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우가 말을 하려는데 유남준이 곧장 옆을 스쳐 지나갔다.그는 곧바로 방금 전까지 남아 있던 도우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성혁 도련님께서 술에 취해 큰 사모님을 추행했는데, 도련님이 강물에 던져버렸어요.”박민정을 추행했다고?유남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아무도 안 말렸어요?”도우미는 고개를 저으며 온화한 유남우를 향해 말했다.“아무도 감히 말리지 못하고 다들 겁에 질려 있었어요.”“소현이는요?”도우미는 머리를 긁적였다. “못 봤나 보네요.”유남우는 단번에 깨달았다. 못 봤을 리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애초에 윤소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약간의 혐오감까지 생겼다.두 사람이 계획하고 있던 약혼 파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못 본 척한다고?...박민정은 유남준을 따라 두 사람이 머물던 곳으로 돌아왔다.유남준은 아직 그녀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는 걸 알고 계속 그녀를 안아주었다.“앞으로는 그런 곳에 가지 말고 집에 있어.”박민정은 조금 진정이 됐는지 이렇게 답했다.“고마워요.”오늘 유남준이 오지 않았다면 유성혁은 어쩌면 더 심한 짓을 했을 것이다.유남준은 그녀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우린 부부라는 걸 기억해. 네 남편으로서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지난번 유남준이 누군가를 시켜서 자신을 미행하고 촬영한 것을 용서하기로 했다.“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말해줘요. 그렇게 빙빙 돌려서 비꼬듯 말하지 말고.”그녀가 자신을 용서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남준은 곧바로 답했다.“알았어, 약속할게.”말을 마친 박민정은 유남준의 품에서 일어나 침실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준비를 했다.유남준도 덩달아 일어서며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다.“그래도 거실에서 자요.” 박민정이 말하자 유남준은 다소 무력한 표정으로 문 앞에 멈춰 섰다.한편 얼어붙은 강물에 유성혁은 옷이 벗겨진 채 덜덜 떨며 입술마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너희들, 내가 다 기억할 거야! 딱 기다려!”
은정숙은 박민정에게 요즘 몸이 많이 좋아졌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박민정은 이번엔 윤우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곳에 있던 간호사는 아이가 잠들었다고 말했다.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자 막 연결된 화면 너머 박민정은 화려하게 꾸며진 아이 방을 보았다.“예찬아?”박예찬은 꼬마 어른처럼 반듯한 정장을 입고 카메라 앞에 나타났다.“엄마, 미안해요. 아까 너무 바빴어요.”“지금 하랑 이모 집에 있어?” 박민정이 묻자 박예찬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이렇게 덧붙였다.“정확히 말하면 하랑 이모 아빠가 저한테 집을 선물해 줬어요.”조석천은 예찬이를 유난히 좋아해서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이제는 아이와 체스를 두는 재미에 푹 빠진 터라 예찬이가 박민정과 통화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석천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예찬아, 누구랑 통화하는 거니? 얼른 와서 할아버지랑 체스 두자.”솔직히 요즘 너무 바빴다.조석천은 그와 체스를 두고 책을 보는 것도 모자라 다른 어르신, 사모님들이 모인 곳에 데려가서 자랑을 하곤 했다.박예찬은 컴퓨터를 닫고 거실로 갔다.조석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턱을 치켜들고 이미 지고 있는 장기를 바라보았다.“예찬아, 너 할아버지한테 거짓말한 거 아니지? 듣기로 요즘 휴대폰으로 체스를 둘 수 있다고 들었는데, 휴대폰으로 나와 체스를 둔 거니?”박예찬과 벌써 열 판을 두었지만 그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네 살도 안 된 어린아이에게 졌다는 것은 정말 창피한 일이었다.“할아버지, 그래도 납득이 안 되시면 다시 한번 해요. 제 몸을 수색하셔도 됩니다.”박예찬은 사실 할아버지에게 양보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워낙 예리해서 자신이 일부러 봐주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체스를 두는 기사는 그래도 어느 정도 경기 정신이 있어야 했다.조석천은 손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기가 사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휴대폰 하나 들어갈 자리 없었고 체스를 빨리 두는 탓에 커닝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분명
조하랑은 조석천과 김훈이 단 몇 마디로 자신의 인생 대사를 결정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이제 거절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미리 말하는데 예찬이는 그 사람 아들이 아니에요. 그때 가서 쫓아내도 날 원망하지 마세요.”“쓸데없는 소리. 내일 예쁜 옷이나 사 입고 이만 가 봐. 나랑 예찬이 체스 두는 거 방해하지 말고.”조석천은 딸은 내다 버려도 그만이지만 똑똑한 손자를 제대로 키우고 싶었다.조하랑은 얼굴이 잿빛이 된 채 자리를 떠났다. 박민정이 이 사실을 모를까 봐 박민정에게 따로 전화를 걸어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유성혁의 사건으로 박민정은 더는 일을 도우러 가지 않았고 고영란도 뭐라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집안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이었으니까.유성혁은 여전히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실수로 강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박민정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유남준에게 물었다.“이제 김인우 씨 기억나요?”유남준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했다.“잘 기억이 안 나.”“기억나면 나는 거고, 안 나면 안 나는 거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건 무슨 말이죠?” 박민정은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보기엔 김인우 씨는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온 마음을 다하는 조하랑이 감정 기복이 심하고 배은망덕한 김인우를 만나면 손해 볼 게 분명했다.“응, 내 생각도 그래.”유남준은 곧바로 거들었다.멀리 김씨 저택에 있던 김인우가 재채기를 했다.그래도 김인우의 친구인 유남준이 자신의 말에 동조할 줄 몰랐던 박민정이 계속해서 말했다.“그럼 하랑이를 괴롭히면 어떡해요?”유남준은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조하랑은 박민정의 친구인데 김인우가 괴롭히게 놔둘 그가 아니었다.“왜 그럴 일이 없어요? 그 사람 잘 알아요? 아까는 기억 안 난다면서요?”말문이 막힌 유남준이 곧바로 둘러댔다.“느낌이 그래.”늘 실질적인 능력으로 일을 처리하던 유씨 가문의 책임자가 이제는 직감에 의존하기
유명진은 박민정처럼 참한 여자가 자기 집안으로 시집온 게 안타까웠다.하지만 집안일에 끼어들기 싫어하는 그였기에 유남준과 고영란은 집안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이제부터 남준이랑 둘이 잘 지내.”말재주가 없었던 유명진은 진심을 담아 말했고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유명진이 간 뒤 박민정의 친엄마 한수민과 남동생 박민호가 미리 도착했다.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두 번째 남편 윤석후의 팔짱을 낀 한수민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오늘 딸이 약혼한다는 말을 전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약혼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한수민은 다른 사람들의 축하 속에도 이렇게 조롱했다. “유씨 가문과 결혼하는 건 우리에겐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데 민정이가 감당할지 모르겠네요. 감당하지 못하면 이혼하겠죠?”그런데 그 말이 예언이 되어 그들이 정말 이혼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어디로 갔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조하랑과 박예찬이 오기를 기다렸다.조하랑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는데, 이상하게도 예찬이는 오지 않았다.“하랑아, 예찬이는 어디 있어?”박민정은 조금 걱정이 되었고 조하랑은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빠가 자랑하려고 데려갔으니까 잠깐은 못 올 것 같아.”남들에게 예찬이를 자랑할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버지를 너무 잘 아는 조하랑이었다.“참, 너희 집 그분은?” 조하랑이 주위를 둘러봤지만 유남준은 보이지 않았다.사실 오늘 이 자리에 그녀는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유씨 가문 같은 막강한 재벌가 앞에서 조씨 가문은 고래 앞의 새우였다.하지만 이제 곧 김인우와 약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덕을 보게 된 것이다.“조하랑 씨 맞죠? 우리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조하랑과 인맥을 쌓으려는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조하랑은 그들을 상대하면서 다소 미안한 듯 박민정을 돌아보았다.박민정이 괜찮다며 가라고 해서야 조하랑은 그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
약혼식이 시작된 후 윤소현은 무대 위에서 가족들한테 감사를 올렸다. 특히 그녀가 엄마 얘기를 꺼낼 때, 한수민의 눈동자는 기대를 품은 채 반짝거렸다.한수민이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박민정은 그녀를 덥석 잡았다.“유씨 집안에서 오늘 윤소현 친엄마, 정수미를 모셨어요.”약혼식 준비를 도왔으므로 진행 순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박민정은 나름 호의로 한수민한테 귀띰해 주었다.그 말을 듣자 한수민은 얼굴색을 확 달리하였다.윤소현은 어제 분명히 자신한테 정수미가 오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윤소현의 엄마 신분으로 하객들 앞에 설 거라고 했는데, 설마 윤소현이 자신을 속였을 리가...한수민은 박민정이 거짓을 말한 거라 잠시 생각했지만 이윽고 짧은 머리에 빳빳한 제복 차림을 한 정수미가 식장에 나타나자 할 말을 잃었다. 정수미는 윤소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외모는 훌륭한 편이 아니지만 몸에서 풍기는 세련되고 똑 부러진 분위기는 한수민처럼 맨날 호사만 누리는 사모님한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정수미는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가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는 윤소현의 눈에는 온통 숭배와 긍지로 가득했다.평소 한수민을 대하는 건성건성 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엄마는 정수미가 유일했으니까.“엄마가 올 줄 알았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는 정수미를 와락 끌어안았다.무대 위에서 한창 깊은 모녀 정이 연출되고 있는 그 시각, 하객석에서는 낮은 소리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아까 윤소현이 자기 딸이라고 자랑을 잔뜩 늘어놓은 한수민은 얼굴색이 말이 아니었다.“윤소현 씨의 아버지가 윤석후 아니에요? 그럼 엄마는 한수민 아닌가요?”“맞아요, 아까도 저희한테 자기가 윤소현 엄마라고 했잖아요.”“알긴 뭘 알아. 한수민은 그냥 소현이 계모야. 아빠 체면을 봐서 그냥 엄마라고 부르는 거지, 진짜로 엄마인 줄 알았어?”“그럼 어떡해요? 방금 선물을 다 한수민 씨한테 줬는데. 다시 가져
“무슨 말투가 그래?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누난 우리 박씨 집안 사람 아니야? 너도 윤소현처럼 막강한 친정집이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면 좋잖아.”‘막강한 친정집이 뭐? 뒷받침이 뭐 어쩌고 어째?’박민정은 박민호의 말이 너무 우스워 콧방귀를 꼈다.“아빠가 금방 돌아가셨을 때도 우리 집안 충분히 든든했어. 그때 네가 뭐 하나라도 나한테 도움 된 거 있었어?”애당초 그가 유씨 가문과의 합의를 어기고 자신의 혼수와 예물을 빼돌리는 어리석은 짓을 안 했다면 유남준도 체면이 구겨졌다고 결혼 후에 자신을 아니꼽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유씨 가문에서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니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말문이 막혀버린 박민호는 또 다짜고짜 손찌검부터 하려고 손을 들었다가 며칠 전 김인우가 자신한테 경고했던 일이 생각나 다시 천천히 손을 떨구었다.“어쨌든 우린 혈육이잖아. 집안 재산이 다른 놈한테 넘어간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당연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걱정하지 마. 그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그런데 너랑은 상관없어, 넌 우리 집안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으니까.”어머니의 말만 듣고 몇 대째 일궈낸 가업을 고대로 남한테 가져다 바친 사람은 인간도 아니다.말을 마치고 그녀는 충격에 빠진 박민호를 뒤로 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항상 나약하고 무능하다고만 생각했던 박민정이 이런 말을 하다니...“내가 후계자 될 자격이 없다고? 그럼 누가 있다는 거야? 네가 있어? 웃기네, 여자가 무슨 사업을 한다고...”박민정이 떠나간 후에 박민호는 혼자 중얼거렸다.“큼큼...”그의 뒤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니 김인우와 방성원이었다.준수한 외모에 키까지 훤칠한 두 남자가 같이 서 있으니 위압감이 절로 생겨 박민호는 그들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박씨 집안이 몰락하기 전부터 그는 두 사람의 뒤를 맨날 졸졸 따라다니는 껌딱지였다. 그들과 나란히 설 자격이 되지 못한 그는 꼬붕 노릇이나 해야 했다.“인우 형님
윤소현도 어릴 적에 유남준을 좋아했고 그 후에도 종종 그의 소식에 관심을 가졌다. 그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마저 있었지만 이제 눈이 보이지 않는다니 유남우를 선택한 것이다.지금으로서는 유남우가 그보다 더 훌륭한 조건을 가졌으므로 이제 굳이 과거의 생각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윤소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주버님, 형님, 한잔 올릴게요.”유남준의 편의를 위해 그가 손만 살짝 들어도 잡을 수 있는 곳까지 술잔을 가져갔지만유남준은 술을 받지 않고 오히려 박민정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나랑 안사람은 술을 안 마셔요. 그러니까 다른 손님들한테 가서 권해요.”윤소현은 삽시에 어찌할 바를 몰라 멈칫하며 유남우를 쳐다봤다.유남우는 술잔을 가져와 윤소현한테 넘겨주었다.“형님과 형수님이 안 마시겠다는데 그냥 우리만 마시자.”“네.”윤소현은 대답하고 나서 술을 마셨다.두 예비 신랑, 신부는 원래 가장 친한 친인척과 가까운 지인들한테만 술을 권하면 되었지만 유남우는 웬일로 참석한 모든 하객한테로 찾아가 그들과 일일히 술을 마셨다. 나중에 윤소현이 못 마시겠다고 하자 그녀의 술까지 대신하여 마셨다....피로연이 막바지에 들어섰을 때 박민정은 비로소 예찬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얼굴은 발그스름한 것이, 조석천한테 이끌려 화장까지 한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몸에는 앙증맞은 고가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더군다나 예찬이의 왼손은 조석천이 잡고 있고, 오른손은 김훈이 잡고 있었다. 연회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약혼식 주인공들이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예찬이가 독차지할 뻔하였다.연회에 참석한 하객들은 모두 지위와 신분이 높은 인물들이었고 그중에 유명훈도 있었는데, 그는 김훈이 웬 꼬마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이보게, 김 회장. 이 아이는 누군가?”김훈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으쓱대며 대답했다.“우리 인우네 애야. 내 증손자.”유명훈이 듣고는 얼른 옆에 있는 사람한테 돋보기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안경을 쓰고 다시
유남우와 사귄 이후로 그는 매우 신사적으로 그녀를 지켜주며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약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윤소현은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다른 사람들이 유남우가 아파서 몸이 안 좋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병인지 알지도 못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거니와, 또 하나는 아무리 정혼한 관계라고 하나 그 역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아무래도 오늘 밤엔 둘의 관계를 더 확실히 해야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마침내 방에 도착해 유남우를 침대에 눕힌 후 윤소현은 사용인에게 분부했다.“이제 다들 가보세요.”“네.”사용인들이 모두 떠나자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유남우의 잘생긴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볼 위에 얹었다.“남우 씨...”술을 너무 많이 마신 유남우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눈을 뜰 수가 없었다.윤소현은 조심스럽게 그의 옷을 벗기고 침대에 올라가 그의 곁에 누웠다.다른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자 유남우는 힘겹게 눈을 떴지만, 알코올에 흠뻑 적셔진 탓인지 눈앞이 약간 몽롱하였다.윤소현은 워낙에 박민정과 조금 닮아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유남우는 박민정이 곁에 앉아 있는 줄로 알고 애틋하고 부드러운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남우 씨, 저희 이미 약혼한 사이잖아요. 이제 저를 가져요.”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그가 깨어날 거라고는 생각 못 한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유남우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살짝 움직였다.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윤소현의 두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남우 씨...”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우는 그녀를 힘껏 품에 끌어안으며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늘 부드럽기만 하던 그한테 이렇게 거친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윤소현도 더는 얌전을떨지 않고 능숙하게 자기 옷을 벗으며 적극적으로 그에게 호응했다.만취 상태인 유남우는 그녀와 키스를 나누면서 나지막이 속삭였다.“민정아...”한창 몸이 달아오르려던 찰나, 윤소현은 그 한마디 부름에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그제야 홍주영은 지금이 근무 시간이라는 걸 떠올렸다.그녀는 급히 하민재에게 배달 음식을 하나 시켜주고는 약간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나 회사에 잠깐 다녀와야 해요.”하민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날 병원에 혼자 두고 가는 거예요? 의사 말로는, 지금 상태면 최소 이틀은 입원해서 경과를 봐야 한다던데. 혹시라도 내부 장기에 손상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요...”그 말에 홍주영은 잠시 망설였다.“퇴근하자마자 바로 올게요.”“근데 밥은요? 씻는 건요? 누가 도와줘요?”하민재가 묻자 홍주영은 곧 결심한 듯 말했다.“회사 가서 이틀 휴가 내고 올게요. 병간호는 내가 해줄게요.”그제야 하민재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근데 유남우 대표는 뭐라고 안 할까요?”홍주영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을 거예요. 저 지금껏 한 번도 휴가 낸 적 없으니까요. 게다가 약혼자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당연히 내가 돌봐야지요.”그녀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이번엔 꼭 하민재 곁을 지켜야겠다고.두 사람은 약혼한 사이였고 앞으로는 가족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될 사람이었으니까.“주영 씨는 정말 착하네요.”하민재가 진심을 담아 말하자 홍주영은 괜히 얼굴이 붉어져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됐어요. 아까 시킨 음식 곧 도착할 테니까 받아서 먹고 있어요. 나 회사 잠깐 다녀올게요.”“네!”하민재는 고개를 연달아 끄덕였다.하지만 그녀가 병실을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민재의 얼굴에 번지던 웃음은 천천히 사라졌다.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그는 화면을 확인한 뒤 메시지를 눌러 열었는데 부하 직원에게서 온 보고였다.[이번 일, 유남우 씨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고를 낸 택시 운전사가 과거에 유남우 씨와 자주 연락했던 기록이 있습니다.]유남우...하민재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리듯 천천히 되뇌었다. 처음 사고가 났을 땐 연씨 집안 사람들 쪽에서 자신을 노린 줄 알았다. 설마 유남우일 줄이야.도
박민정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홍 비서님?”홍주영이 급히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도련님이 거절하신 거예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홍주영은 믿기지 않는 듯 얼굴이 굳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아이가 도련님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사람은 겉만 봐선 모르죠.”박민정이 담담하게 말하자 홍주영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도련님께 무슨 사정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민정 씨, 너무 원망하진 말아요. 제가 가서 말씀드릴게요. 꼭 연서 씨가 다혜를 입양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볼게요.”유다혜라는 아이는 홍주영도 자주 보아온 터였다.그렇게 사랑스럽고 그렇게 착한 아이가 고아로 살아가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그래 준다면 너무 고맙죠.” 박민정이 말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용히 덧붙였다.“그치만 남우 오빠가 딱히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진 않아요. 홍 비서님, 한 가지만 조심하세요. 그 사람한테 속지 마세요.”홍주영의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스쳤는데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도련님이 좀 집착이 강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예전엔 박민정도 그렇게 생각했다.홍주영이 더 뭔가 말하려던 찰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아들고 화면을 확인하니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는 약간 의아해하면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무슨 일이죠?”“홍주영 씨 되시죠? 약혼자분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병원으로 빠르게 와주십시오.”교통사고?홍주영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네, 네. 지금 바로 갈게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박민정을 돌아보며 말했다.“민정 씨,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가볼게요.”그 말을 마친 뒤, 홍주영은 급히 병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하민재가 왜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 걸까?병원에 도착했을 때쯤, 하민재는 이미 일반 병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의사는 다행히도 외상 정도만 입은 것 같다고
“형, 민정아.”유남우가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두 사람을 향해 불렀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동시에 돌아보았다.유남준은 짧게 대답한 뒤, 고개를 돌려 박민정에게 조용히 말했다.“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난 여기 있을게.”“네.”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자에서 걸어 나왔다.유남우가 우산을 들어 그녀 위에 씌워주었다.“고마워요.” 박민정은 공손하게 인사하며 살짝 몸을 뒤로 물러섰다.그녀의 그런 작은 움직임까지 유남우는 다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망설임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연서 씨는 제 오랜 친구예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다혜를 정말 진심으로 입양하고 싶어 해요. 다혜가 그 친구랑 함께 지낼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박민정의 다급한 말투에 유남우는 손에 쥔 우산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우리, 이곳에 온 것도 참 오랜만이지?”박민정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요즘 따라 자꾸 어린 시절 꿈을 꿔. 다시 돌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유남우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예요. 난 오늘 다혜 얘기를 하러 온 거지, 어린 시절 이야기하러 온 게 아니에요.”박민정이 단호하게 선을 긋자 유남우는 말을 멈췄다.“...다혜는 내 딸이야. 남에게 맡길 수 없어.”박민정은 손을 꽉 쥐었다.“알아요. 다혜는 오빠랑 혈연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빠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요.”조 비서가 가끔 유다혜를 보러 병원에 간다고 했다. 간호사들 말로는 유남우는 거의 병원에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다혜는 아버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유남우는 그 말에 짧게 웃었다.“다혜랑 혈연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지?”박민정은 그의 부드럽고 단정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굳이 콕 집어 말할 필요 없잖아요. 서로 다칠라.”그녀는 끝까지 윤소현이 다혜를 어떻게 임신했는지는 입 밖
호숫가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먼저 도착해 작은 정자를 하나 찾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던 유남준이 입을 열었다.“예전에 너랑 여기 같이 온 적 있어.”“네?” 박민정은 잠깐 멍해졌다.“나랑 여길 같이 왔다고요?”“잊었어?”유남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를 바라봤는데 어딘가 씁쓸한 표정이었다.박민정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마 잊은 게 아니라 헷갈렸던 것일지도 모른다고.유남준과 유남우는 너무도 닮았다. 어쩌면 그때 자신조차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그런 그녀의 눈치를 읽은 듯 유남준이 슬며시 웃었다.“그때 말이야, 네가 반 친구한테 맞고 울면서 오다가 나를 딱 마주쳤지. 네가 내 품에 안겨선 자초지종을 다 말하더라.”“내가 그놈 혼쭐을 내주고 결국 전학까지 시켰잖아.”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그게 남준 씨였네요.”어쩐지 그날따라 유남준이 조금 낯설다고 느꼈던 게 기억났다. 평소엔 늘 다정한 그였는데 그날은 거칠게 이렇게 말했다.“울긴 왜 울어, 한심하게. 맞았으면 맞은 만큼 되갚아야지!”그땐 그저 기분이 안 좋았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사람이 바뀌어 있었던 거다. 그날 자신은 억지로 유남준을 끌고 이곳까지 왔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 나무에 기대 서 있었고 울고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질색하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또 울면 나 간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추운 바람이나 쐬고 있고 싶진 않거든.”그 말에 박민정은 와락 울음을 터뜨렸지만 유남준은 끝내 떠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밤이 깊도록 그녀 곁을 지켜주고 집까지 바래다주었으니까.과거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박민정은 다시 유남준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가만 보면 네가 처음 좋아한 사람이 꼭 유남우였다고는 말 못 하겠는데.”유남준은 질투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설마 두 사람 다 좋아한 거야? 자기도 모르게? 그럼 이건 이중 플레이야, 양다리라고.”박민정은 피식 웃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