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는 매우 조용해졌다.유남준은 그제야 알았다. 박민정은 생화를 좋아하고 고향에 가고 싶어 하고 도쿄에 가고 싶어 하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박민정은 어색한 기류를 눈치채고 얘기했다.“이미 얘기했잖아요. 부부 행세 하지 않기로.”유남준은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 기분이었다.“무슨 소리야. 그건 분명 너 혼자만의 결정이었어.”혼자만의 결정이라.모든 일이 두 사람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면, 이지원을 만나러 가는 유남준은 뭐가 되는 것일까.박민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느새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졌다.“그래요. 아직 19일이 남았으니 약속을 지켜줬으면 좋겠네요. 밥하러 갈게요.”그렇게 말한 박민정이 바로 주방으로 갔다.유남준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유남준이 그녀를 따라가며 얘기했다.“내가 할게.”박민정은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유남준은 이미 주방에서 일하고 있었다.비싼 맞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주방에서 일하고 있으니 조금 이상했다.유남준이 나서서 하겠다고 했으니 박민정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며칠 지나면 유남준은 또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박민정은 정정당당하게 그를 떠날 수 있었다.유남준은 사업을 잘하는 편이지만 요리는 그럭저럭했다.아침을 만드는 데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맛없으면 사람을 시켜서 밥을 사 오라고 할게.”유남준이 자리에 앉아 얘기했다.박민정은 희멀건 죽과 약간 타버린 계란말이를 보면서 저번에 먹은 해물 죽을 떠올리고 이상함을 느꼈다.이지원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보면 유남준은 요리를 잘하는 편이었는데...“요리할 줄 몰라요?”그녀가 의심스레 물었다.유남준은 약간 굳은 채 대답했다.“당연히 할 줄 알지.”미간을 찌푸린 그는 계란말이의 탄 부분을 잘라낸 후 박민정에게 건넸다.“이거 먹어.”박민정은 유남준이 자기 그릇에 있는 계란말이를 꺼내 탄 부분을 베어버리는 것을 지켜보았다.유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보면서 해명했다.“그저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야.”그는 요
유남준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서다희는 그저 그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얼른 법무팀에 연락해 계약서를 준비하라고 했다.“대표님, 오늘 새벽 개인 계좌가 해킹당한 일은 당장 밝혀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가상 주소를 써서...”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얘기했다.“지금까지 조사한 데이터를 다 나한테 보내.”“네.”유남준은 데이터를 받은 후 서재로 갔다.컴퓨터로 데이터를 연구하던 유남준은 빠르게 상대의 실수를 눈치채고 진짜 주소를 알아냈다.“하성이라...”다른 한편. 박예찬은 이마에 땀이 가득 맺힌 채, 유치원 화장실에서 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회로를 포기하고 자기 주소를 보냈다.이마의 땀을 닦은 박예찬이 얘기했다.“쓰레기 아빠한테 이렇게 유능한 부하가 있을 줄이야. 돈 훔치기 참 어렵네. 하마터면 발각될 뻔했어.”마음이 놓이지 않아 컴퓨터를 들고 와서 다행이었다.유남준은 그저 하성이라는 위치만 대강 알아냈다.“포기도 빠르네.”유남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라이벌 회사라면 이런 이상한 수단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대략적인 위치를 서다희에게 보내주면서 얘기했다.“잘 조사해 봐. 이 사람을 꼭 찾아내야 해.”유남준은 그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를 그냥 둘 수 없었다.모든 일을 처리한 후, 아침이 도착했다. 유남준은 내려가 박민정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박민정은 박예찬이 유남준한테 발각될 뻔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이번 달에 아이를 임신하는 것과 어떻게 윤우를 데리고 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윤우를 만나게 해주면 안 돼요?”박민정은 떠보면서 물은 후 해명을 덧붙였다.“아직 어리고 곁에 가족이 없으니까 걱정이 되어서...”저번 생일에 윤우를 만난 후, 그녀는 다시는 윤우를 만나보지 못했다.유남준은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는 또 고영란이 한 말을 떠올리게 되었고, 태어나지 못한 그 아이와 연지석을 떠올렸다.그리고
박민정은 이번에 와서 정림원 주변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만약 유남준이 윤우를 놓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윤우를 구해낼 수 있게 말이다.박윤우는 두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듣고 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엄마!”박민정은 작은 윤우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왜 여기 서 있어?”박민정이 그의 손을 잡고 물었다.“안 추워?”“안 추워.”말을 마친 박윤우는 박민정 뒤에 있는 유남준에게 걸어가 얘기했다.“아저씨, 아저씨를 기다리다가 다리가 저려서 그러는데 저 안아주시면 안 돼요?”그 말을 들은 박민정이 바로 얘기했다.“엄마가 안아줄게.”박윤우는 바로 고개를 젓고 유남준을 쳐다보았다.“아저씨, 우리 엄마는 몸이 안 좋아서 안 돼요. 저 좀 안아주세요.”박민정은 약간 어색해졌다. 박윤우를 설득하려고 할 때, 유남준이 바로 앞으로 걸어가 박윤우의 멜빵 바지를 잡아서 그를 들어 올렸다.“가자.”박윤우의 몸이 그대로 허공에 뜨게 되었다.박윤우의 전적이 있어서, 유남준은 그를 들 때 일부러 거리를 유지했다.박윤우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리고 두 발로 힘껏 뒤를 차 유남준의 정장에 발자국 몇 개를 남겼다.유남준의 표정은 금세 굳어버렸다.박윤우는 그를 발로 차면서 사과했다.“아저씨, 죄송해요. 다리에 쥐가 나서 그래요. 일부러 찬 게 아니에요.”‘쥐가 났는데 이렇게 잘 맞춰서 찬다고?’유남준은 박윤우가 일부러 장난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봐줄게.”실내의 소파에 박윤우를 내려놓은 유남준이 손을 뻗어 그의 다리를 잡으려고 했다.박윤우는 얼른 피하며 얘기했다.“아저씨, 제 다리 이제는 나았어요.”유남준은 그저 그렇게 박윤우를 지켜보았다. 박민정은 두 사람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앞으로 다가가 얘기했다.“미안해요. 윤우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먼저 옷 좀 갈아입을래요?”유남준도 아이와 진심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응.”유남준이 떠나자마자 박민정이 박윤우에게
박민정은 윤우의 그림을 몰래 숨겨놓았다.정림원은 너무 커서 제대로 돌아보려면 적어도 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주변에 숨어있는 카메라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유남준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왔다. 거대한 몸집의 그는 검은 눈동자에 두 사람이 앉아서 노는 장면을 담았다.시간은 항상 빠르게 지나가서 놀라게 만든다.박윤우는 유남준을 발견하고 얼른 그와 인사했다.“아저씨, 우리랑 같이 놀래요?”아까는 그저 발로 몇 번 찼을 뿐이다. 그래서 성에 차지 않았다. 박민정은 박윤우를 말리고 싶었다. 아무래도 박윤우와 유남준은 혈연관계이니, 너무 오랜 기간 같이 있으면 서로의 신분을 알게 될까 봐였다. 유남준은 이미 그들에게로 걸어오며 물었다.“뭘 놀고 싶은데.”박윤우는 머리를 굴리고 얘기했다.“역할 놀이 해요! 아저씨는 아빠, 엄마는 엄마! 나는 두 사람의 아들!”박민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리해졌다.유남준도 멍해서 서 있었다.‘남자애가 무슨 역할 놀이를 좋아해? 여자애들도 아니고.’“아저씨, 우리 아빠는 엄청난 부자예요. 내 아빠 역할은 아무한테나 안 시키는 건데, 특별히 아저씨한테 주는 거예요.”박윤우가 입술을 움직이며 이 일이 유남준의 영광이라도 되는 듯 얘기했다. “윤우야, 아저씨 난처하게 하지 말고...”박민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얘기했다.“그래, 네 아빠가 되어줄게.”박윤우는 그가 동의하자마자 바로 그의 허벅지를 잡고 눈물과 콧물을 갈아입은 바지에 묻히며 얘기했다.“엉엉엉, 아빠, 윤우가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알아요? 보고 싶어서 죽을 뻔했다고요.”유남준은 박윤우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아빠라는 말에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다른 한편, 박민정은 윤우가 유남준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서 말문이 턱 막혔다.그녀의 두 아이는 아빠를 원한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사실 속으로는 아빠가 있었으면 했다.지금 윤우가 안고 있는 사람이 그들의 친아빠라고 알려주면 얼마나 좋아할까.하지만 박민정은 유남준에
가끔 어린아이의 도발도 꽤 유용했다.유남준은 다시 박민정을 보더니 목울대를 꿈틀거리고 겨우 입을 열었다.“미안해.”박민정도 그를 보다가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얘기했다.“괜찮아요.”박윤우는 나름 참신한 방법으로 유남준이 사과하게 만들었다.“아빠, 매일 여기에 혼자 있는 건 너무 답답해요. 아빠랑 엄마랑 같이 나가서 놀고 싶어요.”박윤우의 애교는 누구도 당해내지 못한다.그건 유남준도 마찬가지였다.“그래.”동의한 후, 유남준은 사람을 시켜 박윤우를 데리고 근처의 놀이공원에 갔다. 하지만 박윤우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기에 많은 놀이기구들은 탈 수가 없었다. 박민정은 박윤우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세 사람은 놀이공원에서 이목을 끌었다.박윤우는 조금 걷더니 피곤함을 느껴 유남준을 쳐다보았다. 유남준이 그를 안아주려는 생각이 없는 것을 보고, 박윤우는 그가 돈과 얼굴이 아니었으면 평생 아내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빠, 저기 다른 아빠들 좀 봐요.”박윤우는 멀지 않은 곳에서 딸을 어깨에 앉힌 남자를 가리켰다.유남준은 그 남자를 보고 또 박윤우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안돼.”“하지만 아빠, 나도 아빠한테 안기고 싶단 말이에요.”박윤우는 제자리에 서서 유남준을 바라보았다.“그럼 차면 안 돼.”그렇게 경고한 후에야 유남준은 박윤우를 안았다.박윤우는 전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이 놀이기구, 저 놀이기구 다 타겠다고 했다.“아빠, 저 판다 인형을 잡아서 엄마한테 줘요!”“아빠 최고!”“아빠, 나 엄마랑 저거 먹고 싶어요.”“아빠가 최고예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박윤우는 유남준의 품에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으려고 했다.유남준은 아빠라는 소리를 들으며 점점 박윤우가 연지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오후에 품에 안은 박윤우가 저녁에 그의 등에서 잠이 들자, 유남준은 그제야 놀이를 끝냈다.“내가 안을게요.”박민정이 손을 뻗
주변이 삽시에 조용해지고 바람이 나뭇잎을 휩쓸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박민정은 익숙한 유남준의 얼굴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어색해하면서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난 이제...”그녀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끼어들었다.“너랑 낳겠다는 게 아니었어.”박민정은 놀라서 동공이 떨렸다. 그의 차갑고 모진 말이 그녀의 고막을 때렸다.“어떤 남자가 자기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여자와 계속 아이를 낳고 싶겠어.”유남준은 박민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으로 걸어갔다.자기 방에 도착한 그는 짜증스레 외투를 벗어 던졌다.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을 때, 박민정이 거절하려고 하자 유남준은 그제야 자기가 얼마나 우스운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 그가 얼마나 황당한 일을 저질렀는지도 알게 되었다.하루 동안 그 아이의 아빠 역할을 해주다니.얼마나 아이를 갖고 싶었으면 다른 아이의 아빠를 해줬을까.별장 밖.박민정은 홀로 바람 속에 서 있었다.머리에는 유남준이 한 말이 맴돌았다. “어떤 남자가 자기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여자와 계속 아이를 낳고 싶겠어.”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거실에 들어갔다.거실에는 그녀뿐이어서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러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5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다.홀로 이렇게 넓은 곳에 있고 싶지 않았던 박민정은 얼른 방으로 돌아갔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음악을 틀었다.부드러운 선율에 박민정의 마음이 약간 풀렸다.쿠쿵~창밖에서 갑자기 우레가 치더니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나기가 멈추지 않을 기세로 쏟아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박민정은 빗소리를 들으면서 거의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그때 마침 밖에서 차량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윽고 대문 벨소리가 들렸다.‘이 시간에 누구지?’박민정은 유남준이 잠에 들었는지 몰라 일단 나가보았다. 문을 열자 환자복을 입은 이지원이 목에는 붕대를 하고 비에 맞아 쫄딱 젖은 채, 핏기 하나 없는
계속해서 괴롭히다니.박민정은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계속해서 남을 모함하는 건 이지원이 아닌가.이지원의 두 손은 이미 피로 물들었다. 유남준은 얼른 그녀를 구급차에 태워 갔다.떠나기 전, 이지원은 박민정을 슬쩍 쳐다보았다.마치 ‘봤지? 너와 나 중에서 유남준은 날 선택할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지금의 박민정은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이지원이 빨리 유남준과 사귀어서 유남준이 박민정과 박윤우를 놓아주었으면 했다.구급차에서.유남준의 차가운 얼굴은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이렇게 늦은 밤에 두원에 와서 뭐 하는 거야.”“혼자 병원에 있는 건 너무 무서워서 오빠를 보려고 왔어요.”그렇게 심하게 다쳤지만 끝내 유남준을 잡지 못했다.이지원은 유남준이 앞으로 자기를 버릴까 봐 걱정이었다.그리고 오늘의 일로 그 걱정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유남준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앞으로 두원에 오지 마.”이지원은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왜요? 민정 씨 때문이에요? 그런 여자는 오빠한테 어울리지 않...”유남준이 이지원의 말을 끊었다.“박민정은 내 아내야!”이지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에도 핏기가 가셔 창백했다.“그럼 나는요? 오빠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8년이나 기다렸어요!”“보상할게.”유남준은 무표정으로 유명한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지원의 앞에서 드라마 주인공 배역을 따주었다.“내가 있으면 넌 영원히 승승장구하게 될 거야. 그런 비열한 수단 없이도 말이야.”이지원은 그제야 알았다. 유남준은 진작 그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두려워진 이지원은 유남준에게 결혼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전에 이지원이 해외 노래를 표절한 것 때문에 사건이 터졌었는데 유남준 덕분에 깔끔하게 해결되었었다. 여전히 많은 브랜드들이 이지원을 모델로 삼으려고 했다. 이지원의 명성에는 전혀 흠집이 없었다.그날 밤, 유남준은 두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이튿날, 박민정은 뉴스에서 이지원이 또 유명한 감독의 여자 주인공 배역을 따고
차 안에서. 유남준은 뒷좌석에 앉았다.어젯밤 그는 차에서 저녁 내내 박민정의 전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박민정은 전화 한 통 주지 않았다.박민정이 나오는 것을 본 그는 창문을 내리고 피곤한 얼굴로 얘기했다.“타.”박민정은 그가 금방 돌아온 줄 알고 화가 나서 차에 타지 않았다.“할 말이 있으면 여기서 해요.”유남준은 약간 피곤한 눈으로 얘기했다.“아직 보름 남았어. 잊지 마.”박민정은 약간 의아해하면서 차에 올라탔다.유남준은 어젯밤 이지원의 일을 꺼내지 않았다. 박민정도 왜 이제야 돌아왔는지 묻지 않았다.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었다.“오늘은 옛 저택으로 간다.”유남준이 얘기했다.박민정은 약간 이해되지 않았다.“옛 저택에 가서 뭐 해요?”“며칠 있으면 추석이잖아.”유남준이 멈칫하고 얘기했다.“전에 나랑 옛 저택에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박민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녀가 옛 저택에 살고 싶다고 한 건 옛 저택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유남준과 함께 하고 싶어서였다.하지만 시간은 많이 흘렀고 그녀는 이제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두 사람은 불가능한 사이니까.어젯밤, 박민정은 오랫동안 생각했다.만약 이번에 임신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이미 유남준의 정자를 얻었으니 앞으로도 임신할 수 있는 기회는 많다.정림원의 지도를 알았으니 박윤우를 데려오는 것도 방법이 없는 게 아니었다.그녀는 그저 유남준이 자기와 윤우를 놓아주지 않고 다시 붙잡아 올까 봐 걱정이었다.그래서 그저 유남준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네.”옛 저택.고용인부터 집주인까지, 누구 하나 박민정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이 이곳을 제일 싫어한다는 것을 몰랐다.보슬비 때문에 이 세계에 한 층의 얇은 막이 씌워진 기분이 들었다.박민정은 유남준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끝도 안 보이는 옛 저택을 보면서 우울감을 느꼈다.‘아직도 17일...’옆의 보디가드가 검은 우산을 씌워주었고 박민정은 하이힐을 신고 유남준과 함께 걸
옆에 있던 애인이 맞장구쳤다.“손연서 같은 여자, 설령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아들을 낳긴 힘들었을걸?”그러곤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오빠, 역시 나밖에 없지? 내가 오씨 가문의 대를 이었으니까.”그들이 낳은 아들, 성훈이는 이미 포동포동 살이 올라 커다란 덩치가 되어 있었다.손연서가 아이를 돌볼 때는 건강한 식습관을 신경 써서 관리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방치된 상태였다.먹고 싶은 건 다 먹고 공부도 등한시하며 오냐오냐 자랐다. 오성훈은 기름진 음식을 입안 가득 우겨넣으며 거칠게 내뱉었다.“손연서 그 여자, 진짜 재수 없어요. 더러운 년이에요.”이런 말투는 모두 엄마를 따라 배운 것이었다.하지만 오준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다시 들었다.온 가족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듯했으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하인이 다가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오준수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는데 비서였다.그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뭔데?”“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엔 그룹에서 저희 그룹과의 모든 계약을 취소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준수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뭐? 무슨 헛소리야? 지엔 그룹과의 계약은 최소 5~6년은 남았어! 갑자기 취소될 리가 없잖아!”그동안 그가 매일같이 술 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엔 그룹과의 협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만든다고?비서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또...”그러나 남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오준수는 불길한 예감에 다급하게 다그쳤다.“또 뭐가 있는데?”비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지엔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오씨 가문과 협력하는 기업은 곧 정씨 가문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요.”이 말은 마치 날벼락과도 같았다.오준수의 머릿속
손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민정 씨, 고마워요.”“우리 사이에 뭘요. 예전에 제가 힘들 때 연서 씨도 도와줬잖아요.” 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과거 그녀가 윤소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손연서가 나서서 힘을 써준 적이 있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손연서는 여전히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손연서가 떠난 후, 박민정은 정수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정수미는 오씨 가문의 남자들을 가장 혐오했다.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정부를 만들어 원래의 배우자를 해치다니. 이런 남자들과 도덕 없는 애인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민정아, 그 여자의 남편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박민정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오준수예요.”오준수.정수미가 옆에 있던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떠올렸다.“오현웅 회장의 아들입니다.”“아, 그 사람이구나.”정수미의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그 오준수, 몇 번 본 적 있어. 나한테도 몇 번 찾아온 적 있고. 근데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그냥 허세뿐인 한량이지.”문득 떠오른 듯, 정수미가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그 사람 아버지 체면을 봐서 오씨 가문과 거래를 한 적이 있거든. 네 친구를 돕고 싶다면 계약을 취소하면 돼.”박민정은 정수미가 오준수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얽혀 있을 줄이야.“그거 참 잘됐네요. 마침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별것도 아닌 일에 머리 쓸 필요 없어.”정수미는 오씨 가문 따위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씨 가문이 정씨 가문과 비교하면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 정도의 차이였다.“김 원장이 그러잖아. 너 요즘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둬.”정수미가 덧붙였다. 그때 옆에 있던 정윤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언니, 내가 해줄게요.”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먼저 찬
정수미는 자신이 여기 있으면 대화가 불편할 거란 걸 눈치채고 비서에게 밖에 가 햇볕을 쬐겠다고 했다.그녀가 나가자 세 사람은 한결 편해졌다.지원 엄마는 더욱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예찬 엄마, 다음 학기부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잖아요. 예찬이는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이에요?”박예찬의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박민정은 도한 엄마에게도 초청장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아직 한 장 더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박민정은 지원 엄마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학교는 이미 정했어요. 혹시 지원이도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면 같이 다니게 할까요?”“좋아요!”지원 엄마는 학교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이라면 분명 좋은 학교를 선택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럼 제가 시간 될 때 초청장을 드릴게요.”“고마워요, 예찬 엄마.”지원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손연서는 아이가 없어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다.그녀는 엄마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자신이 왜 남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택했던지 후회스러웠다. 만약 전 남편의 본모습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은 남자를 만나 지금쯤 자신도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잠시 후, 지원 엄마와 도한 엄마는 집에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손연서는 계속 남아 박민정에게 과일을 깎아 주었다.박민정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기억을 잃은 후로 손연서의 소식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손연서는 사과를 깎아 한 조각 건네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편해요. 예전보다 훨씬 나아요.”그러다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다만, 이제 와서 좀 후회가 돼요.”“후회요?”“네, 민정 씨가 아이를 키우는 걸 보면 정말 부럽더라고요.”손연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전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왜 그런 말을 해요?”박민정은 손연서가 아직 젊은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 이
유남준은 떠나지 않고 혼자서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남준아.”김인우가 먼저 다가왔다.“술 한잔하러 갈까?”유남준은 그를 흘겨보았다.“하랑 씨 임신했다며? 무슨 술이야.”“오늘 밤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낼 테니까, 우리도 재미 좀 찾아야지.”김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다희, 정민기, 방성원을 바라보았다.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우리 애가 싫어할 거예요.”방성원도 거들었다.“우리 딸이 내 몸에서 술 냄새 나는 걸 싫어하거든.”정민기는 무표정하게 한마디 했다.“전 술 안 마셔요.”김인우는 입을 달싹였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자신만 아직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좋은 남자친구, 좋은 남편이 되어 있었다.유남준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이제 너도 철들 때가 됐어.”“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지...”서다희가 말했다.“우리 애가 그러더라고요. 심심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굳이 술 마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대표님?”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술은 몸에 안 좋아.”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 있었다.“그럼 뭐 할 건데? 밤새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도 없잖아.”“그건 네가 알아서 정해야지. 방이라도 하나 마련해서 쉬는 게 좋겠어. 난 그래도 딸 보러 먼저 가볼 생각이야.”방성원이 말했다.“알겠어.”김인우는 바로 옆방을 준비하도록 했다.딱히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은 모여서 카드나 한 판 하며 시간을 보냈다.옆방에서는 김인우의 예상대로 모두가 박민정을 위해 오늘 밤만큼은 함께 있기로 했다.다만, 고영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박윤우와 박예찬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유남준을 찾아왔다.유남준이 그들에게 말했다.“너희, 이제 세 살짜리 아기 아니잖아. 알아서 잘 곳 찾아가.”결국 두 아이는 방 한쪽에서 나란히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감탄했다.“남준아, 유전자 진짜 대단하다. 윤우랑 예찬이, 완전 네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
옆에서 지켜보던 정수미가 박민정이 병상에서 일어나려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어디 가려고?”“친구 만나러요.”“지금은 푹 쉬어야 할 때야.”정수미가 걱정스레 만류했다.“며칠 후에 만나면 안 돼?”하지만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그 친구가 곧 해외로 떠나거든요.”연지석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도 배웅하지 않는다면 정말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그래. 대신 조심해야 해.”정수미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박민정이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네.”박민정은 짧게 대답하고 병실을 나섰다.밖에서는 유남준과 정윤아가 기다리고 있었다.“언니, 어디 가려고요?”정윤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은 쉬어야 하는데.”“좀 있다가 설명할게. 지금은 시간이 없어.”박민정이 이렇게 말하며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남준 씨, 지석이가 출국한대요. 지금 공항에 있어요.”그녀는 가장 중요한 신뢰를 지키고 싶었다.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유남준은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차로 데려다줄게.”“정말요?”박민정은 망설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연하지. 별일도 아닌데 뭘.”유남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가자.”“네.” 박민정이 웃으며 따라갔다.차에 오르자 유남준은 공항으로 향하며 물었다.“갑자기 왜 떠나는 거야?”박민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진주시에 온 것도 국내 사업 관련 일이 있어서였어요. 그런데 내가 실종되면서 오래 머물렀던 거죠. 아마 이제 가족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럼 제대로 인사해야겠네.”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네.”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기분 나쁘진 않아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예전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예전에는 연지석과 박민정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지석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차를 몰고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정아, 나 집에 가려고. 너한테 인사하려고 연락했어. 지금 몇 병동에 있어? 잠깐 보러 갈게.]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후,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한편, 박민정은 수술을 마친 뒤 처음으로 상태를 점검하는 날이었다. 실을 제거하고 청력을 확인하는 중요한 검사들이 진행됐다. 의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김인우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는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했다. 과연 박민정의 청력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박민정은 눈을 감은 채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오랜 세월, 그녀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만약 내가 정상적인 청력을 되찾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누구보다 떨리고 누구보다 기대됐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장비들이 제거되었고 그녀의 귀에 미세한 소음이 울렸다. 그건 수술 도구들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들려?” 김인우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자 박민정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네. 들려요.”그녀의 대답에 김인우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잘됐어! 정말 잘됐어. 수술이 성공했어.”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당분간 푹 쉬어야 해. 무리하면 안 돼.” 김인우가 급히 덧붙였다.“이제 테스트를 좀 해볼게요.”“네.”김인우는 간단한 청력 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완전히 정상 수준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보청기가 필요 없는 상태였다.“아주 좋아. 앞으로 조심해서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으면 문제없을 거야.”검사를 마친 뒤, 박민정은 병실 밖으로 나왔고 거기엔 유남준, 정수미, 정윤아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어때요, 김 선생님?”정수미가 다급히 물
연지석은 잠시 말없이 있었다.“홍 비서가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알고 나서 후회하는 건가?”“그건 아니야. 그냥 우리 두 사람이 약혼한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나보고 배신하지 말라고. 만약 다른 여자가 생기면 미리 한마디만 해 달래.” 하민재의 말에 연지석은 서류를 넘기면서 무심히 말했다. “괜찮은 여자 같은데?”“형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하민재가 되묻자 연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연애 전문가가 아니지만 네가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홍 비서는 너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했잖아. 너무 기대하지 마. 실망하는 건 결국 너야.”그 한마디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하민재를 깨웠다. 그제야 왜 자신이 불편했는지 깨달았다.“형, 솔직히 말해서... 나, 주영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홍주영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연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좋아한다면 노력해. 먼저 네 자신부터 바로잡고.”“하지만 주영 씨는 유남우를 좋아하잖아...”그 한마디에 연지석도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하민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형, 왜 우리가 좋아하는 여자들은 다 유씨 형제랑 얽히는 걸까?”더 이상 서류를 볼 기분이 없었던 연지석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이미 놓았어.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이미 홍 비서와 약혼까지 했으니까 널 선택한 거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잠시 말을 멈췄던 연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난 곧 해외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 여긴 네가 좀 맡아줘.”“알았어.”하민재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반대편에서도 연지석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인하의 자리로 갔다.“인하 씨, 민정이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설인하는 그제야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아마 오늘이면 수술이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연지석이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퇴근 후 시간이 나면 병원에 가서 박민정
홍주영은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제야 하민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정리를 시작했다.혼자 소파에 앉은 홍주영은 침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레 유남우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민재가 지금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그저 일시적인 신선함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예전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으니까.하지만 이제 그녀도 나이가 찼고 결혼해야 할 때가 됐으며 무엇보다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홍주영은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시작했다. 일에 몰두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하민재가 기대에 찬 얼굴로 걸어나오며 말했다.“주영 씨, 와서 좀 봐요. 내가 잘 정리했는지 확인해줘요.”홍주영은 노트북을 닫으며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문을 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했던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 놓여 있던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주영 씨 옷도 전부 정리해서 옷장에 넣어뒀어요.”하민재가 옷장 앞에 서서 문을 활짝 열자 안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옷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절별로 정리된 옷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종류에 따라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었다.홍주영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걸 어떻게 한 거예요?”이런 정리는 능숙한 사람도 쉽지 않다. 그런데 명문가 출신인 하민재가 직접 했다고?“그냥 만족하다고만 해주면 안 돼요?”그가 칭찬을 바라는 듯 바라보자 홍주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족해요.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장판이었던 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그럼 됐어요.”“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