을 마치고 입구를 향해 경호원들더러 들어오라고 했고 경호원들은 윤소현을 안고 떠났다.윤소현은 유남우더러 같이 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그런 사람들한테 당한 일을 생각하면 면목이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했다.유남우는 묵묵히 그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외투를 벗어 손을 닦고 휴지통에 버려버렸다.반대편.진주시는 흰 눈이 내렸고 강물은 모두 두꺼운 얼음으로 뒤뎦였다. 박민정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차 안의 열기로 인해 유리창에 옅은 안개가 껴서 밖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박민정은 시선을 거두고 선물을 들춰보며 안쪽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았다.그녀는 정교한 포장이 된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내어 열었는데 그 안의 물건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자 안에는 아름다운 은반지가 들어 있는데 이 반지에는 박민정이 어릴 적 직접 새긴 두 사람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원래 이 반지는 한 쌍이었다. 박민정과 유남우 두사람 것이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시집갈 때 그에게 반지가 어디 있는지 물었었다. 당시 그는 무슨 반지냐고 되물었다그때, 박민정은 그가 반지를 잃어버린 줄만 알았다.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자세히 물어봤다면 사람을 잘못 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박민정의 반지에 새겨진 글자를 보면:PMJ&UNJ이 반지의 약자도 틀렸다, 유남준 것이었다.박민정은 반지를 꽉 쥐었더니 손바닥에 쏙 들어갔고 마음속으로 갈수록 사람을 못 알아봤다는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휴대폰을 꺼내 유남우에게 답장했다.“네.”그리고 다시 타이핑 했다. “선물 받았는데 정말 미안해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앞으로 우리는 여전히 친구입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줘요.”박민정은 유남우가 자기에게 반지를 다 돌려준 걸 보니 과거를 잊으려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곧 답장이 왔다.“네.”박민정은 다시 휴대폰을 껐다.유남준은 박민정이 말하고 싶다면, 스스로 자신에게 알려줄 게 분명해 굳이 묻지 않았다.한참 동안
두 사람이 차에 앉아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날이 어두워져야 부하들이 반지를 훔치기 쉬웠다.박민정은 돌아가면서 선물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은정숙의 방으로 가서 간병인을 쉬게 했다.이전에 전문가의 진단과 치료를 받은 후 은정숙의 정신이 많이 좋아졌다. 만약 계속 이대로라면 몇 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이다.그들은 누군가가 몰래 들어온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반지가 들어 있는 상자가 유남준에게로 옮겨졌다.서다희가 열어보니 반지는 굉장히 싸보였다.“이렇게 싸다니, 둘째 도련님이 줬을 리가 없잖아요?”유남준은 유남우가 이런 물건을 선물 해 주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다른 건 없니?”서다희가 자세히 살펴보니 반지 안쪽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약자인 PMJ&UNJ 은 박민정과 대표님의 이니셜 아닌가요?”서다희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부인께서 주신 서프라이즈 아니죠? 싸지만 성의가 보이네요. 삐뚤삐뚤한 글씨를 보니 직접 새긴 것 같아요.. 사모님이 대표님을 아주 좋아하신다니까. 사모님의 마음속에는 항상 대표님이 있는 것 같아요. 제 여자 친구도 저한테 수제품을 준 적이 없어요.”서다희는 말하느라 유남준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유남준이 영상 앞부분을 서다희에게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다희는 유남우가 박민정에게 물건을 준 건지 몰랐다.유남준은 그 반지를 가지고 잠시 생각해 보니 유일하게 말이 되는 것은 이 반지가 박민정이 유남우에게 준 것이라는 것이었다.왜냐하면 박민정은 늘 유남우를 유남준이라고 불렀다!“대표님, 끼워드릴까요? 부인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대표님도 서프라이즈 하나 준비하세요.”“그만해.”유남준은 서다희의 말을 끊었다. “꺼져.”서다희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자기가 어느 포인트에서 대표님을 건드렸는지 전혀 몰랐다.“네.”그는 어쩔 수 없이 이곳을 떠나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갔다.서다희가 간 뒤 유남준은 그 반지를 주먹 안으로 꽉 움켜쥐었다.하필이면 이때 전화
유남준은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서 모른 척하고 선물 가방을 내려놓았다.박민정은 의심쩍게 물었다.“내 물건 가지고 뭐 하는 거예요?”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봉지 안을 살펴보니 상자가 있었다.“보셨어요?”박민정이 또 묻는다.유남준은 그 자리에 서서 말했다.“아니, 안 봤어.”박민정은 믿지 않았다. 그가 분명 들고 있었고, 밖에까지 들고 갔으니 안 봤을 리가.“그럼 뭐가 들었는지 알고 싶어요?”박민정은 일부러 그를 떠봤다.유남준은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아니요.”박민정은 화도 안 나서 선물을 바로 풀었다.“당신 동생이 준 선물은 꽤 귀중해요. 금목걸이를 제가 받을 건데 괜찮겠어요?”유남준은 묵묵히 그녀가 고의로 자신을 속이는 것을 듣고 있었지만 그저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었다.유남준은 박민정한테 질투가 가득 했지만 입으로는 마지못해 “응.”이라고 대답했다.박민정은 그의 모습을 보니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했다.자기 물건을 몰래 보고도 인정하지 않으니 박민정은 그의 앞에서 버리지 않고 일부러 방으로 가져갔다.유남준은 거실에 혼자 있으니 안색이 더 나빠졌다.박민정은 아래층으로 내려갔지만 그는 소파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일부러 그를 무시하고 사과를 깎아 먹었다.“먹을래요?”“아니.”박민정은 그의 도도한 모습에 설명하기도 귀찮았다.“늦어서 먼저 자러 가요.”그녀가 일어서서 두 걸음도 채 가지 않았을 때, 유남준이 팔을 들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박민정은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품에 기댔다. 입술은 그의 목덜미에 닿았고 두 손은 실수로 그의 허벅지에 닿았다.유남준은 숨을 쉬고 나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민정아, 오늘 밤 우리 같이 잘래?”박민정은 귀가 빨개지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아니요.”그녀는 일어나려고 하다가 실수로 유남준의 다리 사이에 손을 닿았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피했다.유남준은 그녀의 작은 손을 덥석 잡았다.“건드리지 않고 꼭 안고 잘게.”박민정이 처녀도 아닌데 어
유남준은 이지원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해명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기억을 잃은 척하고 있어 말하지 못했다.“아니.”유남준은 눈을 감았다.“자.”박민정은 그의 품에서 좀 나와서 불편하게 잠을 청했다.내일 그녀는 병원에 가서 임신 검사를 해야 하니 오늘은 푹 쉬어야 했다.......진주시 병원.윤소현은 병실에 누워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녀의 아버지 윤세권은 이미 사람을 보내 그의 딸에게 이런 짓을 한 게 누구인지 조사했지만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 한동안 누가 그랬는지 알아내기가 어려웠다.한수민은 원래 약혼연회 일 때문에 화가 나 있었는데 그녀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그녀를 보러 왔다. “소현아,괜찮아?”윤소현은 툴툴 맞게 대답했다.“보면 몰라요?”윤소현은 예전에는 한수민의 체면을 세워주고 싶었다. 어쨌든 한수민은 아버지에게 시집온 지 5년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딸 박민정이 몰래 유남우를 꼬신 것을 생각하면 윤소현은 한수민에게 태도가 좋지 못했다.한수민은 윤소현의 짜증 나는 말투에도 화내지 않고 안쓰러워 이불을 덮어주었다.“미안해, 화내지 마, 다 잘될 거야.”윤소현 앞에서는 한수민은 진짜 어머니 같았다.윤소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엄마인 척하지 마세요. 무슨 의도가 있으신 것 같은데, 약혼 파티에서 제가 당신에게 말할 기회를 안 줘서 그러는 거에요? 그 일 때문에 제가 미워서 친딸 박민정에게 제 자리를 꿰차고 유남우를 꼬시라고 한 거예요?”윤소현의 말에 한수민은 순간 멍해졌다가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렸다.“소현아,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어떻게 민정이한테 유남우를 꼬시라고 할 수 있겠어?”윤소현은 한수민이 모두 연기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유남우와 박민정은 이미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고 말했고, 박민정은 또 몰래 유남우를 꼬셨다고 말했다.한수민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꽉 쥐었다.“나는 정말 민정이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 남자를 꼬실꺼라곤
윤소현은 이제야 왜 아빠가 한수민과 결혼했는지 알았다. 새엄마가 친엄마보다 자기한테 더 신경 써주었다.처음에는 한수민 단지 그녀의 비위를 맞추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정수미는 올해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왜 딸 하나밖에 없는지 이유도 알았다.윤소현은 쓰레기통 속 파편을 보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화장실 변기에 던져버렸다.“나는 사업가 정수미의 딸이지, 딴따라의 딸이 아니야.”정수미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한수민은 그저 가정주부였고 정수미만이 자기의 엄마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윤소현은 한수민을 다시 불러들여 가짜웃음을 장착하고 말했다.“엄마, 알겠어요. 앞으로 제가 꼭 효도할 거예요.”한수민은 이 말을 듣고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그 말을 들으니 엄마가 기쁘구나.”“근데 이 일은 우리가 사적으로만 알고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아 줄래요?”한수민은 의문스러웠다.“왜?”“정수미는 아이가 저 뿐인데 죽으면 기업을 다 저한테 맡기겠다고 했어요. 지금 진실을 알게 되면 기업을 저한테 물려주시지 않을 거예요.”윤소현이 내뱉는 말들은 모두 도리가 있었다.한수민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애초에 윤소현을 낳고 윤세권에게 건네준 후 윤세권은 정수미에게 이 아이가 주운 아이이고 아이의 친부모를 모른다고 해서야 정수미가 키우기로 한 것이었다.“그래.”......다음날 박민정은 임신검사를 받으러 갔다. 유남준도 굳이 같이 가자고 했다.“출근 안 해도 돼요?”“휴가 냈어.”유남준이 대답했다.“하루가 멀다 하고 휴가를 내면 대표님이 내버려둬요?”박민정은 점점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있었다.“우리는 자선사업이어서 대표님 월급도 많지 않은 데다 나처럼 눈이 보이지 않고 업무 능력은 뛰어난 사람은 드물어.”유남준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박민정은 이전에도 유남준의 일을 본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집중력이 훨씬 더 필요했다.기본적으로 같은 일을 하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보
박윤우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도 시치미를 뗐다.“죽다니요. 저희 아빠는 죽지 않아요. 아저씨는 나쁜 사람.”유남준은 꼬마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눈앞의 이 아이는 그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도 짜증이 났다.“울지 마.”“싫어요.”박윤우는 계속 거짓 울음을 터뜨리며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유남준은 박윤우가 가짜로 운다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이따가 박민정이 검사하고 나와서 보면 자기한테 화낼까 봐 무서웠다.“네 아버지는 죽지 않았어.”“그런데 왜 우리 아버지를 저주했어요!! 흑흑흑!!”박윤우는 더 크게 울었다.유남준은 머리가 아팠다.“울지 마, 농담이야.”박윤우는 자신을 달래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나서야 엄마의 건강검진 시간이 끝나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보아하니 지금 이 아저씨가 엄마를 많이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이걸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어른이신데 왜 이런 농담을 치는 거요? 흑흑흑,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흑흑, 엄마랑 에스토니아로 돌아가 아빠 장례를 치뤄줄거야...”유남준은 어린아이가 이렇게 진지할 줄은 몰랐다, 만약 박민정이 알면 큰일 났다.그는 미간을 찌푸렸다.“농담이야, 어떻게 하면 안 울래?”“선생님이 잘못했으면 사과하라고 하셔서요.”박윤우는 쓰레기 아빠가 어떻게 사과했는지 보고 싶었다.유남준은 평생 박민정에게 사과한 것 외에는 다른 사람에게 사과하지 않았다.이 꼬마가 박민정 다른 남자의 아이이고 자기 몸에 오줌을 쌌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더욱 그에게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유남준이 계속 사과하지 않자 박윤우는 더 크게 울었다.“흑흑흑,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난 이제 아빠 없는 아이야, 우리 아빠...”그의 울음소리에 밖에 있는 간호사들이 다가왔다.“윤우야, 아버지가 왜요?”유남준이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 줄도 몰랐다.“아버지는 잘 계세요.”유남준은 간호사가 차가운 시선에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괜찮으면 됐어요.”간호사가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그제야 홍주영은 지금이 근무 시간이라는 걸 떠올렸다.그녀는 급히 하민재에게 배달 음식을 하나 시켜주고는 약간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나 회사에 잠깐 다녀와야 해요.”하민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날 병원에 혼자 두고 가는 거예요? 의사 말로는, 지금 상태면 최소 이틀은 입원해서 경과를 봐야 한다던데. 혹시라도 내부 장기에 손상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요...”그 말에 홍주영은 잠시 망설였다.“퇴근하자마자 바로 올게요.”“근데 밥은요? 씻는 건요? 누가 도와줘요?”하민재가 묻자 홍주영은 곧 결심한 듯 말했다.“회사 가서 이틀 휴가 내고 올게요. 병간호는 내가 해줄게요.”그제야 하민재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근데 유남우 대표는 뭐라고 안 할까요?”홍주영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을 거예요. 저 지금껏 한 번도 휴가 낸 적 없으니까요. 게다가 약혼자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당연히 내가 돌봐야지요.”그녀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이번엔 꼭 하민재 곁을 지켜야겠다고.두 사람은 약혼한 사이였고 앞으로는 가족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될 사람이었으니까.“주영 씨는 정말 착하네요.”하민재가 진심을 담아 말하자 홍주영은 괜히 얼굴이 붉어져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됐어요. 아까 시킨 음식 곧 도착할 테니까 받아서 먹고 있어요. 나 회사 잠깐 다녀올게요.”“네!”하민재는 고개를 연달아 끄덕였다.하지만 그녀가 병실을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민재의 얼굴에 번지던 웃음은 천천히 사라졌다.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그는 화면을 확인한 뒤 메시지를 눌러 열었는데 부하 직원에게서 온 보고였다.[이번 일, 유남우 씨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고를 낸 택시 운전사가 과거에 유남우 씨와 자주 연락했던 기록이 있습니다.]유남우...하민재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리듯 천천히 되뇌었다. 처음 사고가 났을 땐 연씨 집안 사람들 쪽에서 자신을 노린 줄 알았다. 설마 유남우일 줄이야.도
박민정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홍 비서님?”홍주영이 급히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도련님이 거절하신 거예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홍주영은 믿기지 않는 듯 얼굴이 굳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아이가 도련님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사람은 겉만 봐선 모르죠.”박민정이 담담하게 말하자 홍주영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도련님께 무슨 사정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민정 씨, 너무 원망하진 말아요. 제가 가서 말씀드릴게요. 꼭 연서 씨가 다혜를 입양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볼게요.”유다혜라는 아이는 홍주영도 자주 보아온 터였다.그렇게 사랑스럽고 그렇게 착한 아이가 고아로 살아가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그래 준다면 너무 고맙죠.” 박민정이 말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용히 덧붙였다.“그치만 남우 오빠가 딱히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진 않아요. 홍 비서님, 한 가지만 조심하세요. 그 사람한테 속지 마세요.”홍주영의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스쳤는데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도련님이 좀 집착이 강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예전엔 박민정도 그렇게 생각했다.홍주영이 더 뭔가 말하려던 찰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아들고 화면을 확인하니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는 약간 의아해하면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무슨 일이죠?”“홍주영 씨 되시죠? 약혼자분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병원으로 빠르게 와주십시오.”교통사고?홍주영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네, 네. 지금 바로 갈게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박민정을 돌아보며 말했다.“민정 씨,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가볼게요.”그 말을 마친 뒤, 홍주영은 급히 병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하민재가 왜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 걸까?병원에 도착했을 때쯤, 하민재는 이미 일반 병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의사는 다행히도 외상 정도만 입은 것 같다고
“형, 민정아.”유남우가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두 사람을 향해 불렀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동시에 돌아보았다.유남준은 짧게 대답한 뒤, 고개를 돌려 박민정에게 조용히 말했다.“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난 여기 있을게.”“네.”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자에서 걸어 나왔다.유남우가 우산을 들어 그녀 위에 씌워주었다.“고마워요.” 박민정은 공손하게 인사하며 살짝 몸을 뒤로 물러섰다.그녀의 그런 작은 움직임까지 유남우는 다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망설임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연서 씨는 제 오랜 친구예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다혜를 정말 진심으로 입양하고 싶어 해요. 다혜가 그 친구랑 함께 지낼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박민정의 다급한 말투에 유남우는 손에 쥔 우산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우리, 이곳에 온 것도 참 오랜만이지?”박민정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요즘 따라 자꾸 어린 시절 꿈을 꿔. 다시 돌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유남우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예요. 난 오늘 다혜 얘기를 하러 온 거지, 어린 시절 이야기하러 온 게 아니에요.”박민정이 단호하게 선을 긋자 유남우는 말을 멈췄다.“...다혜는 내 딸이야. 남에게 맡길 수 없어.”박민정은 손을 꽉 쥐었다.“알아요. 다혜는 오빠랑 혈연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빠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요.”조 비서가 가끔 유다혜를 보러 병원에 간다고 했다. 간호사들 말로는 유남우는 거의 병원에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다혜는 아버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유남우는 그 말에 짧게 웃었다.“다혜랑 혈연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지?”박민정은 그의 부드럽고 단정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굳이 콕 집어 말할 필요 없잖아요. 서로 다칠라.”그녀는 끝까지 윤소현이 다혜를 어떻게 임신했는지는 입 밖
호숫가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먼저 도착해 작은 정자를 하나 찾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던 유남준이 입을 열었다.“예전에 너랑 여기 같이 온 적 있어.”“네?” 박민정은 잠깐 멍해졌다.“나랑 여길 같이 왔다고요?”“잊었어?”유남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를 바라봤는데 어딘가 씁쓸한 표정이었다.박민정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마 잊은 게 아니라 헷갈렸던 것일지도 모른다고.유남준과 유남우는 너무도 닮았다. 어쩌면 그때 자신조차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그런 그녀의 눈치를 읽은 듯 유남준이 슬며시 웃었다.“그때 말이야, 네가 반 친구한테 맞고 울면서 오다가 나를 딱 마주쳤지. 네가 내 품에 안겨선 자초지종을 다 말하더라.”“내가 그놈 혼쭐을 내주고 결국 전학까지 시켰잖아.”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그게 남준 씨였네요.”어쩐지 그날따라 유남준이 조금 낯설다고 느꼈던 게 기억났다. 평소엔 늘 다정한 그였는데 그날은 거칠게 이렇게 말했다.“울긴 왜 울어, 한심하게. 맞았으면 맞은 만큼 되갚아야지!”그땐 그저 기분이 안 좋았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사람이 바뀌어 있었던 거다. 그날 자신은 억지로 유남준을 끌고 이곳까지 왔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 나무에 기대 서 있었고 울고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질색하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또 울면 나 간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추운 바람이나 쐬고 있고 싶진 않거든.”그 말에 박민정은 와락 울음을 터뜨렸지만 유남준은 끝내 떠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밤이 깊도록 그녀 곁을 지켜주고 집까지 바래다주었으니까.과거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박민정은 다시 유남준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가만 보면 네가 처음 좋아한 사람이 꼭 유남우였다고는 말 못 하겠는데.”유남준은 질투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설마 두 사람 다 좋아한 거야? 자기도 모르게? 그럼 이건 이중 플레이야, 양다리라고.”박민정은 피식 웃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