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정숙은 박민정에게 요즘 몸이 많이 좋아졌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박민정은 이번엔 윤우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곳에 있던 간호사는 아이가 잠들었다고 말했다.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자 막 연결된 화면 너머 박민정은 화려하게 꾸며진 아이 방을 보았다.“예찬아?”박예찬은 꼬마 어른처럼 반듯한 정장을 입고 카메라 앞에 나타났다.“엄마, 미안해요. 아까 너무 바빴어요.”“지금 하랑 이모 집에 있어?” 박민정이 묻자 박예찬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이렇게 덧붙였다.“정확히 말하면 하랑 이모 아빠가 저한테 집을 선물해 줬어요.”조석천은 예찬이를 유난히 좋아해서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이제는 아이와 체스를 두는 재미에 푹 빠진 터라 예찬이가 박민정과 통화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석천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예찬아, 누구랑 통화하는 거니? 얼른 와서 할아버지랑 체스 두자.”솔직히 요즘 너무 바빴다.조석천은 그와 체스를 두고 책을 보는 것도 모자라 다른 어르신, 사모님들이 모인 곳에 데려가서 자랑을 하곤 했다.박예찬은 컴퓨터를 닫고 거실로 갔다.조석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턱을 치켜들고 이미 지고 있는 장기를 바라보았다.“예찬아, 너 할아버지한테 거짓말한 거 아니지? 듣기로 요즘 휴대폰으로 체스를 둘 수 있다고 들었는데, 휴대폰으로 나와 체스를 둔 거니?”박예찬과 벌써 열 판을 두었지만 그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네 살도 안 된 어린아이에게 졌다는 것은 정말 창피한 일이었다.“할아버지, 그래도 납득이 안 되시면 다시 한번 해요. 제 몸을 수색하셔도 됩니다.”박예찬은 사실 할아버지에게 양보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워낙 예리해서 자신이 일부러 봐주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체스를 두는 기사는 그래도 어느 정도 경기 정신이 있어야 했다.조석천은 손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기가 사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휴대폰 하나 들어갈 자리 없었고 체스를 빨리 두는 탓에 커닝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분명
조하랑은 조석천과 김훈이 단 몇 마디로 자신의 인생 대사를 결정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이제 거절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미리 말하는데 예찬이는 그 사람 아들이 아니에요. 그때 가서 쫓아내도 날 원망하지 마세요.”“쓸데없는 소리. 내일 예쁜 옷이나 사 입고 이만 가 봐. 나랑 예찬이 체스 두는 거 방해하지 말고.”조석천은 딸은 내다 버려도 그만이지만 똑똑한 손자를 제대로 키우고 싶었다.조하랑은 얼굴이 잿빛이 된 채 자리를 떠났다. 박민정이 이 사실을 모를까 봐 박민정에게 따로 전화를 걸어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유성혁의 사건으로 박민정은 더는 일을 도우러 가지 않았고 고영란도 뭐라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집안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이었으니까.유성혁은 여전히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실수로 강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박민정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유남준에게 물었다.“이제 김인우 씨 기억나요?”유남준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했다.“잘 기억이 안 나.”“기억나면 나는 거고, 안 나면 안 나는 거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건 무슨 말이죠?” 박민정은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보기엔 김인우 씨는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온 마음을 다하는 조하랑이 감정 기복이 심하고 배은망덕한 김인우를 만나면 손해 볼 게 분명했다.“응, 내 생각도 그래.”유남준은 곧바로 거들었다.멀리 김씨 저택에 있던 김인우가 재채기를 했다.그래도 김인우의 친구인 유남준이 자신의 말에 동조할 줄 몰랐던 박민정이 계속해서 말했다.“그럼 하랑이를 괴롭히면 어떡해요?”유남준은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조하랑은 박민정의 친구인데 김인우가 괴롭히게 놔둘 그가 아니었다.“왜 그럴 일이 없어요? 그 사람 잘 알아요? 아까는 기억 안 난다면서요?”말문이 막힌 유남준이 곧바로 둘러댔다.“느낌이 그래.”늘 실질적인 능력으로 일을 처리하던 유씨 가문의 책임자가 이제는 직감에 의존하기
유명진은 박민정처럼 참한 여자가 자기 집안으로 시집온 게 안타까웠다.하지만 집안일에 끼어들기 싫어하는 그였기에 유남준과 고영란은 집안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이제부터 남준이랑 둘이 잘 지내.”말재주가 없었던 유명진은 진심을 담아 말했고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유명진이 간 뒤 박민정의 친엄마 한수민과 남동생 박민호가 미리 도착했다.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두 번째 남편 윤석후의 팔짱을 낀 한수민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오늘 딸이 약혼한다는 말을 전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약혼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한수민은 다른 사람들의 축하 속에도 이렇게 조롱했다. “유씨 가문과 결혼하는 건 우리에겐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데 민정이가 감당할지 모르겠네요. 감당하지 못하면 이혼하겠죠?”그런데 그 말이 예언이 되어 그들이 정말 이혼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어디로 갔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조하랑과 박예찬이 오기를 기다렸다.조하랑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는데, 이상하게도 예찬이는 오지 않았다.“하랑아, 예찬이는 어디 있어?”박민정은 조금 걱정이 되었고 조하랑은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빠가 자랑하려고 데려갔으니까 잠깐은 못 올 것 같아.”남들에게 예찬이를 자랑할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버지를 너무 잘 아는 조하랑이었다.“참, 너희 집 그분은?” 조하랑이 주위를 둘러봤지만 유남준은 보이지 않았다.사실 오늘 이 자리에 그녀는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유씨 가문 같은 막강한 재벌가 앞에서 조씨 가문은 고래 앞의 새우였다.하지만 이제 곧 김인우와 약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덕을 보게 된 것이다.“조하랑 씨 맞죠? 우리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조하랑과 인맥을 쌓으려는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조하랑은 그들을 상대하면서 다소 미안한 듯 박민정을 돌아보았다.박민정이 괜찮다며 가라고 해서야 조하랑은 그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
약혼식이 시작된 후 윤소현은 무대 위에서 가족들한테 감사를 올렸다. 특히 그녀가 엄마 얘기를 꺼낼 때, 한수민의 눈동자는 기대를 품은 채 반짝거렸다.한수민이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박민정은 그녀를 덥석 잡았다.“유씨 집안에서 오늘 윤소현 친엄마, 정수미를 모셨어요.”약혼식 준비를 도왔으므로 진행 순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박민정은 나름 호의로 한수민한테 귀띰해 주었다.그 말을 듣자 한수민은 얼굴색을 확 달리하였다.윤소현은 어제 분명히 자신한테 정수미가 오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윤소현의 엄마 신분으로 하객들 앞에 설 거라고 했는데, 설마 윤소현이 자신을 속였을 리가...한수민은 박민정이 거짓을 말한 거라 잠시 생각했지만 이윽고 짧은 머리에 빳빳한 제복 차림을 한 정수미가 식장에 나타나자 할 말을 잃었다. 정수미는 윤소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외모는 훌륭한 편이 아니지만 몸에서 풍기는 세련되고 똑 부러진 분위기는 한수민처럼 맨날 호사만 누리는 사모님한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정수미는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가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는 윤소현의 눈에는 온통 숭배와 긍지로 가득했다.평소 한수민을 대하는 건성건성 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엄마는 정수미가 유일했으니까.“엄마가 올 줄 알았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는 정수미를 와락 끌어안았다.무대 위에서 한창 깊은 모녀 정이 연출되고 있는 그 시각, 하객석에서는 낮은 소리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아까 윤소현이 자기 딸이라고 자랑을 잔뜩 늘어놓은 한수민은 얼굴색이 말이 아니었다.“윤소현 씨의 아버지가 윤석후 아니에요? 그럼 엄마는 한수민 아닌가요?”“맞아요, 아까도 저희한테 자기가 윤소현 엄마라고 했잖아요.”“알긴 뭘 알아. 한수민은 그냥 소현이 계모야. 아빠 체면을 봐서 그냥 엄마라고 부르는 거지, 진짜로 엄마인 줄 알았어?”“그럼 어떡해요? 방금 선물을 다 한수민 씨한테 줬는데. 다시 가져
“무슨 말투가 그래?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누난 우리 박씨 집안 사람 아니야? 너도 윤소현처럼 막강한 친정집이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면 좋잖아.”‘막강한 친정집이 뭐? 뒷받침이 뭐 어쩌고 어째?’박민정은 박민호의 말이 너무 우스워 콧방귀를 꼈다.“아빠가 금방 돌아가셨을 때도 우리 집안 충분히 든든했어. 그때 네가 뭐 하나라도 나한테 도움 된 거 있었어?”애당초 그가 유씨 가문과의 합의를 어기고 자신의 혼수와 예물을 빼돌리는 어리석은 짓을 안 했다면 유남준도 체면이 구겨졌다고 결혼 후에 자신을 아니꼽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유씨 가문에서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니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말문이 막혀버린 박민호는 또 다짜고짜 손찌검부터 하려고 손을 들었다가 며칠 전 김인우가 자신한테 경고했던 일이 생각나 다시 천천히 손을 떨구었다.“어쨌든 우린 혈육이잖아. 집안 재산이 다른 놈한테 넘어간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당연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걱정하지 마. 그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그런데 너랑은 상관없어, 넌 우리 집안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으니까.”어머니의 말만 듣고 몇 대째 일궈낸 가업을 고대로 남한테 가져다 바친 사람은 인간도 아니다.말을 마치고 그녀는 충격에 빠진 박민호를 뒤로 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항상 나약하고 무능하다고만 생각했던 박민정이 이런 말을 하다니...“내가 후계자 될 자격이 없다고? 그럼 누가 있다는 거야? 네가 있어? 웃기네, 여자가 무슨 사업을 한다고...”박민정이 떠나간 후에 박민호는 혼자 중얼거렸다.“큼큼...”그의 뒤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니 김인우와 방성원이었다.준수한 외모에 키까지 훤칠한 두 남자가 같이 서 있으니 위압감이 절로 생겨 박민호는 그들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박씨 집안이 몰락하기 전부터 그는 두 사람의 뒤를 맨날 졸졸 따라다니는 껌딱지였다. 그들과 나란히 설 자격이 되지 못한 그는 꼬붕 노릇이나 해야 했다.“인우 형님
윤소현도 어릴 적에 유남준을 좋아했고 그 후에도 종종 그의 소식에 관심을 가졌다. 그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마저 있었지만 이제 눈이 보이지 않는다니 유남우를 선택한 것이다.지금으로서는 유남우가 그보다 더 훌륭한 조건을 가졌으므로 이제 굳이 과거의 생각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윤소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주버님, 형님, 한잔 올릴게요.”유남준의 편의를 위해 그가 손만 살짝 들어도 잡을 수 있는 곳까지 술잔을 가져갔지만유남준은 술을 받지 않고 오히려 박민정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나랑 안사람은 술을 안 마셔요. 그러니까 다른 손님들한테 가서 권해요.”윤소현은 삽시에 어찌할 바를 몰라 멈칫하며 유남우를 쳐다봤다.유남우는 술잔을 가져와 윤소현한테 넘겨주었다.“형님과 형수님이 안 마시겠다는데 그냥 우리만 마시자.”“네.”윤소현은 대답하고 나서 술을 마셨다.두 예비 신랑, 신부는 원래 가장 친한 친인척과 가까운 지인들한테만 술을 권하면 되었지만 유남우는 웬일로 참석한 모든 하객한테로 찾아가 그들과 일일히 술을 마셨다. 나중에 윤소현이 못 마시겠다고 하자 그녀의 술까지 대신하여 마셨다....피로연이 막바지에 들어섰을 때 박민정은 비로소 예찬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얼굴은 발그스름한 것이, 조석천한테 이끌려 화장까지 한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몸에는 앙증맞은 고가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더군다나 예찬이의 왼손은 조석천이 잡고 있고, 오른손은 김훈이 잡고 있었다. 연회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약혼식 주인공들이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예찬이가 독차지할 뻔하였다.연회에 참석한 하객들은 모두 지위와 신분이 높은 인물들이었고 그중에 유명훈도 있었는데, 그는 김훈이 웬 꼬마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이보게, 김 회장. 이 아이는 누군가?”김훈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으쓱대며 대답했다.“우리 인우네 애야. 내 증손자.”유명훈이 듣고는 얼른 옆에 있는 사람한테 돋보기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안경을 쓰고 다시
유남우와 사귄 이후로 그는 매우 신사적으로 그녀를 지켜주며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약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윤소현은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다른 사람들이 유남우가 아파서 몸이 안 좋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병인지 알지도 못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거니와, 또 하나는 아무리 정혼한 관계라고 하나 그 역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아무래도 오늘 밤엔 둘의 관계를 더 확실히 해야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마침내 방에 도착해 유남우를 침대에 눕힌 후 윤소현은 사용인에게 분부했다.“이제 다들 가보세요.”“네.”사용인들이 모두 떠나자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유남우의 잘생긴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볼 위에 얹었다.“남우 씨...”술을 너무 많이 마신 유남우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눈을 뜰 수가 없었다.윤소현은 조심스럽게 그의 옷을 벗기고 침대에 올라가 그의 곁에 누웠다.다른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자 유남우는 힘겹게 눈을 떴지만, 알코올에 흠뻑 적셔진 탓인지 눈앞이 약간 몽롱하였다.윤소현은 워낙에 박민정과 조금 닮아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유남우는 박민정이 곁에 앉아 있는 줄로 알고 애틋하고 부드러운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남우 씨, 저희 이미 약혼한 사이잖아요. 이제 저를 가져요.”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그가 깨어날 거라고는 생각 못 한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유남우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살짝 움직였다.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윤소현의 두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남우 씨...”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우는 그녀를 힘껏 품에 끌어안으며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늘 부드럽기만 하던 그한테 이렇게 거친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윤소현도 더는 얌전을떨지 않고 능숙하게 자기 옷을 벗으며 적극적으로 그에게 호응했다.만취 상태인 유남우는 그녀와 키스를 나누면서 나지막이 속삭였다.“민정아...”한창 몸이 달아오르려던 찰나, 윤소현은 그 한마디 부름에
박민정은 얼떨떨해졌다.“무슨 말이에요, 그게?”“시치미 떼지 마. 남우 씨가 사석에서 왜 너를 민정이라고 불러?” 윤소현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박민정은 유남우와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윤소현은 그렇게 단순한 사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너 솔직히 말해. 나한테서 남우 씨 뺏으려는 거 아니야? 유남준이 이젠 별 볼 일 없으니까 타깃을 유남우로 바꾸려는 거 아니냐고?!”다짜고짜 무슨 생트집인 건지, 박민정은 그녀를 상대하기도 귀찮았다.“전 이미 남준 씨랑 결혼 했는데, 유남우 씨를 왜 뺏어요?”“내가 모를 줄 알아? 너 유남준이랑 계속 이혼하겠다고 난리잖아!”유남우가 침대에서 그녀와 뜨거운 스킨십을 나누며 박민정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만 생각하면 윤소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누구도 감히 내 남자를 못 뺏어가. 네가 한수민 딸이라고 해도 말이야! 너 딱 기다려.”그녀는 으름장을 놓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화가 잔뜩 난 채 떠나버렸다.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과거에 있은 일은 진작에 내려놓았고, 유남우와 함께 있을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다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박민정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은정숙과 윤우만 신림현에 남겨 두고 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러자 유남준도 짐 정리를 도와주었다.“동생이 갓 약혼했는데, 남준 씨는 여기 좀 더 있을래요?”“아니야, 너랑 같이 돌아갈 거야.”“그래요, 그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짐을 꾸리고 그다음 날 아침에 바로 고영란과 작별하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자 한창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호텔 대문을 나가는데 기사가 갑자기 차를 멈춰 세웠다. 차창을 내리고 밖을 내다보니 유남우가 눈보라 속에 외로이 서 있었다.그는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와 자루 하나를 내밀었다.“뭐예요, 이건?”박민정이 궁금하여 묻자 유남우가 온화한 말투로 대답했다.“약혼식 답례품이야.”박민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